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걸어온 윤혜인의 몸은 깨끗했고 바닥에 있는 피투성이는 사람과는 선명한 대비가 됐다.“너.”임세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다.돌이켜 생각해 보니 찌르는 과정에서 이 ‘사람'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임세희는 병 때문에 시각과 후각이 퇴화한 데다 혈장에 눈이 막혔다.그 때문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미친년!”임세희는 화가 나서 윤혜인에게로 달려들었고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죽일 거야.”이준혁이 나서려고 한 순간 윤혜인이 그를 막았다.임세희를 바라보는 윤혜인의 눈에는 차가운 원한이 가득했다.윤혜인은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과거의 일은 결과만 알지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방금 윤혜인이 식당에서 나가려고 할 때 성준이 윤혜인을 쫓아와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윤혜인과 연락이 되지 않자 이준혁은 성준에게 전화를 걸어 임세희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녀가 윤혜인을 귀찮게 할 수도 있었다.이준혁은 성준에게 윤혜인을 잘 보호하라고 했다. 지금부터 아무데도 가지 말고 이준혁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늘 연약하게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임세희가 죽지 않으면 끈질기게 윤혜인을 찾아올 것이었다.임세희가 윤혜인에 대한 원한이 크다는 것이다.윤혜인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적은 어두운 곳에 피해 있으니 숨는 것만이 정확한 선택이었다.그렇게 행동하려 했다.윤혜인은 이 일을 좋은 기회로 삼으려 했다.당시 오빠는 윤혜인에게 자신을 업어 키운 외할머니와 아기의 죽음이 송소미 뿐만아니라 임세희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했다.다만 임세희가 너무 교활해서 이 두 사건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그래서 그녀는 성준더러 배후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게 했다. CCTV도 준비하게 했다.윤혜인은 그 아줌마가 이유 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그녀는 뒤쪽 탈의실에서 임세희의 말을 받아치며 진실을 말하도록 유인했다.결국 임세희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이준혁은 윤
윤혜인은 임세희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냥 죽게 한다면 연약한 임세희에게는 되려 좋은 것이었다.절대 임세희를 이렇게 편안하게 죽게 할 수 없었다.그녀는 임세희가 매일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기를 원했다.그래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회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게 된다.희망도 없는 고통스러운 삶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겠는가.두 번의 살인과 그 차 안에서 숨진 값진 생명들.임세희가 한 모든 짓으로 보면 설령 20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더라도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어 있어야 할 정도였다.이준혁은 차가운 시선으로 꼴사나운 임세희를 쳐다보고는 말했다.“네 말대로 하자.”이준혁의 말투는 지옥에 있는 악마처럼 차가웠다.임세희는 온몸이 떨려왔다.이준혁의 말투로 보아, 이미 임세희를 상대할 잔인한 방법을 백 가지나 생각한 듯했다.그의 냉혈함과 무정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정신병원에서 그녀는 이미 한번 미칠 뻔했지만 그래도 감옥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그곳에 가면 임세희의 인생은 완전히 끝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안된다.절대 안 된다.죽을지언정 절대 감옥에 가지 않으려 했다.“너 같은 년 배 속에 새끼는 맞아 죽어도 싸.”임세희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악랄하게 말했다.“잘 죽었어.”갑자기 내리 친 날벼락 같았다.윤혜인은 이 말을 어디서 들은 듯싶었다.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여러 가지 기억이 돌아오면서 한꺼번에 머릿속에 밀려왔다.병원에서 있었던 일인 것 같았다.그때도 임세희는 이렇게 말했다.“잘 죽었어.”똑같은 말투였다.윤혜인은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시도했다.갑자기 머릿속에 전기 드릴이라도 들어간 듯 윙윙거렸다.윤혜인은 힘겹게 머리를 눌렀다.아팠다.심한 통증이 엄습해 오자 윤혜인은 버티지 못하고 다리가 나른해졌다.“혜인아.”이준혁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윤혜인의 힘 빠진 몸을 안고 말했다.그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어디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었다.윤혜인은 얼음 동굴에 들어간 것 같았고 온몸이 떨렸다.지나간 기억들이 주마간산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혼 합의서야. 세희가 정황이 엄중하니 얌전히 있어. 왜 이렇게 독해? 이런 유치한 장난은 이제 그만해.”이 말들이 비수가 되어 윤혜인의 심장을 찔렀다.그녀의 이마는 땀에 젖었고 몸을 움츠렸다.불빛 속에서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며 절망스럽게 도움을 구했다.“준혁 씨 살려줘요. 우리 아이 좀 살려줘요.”모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홍수가 터진 듯 윤혜인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와 고통스러웠다.옆에 있던 임세희는 기회를 노렸다.그녀는 가늘고 긴 주삿바늘을 번쩍이며 윤혜인의 목덜미를 향해 찔렀다.이준혁은 눈을 크게 뜨며 막으려고 한 순간 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그녀는 갑자기 고통스러운 소리를 질렀다.