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여긴 회사란 말이에요.”갑자기 가슴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셔츠가 벗겨졌다.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아름다운 쇄골에 내리며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빨리 끝낼게.”자잘한 그의 입맞춤이 아래로 향했다. 윤혜인은 전기충격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하앙...”그녀는 깜짝 놀라 이를 악물었다. 가는 손가락이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았다.혹시라도 다시 소리를 지르게 될까 봐 애써 참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주훈이 말했다.“대표님, 출발해야 합니다.”윤혜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아니꼽게 그를 흘겼다.“...놔 줘요. 일 보러 가야죠.”이준혁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이게 내 일이야.”그는 지난 며칠 어떻게 참고 견뎠는지 모른다.오늘 실컷 맛보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다.노크소리는 계속 울렸고 윤혜인은 울먹이기 시작하며 그를 밀치려 했다.하지만 그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아름다운 두 눈을 글썽이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그는 잠시 우는 모습도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다.머릿속의 악마가 그녀를 더 울리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아직 몸부림치고 있는 그녀를 단번에 제압하며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문밖에서도 안의 상황을 아는 듯했고 더 이상 노크하지 않았다.남자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그는 그녀에게 기대어 낮게 속삭였다.“널 보면 참을 수 없어.”잠시후 그는 바로 섰고 윤혜인은 아직도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그 때문에 흐트러졌고 붉어진 두 볼은 너무 사랑스러웠다.그는 그녀를 닦아주며 다리에 든 멍을 보았다.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방금 힘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그는 서랍에서 약을 꺼내 그녀를 눕히고 약을 발라주었다.긴 손가락이 피부에 닿자, 윤혜인은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다행히 넓은 바지를 입어서 연고가 묻지 않았다.하지만 너무 부끄러웠다.그녀는 수줍게 말했다.“왜 이런 게 사무실에 있어요?”이준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준혁의 입술은 한참이나 윤혜인을 괴롭히며 남편이라고 부르라고 협박했다.차에서 내릴 때 그는 그녀의 옷을 정리해 주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내가 돌아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거니까.”윤혜인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이런 일을 꼭 여기에서 예고해야 해?그의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최소 일주일은 금욕하라고 했다.하지만 너무 강하게 요구하는 그 때문에 윤혜인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도 의사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이 2 달 동안은 가볍게 가끔씩 해도 괜찮다고 했다.그녀가 부드럽게 부탁해 봐야겠다.....병원에 도착한 윤혜인은 간병인이 밖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머리가 흐르려 있었고 한쪽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간병인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막 아가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 글쎄 어르신의 아들이란 사람이 찾아왔는데 어르신께 케익을 대접시키는 거예요. 제가 어르신이 케이크를 드시면 안 된다고 하자 아들이란 분이 제 머리를 잡고 따귀까지 때렸어요...”그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녀는 100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드리며 다독였다.“먼저 가서 상처 치료하세요. 제가 가볼게요.”돈을 받은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소심한 그녀는 일을 키울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더 이상 어르신을 돌볼 수 없을 것 같아요.”윤혜인은 그녀를 잡았다.“그동안 너무 잘해주셨고 저도 아줌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어요.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매달 50만 원 더 드릴 테니 할머니를 계속 부탁할게요.”그녀는 한참 생각했다.그녀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어르신은 몸이 안 좋으시지만,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아서 돌보기 쉬웠다. 윤혜인도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마음씨 고운 고용주를 만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그녀가 다시 말했다.“아가씨, 월급은 올리지 않아도 돼요. 어르신을 계속 돌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약국으로
윤혜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고향집을 2억에 팔었잖아. 그 돈은 어디 갔어?”“이미 쓰고 없지. 지금 삼촌이 사업을 하나 하고 있어. 많이도 말고 1억만 땡겨줘. 삼촌이 벌면 두 배로 갚을게.”윤혜인는 냉소를 지었다.“그 사업이 도박이야?”주산응의 낯빛이 바뀌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할머니의 번호는 내가 바꾼 거야. 전에 빚쟁이들이 전화 왔었다고.”거짓말이 들통나자, 주산응은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어쩌다 가끔 가는 거고 이제는 아니야. 네가 돈만 준다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윤혜인은 그를 믿지 않았다. 주산응은 한심한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는 성실하게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여기저기 싸움을 하고 다니다가 중년에 접어든 지금은 도박에 빠져 할머니 몰래 고향 집까지 팔아버려서 할머니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2억을 1달도 안 되어 모조리 써버렸다.이런 인간은 밑빠진 독이었다.“주산응! 고향집은 우리 아빠 몫도 있어. 2억 중에 1억은 내꺼란 말이야. 