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이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기억해. 너는 영원히 내 발치만 맴도는 개 같은 존재야. 내 개가 됐으면 영원히 주인 말을 잘 들어야겠지? 네 주장이나 생각 같은 건 있어서는 안 돼. 알아들어?”임호는 입이 피투성이라 말하는 것도 아팠다. 그래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네, 아가씨.”원지민은 뭐나 생각난 듯 차갑게 물었다.“임세희 쪽은 가서 알아봤어?”“알아봤습니다. 아직 안에서 치료받는 중입니다. 다음 달 판결 예정이라고 합니다.”원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입막음은 잘 해뒀지?”“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예 혀를 잘라버렸는데 혼비백산해서 이미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입니다.”임호는 병원에서 선수를 쳤다. 야밤에 병원으로 잠입해 임세희의 혀를 자르면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임세희는 당장에 바지에 실수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다.정말 미친 거라면 임세희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걸 빌미로 며칠 더 살다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원지민은 임세희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뒤처리만 깔끔히 하면 된다는 취지였다.사실 원지민도 아직은 임세희가 죽는 게 싫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이용할 셈이었기 때문이다.임세희는 죽음도 가치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원지민은 임호의 손을 야무지게 지르밟더니 욕설을 퍼부었다.“꺼져.”임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눈빛은 여전히 미련 가득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굽신거리며 방에서 나갔다.원지민은 임호의 충심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 시중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임호는 생긴 것도 꽤 잘생겼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는 준수하면서도 튼튼해 보였고 짐승미가 다분한 터프가이 같았다.신분만 바꾼다면 원지민도 그를 거들떠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호는 비천한 신분을 가졌기에 시중을 드는 데에만 만족해야 했다.원지민은 거울 앞으로 걸어가 옷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는 하얀 뱃가죽을 내려다보았다.만삭
아주 예의 바른 볼 키스였기에 사실 정상이었다. 외국에서는 흔한 인사였다.하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곽아름의 볼을 꼬집으며 이준혁의 품에서 내렸다.“엄마가 안 아프다고 했잖아. 얼른 손 씻고 와서 아침 먹어야지.”곽아름은 살짝 실망했지만 이준혁과 같이 밥 먹는다는 생각에 그래도 기뻤다.하여 잽싸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엄마.”곽아름이 자리를 비우자 윤혜인이 얼굴을 굳히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윤혜인이 내비치는 거리감과 적대감에 이준혁은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아파져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름이랑 아침 먹고 싶어서.”윤혜인은 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이준혁이 찾아온 목적은 얼굴에 쓰여있을 만큼 선명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곽아름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윤혜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그저 준혁 씨가 아름이의 상 하굣길에 동행하는 것만 동의했을 뿐이지 우리 생활까지 공유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우리라는 단어에는 이준혁을 아예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이준혁은 목구멍이 막혀왔지만 진심으로 말했다.“혜인아, 난 정말 그냥 아름이랑 더 같이 있고 싶을 뿐이야.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을 놓쳐버려서 더는 한 순간도 낭비하기가 싫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아름이 자주 보게 해줘.”당연히 곽아름뿐만 아니라 윤혜인도 보고 싶었다.하지만 이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겨우 한걸음 가까워졌는데 다시 망칠 수는 없었다.만약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윤혜인은 곽아름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에 이준혁도 곽아름을 뺏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윤혜인도 부녀의 만남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이준혁은 꼴 보기 싫었지만 곽아름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잠깐 고민하던 윤혜인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밥 먹고 얼른 가요.”이준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표
곽아름은 이준혁이 단팥 호빵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직접 조금 나눠서 주었다.하지만 뜨거운 단팥이 손등까지 흘러내려 뜨거웠던 곽아름은 손에 들었던 호빵을 이준혁에게 던지고 말았다.이준혁은 더럽혀진 옷은 상관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곽아름을 안고 다급하게 물었다.“데었어?”이준혁의 생각은 윤혜인과 같았다. 윤혜인도 첫 반응이 곽아름의 손을 살피는 것이었다.“아름아…”다급해진 윤혜인이 곽아름을 안으려 했지만 이준혁이 한발 빨리 곽아름을 안고 싱크대로 향해 차가운 물로 씻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몸에 묻은 단팥이 곽아름에게 묻지 않게 조심했다.손을 씻고 나니 홍 아줌마가 화상 연고를 가져왔다.“제가 할게요.”홍 아줌마가 곽아름을 안아가려는데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연고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주세요.”윤혜인은 이준혁이 발라주는 게 신경 쓰여 홍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나한테 줘요.”홍 아줌마는 화상 연고를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준혁은 곽아름을 안아 다리 위에 앉혔고 윤혜인은 쪼그리고 앉아 곽아름에게 약을 발라주었다.약을 바르는데 윤혜인의 팔이 이따금 남자의 바지를 스쳤지만 윤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이준혁은 까만 눈동자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렇게 평화롭게 윤혜인과 지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늦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심을 듬뿍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곽아름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엄마, 아빠, 아름이 안 아파요.”