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앞윤혜안운 마음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것은 사람의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당황함이였다. 그녀가 방금 자신이 집에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한구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당황했지? 소원한테 물었더니 네가 집에 있다고 하길래 밖에서 기다렸어. 급하지 않으니 일어나서 씻어.”갑자기 윤혜인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났다. 그녀는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고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으음...”옅은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윤혜인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으며 그의 말에 대답을 하고 급급히 전화를 끊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남자를 자신의 몸에서 밀쳐내며 잠옷을 움켜쥐더니 화가 나서 손을 내들어 뺨을 때리려 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였다. 누가 아침부터 그더러 정당치 못한 일을 하라고 했던가.그러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가자 이준혁의 손에 되려 잡히고 말았다.그는 그녀를 흘겨보며 눈빛을 깊이 숨겼다. “내 여자만 때릴 자격 있어. 그래도 때릴 거야?”윤혜인은 즉시 손을 거두어들이며 때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왜? 벌써 쫄기는, 다른 남자를 꼬실 땐 오히려 신나하더니.” 그의 눈빛과 어조는 마치 그녀가 외도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이 남자와 어울리기만 하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미 이혼한 이상 더는 다른 감정이 자신을 좌우지하게 해서는 안된다. “대표님께서 오해하셨어요.”윤혜인은 웃으며 말했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제 남자 친구인데요.”“남자 친구? 그런데도 지금 나랑 이러고 있는거야?”이준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윤혜인, 너무 까졌네.”윤혜인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오히려 한가지 일이 더 미쩍었다. “대표님, 뭣때문에 이렇게 집착하시는 거죠?”그녀는 눈동자를 깜박거리더니 마치 자신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발견한 것
전형적인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다.윤혜인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일들은 확실히 해야 했다. “대표님, 가실 때 문 닫는 거 잊지 마세요. 그리고...“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더 이상 이사하고 싶지 않아요.”이왕 끊을 거라면 깨끗이 끊고 싶었다. 그녀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이준혁은 약간 차가운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가슴이 무시할 수 없을만큼 아팠다. 그녀는 다시 그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완전히 포기한건가?윤혜인이 그의 앞으로 지나다가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네 말이 맞아.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너도 알잖아. 한가지 일에 확신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거.”이준혁은 손을 뻗어어 윤혜인의 하얖고 부드러운 얼굴을 어루만지며 또박또박 말했다. “더 이상 고집 부리지마. 이번생은 나한테 벗어날 생각하지 마.”윤혜인은 그자리에 멍하니 굳어진채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녀는 고의적인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연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리라고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그를 이윽토록 응시하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변태에요?”방금 그를 향해 거드름을 피우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소름뿐이였다. “이제야 알았어?”이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이런 이준혁의 모습은 윤혜인더러 끔직했다. 그녀는 그가 수단이 많은 사람인걸 알지만 다만 전에 한 번도 그녀에게 쓴 적이 없었다. “준혁 씨, 미쳤어요? 날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돌아갈것 같아요?”윤혜인은 화가 났는지 무서웠는지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준혁 씨한테 돌아갈 일은 없을거에요.”“그래.”그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마치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이준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그녀가 주제넘은 행동을 비웃는 것 같았다. “모르지. 혹시 나한테 부탁하며 내곁으로 돌아오고 싶어할지도.”윤혜인은 손이 계속 떨렸다. 앞에 있는 무례한 남자
윤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재결합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재결합할 생각이 없어요. 어젯밤에 제가 몸이 불편해서 그가 여기 남아 돌봐주었을 뿐이에요.”그녀는 한구운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혼한 후부터 그녀는 재결합할 생각이 없었고 이준혁과 죽어도 상종하지 않을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그의 말은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가 심지어 한구운과 여유롭게 인사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자시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수록 화가 났다. 그가 사랑하는 건 그녀가 아닌 관계를 나눌 수 있는 그녀의 몸이 었다. 한구운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 우리 그만 만나야 될것 같아요.”한구운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물었다. “왜?”윤혜인은 한구운의 어두워진 안색을 보더니 의아해졌다. 게다가 손에 힘이 세서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녀는 할수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한구운은 그제야 알아채고 손을 떼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해. 혜인아, 실례를 범했어.”그의 다정한 웃음은 봄바람 같아서 윤혜인의 의혹을 날려버렸다. “괜찮아요.”“그럼 두 번째로 차인 거네. 또 이준혁때문이야?”윤혜인 부정하지 않았다. “전 선배의 사업에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요. 아무래도 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구운은 쓸쓸하게 웃었다.“이미 영향을 끼쳤다면 어떡할래?”윤헤인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나 AI에서 해고되었어. 거래를 조작해 앞으로 투자은행에 취직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한구운은 비록 가볍게 말했지만 윤혜인의 가슴에는 파도가 일고 있었다. 선배가 여러 해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결국 자기