이준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바늘이 윤혜인의 목에서 1밀리 정도 거리가 남았을 때,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움켜쥐었다.모기에게 물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바늘이 이준혁의 손바닥을 찔렀다.1초 만에.몸이 갑자기 저려오기 시작했고 뻣뻣하고 힘이 없었다.이준혁의 눈앞에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는 머리를 세게 저으며 이빨로 혀를 꽉 깨물었다.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지며 순간 정신이 말짱해졌다.이준혁은 임세희를 걷어찼고 그녀는 날려가서 문에 맞았다.그녀는 고통의 신음소리도 낼 겨를도 없이 기절해 버렸다.윤혜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슴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윤혜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랐다.그저 윤혜인을 꽉 껴안고 손가락뼈가 하얗게 될 때까지 힘을 주면서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려 했다.“혜인아, 혜인아.”이준혁은 눈이 새빨개졌고 윤혜인 대신 아프고 싶었고 모든 좋지 않은 일을 막아주고 싶었다.이때,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구급 대원도 있었고 형사도 있었다.임세희가 실
“뭐라고요? 머리가 무거운 물건에 맞은 적이 있다고요?”이준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몇 년 정도 됐을 겁니다. 피멍은 크지 않지만 위치가 위험해서 수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순식간에 이준혁의 차가운 입술에서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피가 몇 년 동안 고여 있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이 곽씨 가문에서 무슨 일을 당했다고 의심하진 않았다.곽경천은 윤혜인을 진심으로 예뻐했고 그도 그걸 보아낼 수 있었다.윤혜인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5년 전이다.교통사고로 강에 빠졌을 때 입은 상처.그는 가슴이 아파오면서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강에 빠진 후 무엇을 겪었는지 생각하기가 두려웠다.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그러나 그때 이준혁은 윤혜인을 모르는 척 그저 스쳐 지나갔다.그는 마치 망치로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자기의 머리를 감싼 채 그는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큰 소리가 들렸다.이준혁의 크고 우람한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대표님!”주훈이 달려와 의사에게 외쳤다.“빨리 우리 대표님을 살려주세요, 알 수 없는 액체를 맞았어요.”방금 경찰이 보낸 감시 카메라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준혁이 윤혜인을 찌르는 주사기를 잡은 것을 똑똑히 보았다... 윤혜인은 온 하루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났다.그녀의 머리는 아주 말짱했다.이준혁의 잔인함, 외할머니의 죽음, 잃어버린 그 아이... 그리고 모든 것.마치 비극영화처럼 윤혜인의 머릿속에서 재생됐다.모든것이 기억났다.기억을 되찾았지만 그녀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뿐이었다.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이준혁 때문에 윤혜인은 많은 것을 잃었다.하지만 기억을 잃은 그녀는 다시 이준혁과 얽혔다.윤혜인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생각했다.이때 문이 열리며 배남준이 들어왔다.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혜인아, 일어났어?”윤혜인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몸은 좀 어때?”배남준이 물었
윤혜인은 배남준의 얼굴에서 문제를 알아봤다.“남준 오빠, 이 도안을 아세요?”“네가 이 도안을 어떻게 아는지 먼저 말해봐.”윤혜인은 그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나를 다치게 했던 사람 팔뚝에 있던 문신이에요.”“널 다치게 한 사람? 다 기억이 난 거야?”배남준이 놀라 했다.윤혜인은 배남준을 속일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널 해친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일어난 일을 나한테 처음부터 말해봐 봐.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배남준이 물었다."그때 일을 한번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윤혜인이 기억을 더듬었다.그때 그 운전사는 차량에 강한 빛 반사 때문에 차를 들이박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강한 빛은 평범한 차의 빛이 아니었다.뒷좌석에 앉아 있어 비치지 않았지만 그 운전사가 차를 박은 후 엄청난 충격으로 뒷좌석으로 밀려났을 때 윤혜인은 운전사의 두 눈에서 피가 나고 눈동자가 하얗게 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분명히 누군가가 특수 수단으로 운전자의 눈을 멀게 해서 사고를 낸 것이었다.뒤에서 구급차가 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었다.그때 갑자기 창가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더니 망치로 윤혜인의 머리를 세게 쳤다.그녀는 난간에 매달렸지만 차는 그대로 강물에 빠졌다.정신을 잃기 전 윤혜인은 마스크를 쓰고 이국적인 눈만 드러낸 남자를 보았다.그리고 남자의 팔에 있는 배지, 그리고 배지 정중앙에 점이 하나 있었다.배남준이 듣고 나서 몇 초 동안 표정이 굳어있었다.“찰스 가문의 배지야.”찰스 가문은 배씨 가문처럼 아주 큰 가문이었다.몇 년 전부터 줄곧 배씨 가문의 아래에 있었다.배씨 가문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는 배씨 가문처럼 튼튼하지 않은데다가 배씨 가문은 재력이 풍부하여 용병을 많이 모집하여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최근 몇 년 동안 가문 형제들의 말에 의하면 찰스 가문은 북안을 제외한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아 몰래 배씨 가문을 우르고 북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나았다.