제때 처리한 덕분에 곽아름의 손등은 별 영향이 없어 보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한시름 놓았다.홍 아줌마가 얼른 곽아름을 안아가더니 이준혁에게 말했다.“대표님,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세요.”이준혁의 옷을 힐끔 살펴보니 더는 입지 못할 것 같았다.얼마냐고 변상해 주겠다고 하려는데 곽아름이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가 외삼촌 주려고 만든 옷이 위층에 있는데 올라가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화가 나서인지 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숨을 꾹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나가 있을게요.”윤혜인은 이준혁과 부딪칠까 봐 몸을 최대한 옆으로 틀고 지나가다가 거기 놓아둔 작은 걸상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이제 옷장 문에 쓰러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윤혜인은 눈을 감고 낮게 비명을 질렀다.“아!”하지만 비명이 이내 신음이 되었다.이준혁이 잽싸게 팔을 내밀어 그녀를 건져냈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문제는 윤혜인의 얼굴이 이준혁의 튼튼한 가슴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입술이 닿지 말아야 할 곳에 닿았다는 것이다.“흡.”이준혁이 숨을 들이마셨다. 끓어오르는 욕구에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엎드려 있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몸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이때 밖에서 홍 아줌마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괜찮아요?”장난감을 가지러 올라왔다가 둔탁한 소리를 듣고는 걱정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홍 아줌마는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아가씨, 안에 계세요? 저 들어갑니다…”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이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가슴을 짚고 일어나다가 이준혁의 중요 부위를 살짝 건드렸다. 이에 이준혁이 신음하더니 윤혜인의 발목을 움켜잡고는 하얘진 얼굴로 말했다.“나 고자 만들고 싶어?”윤혜인은 그제야 자기가 어디를 걷어찼는지 알았다. 이에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그때 탈칵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이거 놔…”‘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준혁이 갑자기 손을 뻗어 윤혜인의 허리를 감싸더니 옷장으로 숨어들었다.문이 열림과 동시에 옷장 문도 따라서 닫혔다.옷장은 컸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니 갑자기 비좁아
윤혜인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이준혁을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함부로 만지지 마요.”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지금 홍 아줌마가 더 있다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윤혜인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당연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키스도 하고 싶고 다른 것도 하고 싶었다.하지만 윤혜인이 화낼까 봐, 다시는 다가가지 못하게 할까 봐 무서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이준혁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윤혜인은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드디어 홍 아줌마가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려고 했다.옷장 문을 밀고 나가려는데 밖에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기 소리였다. 알고 보니 홍 아줌마가 도우미에게 바닥 좀 닦으라고 시켰던 것이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손에 뭔가 말캉한 게 잡히길래 그대로 잡았다.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욕구가 다시 활활 불타올랐다.사랑을 나누었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준혁의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는 욕정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키스해도 돼?”옷장 안은 공기가 희박했기에 윤혜인의 머리도 점점 산소 부족으로 흐릿해지는 것 같았고 이준혁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탐냈던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두 손으로 힘껏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윤혜인의 두 팔목을 꽉 붙잡더니 옷장 문에 꾹 눌렀다. 쾅 하는 소리가 마침 청소기 소리에 가려졌다.다급해진 윤혜인이 욕하려고 입을 벌린 게 오히려 이준혁에겐 더 안쪽으로 파고들 기회가 되었다. 그의 긴 혀는 윤혜인의 혀에 닿자마자 거침없이 공략을 이어갔다.윤혜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는 온갖 욕을 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준혁의 저돌적인 키스에 생각과는 다르게 신음했다.화가 나 미칠 지경인 윤혜인은 이준혁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드러나는 윤혜인의 진심에 이준혁은 다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더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혜인아. 너를 잃은 5년간 나는 일분일초를 고통 속에서 살았어. 정말 많이 후회했다고...”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어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말투에서 그의 비굴함과 후회를 느낄 수 있었다.비굴함은 늘 윤혜인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처지가 바뀌었다. 그렇다 해도 윤혜인은 전혀 통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괴롭기만 했다.실망으로 무너져 폐허가 된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감동할 수가 없었다.윤혜인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그렇게 대했듯이 말이다.이준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낮은 소리로 애원했다.“혜인아.