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어서야 이준혁의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내일 오는 거예요?”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아니.”생각하던 윤혜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오지 않는 이유가 임세희 때문인가요?”이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누가 말한 거야?”윤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한가?임세희는 온 세상에 알리고 있었는데 그만이 멍청하게 모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침묵을 지켰다.그러다 이준혁이 정적을 깼다.“세희가 여기에 온 건 맞아.”“하지만 날 찾으러 온 건 아니고 일 보러 온 거야. 각자 할 일 하며 접촉하지 않았어.”“공항에 마중 갔더군요.”“여기는 복잡하기도 하고 혼자 몸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어.”‘신경 쓰다’.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이지만 몸에 밴 습관이다.윤혜인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호흡조차 힘겨웠다.멈칫하던 이준혁이 말을 이었다.“여보, 왜 이렇게 질투하는 거야?”“그럼 묻지 않을게요.”윤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또 화난 거야? 그러지 마. 요즘 눈을 제대로 붙인 적이 없어.”윤혜인은 이 말이 너무 거슬렸다. 그는 마치 그녀가 일을 만들어 트집을 잡는 것 같이 표현하고 있었다.부부는 서로 성심성의를 다해야 하지 않는가?해외에 있으며 그녀의 전화를 씹고 임세희와 함께 있는 모습까지 타인에게서 들어야 했다.그녀에게는 왜 기분이 나쁠 자격도 없단 말인가?윤혜인은 진지하게 말했다.“이준혁, 난 트집 잡은 적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솔직하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날 기만하지 말아요. 헤어진다고 해도 아름답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윤혜인의 말투는 그리 듣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 났고 어떻게 할머니께 설명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같은 공간에 머무는 두 사람이기에 임세희만 마음먹으면 둘은 반드시 접촉할 것이다.전 세계가 모두 알 때까지 혼자 멍청이가 되
의사가 말했다.“어르신의 최신 건강 검진 보고서에 따르면 전신이 무너져 있는 상태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보시면 돼요. 이런 상황에서 병원에 머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집으로 모시고 최대한 마음속의 소원을 이뤄드리세요.”병실을 나선 윤혜인은 얼빠진 상태였다.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그녀는 가까운 의자를 찾아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그때 간병이 초췌한 그녀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윤혜인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줌마, 저 대신 번호를 눌러주세요.”이준혁의 번호는 단축키 ‘1’에 저장되었다.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그녀의 모습에 간병인은 깜짝 놀라며 휴대폰을 받아들여 1을 꾹- 눌렀다.신호음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다시 한번 걸어보지만, 여전히 닿지 않는다.간병인은 윤혜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또 걸어요?”“네.”윤혜인은 고집스러웠다.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녀는 지금 그가 필요했다.그녀의 손을 잡고 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려야 했다.세 번째 연결음이 흘러나오고 전화는 끝내 연결되었다.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래?”지금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그녀가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돌아오면 안 돼요? 할머니가...”그때 연약한 여자의 목소리가 윤혜인의 말을 잘랐다.“오빠...”윤혜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신, 임세희랑 같이 있는 거예요?”“그래, 세희가-”“이준혁!”윤혜인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거기는 지금 밤인데 같이 있단 말인가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병상에 누워있는 임세희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돌아가면 다 설명할게.”이윽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준혁은 전화를 움켜쥐고 다정하게 다독
윤혜인은 눈물을 머금고 허탈하게 웃었다.“이준혁 당신에게 우리 할머니가 중요하고 않고를 떠나 내가 중요하지 않지 않은 거지?”망설일 필요도 없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이준혁은 더 이상 그녀의 행패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이게 재밌어?”순간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 고통으로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윤혜인의 생존 본능이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할머니에게 아쉬움을 남겨드릴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애원했다.“괜히 그러는 거 아니고 할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해요...”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은 전화상으로는 홀로 남아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내심 있게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할머니를 뵈러 간다고 했으니 꼭 지킬 거야. 넌 얌전히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면 돼.”윤혜인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래야만 울면서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거의 실성하며 외쳤다.“그저 응석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진짜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날 믿지 않는 거죠?”“믿지 않는 게 아니야. 세희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어제부터 심해져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니까. 난 절대 그녀를 홀로 해외에 남겨 둘 수 없어.”강경한 이준혁의 태도에 윤혜인은 절망했다.그녀가 자신을 너무 크게 본 것이 맞았다.이준혁에게는 임세희가 하늘이었다.외할머니가 위독하여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준혁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잘못 믿었던 것 같다.“혹시 그녀가 그저 병으로 당신을 잡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헛소리 그만 해. 세희가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자신의 생명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바보란 걸 몰랐나요? 그것은 당신이 믿어줬기 때문이죠. 항상 그 핑계로 당신을 잡고 있었잖아요. 그럼 왜 매번 당신 앞에서만 아프고 다른 사람 앞에선 멀쩡한지 생각은 안 해 봤나요?”윤혜인
