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할머니 때문에 혜인이 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나이가 있으신 할머니는 속상할 때면 눈물을 보이곤 했다.윤혜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예전에는 할머니가 저를 보호했으니 이제 내가 할머니를 보호하는 거죠.”주산응은 천하의 몹쓸 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할머니는 쓰레기를 줍고 분식을 해서 팔기도 하면서 모진 애를 썼다.그렇게 지금은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병으로 앓고 있어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할머니는 다른 건 괜찮지만 내가 가고 나면 널 돌봐줄 사람이 없고 너의 좋은 짝을 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될 뿐이야. 그래서 이대로는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겠어.”윤혜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런 말씀 하지 말아요. 할머니는 꼭 100세까지 문제 없어요. 게다가 우리 조만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잖아요.”흐릿했던 할머니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다시... 돌아갈 수 있어?”“당연하죠. 비록 이미 팔린 집이지만 누구도 살지 않고 있으니 세 들면 돼요. 그리고 이후에 다시 사들일 수도 있어요.”할머니는 기뻐하며 윤혜인의 손을 잡았다.“그래. 그래. 너무 좋아.”그러다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제 꿈을 꿨는데 네 아비가 자신을 보러 오라고 하더라.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할머니는 뭔가를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 안에는 평안 자물쇠였다.“이건 네가 어릴 적에 지녔던 거야. 너의 평안을 지켜줄 거야.”할머니가 하는 매 한마디는 모두 사후를 당부하는 것이었다.그녀는 할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할머니, 난 이미 결혼했어요.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이제야 말해요.”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윤혜인은 곧이곧대로 말했고 계약 결혼이란 말만 뺐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그는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에요. 그가 일
똑똑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안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침대에 다시 누워있는데 소원이 점심 먹자며 전화를 걸어왔다.식당에 도착한 윤혜인은 소원을 보고 흠칫 놀랐다.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짝뚝 귀밑까지 자른 소원 때문이었다.“머리 깎았어?”소원은 짧은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이상해?”“느낌이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예뻐.”소원은 선이 굵어서 머리가 길면 미인이고 단발이면 흑장미였다.정복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그녀의 저기압을 느낀 윤혜인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소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 누군가가 머리가 허리까지 오면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누구도 데려가지 않으니 자른 것뿐이야.”소원이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윤혜인은 알고 있었다. 설득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떼지 않았다.소원이 갑자기 물었다.“이준혁 출장 갔어?”멈칫하던 윤혜인이 물었다.“응. 네가 어떻게 알아?”소원은 육경한에 시달리느라 두 사람이 이미 화해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나 임세희 피드에서 봤어.”윤혜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애써 침착하며 물었다.“어떤 거?”소원은 휴대폰을 켜고 임세희의 피드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녀의 단독 셀카들이 있었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멘트에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 너무 따뜻.’위치까지 태그했고, 해외였다.시간은 이준혁이 전화를 끊어버린 30분 후였다.게다가 그녀 대신 트렁크를 옮기는 것이 이준혁임을 알 수 있었다.비록 옆모습이긴 했지만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두 사람을 아는 지인들이 댓글에 사이가 좋다며 부부냐고 부러워했다.임세희는 웃는 이모티콘으로 답했다.지인들 속에서 그들이야말로 한 쌍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칼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소원은 마음이 아팠지만 길게 아플 바엔 짧고 굵게 한번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혜인아, 세상에서
소원은 당황했다. 아무리 간이 큰들 약혼녀 앞에서 그를 유혹할 수는 없다.거기에 한 성깔 하는 진아연인데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 서야 그런 짓을 하겠는가?그녀는 발버둥 치며 아니라고 했다.“아니야. 제발 이러지 마. 약혼녀도 여기 있는데 보기라도 한다면...”하지만 육경한의 손은 이미 움직였다. 그녀의 옷을 밀려 올리고 고개를 숙인 그가 항웅큼 물었다.그녀는 그만 고개를 젖혔다.“창피한 건 알기 나 해?”소원은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이를 악물었다.“약혼녀가 화내면 어떡하려고?”“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소리쳐볼래?”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소원의 몸이 경직되었다.그것을 느낀 육경한은 담담하게 비꼬았다.“진짜 무서운 가 보네?”“여기서는 이러지 마. 제발.”소원은 애원했다. 하지만 남자의 비웃음만 돌아올 뿐이었다.“그럼 복도 갈까? 아니면 로비에서?”