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떨리는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준혁 손에 익숙한 핸드폰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부족해 화면이 통화 중인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윤혜인은 자신의 핸드폰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준혁은 별 저항 없이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핸드폰에서 한구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혜인아? 나 지금 화장실 앞인데, 넌 지금 어디야? 혜인아?”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원까지 꺼버렸다.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한구운은 여직원을 찾아 여자 화장실을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다.“제 여자친구가 화장실에 있는 것 같은데, 한번 확인 좀 부탁드려요. 이름은 윤혜인이에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여자친구, 좋아하네.’한편, 윤혜인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1초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여직원이 한구운에게 아무도 없었다며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윤혜인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당연히 한구운이 포기하고 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남자 화장실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한구운이었다. 윤혜인은 긴장과 불안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 이때, 이준혁이 그녀를 바라보며 나가라는 듯한 고갯짓을 했다. 윤혜인은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엉망진창으로 흩트려 놓은 사람은 그였다. 그런데 이런 뻔뻔한 태도라니, 윤혜인은 그가 너무 증오스러웠다.그녀의 모습을 본 이준혁은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직접 나가지 않겠다면, 나가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윤혜인이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협조할 마음이 없었다. 이준혁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키스를 시작했다. 이준혁은 한구운에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화장실 안에서 울려 퍼졌다. 윤혜인은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며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그러나 대비되게 이준혁은 매우 태연한 표정이었다. 윤혜인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여기서 싸우면 더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들키는 상황을 상상하니, 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그러다 문득, 이준혁이라면 왠지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윤혜인은 분노를 잠시 제쳐두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낀 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해결해 달라고?”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윤혜인은 자주 봤던 표정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준혁을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던 찰나,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작은 칸막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한구운의 목소리도 들렸다.“안에 누구 있어요?”그 순간, 윤혜인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윤혜인은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린 뒤,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깨물어 버렸다. 하지만 대담한 행동과 달리 그녀의 몸은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놀란 윤혜인은 자신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잊고,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준혁이 제때 그녀를 바쳐주지 않았다면, 큰 소리가 났을지도 몰랐다.한편, 한구운은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가 강제로 칸막이 문을 열기 위해 발로 걷어차려던 찰나, 갑자기 청소부가 청소 카트를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고객님, 거긴 지금 수리 중이라 다른데 이용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지금 사용하실 건가요? 아니면 청소해
마치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는 듯, 뻔뻔한 모습에 윤혜인은 분노했다.“그쪽이 신경 쓸 거 아니에요.”“하….”이준혁은 화가나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지금 나 도발해? 화장실이라고 내가 널 못 건드릴 것 같아?”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이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직 교훈이 부족해?”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고개가 돌아갔다. 차가운 이준혁의 입술이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윤혜인은 당황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입안에 아까처럼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이번엔 입술을 깨문 건 이준혁이었다. 그는 벌하듯 윤혜인의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그녀는 따끔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고 차가운 손이 윤혜인의 몸을 제멋대로 훑고 다녔다.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몸이 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서서히 얼굴이 흥분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이준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손은 마치 본드를 붙인 듯, 떨어질 줄 몰랐다.자극이 서서히 뇌를 마비시켰다. 윤혜인의 몸은 이미 이준혁에게 길들어 있었다.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흥분이 전신에 퍼졌다. 윤혜인은 반항하던 것을 멈추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점점 입안을 헤집는 움직임이 깊어졌다. 이준혁은 구석구석, 윤혜인의 입안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쓸고 다녔다. 잠시 뒤, 키스는 멈췄지만, 그녀는 몸이 나른하게 풀려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당신, 정말 무례한 거 알아요? 이렇게까지 해서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뭔데요?”윤혜인은 이준혁한테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강제로 느껴야만 하는 흥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직도 모르겠어?”이준혁이 뚫어져라 그녀를 마주 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부드럽고도 촉촉한 촉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이래도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할 수 있어?”윤혜인은 오만한 그의 표정이 보기 싫어
