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혜인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고마워요, 선배.""지난번에 말했듯이, 선배라 부르지 말고 오빠라고 불러줘."한구운은 의사가 확실했지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혜인이 호칭을 정정해 다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오빠, 고마워요."한구운이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코너에 익숙한 검은색 벤틀리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윤혜인이 지금 고개를 돌린다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일부러 윤혜인을 불렀다."혜인아."윤혜인의 시선이 다시 한구운에게 고정되었다. "왜요?"그 사이, 벤틀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제야 한구운은 긴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이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어."“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회피했다. 그녀가 이 주제를 꺼린다는 것을 눈치챈 한구운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좀 돌아갈 순 있어도, 결국엔 다 잘될 거야."윤혜인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이준혁을 쫓아다니느라 많이 방황하고 상처도 입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왔으니, 좋아질 일만 남았다.반면, 검은색 벤틀리 안은 분위기가 살얼음판이었다. 주훈은 백미러를 통해 이준혁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주훈은 눈치 없는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괜히 쓸데없이 사모님이라고 말을 꺼내, 이준혁에게 이혼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게 했다. 물론 윤혜인 입장에선 당연한 요구였겠지만, 이준혁이 그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 윤혜인과 달리 이준혁은 억지로 한 이혼이었으니까. 주훈은 좀 전에 난감해하던 윤혜인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녀가 이준혁의 태도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했음을 눈치챘다. 주훈은 잠시 도로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무도 안 오면 이준혁에게 다시 윤혜인을 데리러 가자고 말을 꺼내려 했다. 이준혁은 체면 때문에 절대로 말을 못 꺼낼 테니, 이럴 때는 그가 눈치 빠르게
더 거절하기 미안했던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수락했다. 한구운이 떠난 뒤, 윤혜인은 근처에서 택시를 불러 곧장 묘지로 향했다. 큰 도시와 달리 시골 묘지는 바닥이 고르지 않았다. 할머니의 비석도 꽤 힘겹게 사람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그런 외할머니의 비석이 붉은 페인트로 뒤덮인 모습을 보자, 윤혜인은 화가 치밀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곧장 묘지 근처에 있는 집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빨간 페인트를 묘비에 뿌린 사람은 동네 건달이었는데, 외할머니가 진 빚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라 했다. 윤혜인은 처음 듣는 얘기에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비석 청소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간단한 청소도구를 빌린 뒤, 비석을 정성스레 원상복구시켰다. 청소하는 내내 몇 번이고 눈물이 터질 뻔했으나,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며 꿋꿋이 감정을 내리눌렀다. '외할머니, 제가 꼭 복수해 드릴게요.'정리를 마친 뒤, 윤혜인은 좀 전에 자초지종을 알려줬던 사람한테 50만 원을 주며 비석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연락처도 남겨놨다.그들은 흔쾌히 윤혜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인하 마을 자체가 그리 부유한 마을도 아니었고, 돈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다음, 그녀는 곧바로 사람을 수소문해 건달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런데 찾아가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부수려 한다며, 하인숙이 다급히 연락해 온 것이었다. 심지어 집주인까지 나타나, 그들과 함께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윤혜인은 놀라 헐레벌떡 그 집으로 달려갔다. 도착하니, 사람들은 물론 경찰까지 출동했는지, 사건 현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을 본 집주인이 안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내가 너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니? 너희 외삼촌이 먼저 팔겠다고 한 거잖아. 그리고 세 들어 살고 싶다고 해서, 세도 줬는데 너의 외삼촌이랑 같이 이런 사기를 쳐? 나는 이제 이 집 세 못 준다. 얼른 짐 빼고, 사람들한테 이 집이 너
차용증을 모두 종합해 보니, 총 4억, 20가구 정도 되었다. 윤혜인은 어렸을 적부터 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이들의 얼굴을 다 알진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 소박한 옷차림을 한 걸 봐서, 모두 성실히 일하면서 노후 자금을 모았을 게 예상됐다. "이번에 주산응이 사기 친 돈은 제가 갚도록 할게요. 하지만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으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경찰관이 옆에서 말했다. "이미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니, 같은 피해는 없을 것 같아요."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아이고, 다행이네. 처자, 그럼 얼른 우리 돈 내주게나."윤혜인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당장은 못 드려요. 저도 서울에 있는 집을 팔아야 현금 나와요."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집도 대출이 걸려 있었다. 그걸 다 갚고 팔면 약 3억 5천 정도 남을 게 예상됐다. 윤혜인은 우선 이걸로 급한 불부터 끄고, 남은 5천은 돈 버는 대로 갚겠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가 터졌다."그게 무슨 말이야! 돈 갚겠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집 팔아 주겠다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이때, 아까 그 건달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 같은 집 핏줄인데, 이 여자도 사기꾼 아니라는 법 있어?"그러자 사람들이 흥분하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찰도 막을 수 없었다. 정리할 필요를 느낀 윤혜인이 주변에 있던 한 판자 위로 올라서며 외쳤다."자, 싸우지 마세요."그러자 웅성거리던 것이 조금 잠잠해졌다."싸운다고 돈이 나오나요?"윤혜인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제가 주산응을 대신해 돈 갚겠다고 약속했으면, 무조건 지켜요."딱 봐도 시골 사람과는 다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발언하자,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이때, 한 주민이 외쳤다."그러면 정확히 언제 얼마를 갚을지 알려주세요."윤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확한 시간은 말씀 못 드려요.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갚도록 할게요."집이라는 것이 내놨다고 해서 당장 팔릴 거라는 보
