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말투는 너무 차가웠다.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췄고 돌아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임세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혜인이 도시락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이준혁은 고개를 들었고 뒤돌아 멀어져 가는 윤혜인을 발견했다.순간, 엄숙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잠깐.”윤혜인은 멈췄다.이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임세희에게 말했다.“중점은 이미 표시해 놨으니, 나머지는 주훈이 책임자에게 데려다줄 거야.”임세희가 뭔가 말하려는데 이준혁은 벌써 윤혜인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여보가 여긴 무슨 일이야?”서류를 쥔 임세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남들 앞에서 이런 행동은 조금 불편했지만, 임세희의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스캔한 윤혜인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이준혁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서 왔죠.”윤혜인의 미모는 타고난 장점이었고 고분고분한 몸짓은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을 맛보았다.임세희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눈에 뿜어져 나오던 살기는 한참 뒤에야 사그라들었고 결국 꼬리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오빠, 난 먼저 갈게.”고개를 끄덕인 이준혁은 당부 한마디 했다.“조 대표가 더 이상 꼬투리 잡지 않게 주훈이 잘 처리할 거야.”그의 한마디로 임세희는 다시 기쁨을 되찾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고마워요. 오빠.”임세희는 턱을 올리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문이 닫히자,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서 벗어나며 도시락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뜨거우니 좀 먹어요.”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이준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왜 그래?”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일 동안 그들은 연락하지 못했고 그녀는 임세희가 작전을 바꿔 회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두 사람이 한 사무실에서 일에 대
윤혜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여긴 회사란 말이에요.”갑자기 가슴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셔츠가 벗겨졌다.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아름다운 쇄골에 내리며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빨리 끝낼게.”자잘한 그의 입맞춤이 아래로 향했다. 윤혜인은 전기충격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하앙...”그녀는 깜짝 놀라 이를 악물었다. 가는 손가락이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았다.혹시라도 다시 소리를 지르게 될까 봐 애써 참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주훈이 말했다.“대표님, 출발해야 합니다.”윤혜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아니꼽게 그를 흘겼다.“...놔 줘요. 일 보러 가야죠.”이준혁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이게 내 일이야.”그는 지난 며칠 어떻게 참고 견뎠는지 모른다.오늘 실컷 맛보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다.노크소리는 계속 울렸고 윤혜인은 울먹이기 시작하며 그를 밀치려 했다.하지만 그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아름다운 두 눈을 글썽이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그는 잠시 우는 모습도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다.머릿속의 악마가 그녀를 더 울리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아직 몸부림치고 있는 그녀를 단번에 제압하며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문밖에서도 안의 상황을 아는 듯했고 더 이상 노크하지 않았다.남자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그는 그녀에게 기대어 낮게 속삭였다.“널 보면 참을 수 없어.”잠시후 그는 바로 섰고 윤혜인은 아직도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그 때문에 흐트러졌고 붉어진 두 볼은 너무 사랑스러웠다.그는 그녀를 닦아주며 다리에 든 멍을 보았다.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방금 힘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그는 서랍에서 약을 꺼내 그녀를 눕히고 약을 발라주었다.긴 손가락이 피부에 닿자, 윤혜인은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다행히 넓은 바지를 입어서 연고가 묻지 않았다.하지만 너무 부끄러웠다.그녀는 수줍게 말했다.“왜 이런 게 사무실에 있어요?”이준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준혁의 입술은 한참이나 윤혜인을 괴롭히며 남편이라고 부르라고 협박했다.차에서 내릴 때 그는 그녀의 옷을 정리해 주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내가 돌아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거니까.”윤혜인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이런 일을 꼭 여기에서 예고해야 해?그의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최소 일주일은 금욕하라고 했다.하지만 너무 강하게 요구하는 그 때문에 윤혜인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도 의사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이 2 달 동안은 가볍게 가끔씩 해도 괜찮다고 했다.그녀가 부드럽게 부탁해 봐야겠다.....병원에 도착한 윤혜인은 간병인이 밖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머리가 흐르려 있었고 한쪽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간병인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막 아가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 글쎄 어르신의 아들이란 사람이 찾아왔는데 어르신께 케익을 대접시키는 거예요. 제가 어르신이 케이크를 드시면 안 된다고 하자 아들이란 분이 제 머리를 잡고 따귀까지 때렸어요...”그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녀는 100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드리며 다독였다.“먼저 가서 상처 치료하세요. 제가 가볼게요.”돈을 받은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소심한 그녀는 일을 키울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더 이상 어르신을 돌볼 수 없을 것 같아요.”윤혜인은 그녀를 잡았다.“그동안 너무 잘해주셨고 저도 아줌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어요.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매달 50만 원 더 드릴 테니 할머니를 계속 부탁할게요.”그녀는 한참 생각했다.그녀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어르신은 몸이 안 좋으시지만,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아서 돌보기 쉬웠다. 윤혜인도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마음씨 고운 고용주를 만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그녀가 다시 말했다.“아가씨, 월급은 올리지 않아도 돼요. 어르신을 계속 돌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약국으로
