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화장실 안에서 울려 퍼졌다. 윤혜인은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며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그러나 대비되게 이준혁은 매우 태연한 표정이었다. 윤혜인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여기서 싸우면 더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들키는 상황을 상상하니, 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그러다 문득, 이준혁이라면 왠지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윤혜인은 분노를 잠시 제쳐두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낀 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해결해 달라고?”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윤혜인은 자주 봤던 표정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준혁을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던 찰나,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작은 칸막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한구운의 목소리도 들렸다.“안에 누구 있어요?”그 순간, 윤혜인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윤혜인은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린 뒤,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깨물어 버렸다. 하지만 대담한 행동과 달리 그녀의 몸은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놀란 윤혜인은 자신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잊고,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준혁이 제때 그녀를 바쳐주지 않았다면, 큰 소리가 났을지도 몰랐다.한편, 한구운은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가 강제로 칸막이 문을 열기 위해 발로 걷어차려던 찰나, 갑자기 청소부가 청소 카트를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고객님, 거긴 지금 수리 중이라 다른데 이용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지금 사용하실 건가요? 아니면 청소해
마치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는 듯, 뻔뻔한 모습에 윤혜인은 분노했다.“그쪽이 신경 쓸 거 아니에요.”“하….”이준혁은 화가나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지금 나 도발해? 화장실이라고 내가 널 못 건드릴 것 같아?”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이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직 교훈이 부족해?”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고개가 돌아갔다. 차가운 이준혁의 입술이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윤혜인은 당황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입안에 아까처럼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이번엔 입술을 깨문 건 이준혁이었다. 그는 벌하듯 윤혜인의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그녀는 따끔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고 차가운 손이 윤혜인의 몸을 제멋대로 훑고 다녔다.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몸이 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서서히 얼굴이 흥분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이준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손은 마치 본드를 붙인 듯, 떨어질 줄 몰랐다.자극이 서서히 뇌를 마비시켰다. 윤혜인의 몸은 이미 이준혁에게 길들어 있었다.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흥분이 전신에 퍼졌다. 윤혜인은 반항하던 것을 멈추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점점 입안을 헤집는 움직임이 깊어졌다. 이준혁은 구석구석, 윤혜인의 입안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쓸고 다녔다. 잠시 뒤, 키스는 멈췄지만, 그녀는 몸이 나른하게 풀려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당신, 정말 무례한 거 알아요? 이렇게까지 해서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뭔데요?”윤혜인은 이준혁한테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강제로 느껴야만 하는 흥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직도 모르겠어?”이준혁이 뚫어져라 그녀를 마주 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부드럽고도 촉촉한 촉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이래도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할 수 있어?”윤혜인은 오만한 그의 표정이 보기 싫어
순간 이준혁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키스 값으로 이 이상은 줄 수 없어요.”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짓밟는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지만, 먼저 시작한 것은 이준혁이었다. 중요한 자리에 참석한 것을 알고도 그녀를 화장실로 강제로 끌고 가 옷까지 찢어 놓았다. 윤혜인은 그저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었다.“윤혜인!”이준혁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겨우 이 정도로 화났어요? 대표가 되어서 인내심이 없으시네요.”윤혜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비꼬았다.“조언 하나만 할게요. 돈 벌고 싶으면 얼굴만 잘생긴 것으론 안 돼요. 성격부터 좀 죽이세요.”그러자 이준혁은 당장이라도 윤혜인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더 당당히 그와 마주 보았다.평소엔 제대로 그에게 반박조차 하지 못했지만, 오늘 드디어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윤혜인은 그 어느 때보다 속이 후련하고 짜릿했다.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기 시작한 지 한참, 이준혁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윤혜인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변기 뚜껑 위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윤혜인의 몸은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이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이건 결코 그녀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휘두를 무기를 상대에게 쥐여준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오늘은 여차저차 이렇게 끝났지만, 만약 이준혁이 정말 물불 안 가리고 화 냈더리면, 이렇게 간단히 끝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온갖 생각들과 불안들이 그녀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윤혜인은 애써 그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이준혁한테 진 빚을 갚은 다음, 유학 자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외국으로 가버리면, 이준혁이라도
