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은 마치 여왕처럼 옆으로 누우며 명령했다.“머리 좀 안마해 줘.”임호가 고분고분 쪼그리고 앉았다.웅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지금은 부드럽게 원지민의 머리를 안마해 주고 있다.임호는 어둠의 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보기 드물게 깔끔한 걸 좋아하는 죽음의 기사였다.항상 몸은 뽀송뽀송했고 땀 냄새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모발이 매우 풍성한 편이라 남성적인 매력도 다분했다.안마를 한참 받았지만 뭔가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호르몬 문제인지 요즘 그쪽으로 욕구가 들끓어 올랐다.원지민은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임호를 보며 암시했다.“조금만 더 아래로 가봐.”임호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거친 손으로 목덜미를 스쳐 쇄골을 안마했다.두꺼운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만지니 묘한 자극적인 맛이 있었다.원지민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볍게 신음했다.“힘 조금만 더 써도 될 것 같아...”임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원지민이 교태를 부리자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 혹시...”“음...”원지민은 지금 정신이 약간 몽롱한 상태라 무의식적으로 이런 소리를 냈다.임호는 원지민이 동의했다는 생각에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머리를 천천히 숙였다.“읍...”원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또 신음했다. 그러다 안색이 변하더니 손을 들었다.찰싹.원지민이 임호의 따귀를 찰지게 내리쳤다. 목에 난 키스 마크를 보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빌어먹을 새끼, 누가 너더러 키스하래.”꿈에서 깬 임호는 안색이 삭 변했다.원지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털썩 바닥에 꿇어앉더니 자기 따귀를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철썩, 철썩, 철썩.그렇게 임호는 연거푸 10대를 내리쳤다. 손에 힘을 풀기는커녕 때리면 때릴수록 점점 더 세게 후려쳤다.임호도 자기가 그렇게 불경한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정말 무엇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여자의 향기를 맛보고 싶었지만 결벽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임호의 마음속에는 오직
원지민이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기억해. 너는 영원히 내 발치만 맴도는 개 같은 존재야. 내 개가 됐으면 영원히 주인 말을 잘 들어야겠지? 네 주장이나 생각 같은 건 있어서는 안 돼. 알아들어?”임호는 입이 피투성이라 말하는 것도 아팠다. 그래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네, 아가씨.”원지민은 뭐나 생각난 듯 차갑게 물었다.“임세희 쪽은 가서 알아봤어?”“알아봤습니다. 아직 안에서 치료받는 중입니다. 다음 달 판결 예정이라고 합니다.”원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입막음은 잘 해뒀지?”“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예 혀를 잘라버렸는데 혼비백산해서 이미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입니다.”임호는 병원에서 선수를 쳤다. 야밤에 병원으로 잠입해 임세희의 혀를 자르면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임세희는 당장에 바지에 실수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다.정말 미친 거라면 임세희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걸 빌미로 며칠 더 살다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원지민은 임세희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뒤처리만 깔끔히 하면 된다는 취지였다.사실 원지민도 아직은 임세희가 죽는 게 싫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이용할 셈이었기 때문이다.임세희는 죽음도 가치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원지민은 임호의 손을 야무지게 지르밟더니 욕설을 퍼부었다.“꺼져.”임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눈빛은 여전히 미련 가득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굽신거리며 방에서 나갔다.원지민은 임호의 충심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 시중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임호는 생긴 것도 꽤 잘생겼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는 준수하면서도 튼튼해 보였고 짐승미가 다분한 터프가이 같았다.신분만 바꾼다면 원지민도 그를 거들떠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호는 비천한 신분을 가졌기에 시중을 드는 데에만 만족해야 했다.원지민은 거울 앞으로 걸어가 옷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는 하얀 뱃가죽을 내려다보았다.만삭
아주 예의 바른 볼 키스였기에 사실 정상이었다. 외국에서는 흔한 인사였다.하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곽아름의 볼을 꼬집으며 이준혁의 품에서 내렸다.“엄마가 안 아프다고 했잖아. 얼른 손 씻고 와서 아침 먹어야지.”곽아름은 살짝 실망했지만 이준혁과 같이 밥 먹는다는 생각에 그래도 기뻤다.하여 잽싸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엄마.”곽아름이 자리를 비우자 윤혜인이 얼굴을 굳히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윤혜인이 내비치는 거리감과 적대감에 이준혁은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아파져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름이랑 아침 먹고 싶어서.”윤혜인은 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이준혁이 찾아온 목적은 얼굴에 쓰여있을 만큼 선명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곽아름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윤혜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그저 준혁 씨가 아름이의 상 하굣길에 동행하는 것만 동의했을 뿐이지 우리 생활까지 공유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우리라는 단어에는 이준혁을 아예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이준혁은 목구멍이 막혀왔지만 진심으로 말했다.“혜인아, 난 정말 그냥 아름이랑 더 같이 있고 싶을 뿐이야.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을 놓쳐버려서 더는 한 순간도 낭비하기가 싫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아름이 자주 보게 해줘.”당연히 곽아름뿐만 아니라 윤혜인도 보고 싶었다.하지만 이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겨우 한걸음 가까워졌는데 다시 망칠 수는 없었다.만약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윤혜인은 곽아름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에 이준혁도 곽아름을 뺏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윤혜인도 부녀의 만남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이준혁은 꼴 보기 싫었지만 곽아름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잠깐 고민하던 윤혜인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밥 먹고 얼른 가요.”이준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표