그 여자가 마약을 과다 복용해서 죽을 때,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구급차도 부르지 않았다.그는 죄가 있는 그 여자의 마지막 순간까지 빤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는 슬픈 감정을 감추어 가며 말했다.한구운의 제안은 꽤 좋아 보였지만 윤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전 아직 그런 생각은 없어요.”그녀는 해외로 가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혼자서도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은 매우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급해하지 마. 아직 반년 남았어. 그때 가서 네가 가고 싶다면 내가 데리고 갈게.”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구운과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구운 오빠, 잠시만요.”그리고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그의 어머니가 준 돈봉투를 꺼내 한구운에게 건네주었다.한구운은 돈봉투를 보자 즉시 거절했다.“혜인아, 괜찮아. 그날 고생 많았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아야 해.”하지만 윤혜인은 고집을 부리면서 끝내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을 함부로 받을 그녀가 아니었다.집을 나선 후.한구운의 나긋나긋한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윤혜인의 망설임 없이 거절하던 모습을 생각하자 뜻밖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그러지 말아야 했는데.설마 그가 정말 윤혜인에게 관심이 생긴 걸까?휴대전화가 울리자 그는 전화를 받았다. 맞은 편에서 무슨 말을 했다.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윤혜인의 집 창문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행적을 그녀에게 알려 줘서 걸려들게 해.”...서울 정신 병원.임세희는 어둡고 작은 방에 갇혔다.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마치 죽은 사람 냄새 같은 악취가 났다.발밑에는 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어떤 쥐는 심지어 그녀의 발 위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마구 뛰어다니다가 죽은 쥐를 밟는 게 더 두려웠다.이 방은 그녀가 도망치다가 실패한 징
그의 말을 들은 임세희는 멍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맑고 촉촉했지만 이준혁의 목소리는 아니었다.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반응하며 말했다.“이 목소리는 준혁 오빠가 아니야. 그럼 넌 누구야? 누구냐고!”“나?”젊은 남자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널 구하러 온 사람이지.”임세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날 구한다고? 왜?”젊은 남자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네가 임신했어. 알고 있었어?”“내가... 임신했다고?”임세희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굳어졌다.어쩐지 요즘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그녀는 방안의 악취를 너무 맡아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임신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그럼 이 아이는 그 빌어먹을 송휘재의 아이일 것이다.게다가 그 기간 그녀는 이준혁을 속이기 위해 병든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주사를 많이 맞았다. 그래서 이 아이는 태어나도 기형아기에 절대 낳으면 안 되었다.그녀는 무릎을 꿇고 젊은 남자에게 빌었다.“제발 이 아이를 없애주세요. 기형아를 낳아서 절대 안 돼요.”“쳇.”남자는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지금부터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해. 괴물이든 기형아든 낳아야 해. 네 아이만이 널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임세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그럴 수 있어요? 제가 정말 예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그래.”남자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 떠났다.무거운 철문이 다시 쾅 하고 닫혀버렸다.임세희의 마음속에 다시 희망이 생겼다.그녀의 가족들도 모두 그녀를 포기했고 이제 모든 게 그녀 자신에게 달렸다.독이 묻은 해독제라 해도 살 수 있다면 그녀는 삼켜야 했다.그녀는 나가서 윤혜인에게 직접 복수하고 싶었다.‘모두 그 천한 년의 잘못이야. 빌어먹을 년. 죽어도 마땅해!’...화요일 아침.윤혜인은 제시간에 별장에 도착했다.이신우는 없었고 집에는 도우미 아주머니뿐이었다.이하진이 위층에 있다는 말을 듣고 윤혜인은 바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자