배남준이 말했다.“만약 그 사람이 아직 찰스 가문에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야.”“그래요, 고마워요. 남준 오빠.”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얌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배남준은 윤혜인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이내 그러한 행동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손을 반쯤 들다 멈췄다.“혜인아, 경찬이가 없을 때는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해. 알았지?”배남준이 미소 지었다.“내 앞에서는 예의 차릴 필요 없어.”그러자 윤혜인이 짧게 대답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당부했다.“오빠, 내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줘요. 우리 오빠가 돌아오면 그때 말할게요.”그녀는 지금 머리가 복잡했고 많은 세부 사항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기억을 되찾기 전후의 일들을 정리하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배남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간이 늦어졌기에 도시락을 들고 말했다.“일찍 쉬어, 내일 올게.”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며 여은에게 윤혜인을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전에는 괜찮았지만 윤혜인이 찰스 가문에게 주목받았던 걸 알게 된 후, 그의 마음속엔 항상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다음 날.잠에서 깬 윤혜인은 운동 준비를 했다.하지만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귀에 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우유 냄새가 나는 작은 아이가 윤혜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윤혜인은 마음이 따뜻해져 아름이를 안았다.“우리 아가...”홍 아줌마가 뒤따라 들어오며 아름이를 안고 있는 윤혜인을 보고 말했다.“아름아, 내려와서 놀자. 엄마 피곤하게 하지 말고.”그러자 아름이는 그 말을 듣고 내려가려고 발버둥 쳤다.윤혜인은 아름이를 안고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괜찮아, 엄마는 괜찮아.”홍 아줌마는 설명했다.“아름이가 아침에 악몽을 꾸고 엄마가 위험에 처했다고 우는 바람에 배 대표님 차를 타고 여기 왔어요. 안심시키려고.”윤혜인은 아름이의 코끝을 다정하게 비비며 부드럽게 말했다.“아름아, 이제 마음
이준혁은 세상 모르고 잠이 들었고 그 상태로 무려 사흘이나 지났다.이상한 것은 병원에서도 그에게 주사된 약물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고 그의 몸 상태는 완전히 멀쩡했다.왜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도 불가능했다.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점이었다.주사기에 남아 있던 물질을 검사해 보았으나 흔한 일산화이수소만 검출되었다.즉, 그냥 물이라는 소리다.주훈은 노련한 전문가를 불러 진단을 받게 했지만 역시 몸에는 문제가 없었고 충분히 자면 깨어날 것이라는 답변뿐이었다.성준도 해외의 전문가들을 불러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주훈은 어쩔 수 없이 이준혁을 지키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이준혁의 지시 없이 주훈은 그의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고 오직 김성훈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의학 교수이기도 한 김성훈에게 이준혁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안심이 되었으니 말이다.잠에서 깨어난 이준혁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창백한 얼굴로 그는 속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방 안의 빛에 적응하려고 애썼다.그러고는 본능적으로 그 모습을 찾았다.그러다 이준혁의 눈 앞에 한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대표님, 깨어나셨습니까?”주훈이 기뻐하며 말했다.“응...”며칠간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쉬어있었다.“다행입니다.”주훈은 눈물이 나올 듯했다.오늘도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쌓인 서류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는 이준혁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숨길 수는 있어도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대표님, 그 약물은...”주훈이 주사기의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이준혁이 말을 끊었다.“혜인이는... 어때?”그는 자신의 상태에는 관심이 없고 깨어나자마자 윤혜인의 상태를 걱정했다.특히 그날 그녀가 그의 품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이준혁이 걱정하는 듯한 모습에 주훈은 몇 초간 침묵한 후 말했다.“걱정 마세요, 윤혜인 씨는 괜
