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아무리 침착하게 말하려 해도 소원은 그 속에서 다가오는 폭풍을 느낄 수 있었다.소원의 붉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육 대표님, 분별 있는 사람은 이런 시간에 전화해서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습니다.”“내가 분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비록 병약해 보였지만, 육경한의 목소리 속 권위감과 잔혹함은 여전히 가볍게 볼 수 없었다.“대표님 전에는 EQ가 높아서 여자를 되게 잘 달래줬던 것 같은데. 왜, 나이를 먹을수록 퇴화하는 것 같아요? 이제 그런 것도 이해 못 하는 겁니까?”“소원!”육경한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몇 초도 참지 못하고 어금니로 혀끝을 물며 말했다.“지금, 당장 나와!”그녀가 자신을 놀리든 조롱하든 상관없었다.하지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그의 말투에서 상황을 파악했다.‘날 따라온 건가? 내가 현재랑 호텔에 온 걸 알고 있는 거야.’이윽고 소원이 미소를 씩 짓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떨렸다.“정말 미안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어요.”그 말에 전화기 너머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심지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아니었다면 소원은 그가 전화를 끊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소원은 냉소를 짓고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내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너 내 화 돋우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떨리는 입술로 내뱉은 육경한의 그 말은 마치 애원하는 듯했다.“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나 정말 화났어. 내 오장육부가 다 아플 정도로. 제발, 내려와 줄래?”단순히 오장육부만이 아니었다.그는 지금 숨을 쉴 때마다 칼이 가슴에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가 자신을 무릎 꿇게 만들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어둠이 깔릴 때까지 무릎을 꿇고 버텼다.그의 상태가 심각해져 거의 죽기 직전에도, 소종은 그녀를 불러올 수 없었다.이 모든 것이 명확하게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육경한이 죽
유골은 소원이 떠나기 전 지시한 대로 아버지의 영정 옆에 합장되었다.비록 예상한 결과였지만 그 소식을 직접 듣게 되자 소원은 온몸이 심하게 떨렸다.그녀는 파산으로 인해 온 가족이 죽는다는 말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늘이 이토록 잔인하다니, 왜 자신을 남겨두고 차라리 차가운 바닷속에서 잠들게 하지 않았을까? 왜 살아남게 해서 죄책감을 짊어지게 했을까?소원의 눈가는 붉게 물들었다.“육경한, 난 지금 혼자야. 당신이 나를 어떻게 위협할 수 있을까? 내 목숨? 상관없어. 육경한, 감히 나를 죽이려면 해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그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이제 소원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그날이 오면, 아마도 소원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그 순간, 육경한은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맨손으로 꺼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텅 빈 가슴에 가득 찬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그가 다급히 말했다.“내가 어떻게 널 해치겠어, 소원아. 난 네 목숨을 원하지 않아. 단지 너를 돌아오게 하고 싶을 뿐이야. 돌아오면 정말 잘해줄 거야. 믿어줘. 네 어머니는...”하지만 육경한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맑고 깨끗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목욕물 다 됐어요.”짧은 한마디가 육경한의 얼굴을 순식간에 일그러지게 만들었다.다음 순간, 전화가 끊겼고 다급한 연결음이 소원이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육경한은 뜨거워진 핸드폰을 응시했다.1초, 2초, 3초...소종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이번 달에 이미 여덟 번째 교체한 핸드폰이었다.다음 순간, 육경한은 손에 점점 더 힘을 가했고 결국 핸드폰은 그 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해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소종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 했다.핸드폰이 아니라 육경한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고 말이다.육경한의 손바닥은 부서진 핸드폰 화면에 찔려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억누를
소원은 유진을 혼수상태에서 출산한 후, 2년의 긴 회복 기간을 보냈다.절망에 빠져 생존 의지조차 없었던 그녀는 이제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서현재는 그런 그녀를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지금, 그는 소원이 자신을 향한 태도가 달라지길 바랐다.단순한 가족 간의 의존이 아닌 더 깊은 관계로 말이다.그 맑은 서현재의 눈빛에 소원은 항상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서현재는 달랐다. 그의 앞에는 아직도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현재야, 나 정말 너한테 신세 많이 졌어. 난...”“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머리 안 말리면 나중에 감기 걸려요.”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서현재는 부드럽게 피했다.그러고는 소원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그들 사이에 있는 장벽을 깨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 이상의 일이었다.그는 그녀가 더 이상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비록 그 과정이 힘들겠지만 소원이라서 그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소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거울 앞에 서 있었고 소원은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몰라 거울 속에 집중했다.‘현재 키가 많이 크구나...’그녀보다 한참 더 큰 그는 평소에 셔츠를 입고 있어 날씬해 보였다.그러나 호텔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금, 그는 몸에 딱 맞는 흰 티셔츠를 입고 있어 단단한 허리선과 복근이 뚜렷이 드러났다.옷을 입으면 날씬해 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근육질인 전형적인 타입이었다.