소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육경한은 진짜 그렇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거침없었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게다가 도덕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아무 말 없는 그녀의 모습에 육경한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육경한은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녀가 거울로 제일 굴욕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했다.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머리 왜 잘랐어?”머리가 허리까지 오면 된다고 했던 그 약속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지금 그녀는 그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고 절대 그녀를 데려갈 수 없었지만 상대가 먼저 약속을 깨는 것이 탐탁지 않는 육경한이었다.약속을 깬다 해도 그가 먼저이지 않는가?그만이 그녀를 발아래 짓누를 수 있다.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그를 도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흔들리고 있는 소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귀찮아서.”지금 이렇게 긴 머리를 가꿀 시간이 없었다. 당연히 이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그녀도 도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기대하고 싶지 않았고 망상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서였다.“귀찮?”육경한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진아연이 수그러들 리 없다. 그녀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다행히 견고한 문이었지만 이렇게 나아가다간 언젠가 뚫릴 것이다.문을 부수는 소리와 함께 육경한의 몸이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소원에게서 떨어진 그는 여전히 느릿한 움직임으로 바지를 입었다.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뒤에 소원의 상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육경한!”소원의 절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아니! 제발... 열지 마!”이 문이 열지면 마지막 남은 그녀의 존엄이 부숴지는 것이다. 그러면 서울에서 제일 천한 여자로 되고 만다.그녀는 괜찮다지만 그녀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다...육경한은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진아연이 욕설을 퍼부었다.“이 나쁜 새끼야!”그리고 걸상을 들어 육경한을 덮쳤다. 그는 걸상을 낚아채 한켠에 던져버렸다.진아연은 그의 가슴을 때리며 눈물을 흘렸다.“어떻게 나한테 이래요!”육경한은 웃으며 말했다.“재미 본 거야. 신경 쓸 게 못 돼.”진아연의 두 눈이 붉어졌다. 다른 여자는 다 돼도 저 여자만은 안 된다.그녀는 아까부터 알아봤다.그녀가 바로 육경한의 전 약혼녀이자 소씨 가문의 아가씨 소원이다.지금은 너무 초라해져 한 마리 개보다도 못한 처지로 몸을 팔고 다니지만 말이다.그녀는 육경한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손을 높이 들었다.그리고 ‘쨕쨕’ 소원의 따귀를 때렸다.“네가 감히 사람을 화장실로 유혹해? 소씨 가문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왜 이 모양인 거야!”“아니. 그들은 아니야...”소원은 터진 입술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반박했다.그녀는 더러운 몸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깨끗한 분들이다.성실하게 사업을 했지만, 망한 것뿐이다.모두 그녀 탓이다. 전부 그녀 탓이다...“인정도 안 해!”진아연은 소원의 옷을 찢었다. 마치 개를 대하듯 있는 힘껏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고 또 쳤다. 그녀가
소원은 죽을 듯이 일을 벌인 육경한을 노려보았다.남자는 입을 놀리며 글자를 뱉었다.“안 가고 뭐해?”한 글자 한 글자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었다.그 어떤 폭행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갑자기 몸을 떨던 그녀는 겁에 질려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아니... 그럴 수 없어...”그녀는 실성한 듯 바닥을 기어서 남자의 발을 잡고 애원했다.“넌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그녀의 말에 진아연의 표정이 확 굳었다.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무슨 낯으로 과거를 말하는 거야. 서울에서 너의 소씨 가문이 비열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는 있어. 내 말을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네가 선택해.”소원이 어이없이 웃었다.자유?소씨 가문이 시장에서 퇴출당하고 거액의 빚을 떠안으라는 거야?그렇게 계산한다면 소원은 꽤 가치가 있는 몸이었다.그녀는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깨를 편 그녀는 여전히 같은 말을 했다.“육경한, 난 너에게 빚지지 않았어.”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때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진짜 소원의 말처럼 그랬던 걸까?소원이 진짜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면?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저 한순간일 뿐이었다.육경한은 강제로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소원의 어느 한마디도 믿지 않으려 했다.소원이 말했던 일에 대해 조사한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조사했지만 하나도 일어난 적 없었다.그는 소원이 악인이라고 생각했다. 소원은 반드시 악인이어야 했다. 아니면 지금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진아연은 소원을 널리 알리려는 생각을 그만뒀다.그녀가 알려질수록 진아연에게는 불리할 것 같았다.그때 그 일을 제삼자가 알지 못할 거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소원의 어깨를 밟으며 말했다.“이 년이 아직도 내 앞에서 감히 내 남자를 건드리