다시는 나와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그 돈은 다시 거론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윤혜인은 날카롭게 경고했다.“고소해서 1억을 물어내게 할 거야.”주산응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이 몸쓸 년이 감히 날 고소해? 오늘 내가 누나를 대신해 너의 버릇을 고쳐 줄게.”그는 힘이 세다.윤혜인은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벽을 짚어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주산응이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줄 거야? 안 줄 거야! 안 주면 넌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당신에게 줄 돈은 없어.”“네가 돈 많은 재벌을 물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데 너에게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돼?”“그걸 어떻게 알았어?”윤혜인이 물었다.“차에서 둘이 그 짓거리를 하는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주산응은 그녀의 몸을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말했다.“몸을 팔고 다니는 년이 어떻게 돈이 없을 수 있지?”주산응이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
건장한 체격의 이신우는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남자의 무릎을 꿇렸다.벗어날 수 없게 된 주산응이 분노했다.“넌 또 누구야! 내가 내 조카를 교육하는데 누가 감히 끼어들어!...”주산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껶여졌다.“악-!!”너무 빠른 움직임에 주산응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손을 거둔 이신우에 비서가 소독 티슈를 건넸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닦았다.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윤혜인에 머물렀다.인간쓰레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주산응은 그의 남다른 아우라를 느꼈다.그는 윤혜인의 그 남자를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남다른 포스를 지니고 있었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십중팔구 그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당신이 혜인이의 남자? 난 얘 삼촌이고 이년을 데려가고 싶다면 돈 내놔. 치료비로 2억은 줘야 할 거야.”누가 봐도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아직 정신이 아득한 윤혜인은 순간 이준혁인 줄 알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조금 닮았을 뿐 이준혁이 아니었다.깊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차가운 이준혁과는 달랐다.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눈빛은 더 우수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주산응은 아직도 지껄이고 있었다.“난 삼촌이라고! 감히 삼촌을 때려?”아무 사람이나 물고 늘어지는 주산응에 윤혜인이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닥치지 못해! 난 모르는 분이야.”주산응이 믿을 리 없었다.겨우 만난 돈줄을 놓칠 수 없어 말했다.“이렇게 어린애가 너랑 잠자리하는 데 너도 사람이면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 2억도 적게 부른 거야.”이신우는 고개를 돌려 주산응을 보았다. 그 눈빛은 예리했고 날카로웠다.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주산응은 소름이 돋았다.무의식적으로 이런 남자는 건들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돈 생각에 용기를 내보긴 했으나 목소리는 더 이상 높
윤혜인은 따라가 몇 가지 조사를 받았다.이신우도 따라와 증인을 서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경찰은 윤혜인을 다독이며 주산응이 최소 15날은 구류될 것이라고 했다.윤혜인은 그를 궁지로 내몰 생각은 없었다. 그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어 다시는 할머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윤혜인은 이 일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할머니를 서울로 모셔 온 것을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주산응은 어떻게 정확하게 병원을 찾아서 병실까지 들이닥칠 수 있었을까?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주산응에게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그녀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젊은 경찰 한 분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성함이 윤혜인 되시나요?”윤혜인이 고개를 들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전에 인하파출소에서 근무했던 진운이에요.”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때 아버지를 치고 도주한 뺑소니범 때문에 인하에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었다.서울에 온 이후에도 매년 한 번씩 돌아가 보았지만 사건은 진전이 없었다.진운은 작년에 갓 입사했고 예쁜 미모의 어린 여자였다. 사고가 너무 참담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며칠 전에 예전 동료가 얘기해 줬는데요. 새로운 도주범을 잡았는데 그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상한 차량을 보았다고 자백했대요. 다른 것들은 아직 조사 중이고요.”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때 일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그녀는 진운에게 전화번호를 남겼고 진전이 있으면 연락 바란다고 부탁했다.모든 조사가 끝나고 윤혜인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이신우의 차가 마침 그녀 앞에 멈춰 섰다.그녀는 감격하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괜찮아요.”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좀 전의 날카로움은 한치도 보아 낼 수 없을 정도였다.“어딜 가요?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택시 부르면 돼요.”이신우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타요.”담담한 말투였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기운을 풍겼다.