윤혜인은 오기 전에 이미 이하진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에게 당했는지 조사를 했다.이하진의 수단에 맞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어찌 됐든 그가 썼던 수단으로 그에게 거울 치료를 해야 했다.이하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누가 털도 다 자라지 않았다고 해요? 한번 보실래요...”윤혜인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이하진에게 이게 성추행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이하진은 순식간에 목이 메어왔다. 이렇게 어려운 상대는 처음이었다.“선생님은 정말...”말문이 막힌 그는 윤혜인을 한참 가리키다가 말했다.“뻔뻔하네요!”그러자 윤혜인은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아까 누가 뭘 보여준다고 한 것 같은데.”도대체 누가 뻔뻔하냐고 되묻는 뜻이었다.이하진은 완전히 그녀의 기세에 밀렸다. 자신보다 더 뻔뻔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그는 이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창피해서 차마 울지는 못하고 화가 나서 머리를 움켜쥐었다.윤혜인은 뒤에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얘야, 아니면 나랑 협력할래?”“전 아이가 아니에요!”이하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의 키는 윤혜인보다 30cm 정도 더 컸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윤혜인이 성추행을 말했던 게 생각나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그 모습을 본 윤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백 교육센터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업적도 없고 학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이하진을 잘 가르치는 것이 가장 빨리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이었다.그녀는 말을 이어갔다.“지난번에 했던 말이 기억나? 나랑 내기 한번 하자.”이하진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좋아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요.”“그럴 일 없을 거야.”“네! 그럼 다음 주 금요일로 하죠.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세요.”이하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다음 주 금요일을 선택한 건 그날에 이신우가 해외로 가면 아무도 그를 단속할 수 없었기 때문
이신우는 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고 셔츠 단추는 단 하나 남기고 다 풀어졌기에 크고 튼튼한 가슴 근육이 한눈에 들어왔다.윤혜인은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어쩔 바를 몰랐다.흐트러진 옷을 입고 있던 여자가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서 윤혜인을 욕했다.“당장 꺼져.”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윤혜인은 얼굴을 붉히며 미안하다는 말을 던지고는 재빨리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문을 잠그고 나가려는 그녀를 본 이신우가 말했다.“잠깐만요.”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또 한 번 멍해져서 문을 등지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이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다.“내려가서 기다리세요.”그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혜인은 재빨리 아래층으로 달려갔다.문이 다시 닫히는 것을 본 여자는 다시 이신우에게 자기 몸을 가져다 댔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는 아까처럼 흥분을 느끼지 못했고 몹시 냉담했다.그러는 모습을 보자 여자는 마음속으로 또 쳐들어온 윤혜인을 욕하기 시작했다.“여름 씨, 나가 주세요.”이신우는 냉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벨트를 다시 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뜨거웠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조여름은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그녀는 서울대의 엘리트였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이신우의 국내 업무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공항에서 이신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 경험이 많아 보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그의 프로필에는 35세라고 되어 있지만 얼굴만 보면 그냥 서른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그의 이목구비는 나무랄 데 없이 잘생겼고 우월한 집안 형편과 좋은 교육을 받은 그는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남다른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진한 향수와 독한 술처럼 매혹적이었다.그 후 그녀는 일 때문에 그와 함께 승마장에도 가고 온천도 갔다. 그의 완벽한 근육질 몸매를 본 그녀는 더욱 이 훌륭한 남자에게 빠져들었다.오늘 그녀는
조여름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소파에 앉아 이신우를 기다리는 윤혜인을 발견했다.보들보들한 니트를 입은 윤혜인은 가느다란 허리에 하얗고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확실히 부러운 비주얼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남자들이 첫눈에 반할만한 얼굴이었다.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조여름은 문득 익숙한 느낌이 들더니 문득 아까 책상 위의 그 사진이 생각났다.사진 속의 여자와 눈앞의 이 여자는 눈매가 서로 너무 닮았다.하지만 윤혜인은 분명히 젊어 보였고 나이가 안 맞았다...그녀는 뭔가 깨달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여름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윤혜인의 옆을 지날 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신우 씨 집에서 뭐 하세요?”조여름의 일을 망쳤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는 가정 교사예요.”“가정 교사?”조여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험한 말을 했다.“가정 교사라는 핑계로 신우 씨를 꼬시려고 하는 거죠?”그러자 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이신우는 확실히 매력 있는 남자였기에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윤혜인은 단지 그에게서 돈만 벌고 싶다고 하늘에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조여름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묵인한 줄 알고 더 무례하게 굴었다.“당신처럼 청순한 척하는 여자들을 많이 봤어요. 일한다는 핑계로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죠. 정말 비천하네요.”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아가씨,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세요.”조여름은 윤혜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에 화를 내며 말했다.“신우 씨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단지 대역일 뿐이에요. 얼굴이 좀 예쁘게 생겼다고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는 마세요.”대역이라는 말을 들은 윤혜인은 의심스러워서 이내 물었다.“무슨 뜻이죠?”그러자 조여름은 바로 말했다.“당신은 서재의 그...”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조여름 씨.”양복에 구두를 신은