열심히 따라왔더니, 상대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이준혁은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이제 주훈에게 사모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의 차에 올라타기까지 하다니,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경찰관이 둘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아는 사이에요, 모르는 사이에요?"이준혁은 끈질긴 경찰관이 상당히 거슬렀지만, 일단 짜증을 억눌렀다. 그는 윤혜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은 채, 당당하게 대답했다."남편이에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사고가 정지됐다. 그녀는 이준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그가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소용없었다."헛소리 좀 하지 마세요."양쪽에서 계속 상반된 대답이 들려오자, 경찰관이 또다시 물었다."이분 남편 맞나요?"윤혜인은 이준혁의 변덕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는 물론이고, 전에 술집에서 마주쳤을 때도 이준혁은 매우 냉랭한 태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편이라고 주장하다니, 정말 황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까지 경찰관이 떠날 것 같지 않아, 얼른 설명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전남편이에요."이준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애써 화를 참으며 경찰관에게 말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하지만 경찰관은 믿음이 안 가는지 계속 머뭇거렸다. 결국 참다 못한 이준혁이 자신의 신분증 번호를 불러주며 상황이 일단락 되었다. "앞으로 이쪽에 문제 생기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그제야 경찰관은 안심한 듯 아까 윤혜인을 공격했던 남자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준혁을 마치 구세주처럼 붙잡고 비켜주지 않았다. 좀 전에 그가 윤혜인의 남편이라고 자청했던 것을 그들도 들었기 때문이었다.윤혜인이 안 된다면, 돈 있어 보이는 남편한테라도 매달리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주훈이 미리 인출한 현금다발을 가지고 외쳤다."받을 돈 있으신 분들, 다 이쪽으로
처음엔 자꾸 미운 소리만 해대는 그녀의 입술을 막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키스였다. 하지만 촉촉한 입술에 닿는 순간, 이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행위 자체에 빠져들었다. 그리웠던 촉감, 그리웠던 체향, 그리웠던 온도. 정말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였다.반면, 윤혜인은 그의 행동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숨 막히는 키스를 피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발버둥 쳤지만, 매번 그의 힘에 눌려 강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입술에 머물던 그의 키스가 서서히 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턱, 목덜미, 이젠 쇄골까지, 윤혜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이준혁!"그녀가 기겁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하지만 이준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걸리적거리는 윤혜인의 블라우스를 풀어 젖히려던 찰나, 윤혜인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얼굴을 향해 따귀를 날렸다.짝 하고, 밀폐된 공간에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하지만 이준혁의 얼굴은 전혀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한 번으로 되겠어?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당하려면, 더 때려야 할 텐데.""당신 미쳤어? 법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당신, 나한테 이런 짓 할 자격 없어!"윤혜인은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윤혜인은 이 일로 그를 고소할 수도 있었다.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당신은 나한테 키스해서도, 이렇게 만져서도 안 되는 입장이라고!"그 말과 함께 윤혜인은 최대한 이준혁부터 멀어졌다. 그녀는 그가 스킨십을 해 올 때마다 자꾸만 좋았던 과거의 순간이 떠오르는 것이 싫었다."알겠어."너무나도 쉽게 돌아온 대답에 윤혜인은 잠깐 사고가 멈췄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말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대로는 못 끝내. 분명 이혼의 대가로 내게 주기로 한 거 있지 않았지? 설마 본인이 한 말 잊은 건 아니겠지?"윤혜인이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상처 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이준혁은 자신이 억지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지금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윤혜인의 눈가가 빨개지며 울음을 참는 듯 일그러지자, 이준혁은 마음이 흔들렸다.그가 해명하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면, 뭐?"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윤혜인의 눈가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하고 떨어졌다. 느닷없이 차에 데려오더니, 또 허락도 없이 강제로 키스를 밀어붙였다. 그것도 부족한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잠자리까지 요구하다니, 윤혜인은 서러운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어디 한번 해봐. 짓밟아보라고!"이준혁의 안색이 까맣게 죽었다.윤혜인이 차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외쳤다."할 테면 해보라고! 