원지민은 도도한 표정으로 자기의 명분을 뽐내는 듯 이렇게 물었다.윤혜인이 다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원지민의 태도에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다.윤혜인은 그런 원지민을 가볍게 무시하고 문을 열려는데 원지민이 이를 막았다. 원지민은 매서운 눈빛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인제 그만 돌아가요. 준혁이는 약혼녀인 내가 보살피면 돼요. 병문안은 사절할게요.”윤혜인은 우쭐대는 원지민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원지민이 임세희보다는 한 수 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임세희와 도긴개긴인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헛소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작자들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원지민의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이준혁의 상황을 확인하러 온 것일 뿐 괜찮다는 것만 알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윤혜인의 집에서 쓰러졌으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마음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은 원지민의 거짓말을 까밝히기 귀찮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좀 비켜줄래요?”“어떻게 그렇게 뻔뻔해요?”대인배인 척은 더는 힘들었던 원지민이 바로 비아냥댔다.“왜 멀쩡한 사람이 세컨드를 하려고 그래요?”원지민은 윤혜인과 신경전을 벌인 적만 몇 번이었기에 윤혜인이 ‘세컨드’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알고 있었다.하여 그 말을 빌려 알아서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도 덤덤했고 심지어 가벼운 미소까지 지었다.“원지민 씨, 혼자서 단 약혼녀 명분 이준혁 씨는 인정하던가요?”원지민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당연하죠. 우리가 커플이라는 거 모를 사람 없어요. 헛소리로 이간질할 생각하지 마요.”윤혜인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몰랐네요. 아니면 지금 들어가서 물어볼래요?”윤혜인이 원지민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근데 원지민 씨 그럴 담은 있어요?”“나는.”원지민의 표정이 굳더니 화가 치밀어 올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윤혜인이 문고리에 손을 올리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네?”윤혜인이 놀라서 입을 열었다.이준혁에게 배다른 동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 그 동생이라는 사람이 바로 숨겨둔 자식 아닌가?원지민은 그제야 입지를 되찾았다는 듯 우쭐거리며 말했다.“그러니 확실히 말해둘게요. 우린 무조건 결혼할 거예요. 왜냐하면 준혁이는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원지민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돈도 없고 출신도 별로인 윤혜인이 자기와 남자를 뺏는다는 건 정말 허황한 꿈이라고 생각했다.원지민은 그런 윤혜인이 하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조금 있다 아주머니 오실 거니까 지금 얼른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아주머니는 윤혜인 씨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하거든요.”문고리에 올려둔 윤혜인의 손이 멈칫했다.아까 너무 급한 나머지 그녀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일을 잠시 까먹고 있었다.문현미와 이천수,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윤혜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이 문을 열고 확인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렇다고 이준혁과 이어질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윤혜인은 그저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준혁이 나타나서 그 소중한 평온함을 산산이 조각냈다.다시는 그렇게 난감한 처지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앞이 보이지 않는 일은 지금이라도 끊어내는 게 맞다. 그냥 이준혁이 무사하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원지민은 윤혜인의 어여쁜 얼굴을 보며 확 긁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그러더니 이내 이렇게 경고했다.“앞으로 더는 준혁이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에요.”윤혜인은 원지민의 말을 듣고도 전혀 슬프지 않아 덤덤하게 말했다.“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길 바라요. 헛수고가 아니길 빌게요.”윤혜인이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원지민의 표정이 굳더니 씩씩거리며 윤혜인을 불러세웠다.“거기 서요. 그 말 무슨 뜻이에요?”“아직도 모르겠어요?윤혜인이 입꼬리를 당기더니 이렇게 말했다.“설마 이준혁이 원하
VIP 병실.문이 열리자 이준혁은 희망찬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마치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이준혁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준혁아, 왜 그래?”원지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눈빛에서 걱정이 철철 흘러넘쳤다.“어떻게 들어왔어?”이준혁은 커다란 체구를 침대 머리에 기대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쉽게 다가가지 못할 거리감이 느껴졌다.원지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캐물었다.“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이준혁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원지민을 바라보며 의심했다. 마치 그녀가 도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가슴이 철렁한 원지민이 설명했다.“준혁아, 잊었어? 우리 아빠도 여기 계시잖아. 아래에 잠깐 내려갔다가 주훈 씨가 있길래 혹시나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게 아닌가 해서 와봤어.”이준혁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원지민은 난감한게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침대 가에 자리를 잡았다.“준혁아, 어쩌다가 쓰러진 거야? 무슨 일 있었어?”원지민이 이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이마를 짚어보려 했다.