순간 이준혁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키스 값으로 이 이상은 줄 수 없어요.”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짓밟는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지만, 먼저 시작한 것은 이준혁이었다. 중요한 자리에 참석한 것을 알고도 그녀를 화장실로 강제로 끌고 가 옷까지 찢어 놓았다. 윤혜인은 그저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었다.“윤혜인!”이준혁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겨우 이 정도로 화났어요? 대표가 되어서 인내심이 없으시네요.”윤혜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비꼬았다.“조언 하나만 할게요. 돈 벌고 싶으면 얼굴만 잘생긴 것으론 안 돼요. 성격부터 좀 죽이세요.”그러자 이준혁은 당장이라도 윤혜인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더 당당히 그와 마주 보았다.평소엔 제대로 그에게 반박조차 하지 못했지만, 오늘 드디어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윤혜인은 그 어느 때보다 속이 후련하고 짜릿했다.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기 시작한 지 한참, 이준혁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윤혜인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변기 뚜껑 위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윤혜인의 몸은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이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이건 결코 그녀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휘두를 무기를 상대에게 쥐여준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오늘은 여차저차 이렇게 끝났지만, 만약 이준혁이 정말 물불 안 가리고 화 냈더리면, 이렇게 간단히 끝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온갖 생각들과 불안들이 그녀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윤혜인은 애써 그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이준혁한테 진 빚을 갚은 다음, 유학 자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외국으로 가버리면, 이준혁이라도
잠시 침묵하던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죽었다고 해도, 아이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 이천수가 자꾸만 일 벌이는 거 보면 알 수 있어.”“그렇다면 당분간 말 잘 듣는 아들 흉내 내면서 좀 방심하게 만들어 봐. 너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숨기느라 꽤 애쓴 것 같은데, 이대로는 찾기 힘들어.” 김성훈의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분명 서로 연락하고 있을 거야.”이준혁이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가 계속해서 술을 퍼먹는 모습을 보고, 김성훈이 농담을 던졌다. “왜? 전처 마음 돌리기 쉽지 않나 봐?”그 말에 이준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러자 김성훈이 더 짓궂게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한두 번 거절당한 얼굴이 아닌데? 어디 내가 한번 팁 줘?”김성훈은 이준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표현한다는 것이 도리어 상대의 화를 불러일으켰을 게 뻔했다. 이준혁이 냉담한 표정으로 김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는 너는, 여자친구가 있긴 하고?”김성훈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이준혁의 말에 정곡이 찔렸기 때문이다. 남한테 비수 꽂는 건 이준혁의 특기였다. 이러니 윤혜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됐다. 그래도 친구가 고생하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그 태도부터 바꿔. 평소대로 하면 절대로 안 넘어와. 사람이 좀 져주는 맛도 있어야지. 맨날 그렇게 빳빳하게 구니, 누가 좋아하겠어?”일단 조언은 했지만, 김성훈은 그가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까지가 그의 역할, 결과는 이준혁의 몫이었다.이준혁은 술집을 나선 뒤, 회사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이혼한 뒤로, 익숙한 일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꾸만 윤혜인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다가 어느 날 진짜 못 버티면 납치라도 할 것 같아, 스스로 자제하고 있었다. 다음날 일찍, 이천수가 정유미를 데리고 이준혁을 찾아왔다.이준혁과 눈이 마주친 정유미는 순식간에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맞선에서 완전히 병풍 취급을 당한 이튿날,