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우리 식구 셋이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긴 채 발버둥 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마치 차갑디차가운 동상처럼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준혁도 이를 느끼고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주고 싶은 생각에 더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몰랐다. 윤혜인이 차가운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한번 처절하게 냉대받은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기 힘들었다.이준혁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혜인아. 다시는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윤혜인은 목구멍이 메어왔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얼른 손바닥을 꽉 꼬집었다.‘약속? 허허.’전에도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했다.하지만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윤혜인은 바보같이 그 약속을 믿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병세가 위급할 때 그는 매정하게 그녀를 버렸다.그리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가 나타나 그녀와 아이를 구해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이준혁에게 최우선은 늘 그녀가 아니었다.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힘껏 그를 밀쳐내며
전에는 이준혁을 계속 삼촌이라고 지칭하던 윤혜인도 상황이 급해지자 곽아름을 따라 이준혁을 아빠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곽아름이 눈물이 맺힌 큰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울먹였다.“엄마, 아름이 말 잘 들을 테니까 꼭 아빠 살려줘야 해요. 네?”윤혜인이 말했다.“응, 아빠 아무 일도 없을 거야.”홍 아줌마가 곽아름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윤혜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계속 위층으로 올라갔다.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은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흥건히 묻힌 채 미동도 없었다.순간 윤혜인은 머리가 윙 해지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어쩔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규남 아저씨가 사람을 데리고 올라왔다. 아마도 규남 아저씨가 주훈을 부른 것 같았다.주훈은 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을 보며 얼른 그쪽으로 뛰어가 무릎을 꿇은 채 불렀다.“대표님.”이준혁이 아무 반응도 없자 주훈은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했다.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훈은 과감하게 이준혁을 업고 아래로 향했다.윤혜인도 따라서 내려가 주훈과 함께 이준혁을 뒷좌석에 태웠다. 하지만 윤혜인의 걸음은 거기서 멈췄다.주훈은 윤혜인을 보며 애원했다.“사모님, 같이 가시죠.”윤혜인은 눈이 시려왔지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 가려고 발이 움찔거렸지만 윤혜인은 끝내 그 충동을 참았다.“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윤혜인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주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이었다.“사모님, 사실 대표님은...”윤혜인이 주훈의 말을 잘라버리더니 당부했다.“얼른 가봐요.”주훈은 하마터면 이준혁의 경고를 잊고 주사기에 관한 일을 털어놓을 뻔했다.시간이 없는지라 주훈은 입만 뻐끔거리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집을 빠져나갔다.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윤혜인은 문틀에 기댄 채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북극에라도 떨어진 듯 너무 추워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툭.뜨거운 눈물이 손등에 떨어졌다.윤혜인은 그 눈물을 보며
원지민은 도도한 표정으로 자기의 명분을 뽐내는 듯 이렇게 물었다.윤혜인이 다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원지민의 태도에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다.윤혜인은 그런 원지민을 가볍게 무시하고 문을 열려는데 원지민이 이를 막았다. 원지민은 매서운 눈빛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인제 그만 돌아가요. 준혁이는 약혼녀인 내가 보살피면 돼요. 병문안은 사절할게요.”윤혜인은 우쭐대는 원지민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원지민이 임세희보다는 한 수 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임세희와 도긴개긴인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헛소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작자들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원지민의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이준혁의 상황을 확인하러 온 것일 뿐 괜찮다는 것만 알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윤혜인의 집에서 쓰러졌으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마음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은 원지민의 거짓말을 까밝히기 귀찮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좀 비켜줄래요?”“어떻게 그렇게 뻔뻔해요?”대인배인 척은 더는 힘들었던 원지민이 바로 비아냥댔다.“왜 멀쩡한 사람이 세컨드를 하려고 그래요?”원지민은 윤혜인과 신경전을 벌인 적만 몇 번이었기에 윤혜인이 ‘세컨드’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알고 있었다.하여 그 말을 빌려 알아서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도 덤덤했고 심지어 가벼운 미소까지 지었다.“원지민 씨, 혼자서 단 약혼녀 명분 이준혁 씨는 인정하던가요?”원지민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당연하죠. 우리가 커플이라는 거 모를 사람 없어요. 헛소리로 이간질할 생각하지 마요.”윤혜인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몰랐네요. 아니면 지금 들어가서 물어볼래요?”윤혜인이 원지민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근데 원지민 씨 그럴 담은 있어요?”“나는.”원지민의 표정이 굳더니 화가 치밀어 올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윤혜인이 문고리에 손을 올리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