“혜인이는...”이준혁은 주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깨어났지?”“어제 아침입니다.”“나한테로 왔었나?”그러자 주훈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요, 아마도 막 깨어나서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겁니다.”이 말은 주훈이 이준혁의 얼굴을 보고 대충 둘러댄 것이다.‘아까는 상태가 완전 좋다더니 이번엔 덜 회복됐다고?’이준혁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 핑계로는 속일 수 없었다.그는 어두운 눈으로 주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주사기 이야기는 혜인이에게 하지 않았지?”주훈은 고개를 저었다.“네. 경찰 쪽에서도 말하지 않았고 김 교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이런 일은 주가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라 주훈은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그래, 혜인이한테 알리지 마.”“대표님, 정말 사모님께 말씀 안 드리실 겁니까?”주훈은 이준혁을 대신해 억울한 지경이었다.그는 분명히 봤다. 만약 윤혜인이 갑자기 발병하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주사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대체 이런 일을 왜 알리지 않는 거지?’곧 이준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이런 사소한 일은 혜인이가 알 필요 없어.”그는 그녀가 쓸데없는 걱정을 할까 봐 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이 드니 차라리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나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을 테니까.주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문이 열리며 김성훈이 들어왔다.그는 얼마 전 주훈의 전화를 받고 이준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다른 의사들이 다 진단을 마쳤지만 그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을 관찰하며 말했다.“임세희가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군.”이준혁의 몸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검사 결과도 포함해서 말이다.임세희가 정말로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한 것일까?그러나 여전히 방심할 수는 없었다.김성훈은 청진기를 거두며 말했다.“네 혈액 샘플을 내 해외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
소원은 소종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육경한 있나요?”“없습니다. 대표님은 회의 중이에요.”이어 소원이 말을 꺼내려 하자 소종이 말을 끊었다.“대표님은 지금 소원 씨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바쁘십니다. 소원 씨, 지난번 결혼식에 용감히 난입했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심정으로 소원 씨를 그곳에서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서씨 가문과의 협력이 몇 건이나 엎어졌습니다. 물론 서씨 가문에서 먼저 끊은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그 서씨를 못마땅해하셔서 직접 협상 테이블을 뒤엎었거든요. 뭐, 그때는 속 시원했지만 지금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친 몸으로 말이죠.”소원은 소종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얘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육경한이 무슨 일을 하든 소원은 관심 없었다.서씨 가문의 테이블을 뒤엎든 말든 그건 소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씨 가문의 재산은 서현재에게 돌아갈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오히려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함부로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하지만 지금 소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유진이의 안위뿐이었다.유진이 안전한지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소 비서님, 육경한한테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을까요? 정말 급한 일이 있습니다.”그러자 소종은 비웃듯 물었다.“대표님더러 일하다 말고 소원 씨 전화를 받으라는 말씀이세요?”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정말 급한 일이에요...”하지만 소종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원 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는 이어서 말했다.“소원 씨가 대표님에게 연락해서 좋은 일로 이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소원 씨와 관련된 일은 항상 문제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은 매번 소원 씨의 뒷수습을 하느라 애쓰시네요.”“이번
차에 탄 뒤, 소원은 다급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경원 별장으로 가 주세요.”경원 별장은 육경한의 대저택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산기슭까지만 갈 수 있었는지라 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그 대저택은 우리 같은 택시가 올라갈 수 없게 막혀 있습니다. 혹시 위에서 허가를 받은 게 있으신가요? 그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들어가길 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자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셔야 할 것 같네요.”결국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금을 지불한 후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소원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또 어떤 남자한테 상처받고 찾아온 여자겠지.’이 산 중턱에는 몇몇 재벌 가문의 대저택들이 모여 있었기에 운전기사는 궁금했다.‘과연 어느 재벌 2세가 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게다가 저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텐데.’