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름은 색이 바랜 보고서를 읽어봤다. 의사 사인란에는 기성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기성주는 윤씨 가문에서 쓰던 가정 주치의는 맞았지만 이 보고서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려웠다.원진우는 색이 바랜 편지지를 내밀며 말했다.“너희 아버님이 남긴 유언이야.”“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너에게 줄 편지를 쓰기 시작하셨어. 일이 터지기 전에 18통의 편지를 남겼더라.”윤아름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열었다. 필적을 보아하니 아버지가 남긴 편지가 맞았다.한마디 한마디에 윤아름에 대한 미련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들이 떠난 후 아끼는 딸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혹시나 딸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를 더 걱정했다.모든 편지를 다 읽은 윤아름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슬픔에 사로잡혀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원진우는 윤아름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아냥거렸다.“사실 부모님이 죽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해. 적어도 너희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암에 걸렸다는 거 몰랐으니까.”윤아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았다.“부모님을 죽인 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해?”원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니면? 생사가 이미 결정된 사람들인데 생이별을 겪으면서 영원히 고통스러워할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 떠나는 게 낫지 않아? 내가 너 도와준 거라니까.”“아악...”윤아름은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부모님을 해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애초에 이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면 이 남자가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을 죽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부모님이 정말 암에 걸렸다 해도 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작별할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시간에 함께 하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었을 테고 갑작스럽게 생이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는데 아쉬움만 남았으니 평생 너무 안타까웠다.“아름아, 넌 너무 나약해.”
원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더니 조용히 윤아름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만끽했다. 윤아름이 단단히 겁을 먹어야만 다시 도망갈 엄두를 못 낼거라고 생각했다.윤아름은 원진우가 꺼낸 블루 하트 얘기와 진우희의 찢어진 입을 보며 뭔가 알아챘다.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윤아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위액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지어 피도 섞여 있었다.하지만 원진우의 징벌은 끝나지 않았다. 원진우는 육체적인 벌보다 마음의 벌이 더 잊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진우가 원하는 것도 윤아름이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고 다시는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원진우는 다소 차가워 보이는 얇은 입술로 차갑게 말했다.“곽경천? 아들이지? 아껴준 보람이 있더라? 진우희를 찾아내면 뭐 해. 그때는 진우희가 이미 죽고 없는데.”“건드리지 마.”윤아름이 미친 것처럼 원진우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건드리면 내가 당신 죽일 거야.”하지만 윤아름은 이내 원진우에 의해 바닥에 제압당하고 말았다.원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인한 말을 이어갔다.“진우희를 찾느라 총알을 맞았나?”“...”윤아름은 소리를 지르려 해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암에 걸린 부모님도 원진우 손에 죽었고 그녀를 위해 정보를 전달하려던 진우희도 죽었고 그녀를 찾으러 다니던 곽경천도 총알을 맞고 생사를 알 수 없었다.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를 도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될 불행을 당한 것이다.구슬을 품은 것이 그 죄라는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한 건 다 윤아름 때문이었다.윤아름은 몸을 천천히 웅크리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이 살짝 줄어들 것 같았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그 고통은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한 원망에서 온 것이었다.윤아름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만 가져다주는 자신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남준이 예상했던 것처럼 곽경천에게 총을 쏜 사람은 곽경천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지 정말 목숨을 앗아가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더는 조사하지 말라고, 아니면 피를 볼 것이라고 에둘러서 경고하고 있었다.하지만 곽경천은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다. 이런 행보를 보인다는 건 진실과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윤아름을 찾을 희망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윤혜인은 시간만 나면 진우희의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곽경천을 보며 휴식을 더 취하라고 타일렀다. 일어난 지 고작 며칠이었다. 총상을 입었으니 두세 달은 족히 몸조리해야 할 것 같았다.곽경천은 겉으로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돌아서면 몰래 배남준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토론했다.그들은 눈길을 진우희가 돌보던 몇몇 가문으로 돌렸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일제히 원진우에게로 향했다.하지만 그들은 원진우와 윤아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곽경천은 곽진명에게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곽진명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이야기를 들은 윤혜인과 곽경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원지민의 셋째 삼촌과 어머니 윤아름이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정말 그런 거라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윤아름의 실종이 원진우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윤아름이 지금 원진우에 의해 북안도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곽경천과 윤혜인은 너무 기뻤다.드디어 엄마 윤아름을 만날 날이 다가온 것이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주한 사실은 잔인했다. 어떻게 원진우의 별장을 수색할지가 문제였다.북안도는 서울과는 달랐다. 아무리 서울이라고 해도 확실한 증거와 검찰에서 발부한 수색영장이 없으면 용의자의 집을 수색할 수 없었다. 북안도는 무법천지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북안도는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법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택에 침입한 자들을 그대로 사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만약 억지로 진입한다면 무력 충돌이 있을 수밖