이 한마디에 조금 남아있던 이준혁의 상냥함이 사라졌다.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한두 번은 그럭저럭 맞춰줄 수 있지만 지금 윤혜인은 도가 너무 지나치다.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게다가 이런 식의 협박을 제일 싫어하는 이준혁이었다.그는 드디어 폭발했다.“윤혜인! 그만 유치하게 굴어! 헤어지잔 말로 감히 날 겁주려는 거야?”윤혜인의 마음은 이미 죽어서 그의 말은 전혀 자극이 되지 않았다.마음속의 그 환한 빛이 영원히 저물었다.“이번엔 진짜예요. 전에는 내가 눈이 멀어서 당신을 믿었어요.”“혜인이 너!”이준혁은 휴대폰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는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어!”“뚜뚜뚜-”상대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준혁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쾅!”휴대폰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주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방금 대표님과 사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그는 조심 망설이다가 물었다.“제가 한번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요?”“됐어!”이준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그 사람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보고 하지 마!”그는 그녀에게 너무 오냐오냐해서 그녀가 이렇게 막무가내라고 생각했고 뭐만 하면 헤어지자는 말과 이혼하겠다는 말로 그를 위협하는 것 같다.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때까짖 내버려 둘 셈이었다.전화를 끊은 윤혜인은 조금 평온해 보였다.하지만 그저 겉면일 뿐이다.할머니는 한시가 급하다. 그녀는 반드시 당장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단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할머니의 꿈을 이루어드려야 한다.그때 간호사 한 분이 다가오며 말했다.“304호 환자 가족분이시죠?”워낙 예쁜 미모여서 한두 번 스친 사이지만 간호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요?”간호사는 연민의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이렇게 예쁜 여자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간호사가 말했다. “저기 누군가가 찾고 계시던데 얼른 가보세요.
바닥에 쓰러진 할머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을 닦을 기력조차 없었던 할머니는 혼잣말했다.“우리 혜인이는 때리지 말아. 너희가 말한 그런 애가 아니란 말이다. 안 돼...”그때,윤혜인의 심장은 칼에 찔린 듯했다.그리고 막무가내로 난도질당했다.왜...왜 할머니에게 그러는 거야...앞에 선 뚱뚱녀는 할머니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늙은이 잘 들어. 당신 손녀는 남의 남자를 넘보는 아주 고약한 년이야. 우리는 하늘을 대신해 따끔하게 교육하는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은 그 여자에게 덮쳤고 그녀의 팔을 세게 물었다.그러자 살이 갈아지더니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악!”뚱뚱녀의 날카로운 비명에 함께 온 무리가 식겁했다.피는 여자의 팔을 따라 흘러내렸고 윤혜인의 얼굴에도 묻었다.세게 베어 문 윤혜인은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완전히 실성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할머니를 또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간병인도 그녀를 도왔다. 비록 몸을 떨고 있었지만, 상반신으로 할머니를 단단히 보호 하고 있었다.그녀는 이 무리와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옷차림만으로도 돈과 힘이 있어 보여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아가씨와 어르신이 마음에 걸렸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떨면서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이들은 나쁜 사람들이라 믿으면 안 돼요... 아가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구경꾼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나서서 돕지 못했지만, 입으론 몇 마디 했다.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윤혜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증거를 남기기 시작하며 그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명예훼손, 비방, 폭행! 너희들 누구 하나도 도망칠 생각하지 마.”함께 온 여자는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그저 뚱뚱한 친구의 분풀이를 해주면 2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윤혜인이 제삼자가 맞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게다가 조금 부유한 집들이라 감방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다.주저하는 그들의 모습에 기