당신이 무슨 짓 하든, 난 굴복하지 않을 테니까!"그 모습을 본 이준혁이 다급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려 했지만, 거센 저항에 윤혜인을 놓치고 말았다."당신 정도면, 널린 게 여자일 텐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싫다는 여자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고!"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아무 여자나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윤혜인뿐이었다."정 여자가 없으면 차라리 그쪽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임세희나 찾아가. 그 여자라면 아주 두 팔 벌리고 당신을 환영할 테니까!"이 말을 이준혁은 물론 윤혜인 자신에게도 상처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분노가 이성을 마비된 상태,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상대의 마음을 난도질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 입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윤혜인은 기어이 문을 열어젖혔다. 밖엔 마침 처리 완료된 차용증 무더기를 들고 있는 주훈이 서 있었다.윤혜인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그에게 말했다."주 비서님, 혹시 펜 가지고 계세요?"주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에서 펜 한 자루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윤혜인은 주훈의 손에서 펜과 종이를 얻어
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구운은 그런 그의 표정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윤혜인만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윤혜인이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끄덕였다. 이준혁은 그런 한구운의 태도에 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난번에도 안 좋게 끝났는데, 이번에 또 이렇게 마주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끈질기네”마주 보고 있던 둘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그건 제가할 말 아닌가요?"한구운이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분명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행동가짐을 조심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네요."이준혁의 귀에 이혼했다는 말이 꽂혔다. 윤혜인과 그는 법적으로 이혼 도장을 찍긴 했지만, 끝난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준혁한테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한구운이 사정도 모르고 자꾸 끼어들려 하자, 분통이 터졌다.이준혁이 한구운의 멱살을 잡으며 위험하게 말했다."그럼 그쪽은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끼어드는 거지?"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지자, 윤혜인이 급히 이준혁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또 이준혁이 한구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이준혁 씨, 이거 놔요."그는 놓고 싶지 않았지만, 윤혜인의 눈빛에 담긴 긴장감에 어쩔 수 없이 한구운을 놔줬다.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구운은 안 되고, 질 안 좋다고 말했잖아. 이 남자랑 자꾸 엮이지 마."누구든 그의 눈에 거슬리면 다 나쁜 사람으로 둔갑하는 논리, 윤혜인은 이제 지긋지긋했다.이준혁이 계속해서 불쾌한 티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인간은 절대로 안 돼. 내가 분명히 말했어."윤혜인은 화가 나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널 위해 하는 말이야.""참 고맙네요."두 사람은 분명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구운은 왠지 모르게 연인 사이에 낀 병풍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다 못한 그가 윤혜인의 말을 끊고
윤혜인이 다급히 둘을 말리며 외쳤다."싸우지 마요! 그만들 하라고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준혁이 잠시 멈칫한 순간, 한구운이 또다시 도발해왔다."그쪽은 끝났겠지만, 나랑 혜인 씨는 이제 시작이야. 두고 봐, 혜인 씬 반드시 나랑 결혼하게 될 테니까."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또다시 도발에 넘어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이내 윤혜인이 달려오는 모습에 팔을 내렸다.그 틈을 타, 윤혜인은 얼른 이준혁을 밀치고 한구운을 부축했다."괜찮아요?"한구운은 마지막엔 공격을 멈췄지만, 이준혁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었다. 누가 봐도 한구운이 더 많이 다친 상황이었다. 그녀가 이준혁이 아닌 한구운을 걱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한구운이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괜찮아."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윤혜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정말 저 인간 선택할 거야?"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윤혜인은 빚지는 걸 유독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차까지 얻어 탔는데, 한구운이 그녀 때문에 이준혁한테 맞기까지 하자 윤혜인은 그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가 매우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이준혁 씨, 왜 이렇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저희 이혼한 사이잖아요. 함부로 제 사람한테 손대지 마세요."그 말을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한구운을 부축해 차로 향했다.이준혁은 자신이 마치 외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좌절과 무력감, 온갖 감정들이 그의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윤혜인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이준혁이 차갑게 말했다."윤혜인, 저놈 따라가면 우린 정말로 끝이야."이걸로 협박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멀어지는 윤혜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한 이준혁의 발버둥이었다.윤혜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둘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 아이를 잃은 순간 끝난 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