저녁이 되어서야 이준혁의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내일 오는 거예요?”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아니.”생각하던 윤혜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오지 않는 이유가 임세희 때문인가요?”이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누가 말한 거야?”윤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한가?임세희는 온 세상에 알리고 있었는데 그만이 멍청하게 모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침묵을 지켰다.그러다 이준혁이 정적을 깼다.“세희가 여기에 온 건 맞아.”“하지만 날 찾으러 온 건 아니고 일 보러 온 거야. 각자 할 일 하며 접촉하지 않았어.”“공항에 마중 갔더군요.”“여기는 복잡하기도 하고 혼자 몸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어.”‘신경 쓰다’.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이지만 몸에 밴 습관이다.윤혜인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호흡조차 힘겨웠다.멈칫하던 이준혁이 말을 이었다.“여보, 왜 이렇게 질투하는 거야?”“그럼 묻지 않을게요.”윤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또 화난 거야? 그러지 마. 요즘 눈을 제대로 붙인 적이 없어.”윤혜인은 이 말이 너무 거슬렸다. 그는 마치 그녀가 일을 만들어 트집을 잡는 것 같이 표현하고 있었다.부부는 서로 성심성의를 다해야 하지 않는가?해외에 있으며 그녀의 전화를 씹고 임세희와 함께 있는 모습까지 타인에게서 들어야 했다.그녀에게는 왜 기분이 나쁠 자격도 없단 말인가?윤혜인은 진지하게 말했다.“이준혁, 난 트집 잡은 적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솔직하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날 기만하지 말아요. 헤어진다고 해도 아름답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윤혜인의 말투는 그리 듣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 났고 어떻게 할머니께 설명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같은 공간에 머무는 두 사람이기에 임세희만 마음먹으면 둘은 반드시 접촉할 것이다.전 세계가 모두 알 때까지 혼자 멍청이가 되
의사가 말했다.“어르신의 최신 건강 검진 보고서에 따르면 전신이 무너져 있는 상태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보시면 돼요. 이런 상황에서 병원에 머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집으로 모시고 최대한 마음속의 소원을 이뤄드리세요.”병실을 나선 윤혜인은 얼빠진 상태였다.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그녀는 가까운 의자를 찾아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그때 간병이 초췌한 그녀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윤혜인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줌마, 저 대신 번호를 눌러주세요.”이준혁의 번호는 단축키 ‘1’에 저장되었다.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그녀의 모습에 간병인은 깜짝 놀라며 휴대폰을 받아들여 1을 꾹- 눌렀다.신호음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다시 한번 걸어보지만, 여전히 닿지 않는다.간병인은 윤혜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또 걸어요?”“네.”윤혜인은 고집스러웠다.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녀는 지금 그가 필요했다.그녀의 손을 잡고 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려야 했다.세 번째 연결음이 흘러나오고 전화는 끝내 연결되었다.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래?”지금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그녀가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돌아오면 안 돼요? 할머니가...”그때 연약한 여자의 목소리가 윤혜인의 말을 잘랐다.“오빠...”윤혜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신, 임세희랑 같이 있는 거예요?”“그래, 세희가-”“이준혁!”윤혜인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거기는 지금 밤인데 같이 있단 말인가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병상에 누워있는 임세희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돌아가면 다 설명할게.”이윽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준혁은 전화를 움켜쥐고 다정하게 다독
윤혜인은 눈물을 머금고 허탈하게 웃었다.“이준혁 당신에게 우리 할머니가 중요하고 않고를 떠나 내가 중요하지 않지 않은 거지?”망설일 필요도 없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이준혁은 더 이상 그녀의 행패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이게 재밌어?”순간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 고통으로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윤혜인의 생존 본능이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할머니에게 아쉬움을 남겨드릴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애원했다.“괜히 그러는 거 아니고 할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해요...”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은 전화상으로는 홀로 남아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내심 있게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할머니를 뵈러 간다고 했으니 꼭 지킬 거야. 넌 얌전히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면 돼.”윤혜인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래야만 울면서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거의 실성하며 외쳤다.