윤혜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고향집을 2억에 팔었잖아. 그 돈은 어디 갔어?”“이미 쓰고 없지. 지금 삼촌이 사업을 하나 하고 있어. 많이도 말고 1억만 땡겨줘. 삼촌이 벌면 두 배로 갚을게.”윤혜인는 냉소를 지었다.“그 사업이 도박이야?”주산응의 낯빛이 바뀌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할머니의 번호는 내가 바꾼 거야. 전에 빚쟁이들이 전화 왔었다고.”거짓말이 들통나자, 주산응은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어쩌다 가끔 가는 거고 이제는 아니야. 네가 돈만 준다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윤혜인은 그를 믿지 않았다. 주산응은 한심한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는 성실하게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여기저기 싸움을 하고 다니다가 중년에 접어든 지금은 도박에 빠져 할머니 몰래 고향 집까지 팔아버려서 할머니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2억을 1달도 안 되어 모조리 써버렸다.이런 인간은 밑빠진 독이었다.“주산응! 고향집은 우리 아빠 몫도 있어. 2억 중에 1억은 내꺼란 말이야. 다시는 나와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그 돈은 다시 거론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윤혜인은 날카롭게 경고했다.“고소해서 1억을 물어내게 할 거야.”주산응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이 몸쓸 년이 감히 날 고소해? 오늘 내가 누나를 대신해 너의 버릇을 고쳐 줄게.”그는 힘이 세다.윤혜인은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벽을 짚어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주산응이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줄 거야? 안 줄 거야! 안 주면 넌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당신에게 줄 돈은 없어.”“네가 돈 많은 재벌을 물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데 너에게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돼?”“그걸 어떻게 알았어?”윤혜인이 물었다.“차에서 둘이 그 짓거리를 하는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주산응은 그녀의 몸을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말했다.“몸을 팔고 다니는 년이 어떻게 돈이 없을 수 있지?”주산응이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
건장한 체격의 이신우는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남자의 무릎을 꿇렸다.벗어날 수 없게 된 주산응이 분노했다.“넌 또 누구야! 내가 내 조카를 교육하는데 누가 감히 끼어들어!...”주산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껶여졌다.“악-!!”너무 빠른 움직임에 주산응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손을 거둔 이신우에 비서가 소독 티슈를 건넸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닦았다.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윤혜인에 머물렀다.인간쓰레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주산응은 그의 남다른 아우라를 느꼈다.그는 윤혜인의 그 남자를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남다른 포스를 지니고 있었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십중팔구 그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당신이 혜인이의 남자? 난 얘 삼촌이고 이년을 데려가고 싶다면 돈 내놔. 치료비로 2억은 줘야 할 거야.”누가 봐도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아직 정신이 아득한 윤혜인은 순간 이준혁인 줄 알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조금 닮았을 뿐 이준혁이 아니었다.깊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차가운 이준혁과는 달랐다.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눈빛은 더 우수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주산응은 아직도 지껄이고 있었다.“난 삼촌이라고! 감히 삼촌을 때려?”아무 사람이나 물고 늘어지는 주산응에 윤혜인이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닥치지 못해! 난 모르는 분이야.”주산응이 믿을 리 없었다.겨우 만난 돈줄을 놓칠 수 없어 말했다.“이렇게 어린애가 너랑 잠자리하는 데 너도 사람이면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 2억도 적게 부른 거야.”이신우는 고개를 돌려 주산응을 보았다. 그 눈빛은 예리했고 날카로웠다.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주산응은 소름이 돋았다.무의식적으로 이런 남자는 건들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돈 생각에 용기를 내보긴 했으나 목소리는 더 이상 높
윤혜인은 따라가 몇 가지 조사를 받았다.이신우도 따라와 증인을 서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경찰은 윤혜인을 다독이며 주산응이 최소 15날은 구류될 것이라고 했다.윤혜인은 그를 궁지로 내몰 생각은 없었다. 그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어 다시는 할머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윤혜인은 이 일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할머니를 서울로 모셔 온 것을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주산응은 어떻게 정확하게 병원을 찾아서 병실까지 들이닥칠 수 있었을까?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주산응에게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그녀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젊은 경찰 한 분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성함이 윤혜인 되시나요?”윤혜인이 고개를 들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전에 인하파출소에서 근무했던 진운이에요.”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때 아버지를 치고 도주한 뺑소니범 때문에 인하에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었다.서울에 온 이후에도 매년 한 번씩 돌아가 보았지만 사건은 진전이 없었다.진운은 작년에 갓 입사했고 예쁜 미모의 어린 여자였다. 사고가 너무 참담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며칠 전에 예전 동료가 얘기해 줬는데요. 새로운 도주범을 잡았는데 그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상한 차량을 보았다고 자백했대요. 다른 것들은 아직 조사 중이고요.”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때 일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그녀는 진운에게 전화번호를 남겼고 진전이 있으면 연락 바란다고 부탁했다.모든 조사가 끝나고 윤혜인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이신우의 차가 마침 그녀 앞에 멈춰 섰다.그녀는 감격하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괜찮아요.”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좀 전의 날카로움은 한치도 보아 낼 수 없을 정도였다.“어딜 가요?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택시 부르면 돼요.”이신우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타요.”담담한 말투였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기운을 풍겼다.