잠시 침묵하던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죽었다고 해도, 아이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 이천수가 자꾸만 일 벌이는 거 보면 알 수 있어.”“그렇다면 당분간 말 잘 듣는 아들 흉내 내면서 좀 방심하게 만들어 봐. 너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숨기느라 꽤 애쓴 것 같은데, 이대로는 찾기 힘들어.” 김성훈의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분명 서로 연락하고 있을 거야.”이준혁이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가 계속해서 술을 퍼먹는 모습을 보고, 김성훈이 농담을 던졌다. “왜? 전처 마음 돌리기 쉽지 않나 봐?”그 말에 이준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러자 김성훈이 더 짓궂게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한두 번 거절당한 얼굴이 아닌데? 어디 내가 한번 팁 줘?”김성훈은 이준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표현한다는 것이 도리어 상대의 화를 불러일으켰을 게 뻔했다. 이준혁이 냉담한 표정으로 김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는 너는, 여자친구가 있긴 하고?”김성훈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이준혁의 말에 정곡이 찔렸기 때문이다. 남한테 비수 꽂는 건 이준혁의 특기였다. 이러니 윤혜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됐다. 그래도 친구가 고생하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그 태도부터 바꿔. 평소대로 하면 절대로 안 넘어와. 사람이 좀 져주는 맛도 있어야지. 맨날 그렇게 빳빳하게 구니, 누가 좋아하겠어?”일단 조언은 했지만, 김성훈은 그가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까지가 그의 역할, 결과는 이준혁의 몫이었다.이준혁은 술집을 나선 뒤, 회사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이혼한 뒤로, 익숙한 일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꾸만 윤혜인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다가 어느 날 진짜 못 버티면 납치라도 할 것 같아, 스스로 자제하고 있었다. 다음날 일찍, 이천수가 정유미를 데리고 이준혁을 찾아왔다.이준혁과 눈이 마주친 정유미는 순식간에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맞선에서 완전히 병풍 취급을 당한 이튿날,
이준혁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아버지가 하세요, 그럼.”그의 눈빛에 담긴 살벌한 기운을 느낀 이천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한두 번 본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이준혁은 항상 그에게만 차가웠다. 이천수는 이럴 때마다 자신만 외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준혁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지만,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그럴수록 이천수는 이준혁한테 정이 떨어졌다. 이준혁한테 밀려 해외로 밀려났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다시 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그래야 그의 또 다른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테니.“준혁아, 네가 날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우리 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지진 않았어.”이준혁이 정색하며 말했다.“말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세요!”“너!”이천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곤 다시 꾹 참았다.“결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유미랑 잘 좀 지내봐. 이번 에너지 프로젝트 성사하면, 회사도 큰 도약을 할 수 있을 거야.”이천수의 의도야 뻔했다. 일단 정유미를 통해 그녀의 가문과 이용해 목적을 이룬 다음, 여차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낼 생각인 것이다. 이준혁은 더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 인터폰을 통해 주훈을 불렀다.“손님 나가신다. 배웅해 드려.”결국 이천수는 주훈에 의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을 나온 그는 곧바로 정유미에게 다가가 말했다.“유미야, 준혁이 원래 성격이 좀 차가워. 하지만 네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저 녀석도 바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이, 너만 노력한다면 저 녀석도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야. 알겠지?”정유미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요, 아버님.”이천수는 정유미의 태도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이준혁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정유미같이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여자가 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이천수가 칭찬하며 덧붙였다.“그래, 착하네. 넌 내가 인정한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군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주훈에게 건네줬다.“차용증은 주 비서님께서 갖고있습니까?”주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6억 원이에요. 확인하시고 차용증은 저한테 돌려주세요.”주훈은 잠시 머뭇하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아니요. 주 비서님께서 처리해 주세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새 여자 친구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다고 바로 거절했다.정유미는 여전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주훈은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윤혜인을 데리고 차용증에 관한 일을 처리하러 갔다.차용증을 건네받은 후 윤혜인은 집으로 돌아갔다.이준혁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사무실에서 일했다.