“그저 응석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진짜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날 믿지 않는 거죠?”“믿지 않는 게 아니야. 세희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어제부터 심해져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니까. 난 절대 그녀를 홀로 해외에 남겨 둘 수 없어.”강경한 이준혁의 태도에 윤혜인은 절망했다.그녀가 자신을 너무 크게 본 것이 맞았다.이준혁에게는 임세희가 하늘이었다.외할머니가 위독하여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준혁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잘못 믿었던 것 같다.“혹시 그녀가 그저 병으로 당신을 잡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헛소리 그만 해. 세희가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자신의 생명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바보란 걸 몰랐나요? 그것은 당신이 믿어줬기 때문이죠. 항상 그 핑계로 당신을 잡고 있었잖아요. 그럼 왜 매번 당신 앞에서만 아프고 다른 사람 앞에선 멀쩡한지 생각은 안 해 봤나요?”윤혜인
소종을 바라보던 그녀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소 비서님, 별장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신가요? 제가 지난번에 별장에서 귀걸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같이 타고 가도 될까요?”소종은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그 별장은 유진이가 들어가기 전에도 방민아가 종종 방문해 육경한과 식사를 함께했던 곳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별장에는 방민아를 위해 마련된 전용 객실도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방민아와 육경한이 여전히 각방을 쓰고 있는지 말이다.보통 성인 남녀라면 서로 끌리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은 다소 이상했다.방민아는 외모도 준수했고 몸매나 분위기 역시 상위권이라 할 만했다. 특히 그녀 특유의 재벌가 아가씨 같은 기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그런데도 육경한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심지어 자신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여자를 찾는 편인데 육경한은 아무런 욕구도 없는 듯했다.그래서 한동안 소종은 육경한이 혹시 어떤 신체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예전 소원과 함께할 때 육경한의 표정은 가장 매력적으로 빛났고 항상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방민아와 함께한 뒤로는 그런 열기가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별장에 도착한 뒤 소종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진이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방민아도 뒤따라 올라왔는데 그녀가 귀걸이를 찾으러 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자 소종은 퍽 난감했다. 결국 그가 물었다.“민아 씨, 귀걸이는 안 찾으시나요?”그러자 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아이를 좀 보고 싶어서요.”소종은 순간 멈칫했다. 육경한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방민아가 아이를 봐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이전에 방민아를 데리고 아이를 보러 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이런 소종의 마음을 알아채서인지 방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경한 씨가 전에 저더러 아이 봐도 된다고 했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경한 씨한테 전화해서 확인하셔도 돼요. 아니면
소종 뒤로 방민아가 따라왔다. 육경한이 걱정되었던 방민아는 소종에게 무슨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리라고 했지만 소종은 차마 방민아에게 육경한이 소원을 구하러 갔다고 말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방민아는 몰래 소종의 뒤를 따라 병원에 온 것이었다.방민아를 발견한 순간 소종의 안색이 변하더니 잽싸게 앞으로 다가가 말리려는데 방민아가 소종의 손을 뿌리치더니 가져온 외투를 육경한에게 걸쳐줬다.“경한 씨, 도대체...”방민아는 육경한의 얼굴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흙과 피가 마치 물감처럼 남자의 얼굴에 흩뿌려져 있었고 옷도 엉망진창이었다. 이 정도로 망가진 육경한은 방민아도 처음이라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타올랐다. 다른 여자를 위해 이렇게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다만 밖으로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방민아는 솟구쳐 올라오는 질투를 꾹꾹 참아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경한 씨, 일단 상처부터 처리해요. 이마가...”방민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이마는 어쩌다 다친 거예요?”육경한이 그제야 방민아를 발견한 듯 그쪽을 힐끔 쳐다봤다.“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육경한의 표정이 어딘가 언짢아 보였다. 방만아는 그런 육경한을 보며 기분이 상했지만 결국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경한 씨가 걱정돼서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육경한이 자기를 버리고 간 게 소원을 위해서였다는 걸 알고 방민아의 가슴에 난 틈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 전에 육경한과 약속한 것처럼 유명무실한 결혼은 싫었다. 소원은 마치 가시처럼 육경한의 가슴에 박혀있었고 방민아가 아무리 빼내려 해도 빼지지 않았다.“여기 남아있을 필요 없으니까 이제 돌아가요.”간단한 한마디였지만 뜻은 명확했다.“하지만... 나는 경한 씨 옆에 있고 싶어요...”방민아는 너무 서러웠다. 육경한의 약혼녀는 분명 방민아인데 그가 다른 여자 곁을 이렇게 지키는 게 너무 싫었다.“방민아 씨, 돌아가요.”육경한이 성까지 붙여서 차갑게