곽아름은 이준혁이 단팥 호빵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직접 조금 나눠서 주었다.하지만 뜨거운 단팥이 손등까지 흘러내려 뜨거웠던 곽아름은 손에 들었던 호빵을 이준혁에게 던지고 말았다.이준혁은 더럽혀진 옷은 상관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곽아름을 안고 다급하게 물었다.“데었어?”이준혁의 생각은 윤혜인과 같았다. 윤혜인도 첫 반응이 곽아름의 손을 살피는 것이었다.“아름아…”다급해진 윤혜인이 곽아름을 안으려 했지만 이준혁이 한발 빨리 곽아름을 안고 싱크대로 향해 차가운 물로 씻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몸에 묻은 단팥이 곽아름에게 묻지 않게 조심했다.손을 씻고 나니 홍 아줌마가 화상 연고를 가져왔다.“제가 할게요.”홍 아줌마가 곽아름을 안아가려는데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연고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주세요.”윤혜인은 이준혁이 발라주는 게 신경 쓰여 홍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나한테 줘요.”홍 아줌마는 화상 연고를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준혁은 곽아름을 안아 다리 위에 앉혔고 윤혜인은 쪼그리고 앉아 곽아름에게 약을 발라주었다.약을 바르는데 윤혜인의 팔이 이따금 남자의 바지를 스쳤지만 윤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이준혁은 까만 눈동자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렇게 평화롭게 윤혜인과 지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늦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심을 듬뿍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곽아름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엄마, 아빠, 아름이 안 아파요.”제때 처리한 덕분에 곽아름의 손등은 별 영향이 없어 보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한시름 놓았다.홍 아줌마가 얼른 곽아름을 안아가더니 이준혁에게 말했다.“대표님,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세요.”이준혁의 옷을 힐끔 살펴보니 더는 입지 못할 것 같았다.얼마냐고 변상해 주겠다고 하려는데 곽아름이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가 외삼촌 주려고 만든 옷이 위층에 있는데 올라가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화가 나서인지 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숨을 꾹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나가 있을게요.”윤혜인은 이준혁과 부딪칠까 봐 몸을 최대한 옆으로 틀고 지나가다가 거기 놓아둔 작은 걸상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이제 옷장 문에 쓰러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윤혜인은 눈을 감고 낮게 비명을 질렀다.“아!”하지만 비명이 이내 신음이 되었다.이준혁이 잽싸게 팔을 내밀어 그녀를 건져냈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문제는 윤혜인의 얼굴이 이준혁의 튼튼한 가슴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입술이 닿지 말아야 할 곳에 닿았다는 것이다.“흡.”이준혁이 숨을 들이마셨다. 끓어오르는 욕구에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엎드려 있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몸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이때 밖에서 홍 아줌마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괜찮아요?”장난감을 가지러 올라왔다가 둔탁한 소리를 듣고는 걱정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홍 아줌마는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아가씨, 안에 계세요? 저 들어갑니다…”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이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가슴을 짚고 일어나다가 이준혁의 중요 부위를 살짝 건드렸다. 이에 이준혁이 신음하더니 윤혜인의 발목을 움켜잡고는 하얘진 얼굴로 말했다.“나 고자 만들고 싶어?”윤혜인은 그제야 자기가 어디를 걷어찼는지 알았다. 이에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그때 탈칵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이거 놔…”‘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준혁이 갑자기 손을 뻗어 윤혜인의 허리를 감싸더니 옷장으로 숨어들었다.문이 열림과 동시에 옷장 문도 따라서 닫혔다.옷장은 컸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니 갑자기 비좁아
윤혜인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이준혁을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함부로 만지지 마요.”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지금 홍 아줌마가 더 있다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윤혜인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당연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키스도 하고 싶고 다른 것도 하고 싶었다.하지만 윤혜인이 화낼까 봐, 다시는 다가가지 못하게 할까 봐 무서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이준혁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윤혜인은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드디어 홍 아줌마가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려고 했다.옷장 문을 밀고 나가려는데 밖에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기 소리였다. 알고 보니 홍 아줌마가 도우미에게 바닥 좀 닦으라고 시켰던 것이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손에 뭔가 말캉한 게 잡히길래 그대로 잡았다.