이준혁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아버지가 하세요, 그럼.”그의 눈빛에 담긴 살벌한 기운을 느낀 이천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한두 번 본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이준혁은 항상 그에게만 차가웠다. 이천수는 이럴 때마다 자신만 외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준혁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지만,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그럴수록 이천수는 이준혁한테 정이 떨어졌다. 이준혁한테 밀려 해외로 밀려났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다시 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그래야 그의 또 다른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테니.“준혁아, 네가 날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우리 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지진 않았어.”이준혁이 정색하며 말했다.“말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세요!”“너!”이천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곤 다시 꾹 참았다.“결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유미랑 잘 좀 지내봐. 이번 에너지 프로젝트 성사하면, 회사도 큰 도약을 할 수 있을 거야.”이천수의 의도야 뻔했다. 일단 정유미를 통해 그녀의 가문과 이용해 목적을 이룬 다음, 여차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낼 생각인 것이다. 이준혁은 더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 인터폰을 통해 주훈을 불렀다.“손님 나가신다. 배웅해 드려.”결국 이천수는 주훈에 의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을 나온 그는 곧바로 정유미에게 다가가 말했다.“유미야, 준혁이 원래 성격이 좀 차가워. 하지만 네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저 녀석도 바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이, 너만 노력한다면 저 녀석도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야. 알겠지?”정유미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요, 아버님.”이천수는 정유미의 태도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이준혁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정유미같이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여자가 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이천수가 칭찬하며 덧붙였다.“그래, 착하네. 넌 내가 인정한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군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주훈에게 건네줬다.“차용증은 주 비서님께서 갖고있습니까?”주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6억 원이에요. 확인하시고 차용증은 저한테 돌려주세요.”주훈은 잠시 머뭇하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아니요. 주 비서님께서 처리해 주세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새 여자 친구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다고 바로 거절했다.정유미는 여전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주훈은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윤혜인을 데리고 차용증에 관한 일을 처리하러 갔다.차용증을 건네받은 후 윤혜인은 집으로 돌아갔다.이준혁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사무실에서 일했다.퇴근하고 나왔을 때 정유미는 이미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정유미 씨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죠?”주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유미 씨께서 계속 가지 않았습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주훈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정 씨네 가문은 지금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중인데 만약 정유미를 쫓아내면 다른 사람들은 이 씨네 가문과 정 씨네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고 주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주훈은 이내 물었다.“유미 씨를 깨울까요?”“아뇨, 문 열어줄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이준혁은 말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했다.“대표님.”주훈은 그를 불러 세우고 오후에 윤혜인이 돈을 갚으러 온 일에 대해 전했다.그는 카드를 이준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그럼 이 카드는?”사실 당시 이준혁은 윤혜인이 차용증을 가지러 오면 그저 줄 테니 돈을 갚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그도 윤헤인에게 설명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카드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주훈은 엄청 눈치 보였다.이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녹색 카드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버리세요.”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리고 떠났다.이준혁은 화가 잔뜩 난 채 차에 탔다. 위가 쥐어짜는 듯
윤혜인은 소파에 던져졌다. 생리통 때문에 그녀는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죠?”“네 생각엔?”이준혁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 이미 반쯤 다 헤쳐진 셔츠 속으로 뚜렷한 복근을 드러냈다. 길고 고운 손가락은 단추를 계속 풀고 있었다. 무엇을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미쳤어?”윤혜인의 감정은 격해졌다. “너 아직도 나를 잘 모르나 봐.”이준혁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그녀를 거칠게 덮쳤다. 그녀를 소파에 눕힌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과연 담이 있을가 없을가?”윤혜인은그에 의해 소파에 갇힌채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베어물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증오에 가득찬 말투로 내뱉었다. “이준혁, 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갑자기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었다. 다만 그 웃음은 은근히 자조적이었다. “그럼 네 말을 꼭 명심하고 절대 날 가만두지 마.”그는 그녀의 갸름한 턱을 단번에 베어물었다. 누가 봐도 그의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마크를 남기려는 듯했다. 이준혁은 그토록 그를 거부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보다 더 차갑고 모진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더니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남자친구를 찾는다더니 진짜로 남자친구를 찾았다. 일련의 서운함이나 미련도 없이 쿨하게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했다. 그녀는 지극히 독했다.이준혁은 그녀의 턱을 깨물고 자세히 훑어보더니 물었다. “네 돈은 그가 준거야? 6억원에 너를 가졌어?”윤혜인은 손바닥을 가볍게 꼬집으며 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화가 난 것은 알고 보니 6억원 때문이었다.그는 이 돈이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프게도 이미 이혼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하찮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분노로 가득찬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준혁 씨는 돈 한푼 쓰지 않고 날 가졌는데 지금 6억원원에 날 가졌다면