이준혁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더니 그런 원지민이 역겹다는 듯 몸을 크게 움직여 원지민의 손을 피했다.원지민의 표정이 그대로 굳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함을 쏟아냈다.“준혁아, 난 그냥...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이준혁의 까만 보석 같은 눈동자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그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원지민, 쇼하는 거 안 힘들어?:원지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준혁아,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얘기해.”“원지민, 내가 전에 똑똑히 말했을 텐데. 네가 직접 공지 내서 우리 사이 잘 설명하라고. 업무 외에 불필요한 연락과 만남은 없었다고.”이준혁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전처럼 가식적인 핑계를 대가며 놀리지 말아줄래?”원지민의 표정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
사실 5년간 원지민은 문현미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이준혁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았다.하지만 원지민은 맹목적이었다.‘난 다른 여자랑은 달라. 지금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도 다 윤혜인 그 빌어먹을 년 때문이야.’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말하는 말투에서도 전혀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협박은 아니지만 한 번만 더 그러면 이 말을 현실로 만들어줄게.”원지민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리해졌다. 이 말에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준혁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뭘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다 죄가 되는 거지…”이준혁이 단칼에 그 말을 잘라버렸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 단지 속이 훤히 보이는 너의 속내와 수단이 나는 역겨울 뿐이야.”순간 원지민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오랫동안 사랑한 남자가 지금 그녀를 역겹다고 말하고 있다. 역겹다니, 어떻게 그런 말까지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원지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준혁아, 우리 원씨 집안은 늘 변함없이 너를 선택했어. 한 번도…”그때 문이 열렸다.주훈이 밖에서 들어왔다.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지민이 내보내. 그리고 앞으로 병실 출입 제한해. 아무나 들여보내지 말고.”이준혁의 차갑고 매정한 말은 마치 철퇴처럼 원지민의 따귀를 후려쳤다. 원지민은 볼살이 찢긴 것처럼 너무 아팠다.원지민이 뭔가 덧붙이려는데 주훈이 손짓하며 기계적인 말투로 말했다.“원지민 씨, 이쪽입니다.”원지민은 조각상처럼 정교한 이준혁의 얼굴을 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눈빛은 어딘가 원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결국 원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준혁, 내가 뭘 했든지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나를 이렇게 대한 거 꼭 후회하게 해줄게.’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원지민의 눈빛은 매서워졌다.순간 원지민은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려야지.
뒤를 따르던 남자도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경비한테 제지당했다.경비는 남자를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호텔의 손님이 아니시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경비가 사람을 가려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경비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정말 도시 면모를 손상하는 정도였다.남자는 아마도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아 굳은 흑갈색으로 변해버렸으며 멀리서도 남자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남자의 턱수염은 길게 자랐으며 떡처럼 지저분하게 뭉쳐 있었다.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먼지가 가득했고 온몸에서 깨끗한 구석을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딱 봐도 오랫동안 길거리에서 방랑하던 방랑객 같아 보였다.경비에게 제지당하자, 방랑객은 불평을 늘어놓았다.“누가 나더러 손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저 손님 맞아요!”경비가 말했다.“손님이 맞으신다면 이름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세요. 제가 조회해 드리겠습니다.”“제 이름은 주산응이에요. 저의 조카딸이 방금 호텔 안으로 들어갔어요. 조카딸을 찾게 들여보내 주세요.”주산응은 저번에 인하마음의 돈을 사기 친 후, 이튿날에 바로 외국의 카지노에 가서 하루도 안 되는 사이에 5억을 전부 날려 먹었다.그 5억이란 돈은 주산응이 힘들게 사기 쳐서 얻은 돈이었다.이제 와서 한 푼도 남지 않자, 주산응은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이 환전하려는 돈을 움켜쥐고 냅다 도망쳤다.카지노의 경비는 하나같이 싸움 잘하는 놈들이라 주산응이 도망가게 놓아둘 리가 없었다.주산응이 잡힌 후, 카지노 사장은 그가 5억을 소비한 걸 봐서 그의 세 손가락만 잘랐다.그리고 주산응더러 차용증에 서명하게 해놓고 카지노에서 일을 시키면서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주산응은 카지노에서 3년 가까이 사람답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 마침내 어느 날 카지노 사장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곳에서 도망쳤다.도망쳐 나온 후 주산응은 어선을 따라 바다 위에서 1년 동안 일했다. 그리