소원의 얼굴은 드라이기의 열기 때문인지 붉어져 있었지만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서현재는 소원의 머리를 말린 후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지 않고 거울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누나는 내게 영원히 짐이 될 수 없어요.”순간 소원은 멍해졌다.‘영원히'라는 단어를 여러 번 들어봤지만 오직 서현재의 이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미안해...”“미안해, 내 새끼. 엄마가 너무 몹쓸 짓을 많이 했어.”서현재가 들어와 보니 소원이 쪼그리고 앉은 채 유진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유진에게 손가락을 잡힌 채 잠들어 있는 소원의 속눈썹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서현재는 마음이 아팠다.서현재도 소원의 마음이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움은 항상 사람이 없을 때만 표출되었다.그녀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고 그 누구보다도 힘들었다.서현재는 소원을 깨우기 싫어 얇은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고는 유진의 이불을 꼭 여며주었다....밖으로 나온 서현재는 소원이 무음으로 설정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 전화가 들어온 걸 발견했다.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상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구력 있게 계속 걸어왔다.서현재가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이성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아, 당장 나와! 내가 말하는데...”“누나 자요.”서현재가 남자의 말을 잘라버렸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소원에게 전화 넘겨요.”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서현재가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못 들었어요? 누나 잔다고요.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대신 전달할게요.”수화기 너머로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빠드득빠드득 참으로 날카로웠다.“당신 누구야?”“젠장, 너 누구냐고?”서현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육경한이 먼저 난폭하게 입을 열었다.“네가 누구든 경고하는데. 그 여자 함부로 건드릴 생각하지 마. 얼른 그 집에서 나와! 안 그러면 내가 죽여버린다!”서현재가 청아한 말투로 덤덤하게 물었다.“육경한 씨, 아직도 예전처럼 서울에서 잘 먹히는 줄 알아요?”최근 5년간, 명성이 자자하던 미우 그룹은 점점 약해져만 갔다.육경한이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소종은 바로 인터컨티넨탈 대표에게 연락했다.하지만 웬일인지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무슨 말을 해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소종은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있는 곳으로 질주해 갔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소종은 바로 현재 판가의 두 배로 인터컨티넨탈을 인수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텔은 가족 기업이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물려줬느니 이런 말만 늘어놓았다.이에 소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인터컨티넨탈 호텔은 프렌차이즈였고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었다. 근데 왜 서울의 인터컨티넨탈만 가족 기업이 된 걸까. 이것은 분명 아무렇게나 둘러대 소종을 돌려보내려는 심산이었다.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소종은 가격을 2배에서 3배로 올렸다.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거절했다.육경한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쌓아온 경험으로 보면 이 일은 어딘가 많이 수상했다.육경한도 서울 재벌 순위 10위 안에는 드는 사람이라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따라오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런 사람이 호텔을 인수하겠다는데 만나주지도 않을뿐더러 3배의 가격을 쳐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있다.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장사꾼이 눈앞에 횡재를 두고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소종은 다시 육경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육경한은 고작 두 글자로 대답했다.“5배.”“…”소종은 할 말을 잃었다.5배라는 건 호텔을 인수하고도 50년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이건 아예 돈을 갖다 바치는 장사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소종은 알고 있었다. 만약 오늘 거래를 성사하지 못한다면 육경한은 가격을 10배로 올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소종은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터컨티넨탈 대표를 설득했다.드디어 거대한 이익 앞에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넘어왔다.더는 가족 기업 같은 소리는 지껄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밑지는 장사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
사실 서현재는 소원이 떠나는 꿈을 꿨다.너무 슬픈 꿈이라 소원을 안아야만 그 슬픔이 해소될 것 같았다.이내 서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일단 씻어요. 내가 아침 사다 줄게요.”소원이 멈칫하더니 말했다.“아니야. 나 원래 아침 안 먹어.”미각이 없는 사람에게 산해진미를 차려준다 한들 나무껍질을 씹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하지만 서현재는 아니었다.소원에게 그녀가 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미각이 없다 해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서현재는 소원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좌우로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누나. 가지 마요. 아줌마 곧 도착하니까 옆에 있는 스위트룸 가서 기다려요. 네?”서현재는 소원에게 안정적이고 믿음직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 보니 가끔 애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맑은 목소리에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 애교를 떨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서현재를 보며 소원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서현재는 가끔은 위험한 허스키 같다가도 가끔은 귀여운 푸들 같았다. 