육경한은 지금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힘껏 안지철의 얼굴에 펀치만 계속 날렸다. 그렇게 이가 전부 부서진 안지철은 잘못 삼켰다가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소원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육경한.”육경한의 주먹이 안지철의 얼굴에서 1cm 떨어진 곳에 멈췄다. 소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육경한의 얼굴에는 아까 돌에 맞아서 흘린 피와 안지철을 때리면서 튄 피가 섞여 유난히 음침해 보였다.이에 소원은 전에 호러물에서 봤던 얼굴 없는 남자가 떠올랐다. 육경한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아무 표정 없이 소원을 바라봤다.“왜? 이 자식 손을 빌려서라도 나 무너트리게?”이 말에 소원은 말문이 막혔다. 안지철이 죽으면 증인도 사라지게 되니 소원은 안지철이 죽는 게 싫었다. 유시연도 찾을 수 없는 마당에 안지철이라도 살아 있어야 유진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소원은 육경한에게 안지철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지철이 나쁜 건 맞지만 법률로 제재해야지 육경한이 사적으로 재판해서는 안 되었다.육경한은 늘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생각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소원이 원하는 건 정의로운 재판밖에 없었다.안지철은 지은 죄는 법원에서 판결하는 게 맞았다.“육경한, 너...”소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부어올라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는 안지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당신이 그 사람이야?”육경한이 안지철을 힐끔 쳐다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는 얼굴이 부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기에 육경한의 살기등등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당... 당신이 감정을 맡긴 사람이네. 당신이 그 사이코패스였어?”안지철은 그제야 육경한이 왜 자기를 폭행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긴, 아무 병도 없는데 샘플을 바꿔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안지철은 육경한이 어느 정도로 미쳤는지 모르지만 그 약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분노
하지만 소원은 그런 육경한의 마음을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여러 감정이 뒤섞이자 육경한은 감정을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모든 걸 망가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쳐들었다.육경한의 정신질환은 점점 심해져 환각까지 보였다. 앞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안지철이 아닌 다른 무서운 얼굴을 한 괴물로 변했고 육경한을 먹어버리려는 듯 몸을 비틀며 육경한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아악...”육경한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더니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그 고함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안지철은 육경한이 어딘가 매우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몸 안에 숨어있던 악마가 깨어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설마 이 사람...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잔꾀가 생각난 안지철이 몰래 돌멩이 하나를 줍더니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육경한의 머리를 공격했다.“육경한.”경사 위에 앉아 있던 소원이 갑자기 이렇게 불렀다. 소원도 육경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정신질환이 곧 도질 것 같은 상태처럼 보였다.육경한은 이성을 잃으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고 잡히는 족족 죽일 정도로 쥐어팼다. 소원이 유진을 데려오려는 것도 이런 원인이었다. 육경한의 정신 상태로는 아이를 돌보기 힘들었다.연약한 유진은 육경한에게 한 입 거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소원은 안지철이 육경한을 죽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육경한이 쓰러지면 안지철은 공격의 화살을 소원에게 돌릴 것이다. 눈이 돌아가 버린 이상 한명이든 두 명이든 닥치는 대로 죽일 게 뻔했다. 게다가 소원의 몸으로 이성을 잃은 안지철을 당해내긴 무리였다.소원의 고함에 육경한이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은 안지철이 휘두른 돌을 그대로 맞았고 순간 잘생긴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육경한은 그 공격에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안색은 피로 물든 얼굴 때문에 더 음침해졌다.안지철은 육경한의 눈빛에 놀라서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돌로 내리찍어도 아무 반응