소원은 첫 번째 보안 초소에 도착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지만 소원은 육경한 집의 출입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이 비밀번호는 과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몰래 알려준 것이었다.혹시나 유진이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소원이 들어가지 못해 문제라도 생길까 봐 미리 대비해둔 것이다.그렇게 소원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체력이 약한 데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걸어가야 했기에 소원은 정말 힘들고 지쳤다.이런 대저택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집안 관리인들조차도 전용 차량을 이용했기에 두 발로 이동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40분 넘게 걸어가서야 소원은 경원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저택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소원은 문을
하지만 유진은 특별한 아이였고 아줌마는 몇 년 동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진에게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유진은 늘 아줌마를 할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소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했다.[아줌마, 유진이 목소리 너무 오래 못 들어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들려줘요.]그쪽은 답장이 매우 빨랐다.[아가씨, 다음 기회에 몰래 녹음해 드릴게요. 다른 도우미들이 한눈을 팔아야지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잘 지내고 있고 아가씨 얘기도 거의 안 꺼내고 있어요.]소원은 경거망동하기 싫어 더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아줌마의 마지막 한마디는 사실 매우 불필요한 말이었다. 아줌마는 소원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진이 이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얘기는 소원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도 너를 버렸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말과 같았고 소원에겐 무조건 자극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아줌마가 소원을 따라다닌 지도 어언 7년이었고 거의 가족처럼 힘든 일 궂은일 다 같이 했다. 아줌마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 어떤 약점도 없었고 누군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유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소원은 이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7년 만에 갑자기 변할 일은 없었고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지금 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줌마는 예전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만약 아줌마를 빼돌린 거라면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소원은 전에 육경한에게 유진은 아줌마 없이 안 된다고 말했고 육경한도 아줌마를 잘 챙겨주겠다고, 다른 시터가 있어도 아줌마가 홀대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원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한참 지나 그쪽에서 영상을 하나 더 보내왔다. 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시곡을 외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와. 우리 유진이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방민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사진을 찍더니 아이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주고는 시터가 아이를 씻기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육경한에게 답장했다.“경한 씨, 미안해요. 유진이랑 놀아주느라 핸드폰 확인을 못 했네요. 씻기고 침대에 눕히니 이제 조금 확인할 시간이 나네요. 내게 가정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방민아는 유진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육경한에게 보내주더니 시터에게 눈치를 주자 시터가 방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방민아는 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이렇게 물었다.“그 아줌마 요 며칠 좀 어때요?”방민아가 물은 아줌마는 전에 소원이 유진을 보살펴달라고 위탁한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유진에게 진심이었기에 절대 유진을 해치지 않았고 돈으로 매수될 사람도 아니었다.하여 방민아는 그 아줌마가 먹는 식수와 음식에 다른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미량의 독을 탔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다 더는 유진을 보살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방민아가 제일 좋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도 여전히 무슨 질병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했다.아줌마는 소원의 위탁을 받았는지라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옆에 꼭 붙어있으려 했다. 유진은 이제 아줌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원 못지않게 유진을 챙기고 보호했다.방민아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유진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별장 뒤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게 했고 사람과 의사를 보내 아줌마를 보살폈기에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종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보고할 때면 늘 방민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시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방민아의 눈빛이 살짝 빛나더니 웃으며