빨간 옷을 입은 무녀는 한 폐공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더니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소원이 모자를 쓰고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장은 텅 비어 있었고 방금 들어간 무녀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소원의 입과 코를 막았다.이상한 향기와 함께 소원은 발버둥 칠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바닥에 쓰러진 소원을 보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릇을 살피듯 소원의 얼굴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폈다.그렇게 한참 살피던 무녀가 옆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그래. 이 여자로 하지.”무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탈탈 털었다.“담아서 옮겨.”체격 좋은 남자가 소원을 포댓자루에 담더니 병아리 잡듯 잡아서 차에 던져넣고는 차 문을 닫고 출발했다.무녀는 밖에 세워진 차를 가리키며 다른 남자에게 지시했다.“조용한 곳 찾아서 태워버려.”남자가 즉각 움직이더니 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녀가 소원을 실은 차를 따라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무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더니 방향을 틀었다....저녁.별장으로 돌아온 육경한은 불이 환히 켜진 걸 보고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은 밥 먹었어요?”도우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모르세요? 사모님 어머니 보러 간다고 했는데.”“어머니요?”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사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직 돌아오시진 않았고요.”도우미가 대답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저녁 8시 반이었다. 요양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는 돌아와야 맞았다. 소원이 걱정된 육경한은 올라가서 유진을 한번 보고는 차를 끌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요양원에 도착해 전미영이 있는 병실로 가보니 전미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간병인이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대표님.”육경한은 쓸데없는 말을 생략하고 바로 이렇게 물었다.“소원은 병원
소종이 뜸을 들이더니 병원 보고서를 꺼냈다.“이것도 한번 보세요. 병원 진단서인데 진아연의 상처가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인위적인 상처일 수도 있다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진아연이 자살이라고 잡아떼는 바람에 다른 사람도 달리 방법이 없었죠.”육경한이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진아연이 쓸모가 없어지니까 버림을 받은 거야. 쓸모없는 사람을 왜 살려둬.”“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소종이 말했다.“계속 지켜봐. 배후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육경한이 명령했다. 잠재적 위험 요소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소종을 불러세웠다.“서현재는 조사해 봤어?”“서씨 가문 도련님이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어요. 조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사해 보니까 정말 놀랍더라고요.”소종이 말했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무녀를 하나 데려왔는데 독벌레 주술을 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대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생각도, 행동도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육경한이 입술을 앙다문 채 잠깐 고민했다.“변호사한테 서현재랑 연주의 결혼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더 이어갈 필요 없을 것 같아.”딱 봐도 서현재는 서씨 가문, 그리고 서진태에 의해 버려졌지만 사악한 서진태의 성격에 마지막까지 서현재를 이용해 먹으려 할 것이다. 육경한이 알아버린 이상 한시라도 빨리 육연주를 그 소용돌이에서 빼내야 했다.“지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리고.”소종이 잠깐 망설였다.“연주 아가씨 어머님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제가 대표님 회사에 안 계신다고 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그래, 알았어.”육경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연주를 단단히 혼내주려는 것 같았다.소종은 육연주가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다. 요물 같은 소원이 밉긴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육연주도 나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육연주의 뒤처리를 해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육연주의 성질머리
소원이 육경한이 든 컵을 앗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두유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아.”이에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소원은 영문이 뭔지 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찐빵을 가리켰다.“찐빵도 좀 먹어. 갓 찐 거라 따듯할 거야.”“그래.”육경한이 찐빵을 가져다 입에 넣더니 천천히 음미했다. 유진은 소원이 챙겨준 식단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비웠다.소원은 입맛이 없어 별로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다 먹었어.”그렇게 식탁엔 육경한 한 사람만 남았다.도우미가 정리하려고 와보니 식탁에 놓인 음식은 이미 다 먹어 치운 뒤였다. 육경한은 평소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스테이크 반 덩이면 끝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이 먹었다.역시 소원이 한 아침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 도우미들은 기분이 좋아져 얼른 식탁을 정리했다.