퇴근하고 나왔을 때 정유미는 이미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정유미 씨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죠?”주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유미 씨께서 계속 가지 않았습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주훈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정 씨네 가문은 지금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중인데 만약 정유미를 쫓아내면 다른 사람들은 이 씨네 가문과 정 씨네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고 주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주훈은 이내 물었다.“유미 씨를 깨울까요?”“아뇨, 문 열어줄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이준혁은 말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했다.“대표님.”주훈은 그를 불러 세우고 오후에 윤혜인이 돈을 갚으러 온 일에 대해 전했다.그는 카드를 이준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그럼 이 카드는?”사실 당시 이준혁은 윤혜인이 차용증을 가지러 오면 그저 줄 테니 돈을 갚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그도 윤헤인에게 설명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카드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주훈은 엄청 눈치 보였다.이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녹색 카드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버리세요.”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리고 떠났다.이준혁은 화가 잔뜩 난 채 차에 탔다. 위가 쥐어짜는 듯
윤혜인은 소파에 던져졌다. 생리통 때문에 그녀는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죠?”“네 생각엔?”이준혁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 이미 반쯤 다 헤쳐진 셔츠 속으로 뚜렷한 복근을 드러냈다. 길고 고운 손가락은 단추를 계속 풀고 있었다. 무엇을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미쳤어?”윤혜인의 감정은 격해졌다. “너 아직도 나를 잘 모르나 봐.”이준혁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그녀를 거칠게 덮쳤다. 그녀를 소파에 눕힌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과연 담이 있을가 없을가?”윤혜인은그에 의해 소파에 갇힌채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베어물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증오에 가득찬 말투로 내뱉었다. “이준혁, 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갑자기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었다. 다만 그 웃음은 은근히 자조적이었다. “그럼 네 말을 꼭 명심하고 절대 날 가만두지 마.”그는 그녀의 갸름한 턱을 단번에 베어물었다. 누가 봐도 그의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마크를 남기려는 듯했다. 이준혁은 그토록 그를 거부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보다 더 차갑고 모진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더니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남자친구를 찾는다더니 진짜로 남자친구를 찾았다. 일련의 서운함이나 미련도 없이 쿨하게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했다. 그녀는 지극히 독했다.이준혁은 그녀의 턱을 깨물고 자세히 훑어보더니 물었다. “네 돈은 그가 준거야? 6억원에 너를 가졌어?”윤혜인은 손바닥을 가볍게 꼬집으며 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화가 난 것은 알고 보니 6억원 때문이었다.그는 이 돈이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프게도 이미 이혼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하찮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분노로 가득찬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준혁 씨는 돈 한푼 쓰지 않고 날 가졌는데 지금 6억원원에 날 가졌다면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지 심하지 않았어요.”예전에 그녀는 가벼운 생리통이 있었는데 오기 전이면 미리 준비를 잘해서 이준혁은 몰랐었다. 게다가 매번 생리가 올 때마다 그녀는 이준혁을 안고 잤다. 그의 몸은 따뜻해서 안고 자면 편안했다. 이번에는 생리가 갑자기 와서 그녀는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더욱이 유산후 몸조리를 잘하지 못한 탓으로 특히 심하게 아팠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그의 소매자락에 피자국이 약간 붉게 묻은 것을 보고 얼굴이 바짝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소매자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준혁 씨, 소매를 씻어야겠네요.”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바라보거니 그제야 생리혈이 묻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사실 결벽증이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씻고 올게.”윤혜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긴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그녀도 그가 결벽증이 있어 조금만 더러운 것이 묻어도 블쾌해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생리혈이 묻었다고 싫어하지 않았다...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약효가 작용하였는지 그녀는 혼미해져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윤혜인은 몸을 뒤척이다 팔뚝에 물체가 닿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더니 그녀의 곁에 사람이 자고 있었다. 윤혜인 손을 뻗어 침대머리의 전등을 켰다. 몸이 경직되였다. 눈을 몇번 깜박이고서야 그녀는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이준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그녀 때문에 잠에서 깬듯 칠흑같은 눈망울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윤혜인은 이불을 잡아채서 몸을 감싸며 오래만에 겨우 한마디를 짜냈다. “이 변태야!”“응?”이준혁은 아직 잠에서 덜 깬듯 말소리가 흐릿했다. 윤혜인의 작은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준혁 씨 왜 옷을 입지 않고 있어요?”이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생각난듯 당당하게 말했다. “옷이 더러워졌는데 어떻게 입어?”그는 마구잡이로 나오기로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