유진이 처음 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고슴도치 같았고 평소 그를 보살펴주던 시터와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봤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육경한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종은 최근 방민아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유진을 보살피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속 휴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방민아가 매일 육씨 저택으로 가서 유진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유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육씨 저택은 유진이 올 때부터 데려온 아줌마 외에 전문적인 시터 두 명을 따로 들였기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칠 걱정도 없었다.“방민아 씨 아이를 꽤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가정 심리 주치의도 작은 도련님 진료를 보고는 진보가 크다며 매우 만족해하셨거든요.”소종의 말에 육경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방민아가 요 며칠 보낸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많이 보낸 건 아니었고 하루에 한두 개 정도, 그것도 다 육경한의 몸을 걱정하는 문자지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유진의 사진도 틈틈이 보내왔다. 유진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사진, 책을 보는 사진,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진, 그리고 밥 먹는 사진까지... 진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긴 했다.육경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장을 보냈다....한편, 차 안에 있는 유진은 얌전하고 부드럽던 아까와는 달리 방민아를 살짝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모, 나랑 약속했잖아요.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면 엄마 보여주겠다고.”방민아도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조금 더 노력해야지. 아빠가 진짜 만족해야만 엄마 볼 수 있어.”유진은 금세 김이 빠졌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아까 그 연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했다.왜냐하면 방민아가 육경한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와 몇 마디 대화해 아빠를 기쁘게 해주면
육경한은 방민아의 유도가 유진의 반감을 살까 봐 입을 열려는데 유진이 한발 빨랐다.“몸은 좀 나아졌어요?”나지막한 목소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유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빠.”이 말에 병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방금... 뭐라고?”육경한은 믿을 수가 없어 큰소리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이 착하지... 다시 한번 말해봐.”육경한이 흥분하자 유진이 살짝 놀랐는지 머리를 방민아 뒤로 숨기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민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유진과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우리 아까 한 말 다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게 어떨까?”유진이 방민아와 육경한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이렇게 말했다.“많이 좋아졌요? 아빠.”이 목소리는 전보다 컸고 전보다 뚜렷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상처가 찢어져 너무 아팠지만 육경한은 꾹 참으며 유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유진아... 아빠 괜찮아.”육경한에겐 머리를 만져주는 게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어릴 때 육경한의 아버지가 육경한을 격려할 때도 머리를 쓰다듬어줬기에 육경한에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종의 인정이자 칭찬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경한은 자기 자신을 꼭꼭 싸맨 상태였고 괴물로 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로잡힌 육경한은 가족 간의 사랑이나 윤리 도덕은 안중에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이 아빠라고 부르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리는 그동안 육경한이 저지른 수많은 죄를 씻어내리는 천사의 목소리와 같아 육경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기침했다.“민아 씨, 여기 아이가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에요. 일단 유진이 데리고 돌아가요.”“그래요. 경한 씨. 몸조리 잘해요. 국 좀 가져왔는데 이따 챙겨 먹어요.”방민아가 테이블에 놓인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