육경한은 출근 전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소원이 유진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을 나섰다.차에서 기다리던 소종은 육경한이 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대표님, 그 여자가 준 음식 드신 거 아니죠?”소종은 육경한이 혹시나 소원에게 홀려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걱정했다. 육경한이 말이 없자 소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드셨어요?”육경한이 소종을 차갑게 쏘아봤다.“신경 꺼.”소종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대표님,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어차피 대표님도 오래 못 살 것 같은데 저도 빨리 나가서 죽게요.”육경한이 그런 소종을 힐끔 쏘아보더니 말했다.“무슨 헛소리야?”“제가 없는 말 했어요?”소종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독 탄 거 알면서도 드시는 걸 보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 아니에요?”“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잖아.”육경한이 차갑게 잘라버렸다.“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제가 이 두 귀로 들었는데.”소종이 대뜸 화를 냈다.“그 요물 같은 여자가 대답했다니까요.”“말 가려서 해.”육경한이
그녀를 옆에 남기려면 그게 뭐든 마셔야만 했다.소종은 진아연이 준 약이 만성 독약이라고 했다. 만성 독약이라면 아직 그녀와 아이 곁을 지킬 시간이 많다는 건데 육경한은 그걸로 족했다....이튿날.날이 어슴푸레 밝자마자 잠에서 깬 육경한은 옆자리가 비어 있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찾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 어디 갔어요?”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주방에서 아침 준비하고 있어요.”이를 들은 육경한이 살짝 넋을 잃었지만 도우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던데요?”소원이 너무 차가워 집안 분위기가 늘 우중충한 데다 유진까지 몸이 좋지 않고 말수가 적어 별장은 화기애애한 날이 거의 없었다. 하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큰소리로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소원이 직접 육경한에게 밥을 해주고 있으니 소원도 관계를 완화하려고 애쓴다는 의미 같았다. 도우미들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사랑하니 이 장면을 보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도우미들도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속으로 몰래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주방으로 들어간 육경한은 분주히 돌아치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꿈인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서서 소원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는데 마침 뒤돌아선 소원이 그를 발견했다.소원은 얼굴이 발그스름하고 광이 도는 걸 봐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육경한이 아직 잠옷을 입고 있자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씻어. 아침 먹자.”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소원과 유진은 이미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메뉴는 예전처럼 가짓수가 많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겼다.두유, 찐빵, 호박죽과 만두까지, 직접 만든 아침이라 몸에 좋았다.유진은 두유와 찐빵은 좋아했지만 호박죽과 만두는 별로 당기지 않는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엄마, 나 두유 마시고 싶어요.”이에 육경한이 두유를 한잔 따라주려 했지만 소원이 입을
차가운 연고가 손에 발라지니 너무 시원했다.소원은 잠깐 정신이 흐트러져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손가락만 쳐다봤다.육경한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발라주고는 연고가 빨리 말라 끈적이지 않게 손으로 부채질해 줬다. 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보며 부모님이 생각났다.부모님도 잉꼬부부였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애교를 부렸고 어디 부딪히거나 하면 바로 아빠한테 달려가 투정을 부리곤 했다. 아빠는 엄마를 공주처럼 아껴줬고 소원도 그런 화목한 가정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사람들도 소원의 부모님이 금실이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하느님도 참 매정하시지...’이런 생각이 들자 육경한이 열심히 부채질해 줘도 마치 칼바람과도 같아 소원은 홱 손을 거뒀다.“됐어. 이제 다 나았어.”순간 소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육경한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에 놓아둔 해장국을 가져오며 이렇게 말했다.“마셔. 뜨겁지 않아서 먹기 좋을 거야.”육경한은 색깔이 살짝 짙은 해장국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네가 끓인 거야?”“아니.”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줌마가 끓인 거야. 난 마무리만 했고.”“사실 나 안 취했어.”육경한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먹을 수 있어. 안에 약재가 들어 있어서 몸에 좋아.”소원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육경한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해장국을 들어 원샷했다. 육경한이 그릇을 비워서야 표정이 좋아진 소원이 그릇을 건네받았다.“설거지하고 올게.”“잠깐만.”육경한이 소원을 불러세웠다.소원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덤덤하게 말했다.“왜 그래?”“그릇 이리 줘.”육경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그릇을 꽉 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왜 그러는데?”“뭐가 왜야?”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화상 입어서 물 닿으면 안 되는 거 몰라?”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 괜찮아.”육경한이 그릇을 빼앗아 싱크대로 걸어가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릇을 헹궈냈다. 설거지를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