안지철이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알고 보니 육경한이 시계 판이 위로 향하게 시곗줄을 손바닥에 움켜쥔 채 안지철의 코를 가격한 것이다. 한 번의 펀치 만에 안지철은 코피가 터졌고 코뼈가 부러지면서 코가 삐뚤었다.몇십억을 호가하는 비싼 시계라 그런지 펀치를 날려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아악... 너 미쳤어?”안지철은 코를 부여잡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육경한이 이 정도로 매섭게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펀치를 날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펑.둔탁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고 안지철의 광대뼈가 부러졌다. 안지철은 그제야 이 남자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실감하고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부여잡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원...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게 돈이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때리지만 않으면... 흑흑...”육경한이 웃음을 터트렸다.“나 돈에는 관심 없어. 그냥...”“그냥 뭐... 원하는 게 뭐야. 다 줄게.”안지철은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살아만 있다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돈이야 언제든 다시 벌 수 있기에 그때 가서 다시 원하던 삶을 살면 되지만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목숨을 지켜야 했다.육경한은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어떡하지? 내가 관심 있는 건 네놈 목숨밖에 없는데.”안지철은 이 말이 너무 섬뜩해 바지에 지릴 뻔했다. 원하는 게 목숨밖에 없다니, 무서워도 너무 무서운 남자였다.“저기요.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저랑 원수진 거 없잖아요. 기껏해야 저 여자 건드린 것밖에 없는데 사실 아무 짓도 못 했고 겨우 뺨 두 대 때린 것뿐이에요.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요.”“겨우 뺨 두 대 때렸다?”육경한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뭔데 감히 손을 대?”이 말에 안지철은 심장이 너무 벌렁대 숨 쉴 엄두조차 나지 않아 그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어르신, 아니 형님, 하느님, 부처님, 제가 죽을죄를
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옷을 걸치지 않으면 돌아가서 또 세게 아플 것이다.육경한은 유진에게 감정이 없었기에 소원까지 죽으면 육경한의 오락가락하는 성격에 힘든 건 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소원은 방민아가 법원 앞에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랑에 미쳐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거나 범죄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에 소원은 그 옷이 육경한의 옷인 걸 알면서도 추위를 이겨내고파 얼른 챙겨 입었다.육경한은 곁눈질로 그런 소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당기더니 아래로 내려가 진흙을 뒤집어쓴 안지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육경한의 눈빛에 안지철은 심장이 철렁했다. 몸집이 크고 체격이 빼어난 육경한은 승냥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안지철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안지철은 평소 거의 일반인들과만 소통했고 이런 거물은 거의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눈빛이 닿기만 해도 온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는 느낌이 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감히 내게 발길질을 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당장 사람 불러서 너 죽인다.”안지철이 으름장을 놓으며 용기를 북돋으려 했다. 주로 연락하는 소종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육경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안지철은 소원이 큰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소원을 도와주러 온 사람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아우라가 남다를 뿐 종이호랑이일지 모른다고, 그러니 상대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지레 겁을 먹지 말자고 다짐했다.오늘 이 여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따 베일에 싸인 그 사람에게 연락해 처리해달라고 하면 된다. 이 일이 새어나가면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모든 죄를 안지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면 안지철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지철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나를 죽여?”육경한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고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독수리와도 같은 부리부리한 눈은 모든 걸 뚫어버릴 것처럼 매서웠는데 비바람이 몰아치
벨트를 한쪽에 버린 안지철이 허겁지겁 소원 위로 올라탔다. 소원이 힘껏 저항하며 안지철의 아랫배를 걷어차려 했지만 안지철이 소원의 행동을 간파하고는 옆으로 피하더니 소원의 귀싸대기를 힘껏 후려갈겼다.풉.힘이 어찌나 세게 들어갔는지 소원은 귀싸대기를 맞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피를 한 모금 왈칵 토해냈다. 원래도 몸이 허약했는데 귀싸대기까지 맞자 반항할 능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안지철이 더러운 손으로 옷을 벗기려 하자 너무 역겨워 토할 것 같았지만 먹은 게 없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당신 곱게 죽지는 못할 거야.”소원이 매서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안지철이 코웃음을 치더니 막무가내로 위에 올라탔다. 소원이 살기 어린 눈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안지철의 귀를 힘껏 깨물었다.“아악. 미친X이 이거 안 놔?”안지철이 귀를 억지로 빼내려는데 소원의 입은 마치 볼트를 꽉 끼워서 맞춘 것처럼 단단했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사이 안지철의 귀가 일부 뜯겨 나갔고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우스웠다.“젠장. 이런 젠장.”안지철이 귀를 부여잡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극심한 고통에 안지철은 다시 소원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뱉어. 