“…”윤혜인은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했다.“우선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점용한 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달밤의 모든 작품은 제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설계한 적 없기에 절대로 표절 작품이 아닙니다.”윤혜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대범하게 대응했으며 전혀 소심하고 감추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이미 대부분 사람의 생각을 바뀌게 했다.그러고 나서 윤혜인은 또 디자인 원고와 마지막 집필 시간을 증거로 삼아 일일이 보여주었다.“계승이라는 시리즈는 제가 연수할 때부터 초안을 작성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북성 엔터 대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 덕분에 제가 과감하게 ‘계승’ 시리즈를 북성 축제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의 디자인 원고가 왜 드림 작업실의 의상과 겹치는 지는--”윤혜인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앞줄로 튀어나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당신 왜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당신 표절한 거 맞잖아요. 저에게 표절했다는 증거가 있어요!”구지윤이 무대 위로 올라오려고 했는데 윤혜인은 그녀를 막았다.윤혜인은 밑에 있는 여자를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증거가 있습니까?”그 여자는 득의양양하며 말했다.“저는 드림 작업실의 직원인데 당신 작업실의 직원이 사적으로 저희를 찾아와서 아무리 비싼 돈을 주더라도 그 옷을 사 가겠다고 했는데 증거를 인멸하려고 그런 짓을 한 거 맞잖아요!”이렇게 말하면서 그 여자는 구지윤이 드림 작업실의 직원과 그 옷을 사겠다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꺼냈다. 심지어 그들의 계좌 이체 명세를 큰 종이에 프린트한 것도 꺼내 보였다.현장에 있는 기자들이 촬영하는데 편리하도록 말이다.순식간에 기자들은 난리가 났고 너도나도 질문을 제기했다.“곽혜인 씨, 이 일이 사실입니까?”“곽혜인 씨, 왜 5배 되는 가격으로 낡은 디자인을 사드린 겁니까? 증거를 인멸하려던 것이
윤혜인이 이 말을 할 때 원지민은 바로 직전에 현장에 들어왔다.이 이름을 듣자, 원지민은 낯 색이 확 변했다!‘이 보잘것없는 여자가 윤아름의 딸이라고?’예전에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던 때부터, 윤아름은 상류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상류 사회에서 윤아름이라는 이름은 전설과 같았다.윤아름은 아주 복잡한 옛 그림을 짧디짧은 반달 만에 자신의 작품에 수놓은 적이 있었다!그런데 다가 관건은 윤아름의 정교한 솜씨는 아무도 뛰어넘을 수 없었다.어린 나이에 윤아름은 이미 천재 디자이너라는 칭호를 얻었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여왕도 러브콜을 보내서 윤아름더러 자신의 스페셜 드레스를 주문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었다.윤아름은 한때 성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윤아름은 은퇴 선언을 발표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이에 국내외에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근 20년 가까이 아무도 윤아름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그녀가 절에 숙녀로 들어갔다는 소문,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러나 이런 소문들은 다 인증되지 않았다!원지민이 윤아름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은 윤아름이 자신의 작은 삼촌인 원진우와 남모르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현장에 있는 기자들은 더 야단법석이었다.기자들 중에 윤아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지금 갑자기 윤아름의 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워했다!그들은 오늘 자기들이 헛되이 오지 않았으며 빅뉴스 하나를 건졌다고 생각했다.‘유명 디자이너의 딸, 얼마나 좋은 화젯거리가 되겠어!’기자들이 너도나도 질문 방향을 전환하는 걸 들은 원지민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고 입술 색도 조금 창백해졌다.‘이 여자, 왜 하필 윤아름의 딸이야!’윤씨 가문은 남청에 뿌리박고 살았으며 원씨 가문 못지않게 대단한 가문이었지만 내부에서 싸움이 잦았다.윤아름은 윤씨 가문의 큰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큰댁은 번창하지 못했고 윤아름의 부모님도 교
임세희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으니, 원지민은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했다.원지민은 방민아를 눈여겨보며 그녀를 괜찮은 후보로 여겼다.“방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이렇게 긴밀하게 협력하니, 민아 씨와 경한 씨의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죠...”방민아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원지민의 팔짱을 끼며 수줍게 웃었다.“그럼, 지민 씨가 이씨 가문 사모님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죠.”원지민은 태연하게 방민아의 말장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발표회를 열지 않는다면 원지민은 이준혁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을 하루라도 더 유지할 수 있었다.게다가, 원지민이 갖고 있는 카드는 이것뿐이 아니었다.‘준혁 씨가 나와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니, 꿈도 꾸지 마!’방민아는 계속 미래를 꿈꾸며 원지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기뻐하며 말했다.“너무 좋아요. 이제 결혼하면 저희 남편들이 서로 친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도 절친잖아요. 같이 신혼여행을 가도 되겠네요.”원지민이 줄곧 답이 없자 방민아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원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보고 방민아는 놀라서 물었다.“지민 씨, 왜 울어요?”원지민은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봐 겁난 듯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나가요...”원지민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방민아는 원지민의 팔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가 저에게 알려주지 않는 건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민아 씨, 제가 민아 씨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원지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민아 씨, 그만 물어봐요...”“안 돼요!”방민아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누가 지민 씨를 괴롭혔어요? 말해봐요. 제가 대신 혼내 줄게요!”원지민은 입술이 창백하게 변하며, 몹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제가 방금 만난 그 여자는 사실 준혁 씨의 전 와이프예요.”“이준혁 씨의 전 와이프라고요?”방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