빨간 옷을 입은 무녀는 한 폐공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더니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소원이 모자를 쓰고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장은 텅 비어 있었고 방금 들어간 무녀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소원의 입과 코를 막았다.이상한 향기와 함께 소원은 발버둥 칠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바닥에 쓰러진 소원을 보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릇을 살피듯 소원의 얼굴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폈다.그렇게 한참 살피던 무녀가 옆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그래. 이 여자로 하지.”무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탈탈 털었다.“담아서 옮겨.”체격 좋은 남자가 소원을 포댓자루에 담더니 병아리 잡듯 잡아서 차에 던져넣고는 차 문을 닫고 출발했다.무녀는 밖에 세워진 차를 가리키며 다른 남자에게 지시했다.“조용한 곳 찾아서 태워버려.”남자가 즉각 움직이더니 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녀가 소원을 실은 차를 따라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무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더니 방향을 틀었다....저녁.별장으로 돌아온 육경한은 불이 환히 켜진 걸 보고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은 밥 먹었어요?”도우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모르세요? 사모님 어머니 보러 간다고 했는데.”“어머니요?”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사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직 돌아오시진 않았고요.”도우미가 대답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저녁 8시 반이었다. 요양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는 돌아와야 맞았다. 소원이 걱정된 육경한은 올라가서 유진을 한번 보고는 차를 끌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요양원에 도착해 전미영이 있는 병실로 가보니 전미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간병인이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대표님.”육경한은 쓸데없는 말을 생략하고 바로 이렇게 물었다.“소원은 병원
소종이 뜸을 들이더니 병원 보고서를 꺼냈다.“이것도 한번 보세요. 병원 진단서인데 진아연의 상처가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인위적인 상처일 수도 있다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진아연이 자살이라고 잡아떼는 바람에 다른 사람도 달리 방법이 없었죠.”육경한이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진아연이 쓸모가 없어지니까 버림을 받은 거야. 쓸모없는 사람을 왜 살려둬.”“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소종이 말했다.“계속 지켜봐. 배후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육경한이 명령했다. 잠재적 위험 요소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소종을 불러세웠다.“서현재는 조사해 봤어?”“서씨 가문 도련님이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어요. 조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사해 보니까 정말 놀랍더라고요.”소종이 말했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무녀를 하나 데려왔는데 독벌레 주술을 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대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생각도, 행동도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육경한이 입술을 앙다문 채 잠깐 고민했다.“변호사한테 서현재랑 연주의 결혼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더 이어갈 필요 없을 것 같아.”딱 봐도 서현재는 서씨 가문, 그리고 서진태에 의해 버려졌지만 사악한 서진태의 성격에 마지막까지 서현재를 이용해 먹으려 할 것이다. 육경한이 알아버린 이상 한시라도 빨리 육연주를 그 소용돌이에서 빼내야 했다.“지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리고.”소종이 잠깐 망설였다.“연주 아가씨 어머님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제가 대표님 회사에 안 계신다고 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그래, 알았어.”육경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연주를 단단히 혼내주려는 것 같았다.소종은 육연주가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다. 요물 같은 소원이 밉긴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육연주도 나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육연주의 뒤처리를 해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육연주의 성질머리