윤혜인은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모두 네가 꾸민 짓이지?”송소미는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비록 예전에는 그랬던 적이 있지만 이미 잘못을 뉘우친 상태야. 그러니 헛소리하지 마.”이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이제 보니 상습범이었네?동정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잖아?뚱뚱녀도 자신감을 되찾으며 윤혜인의 휴대폰을 낚아채 바닥에 던져버리고 발로 밟았다.그녀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증거? 내가 지금 인정하게 해줄게.”그리고 가방에서 사진들을 한가득 꺼내 윤혜인의 얼굴에 뿌렸다.사진들이 바닥에 한가득 널브러졌다.예리한 사진 모서리가 윤혜인의 얼굴을 스쳤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진을 보았다.자태가 너무 난해했다.모두들 태세 전환하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겉으로 봐선 아니더니 진짜네? 이렇게 미친 짓을 했을 줄이야.”“너무 역겨워! 맞아도 싼 년이야.”“나도 한때 때리고 싶네. 가증스럽긴.”“...”악의가 담긴 듣기 거북한 말들이 사방에서 공격했다.윤혜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고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줍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당황한 윤혜인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마치 둔탁한 무언가가 그녀를 덮친 것 같았다.모두 거짓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할머니께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실망이 극에 달한 할머니의 표정에 그녀는 입술을 뗄 수 없었고 목구멍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순간, 윤혜인은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찰칵! 찰칵!”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휴대폰을 꺼내 증거를 남기며 인터넷에 올렸다.각종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으며 새로운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윤혜인은 다급히 설명했다.“아니에요... 이 사진들은 모두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거에요...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라고요...”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비웃음과 경멸의 소리는 더욱 거세
이 일은 원래부터 그들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고 그저 돈만 받고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송소미가 이렇게 큰 그림을 만든 것은 마치 우연처럼 가장하기 위함이었고 더욱 손쉽게 배 속의 아기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뚱뚱녀와 사진들은 모두 사전에 준비된 것이다.나중에 실수했다고 하면 되고 좀 더 돈을 들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 와중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상야릇하게 말했다.“또 새로 꼬신 남잔가? 정말 대단하네 윤혜인. 양쪽에 하나씩 끼...”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얼굴에 송소미는 입을 틀어막았다.어떻게 이럴 수가...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숨도 크게 쉴 엄두를 내지 못했다.남자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물러있지 않았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이들의 휴대폰을 전부 확인해 봐. 영상은 하나도 유출돼선 안 돼. 만약 삭제를 원하지 않는다면 법무부의 고소장을 받을 준비하라고 해.”감정 기복 없은 말투였지만 현장의 사람은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일 처리를 확실하게 했고 병실에는 이제 송소미만 남았다.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가려 해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삼...촌...”이신우는 그녀를 흘겼다.“오늘 네가 한 짓은 결국에 이씨 가문의 얼굴을 깎는 거야.”“삼촌,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지나가다 들린 것뿐이에요... 나랑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나가. 아직은 내가 직접 나서지 않을 거니까.”이신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송소미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이게 무슨 말이가?그럼 누가 그녀를...”그리고 송소미도 끌려 나갔다.병실은 조용했다.윤혜인은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했다.움츠린 몸을 떨며 기다시피 할머니 곁으로 갔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떨고 있는 할머니를 감싸 안았다.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멀리 떠날 것 같았다.탁해진 눈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애를 쓰고 있는
할머니는 재빨리 응급실로 옮겨졌다.온몸이 경직된 윤혜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신우는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요?”윤혜인의 작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거의 반투명한 상태로 언제든지 쓰저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를 짚으며 강인하게 일어섰다.매우 맑은 눈동자를 가진 윤혜인이지만 지금은 공허함으로 가득했다.“고마워요.”윤혜인은 가볍게 인사했다.할머니 앞에서 어느 정도의 품위는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줘서 그에게 고마웠다.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마치 한 세기가 지난 것 같았다.그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왔고 윤혜인에 허리를 굽히며 차분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낮은 목소리는 마치 저주처럼 들렸고 텅 빈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윤혜인은 마치 총에 맞은 것처럼 뒤로 한 발 물러섰다.그녀의 두 손은 의사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착간 한게 아니에요?”이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의사가 그저 남은 날이 많지 않았고 했을 뿐 지금 당장 떠난다고는 하지 않았다.“그럴 리 없어요... 그렇죠?... 아침에만 해도 할머니는 고향의 잣빵을 먹고 싶다고 했어요. 아직 드셔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가는 겁이 어디 있나요?”그녀는 무릎을 꿇고 의사의 팔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제발... 할머니를 살려주세요... 제발요. 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의 병을 볼 수 있을 정도는 있다고요... 적어요...”그녀는 낮은 소리로 울먹였다.“적어도 잣빵정도는 드시고 가야죠...”할머니가 배를 곯으면 어떡하는가.윤혜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다.옆에 있던 간호사는 급히 그녀의 팔을 잡으며 위로했다.“아가씨의 마음을 이해해요. 진정하시고 눈으로 할머니를 마지막을 담으세요.”하지만 윤혜인은 가고 싶지 않았다. 붉어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할머니는... 거기에 없어요... 병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세요.”그녀는 몸을 돌려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