안 뱉어?”소원이 물어뜯은 건 연골이었기에 제때 붙이면 흉터는 남겠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소원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더니 물어뜯었던 살점을 경사 아래로 뱉어냈다.안지철은 그렇게 잘려 나간 귀가 강에 빠져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철썩. 철썩.안지철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원의 볼을 마구 내리쳤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안지철은 소원의 목을 힘껏 조르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고아댔다.“미친X이, 지금 당장 죽여줄게.”소원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소리도 점점 미약해졌다. 그렇게 숨이 꺼져가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 올라탔던 안지철이 그대로 경사를 구르며
소원이 절망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하. 드디어 찾았네.”안지철도 금방 따라서 나왔다. 사방이 뻥 뚫려있어 피할 수가 없었던 소원은 경사를 따라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빨리 걷지는 못했고 그렇게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안지철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젠장.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거야?”안지철이 소원을 힘껏 바닥에 패대기쳤다.우두둑.소원은 무릎뼈가 부서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빌어먹을 X이, 아까 일부러 내 손 찢어놓은 거지. 맞아, 아니야?”안지철은 어디서 천 쪼가리를 찾아 손에 칭칭 감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그 손을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소원은 어이가 없었다.“구해준 은혜를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그러다 천벌 받아.”“천벌? 나쁜 짓을 얼마나 했는데 받을 거였으면 진작에 받았지. 아직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잖아?”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늘이 번쩍했다. 놀란 안지철이 입을 꾹 닫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개였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먼 곳에 떨어졌다.“하하하하.”안지철의 웃음이 점점 더 방자해졌다.“봤지? 봤지? 나한테는 절대 안 떨어져.”소원이 한마디 덧붙였다.“아직 좋아하긴 이르지. 때가 안 됐을 뿐이야.”안지철이 몽둥이로 소원의 무릎을 꾹 눌렀다.“아아.”소원이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안지철은 매서운 표정으로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그 입만 살아서.”그때 번개가 다시 하늘을 갈랐다. 하얀 섬광이 빗물에 젖은 소원의 얼굴과 비춤과 동시에 흠뻑 젖은 옷 아래로 드러난 굴곡진 몸매도 비췄다.이에 사악한 마음을 품은 안지철이 생각을 바꾸고 몽둥이로 소원의 옷을 이리저리 헤쳤다.“몸매가 죽여주는데.”안지철이 변태 같은 눈빛으로 소원을 쳐다봤다. 그저 때는 몰랐는데 빗물에 젖으니 소원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너무 섹시했다. 뽀얗고 말한 속살은 유시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했고 매혹적인 얼굴까지 더해지자 요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처에 빗물이 들어가자 너무 아팠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원래도 좋지 않은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힘까지 다 소모해 진흙 범벅인 나무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존재감을 줄이려 했다.졸음이 쏟아져 잠깐 눈을 붙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불규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야심한 밤에 이런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안지철밖에 없을 것이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소원의 발자국이 다 지워졌기에 누가 와서 구해줄 거라는 희망은 버려야 했다.큰비는 수색에 어려움을 더했고 윤혜인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는다 해도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소원은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꼭 안았다. 그래도 혹시나 안지철에게 들킬까 봐 미약한 숨소리마저 꾹 참았다.아무리 다쳤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힘을 이겨내긴 어려울뿐더러 소원은 환자였기에 안지철에게 위치를 들키면 그냥 죽기를 납작 없이 기다려야 했다.아니나 다를까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몽둥이로 숲을 가르는 소리까지 들렸다.“이제 그만 나오지?”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안지철의 목소리가 비 내리는 숲속에서 더 섬뜩하게 들렸다.“여기 뱀도 있고 들짐승도 많은데 동물에게 뜯겨 죽는 것보다는 얌전하게 나오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내가 한 번에 깔끔하게 보내줄게. 헤헤.”안지철이 휘파람을 불며 이렇게 말했다. 웃는 소리도 어쩜 저렇게 섬뜩한지 의문이었다.소원은 점점 가까워지는 안지철의 목소리에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안지철은 랜턴까지 들고 있었기에 옆으로 지나가면 무조건 그녀를 발견할 것이다.끼고 있던 팔찌가 달랑거려 소리가 나지 못하게 잡고 있던 소원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에 끼고 있던 팔찌를 돌과 함께 먼곳으로 뿌려 소리가 나게 했다.가까이 다가오려던 안지철이 그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자, 이제 곧 찾아갑니다.”소원은 안지철의 걸음 소리가 돌을 던진 방향으로 가는 걸 들었다. 이 팔찌는 유진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