병원.“할머니 때문에 혜인이 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나이가 있으신 할머니는 속상할 때면 눈물을 보이곤 했다.윤혜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예전에는 할머니가 저를 보호했으니 이제 내가 할머니를 보호하는 거죠.”주산응은 천하의 몹쓸 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할머니는 쓰레기를 줍고 분식을 해서 팔기도 하면서 모진 애를 썼다.그렇게 지금은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병으로 앓고 있어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할머니는 다른 건 괜찮지만 내가 가고 나면 널 돌봐줄 사람이 없고 너의 좋은 짝을 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될 뿐이야. 그래서 이대로는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겠어.”윤혜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런 말씀 하지 말아요. 할머니는 꼭 100세까지 문제 없어요. 게다가 우리 조만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잖아요.”흐릿했던 할머니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다시... 돌아갈 수 있어?”“당연하죠. 비록 이미 팔린 집이지만 누구도 살지 않고 있으니 세 들면 돼요. 그리고 이후에 다시 사들일 수도 있어요.”할머니는 기뻐하며 윤혜인의 손을 잡았다.“그래. 그래. 너무 좋아.”그러다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제 꿈을 꿨는데 네 아비가 자신을 보러 오라고 하더라.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할머니는 뭔가를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 안에는 평안 자물쇠였다.“이건 네가 어릴 적에 지녔던 거야. 너의 평안을 지켜줄 거야.”할머니가 하는 매 한마디는 모두 사후를 당부하는 것이었다.그녀는 할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할머니, 난 이미 결혼했어요.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이제야 말해요.”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윤혜인은 곧이곧대로 말했고 계약 결혼이란 말만 뺐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그는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에요. 그가 일
똑똑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안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침대에 다시 누워있는데 소원이 점심 먹자며 전화를 걸어왔다.식당에 도착한 윤혜인은 소원을 보고 흠칫 놀랐다.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짝뚝 귀밑까지 자른 소원 때문이었다.“머리 깎았어?”소원은 짧은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이상해?”“느낌이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예뻐.”소원은 선이 굵어서 머리가 길면 미인이고 단발이면 흑장미였다.정복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그녀의 저기압을 느낀 윤혜인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소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 누군가가 머리가 허리까지 오면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누구도 데려가지 않으니 자른 것뿐이야.”소원이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윤혜인은 알고 있었다. 설득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떼지 않았다.소원이 갑자기 물었다.“이준혁 출장 갔어?”멈칫하던 윤혜인이 물었다.“응. 네가 어떻게 알아?”소원은 육경한에 시달리느라 두 사람이 이미 화해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나 임세희 피드에서 봤어.”윤혜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애써 침착하며 물었다.“어떤 거?”소원은 휴대폰을 켜고 임세희의 피드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녀의 단독 셀카들이 있었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멘트에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 너무 따뜻.’위치까지 태그했고, 해외였다.시간은 이준혁이 전화를 끊어버린 30분 후였다.게다가 그녀 대신 트렁크를 옮기는 것이 이준혁임을 알 수 있었다.비록 옆모습이긴 했지만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두 사람을 아는 지인들이 댓글에 사이가 좋다며 부부냐고 부러워했다.임세희는 웃는 이모티콘으로 답했다.지인들 속에서 그들이야말로 한 쌍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칼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소원은 마음이 아팠지만 길게 아플 바엔 짧고 굵게 한번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혜인아, 세상에서
소원은 당황했다. 아무리 간이 큰들 약혼녀 앞에서 그를 유혹할 수는 없다.거기에 한 성깔 하는 진아연인데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 서야 그런 짓을 하겠는가?그녀는 발버둥 치며 아니라고 했다.“아니야. 제발 이러지 마. 약혼녀도 여기 있는데 보기라도 한다면...”하지만 육경한의 손은 이미 움직였다. 그녀의 옷을 밀려 올리고 고개를 숙인 그가 항웅큼 물었다.그녀는 그만 고개를 젖혔다.“창피한 건 알기 나 해?”소원은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이를 악물었다.“약혼녀가 화내면 어떡하려고?”“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소리쳐볼래?”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소원의 몸이 경직되었다.그것을 느낀 육경한은 담담하게 비꼬았다.“진짜 무서운 가 보네?”“여기서는 이러지 마. 제발.”소원은 애원했다. 하지만 남자의 비웃음만 돌아올 뿐이었다.“그럼 복도 갈까? 아니면 로비에서?”소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육경한은 진짜 그렇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거침없었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게다가 도덕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아무 말 없는 그녀의 모습에 육경한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육경한은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녀가 거울로 제일 굴욕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했다.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머리 왜 잘랐어?”머리가 허리까지 오면 된다고 했던 그 약속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지금 그녀는 그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고 절대 그녀를 데려갈 수 없었지만 상대가 먼저 약속을 깨는 것이 탐탁지 않는 육경한이었다.약속을 깬다 해도 그가 먼저이지 않는가?그만이 그녀를 발아래 짓누를 수 있다.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그를 도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흔들리고 있는 소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귀찮아서.”지금 이렇게 긴 머리를 가꿀 시간이 없었다. 당연히 이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그녀도 도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기대하고 싶지 않았고 망상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서였다.“귀찮?”육경한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