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욕구가 다시 활활 불타올랐다.사랑을 나누었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준혁의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는 욕정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키스해도 돼?”옷장 안은 공기가 희박했기에 윤혜인의 머리도 점점 산소 부족으로 흐릿해지는 것 같았고 이준혁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탐냈던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두 손으로 힘껏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윤혜인의 두 팔목을 꽉 붙잡더니 옷장 문에 꾹 눌렀다. 쾅 하는 소리가 마침 청소기 소리에 가려졌다.다급해진 윤혜인이 욕하려고 입을 벌린 게 오히려 이준혁에겐 더 안쪽으로 파고들 기회가 되었다. 그의 긴 혀는 윤혜인의 혀에 닿자마자 거침없이 공략을 이어갔다.윤혜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는 온갖 욕을 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준혁의 저돌적인 키스에 생각과는 다르게 신음했다.화가 나 미칠 지경인 윤혜인은 이준혁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드러나는 윤혜인의 진심에 이준혁은 다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더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혜인아. 너를 잃은 5년간 나는 일분일초를 고통 속에서 살았어. 정말 많이 후회했다고...”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어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말투에서 그의 비굴함과 후회를 느낄 수 있었다.비굴함은 늘 윤혜인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처지가 바뀌었다. 그렇다 해도 윤혜인은 전혀 통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괴롭기만 했다.실망으로 무너져 폐허가 된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감동할 수가 없었다.윤혜인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그렇게 대했듯이 말이다.이준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낮은 소리로 애원했다.“혜인아.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우리 식구 셋이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긴 채 발버둥 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마치 차갑디차가운 동상처럼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준혁도 이를 느끼고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주고 싶은 생각에 더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몰랐다. 윤혜인이 차가운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한번 처절하게 냉대받은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기 힘들었다.이준혁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혜인아. 다시는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윤혜인은 목구멍이 메어왔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얼른 손바닥을 꽉 꼬집었다.‘약속? 허허.’전에도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했다.하지만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윤혜인은 바보같이 그 약속을 믿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병세가 위급할 때 그는 매정하게 그녀를 버렸다.그리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가 나타나 그녀와 아이를 구해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이준혁에게 최우선은 늘 그녀가 아니었다.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힘껏 그를 밀쳐내며
전에는 이준혁을 계속 삼촌이라고 지칭하던 윤혜인도 상황이 급해지자 곽아름을 따라 이준혁을 아빠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곽아름이 눈물이 맺힌 큰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울먹였다.“엄마, 아름이 말 잘 들을 테니까 꼭 아빠 살려줘야 해요. 네?”윤혜인이 말했다.“응, 아빠 아무 일도 없을 거야.”홍 아줌마가 곽아름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윤혜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계속 위층으로 올라갔다.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은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흥건히 묻힌 채 미동도 없었다.순간 윤혜인은 머리가 윙 해지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어쩔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규남 아저씨가 사람을 데리고 올라왔다. 아마도 규남 아저씨가 주훈을 부른 것 같았다.주훈은 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을 보며 얼른 그쪽으로 뛰어가 무릎을 꿇은 채 불렀다.“대표님.”이준혁이 아무 반응도 없자 주훈은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했다.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훈은 과감하게 이준혁을 업고 아래로 향했다.윤혜인도 따라서 내려가 주훈과 함께 이준혁을 뒷좌석에 태웠다. 하지만 윤혜인의 걸음은 거기서 멈췄다.주훈은 윤혜인을 보며 애원했다.“사모님, 같이 가시죠.”윤혜인은 눈이 시려왔지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 가려고 발이 움찔거렸지만 윤혜인은 끝내 그 충동을 참았다.“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윤혜인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주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이었다.“사모님, 사실 대표님은...”윤혜인이 주훈의 말을 잘라버리더니 당부했다.“얼른 가봐요.”주훈은 하마터면 이준혁의 경고를 잊고 주사기에 관한 일을 털어놓을 뻔했다.시간이 없는지라 주훈은 입만 뻐끔거리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집을 빠져나갔다.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윤혜인은 문틀에 기댄 채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북극에라도 떨어진 듯 너무 추워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툭.뜨거운 눈물이 손등에 떨어졌다.윤혜인은 그 눈물을 보며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