병원.“할머니 때문에 혜인이 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나이가 있으신 할머니는 속상할 때면 눈물을 보이곤 했다.윤혜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예전에는 할머니가 저를 보호했으니 이제 내가 할머니를 보호하는 거죠.”주산응은 천하의 몹쓸 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할머니는 쓰레기를 줍고 분식을 해서 팔기도 하면서 모진 애를 썼다.그렇게 지금은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병으로 앓고 있어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할머니는 다른 건 괜찮지만 내가 가고 나면 널 돌봐줄 사람이 없고 너의 좋은 짝을 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될 뿐이야. 그래서 이대로는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겠어.”윤혜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런 말씀 하지 말아요. 할머니는 꼭 100세까지 문제 없어요. 게다가 우리 조만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잖아요.”흐릿했던 할머니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다시... 돌아갈 수 있어?”“당연하죠. 비록 이미 팔린 집이지만 누구도 살지 않고 있으니 세 들면 돼요. 그리고 이후에 다시 사들일 수도 있어요.”할머니는 기뻐하며 윤혜인의 손을 잡았다.“그래. 그래. 너무 좋아.”그러다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제 꿈을 꿨는데 네 아비가 자신을 보러 오라고 하더라.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할머니는 뭔가를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 안에는 평안 자물쇠였다.“이건 네가 어릴 적에 지녔던 거야. 너의 평안을 지켜줄 거야.”할머니가 하는 매 한마디는 모두 사후를 당부하는 것이었다.그녀는 할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할머니, 난 이미 결혼했어요.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이제야 말해요.”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윤혜인은 곧이곧대로 말했고 계약 결혼이란 말만 뺐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그는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에요. 그가 일
똑똑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안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침대에 다시 누워있는데 소원이 점심 먹자며 전화를 걸어왔다.식당에 도착한 윤혜인은 소원을 보고 흠칫 놀랐다.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짝뚝 귀밑까지 자른 소원 때문이었다.“머리 깎았어?”소원은 짧은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이상해?”“느낌이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예뻐.”소원은 선이 굵어서 머리가 길면 미인이고 단발이면 흑장미였다.정복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그녀의 저기압을 느낀 윤혜인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소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 누군가가 머리가 허리까지 오면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누구도 데려가지 않으니 자른 것뿐이야.”소원이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윤혜인은 알고 있었다. 설득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떼지 않았다.소원이 갑자기 물었다.“이준혁 출장 갔어?”멈칫하던 윤혜인이 물었다.“응. 네가 어떻게 알아?”소원은 육경한에 시달리느라 두 사람이 이미 화해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나 임세희 피드에서 봤어.”윤혜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애써 침착하며 물었다.“어떤 거?”소원은 휴대폰을 켜고 임세희의 피드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녀의 단독 셀카들이 있었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멘트에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 너무 따뜻.’위치까지 태그했고, 해외였다.시간은 이준혁이 전화를 끊어버린 30분 후였다.게다가 그녀 대신 트렁크를 옮기는 것이 이준혁임을 알 수 있었다.비록 옆모습이긴 했지만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두 사람을 아는 지인들이 댓글에 사이가 좋다며 부부냐고 부러워했다.임세희는 웃는 이모티콘으로 답했다.지인들 속에서 그들이야말로 한 쌍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칼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소원은 마음이 아팠지만 길게 아플 바엔 짧고 굵게 한번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혜인아, 세상에서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