윤혜인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이준혁과 함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윤혜인을 위해 이준혁은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사랑의 증표였다.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그러니 더 이상 윤혜인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윤혜인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이준혁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준혁을 사랑하기 때문에.외롭고 긴 밤마다 끝없는 악몽 속에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를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을 사랑했다.그와 함께, 그리고 한 가족으로 평화롭게 함께 지내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하여 윤혜인은 이준혁의 사무실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윤혜인은 남자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의 다리를 덮었던 듯한 어두운색 담요를 집어 스스로를 덮었다.곧 그의 독특하고 따뜻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며 윤혜인은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회의가 끝난 후 이준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비서에게 물었다.“제 사무실에 아직 사람이 있나요?”비서가 답했다.“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결국... 갔구나.’윤혜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준혁은 그녀의 선의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잠깐의 동행 후에 떠나는 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테니 차라리 짧은 고통이 나을 것이었다.‘내가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두 사람 결국 모두 불행하게 될 거야. 차라리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낫지.’...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한기를 느껴 깨어났다.밤이 된 북안도는 얼음 창고나 다름없었다. 난방이 없으면 젊고 강한 사람이라도 얼어 죽을 수 있을 만큼 추운 곳이었다.“에
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이 그녀를 휘감았다.이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밖의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시간 맞춰서 갈 겁니다.”비서는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품에서 몸을 떼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그러자 당황한 윤혜인이 물었다.“그... 회의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태연히 대답했다.“1분 정도는 문제없어.”윤혜인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조금 전의 용기도 사라지고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듯했다.“일단 회의에 가세요. 우린 이따가 얘기해요.”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날렵하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이 질문 하나로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준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동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잠시 동안 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에는 점차 어두운 빛이 어렸다.“네 동정은 필요 없어.”이준혁이 말했다.그는 그녀가 자비로운 마음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았다.감정이란 단순한 감동이나 연민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동정으로 얻게 되는 감정이라면, 이준혁은 차라리 윤혜인을 자유롭도록 놓아주고 자신이 홀로 평생 아픔을 감수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곧 이준혁은 윤혜인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제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이제 돌아가.”그런 다음 스위치를 눌러 휠체어를 움직여 윤혜인 앞에서 천천히 떠났다.윤혜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조금 전 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음속으로는 이 감정이 동정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이준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많은 고통이 함께 밀려올
이준혁은 모든 과정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한눈에 보기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 분명했다.동작이 빨랐지만 윤혜인은 그의 한쪽 다리가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며 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혹시 주 비서가 뭔가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하지만 이준혁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했다.요즘 주훈이 점점 겉으로는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항상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주훈이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지금 모습만 봐도 주훈이 분명 무슨 말을 했구나 싶었다.‘탄페니아에서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아직 더 단련시켜야겠어.’윤혜인이 주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은 게 없다고 부정하자 이준혁도 굳이 그 말을 들춰내지는 않았다.대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다리는 괜찮아.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문득 자신이 미워졌다.‘준혁 씨는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늘 자존심 강하고 뛰어났던 사람인데...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거야.’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이준혁은 혼자서 견뎌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을 떠나고 그를 밀어내는 동안, 이준혁은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순간 윤혜인은 모든 것을 잊고 이준혁을 껴안았다.뒤이어 그녀의 눈물이 이준혁의 양복을 적셨다.“준혁 씨... 많이 아팠죠?”‘많이 아팠죠?’라는 말은 이준혁의 마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