소원이 육경한이 든 컵을 앗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두유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아.”이에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소원은 영문이 뭔지 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찐빵을 가리켰다.“찐빵도 좀 먹어. 갓 찐 거라 따듯할 거야.”“그래.”육경한이 찐빵을 가져다 입에 넣더니 천천히 음미했다. 유진은 소원이 챙겨준 식단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비웠다.소원은 입맛이 없어 별로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다 먹었어.”그렇게 식탁엔 육경한 한 사람만 남았다.도우미가 정리하려고 와보니 식탁에 놓인 음식은 이미 다 먹어 치운 뒤였다. 육경한은 평소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스테이크 반 덩이면 끝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이 먹었다.역시 소원이 한 아침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 도우미들은 기분이 좋아져 얼른 식탁을 정리했다.육경한은 출근 전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소원이 유진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을 나섰다.차에서 기다리던 소종은 육경한이 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대표님, 그 여자가 준 음식 드신 거 아니죠?”소종은 육경한이 혹시나 소원에게 홀려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걱정했다. 육경한이 말이 없자 소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드셨어요?”육경한이 소종을 차갑게 쏘아봤다.“신경 꺼.”소종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대표님,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어차피 대표님도 오래 못 살 것 같은데 저도 빨리 나가서 죽게요.”육경한이 그런 소종을 힐끔 쏘아보더니 말했다.“무슨 헛소리야?”“제가 없는 말 했어요?”소종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독 탄 거 알면서도 드시는 걸 보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 아니에요?”“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잖아.”육경한이 차갑게 잘라버렸다.“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제가 이 두 귀로 들었는데.”소종이 대뜸 화를 냈다.“그 요물 같은 여자가 대답했다니까요.”“말 가려서 해.”육경한이
그녀를 옆에 남기려면 그게 뭐든 마셔야만 했다.소종은 진아연이 준 약이 만성 독약이라고 했다. 만성 독약이라면 아직 그녀와 아이 곁을 지킬 시간이 많다는 건데 육경한은 그걸로 족했다....이튿날.날이 어슴푸레 밝자마자 잠에서 깬 육경한은 옆자리가 비어 있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찾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 어디 갔어요?”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주방에서 아침 준비하고 있어요.”이를 들은 육경한이 살짝 넋을 잃었지만 도우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던데요?”소원이 너무 차가워 집안 분위기가 늘 우중충한 데다 유진까지 몸이 좋지 않고 말수가 적어 별장은 화기애애한 날이 거의 없었다. 하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큰소리로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소원이 직접 육경한에게 밥을 해주고 있으니 소원도 관계를 완화하려고 애쓴다는 의미 같았다. 도우미들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사랑하니 이 장면을 보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도우미들도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속으로 몰래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주방으로 들어간 육경한은 분주히 돌아치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꿈인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서서 소원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는데 마침 뒤돌아선 소원이 그를 발견했다.소원은 얼굴이 발그스름하고 광이 도는 걸 봐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육경한이 아직 잠옷을 입고 있자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씻어. 아침 먹자.”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소원과 유진은 이미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메뉴는 예전처럼 가짓수가 많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겼다.두유, 찐빵, 호박죽과 만두까지, 직접 만든 아침이라 몸에 좋았다.유진은 두유와 찐빵은 좋아했지만 호박죽과 만두는 별로 당기지 않는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엄마, 나 두유 마시고 싶어요.”이에 육경한이 두유를 한잔 따라주려 했지만 소원이 입을
차가운 연고가 손에 발라지니 너무 시원했다.소원은 잠깐 정신이 흐트러져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손가락만 쳐다봤다.육경한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발라주고는 연고가 빨리 말라 끈적이지 않게 손으로 부채질해 줬다. 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보며 부모님이 생각났다.부모님도 잉꼬부부였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애교를 부렸고 어디 부딪히거나 하면 바로 아빠한테 달려가 투정을 부리곤 했다. 아빠는 엄마를 공주처럼 아껴줬고 소원도 그런 화목한 가정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사람들도 소원의 부모님이 금실이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하느님도 참 매정하시지...’이런 생각이 들자 육경한이 열심히 부채질해 줘도 마치 칼바람과도 같아 소원은 홱 손을 거뒀다.“됐어. 이제 다 나았어.”순간 소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육경한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에 놓아둔 해장국을 가져오며 이렇게 말했다.“마셔. 뜨겁지 않아서 먹기 좋을 거야.”육경한은 색깔이 살짝 짙은 해장국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네가 끓인 거야?”“아니.”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줌마가 끓인 거야. 난 마무리만 했고.”“사실 나 안 취했어.”육경한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먹을 수 있어. 안에 약재가 들어 있어서 몸에 좋아.”소원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육경한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해장국을 들어 원샷했다. 육경한이 그릇을 비워서야 표정이 좋아진 소원이 그릇을 건네받았다.“설거지하고 올게.”“잠깐만.”육경한이 소원을 불러세웠다.소원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덤덤하게 말했다.“왜 그래?”“그릇 이리 줘.”육경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그릇을 꽉 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왜 그러는데?”“뭐가 왜야?”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화상 입어서 물 닿으면 안 되는 거 몰라?”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 괜찮아.”육경한이 그릇을 빼앗아 싱크대로 걸어가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릇을 헹궈냈다. 설거지를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