여자라면 그 누구도 서현재의 이런 매력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서현재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중요할 때만 한 번씩 매력 발산했다.너무 발산하면 효과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망설이자 서현재는 구체적인 시간까지 제시했다.“반 시간, 반 시간이면 꼭 돌아온다고 약속할게요.”아침을 사러 나가려면 거리가 좀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의 성화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다릴게.”서현재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즐겁게 키를 들고 밖을 나섰다.아줌마가 도착하자 소원은 유진과 마주칠까봐 두려워 얼른 다른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샤워나 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마침 옷을 다 챙겨 입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소원은 서현재가 돌아온줄 알고 웃으며 문을 열었다.“이렇게 빨리…”하지만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육경한이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꺼져!”소원이 역겹다는 듯 말했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여 소원의 쇄골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더니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소원을 노려봤다.“말해! 좋았냐고!”소원은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한쪽 팔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러자 육경한의 입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너랑 무슨 상관이냐고!”육경한의 입술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차가운 얼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그는 소원의 손을 꽉 움켜쥔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나 때리면 기분이 좋아지나?”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그럼 이쪽도 때려.”육경한이 다른 쪽 얼굴도 들이밀더니 소원의 손을 잡아 힘껏 자신의 따귀를 때렸다.찰싹.크고도 묵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육경한의 볼이 순간 빨갛게 부어올랐다. 소원이 직접 날린 따귀보다 훨씬 강력했다.“만족해?”육경한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그가 얼마나 화나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아니면 계속해. 네가 만족스러울 때까지.”소원의 눈에 그제야 육경한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새로 난 상처와 전에 난 상처가 겹쳤지만 육경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원의 손으로 자기 얼굴을 후려쳤다.정말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소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미친 거라면 차라리 정신 병원에 가. 여기 와서 지랄하지 말고.”“그러면 그냥 미쳤다고 생각해. 내가 미우면 미운 만큼 화풀이해도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랑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어.”육경한의 눈은 여전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변함없이 음침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만나서 밥 먹고, 손잡고, 안고, 자는 거 다 안 돼!”소원이 다른 남자랑 좀 자면 어떠냐고 비꼬려는데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흑흑.그 소리가 너무 작아 육경한이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육경한은 소원의 표정에서 이상한
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찌푸린 채 소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미칠 거면 확실히 미쳤으면 해서. 어떻게 죽여버리든 나는 네 뜻에 따를 테니까.”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저돌적으로 키스했다.오랜만에 느껴보는 말캉함이 가뭄에 단비처럼 육경한의 메마른 곳에 고였다. 순간 모든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이 지금 그의 품에 안겨있고 그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이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점점 빠져 들어갔다.소원은 의외로 반항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입을 벌린 틈을 놓치지 않고 깊숙이 파고들었다.육경한은 소원을 점점 더 갈구했다. 혀와 입술을 뜨겁게 부딪치는 와중에도 육경한은 소원의 다리를 허리춤에 올리며 몸을 바짝 붙였다.순간 엘리베이터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러자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육경한이 5배의 가격으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사들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호텔로 몰려들었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렇게 화끈한 장면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기자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경쟁하듯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다. 그러면서 기사까지 다 생각해 두었다.[육경한 대표, 그녀만을 위한 인터컨티넨탈.]육경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았다.호구처럼 5배의 가격으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사들였다는 기사가 나가게 되면 미우 그룹은 크게 요동칠 것이다.하지만 육경한은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른 소원을 품속에 끌어안은 채 다른 사람이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더니 얼른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갔다.육경한이 고개를 돌려 소원을 바라봤다.“돌아가기엔 무리인 거 같은데. 이 호텔 이제 내 소유니까 방은 네가 알아서 골라.”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정말 돌았구나.”그녀가 어느 방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분명 밑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