엄마 윤아름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였다.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이신우는 연락을 받은 날 밤, 제일 빠른 속도로 북안도에 도착했다.이신우는 그간 외국에서 쌓은 인맥이 대단했다. 복잡한 입국 절차도 이신우는 프리패스할 수 있었다.아침이 되자 이신우는 윤혜인이 잠시 지내는 별장에 도착했다. 이신우가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 몰랐던 윤혜인은 하마터면 배남준과 쇼윈도 부부라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다행히 이신우의 신경은 온통 윤아름에게 빼앗겨 있어 왜 신혼부부인 윤혜인과 배남준이 같이 지내지 않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이신우는 곽경천이 준 윤아름의 자료를 가지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3일 뒤에야 다시 나타났다.곽경천과 윤혜인을 찾아온 이신우가 이렇게 말했다.“별장은 조사해 봤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곳곳에 원진우가 혼자 사는 흔적만 있었지 여성이 생활한 흔적이나 생활용품은 없더라고요.”곽경천과 윤혜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이신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혹시 누가 아름... 콜록콜록...”이신우는 말실수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마른기침하며 말했다.“사모님 본 적 있나요?”곽경천이 고개를 저었다.“본 사람은 없어요.”곽경천도 조사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약을 사 간 것을 기반으로 한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윤아름을 본 사람은 없었다.그렇다는 건 윤아름의 생사도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일은 다시 답보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원진우의 저택은 다른 곳과 달랐다. 이신우가 한번 들키지 않고 들어갔다고 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이때 이신우는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이준혁이 걸어온 전화였다.이신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준혁아.”이준혁은 이신우가 윤아름의 행방을 찾는다는 걸 알고 중요한 단서를 하나 제공했다.“원진우의 저택은 대부
단추형 추적기였다. 전에 결혼식 답례품에 있던 제비 자수에 심은 것이었다.매 답례품에 빼놓지 않고 다 심어놓았을뿐더러 잘못 터치할까 봐 복잡한 공법으로 수놓은 것이었기에 윤아름만 어떻게 푸는지 알 수 있었고 그래야 추적기를 촉발할 수 있었다.곽경천은 어깨에 입은 상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노트북을 꺼내 추적기의 위치를 찾아봤다. 5초 만에 알아내 위치는 원진우의 저택이었다. 저택에서 사람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지하실일 것이다.지하실 입구만 찾아내면 윤아름을 찾을 수 있다.이신우는 바로 계획을 세우고 원진우의 저택에 잠입할 준비를 했다.잠입 계획을 실시하는 날이 되었지만 이신우는 들어갈 수 없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원진우가 며칠 전 북안도에서도 유명한 황실 능묘의 장인을 불러와 별장에 그 유명한 ‘불모래’를 설치했다.불모래는 말 그대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별장 전체에 불이 달리기 쉬운 모래가 쏟아지면서 화염에 휩싸일 수 있는 물질이었다.원진우는 저택을 아예 능묘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이신우가 주저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들어간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뿐만 아니라 원진우에 의해 지하실에 갇힌 윤아름의 목숨도 위험해졌다.원진우의 행보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불모래를 심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이는지 알 수 없었다.사람을 찾으러 들어가는 일은 일단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이신우는 연세가 있는 장인들을 찾아가 불모래의 특점을 알아보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며칠을 연구해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돌파구라면 바로 원진우를 밖으로 유인한 후에 집으로 잠입해 신속하게 조사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문제는 원진우가 이미 연속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누가 초대하든 거절한다는 것이었다.그럴수록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혜인도 이 일도 연속 며칠간 불안해했다.윤혜인의
윤혜인은 눈을 의심했다. 이준혁은 지금 국내에서 재활 중이라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원래대로라면 재활 훈련을 한 달 동안 더 받아야 했다. 그래도 다 낳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달간 조심하면서 힘이 들어가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뭘 그렇게 봐?”배남준은 윤혜인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이렇게 물었다.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왜 다른 사람을 이준혁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요즘 엄마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를 떠올릴 새가 거의 없었다. 좋은 징조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누군가를 천천히 잊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길을 거닐다가 비슷한 그림자를 보고 심장이 저릿해질 수는 있다.식당에 도착하니 윤혜인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배남준은 친절하게 손수건을 건네며 땀을 닦으라고 하더니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했다. 거의 해산물이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북안도는 해산물 자원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임신한 관계로 혹시나 아이에게 영향 줄까 봐 늘 조금씩만 먹었다.하지만 오늘 주문한 해산물은 배남준이 다 계산해서 주문한 것이라 임산부도 적정량을 지켜서 먹으면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시름 놓고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껍질이 있는 해산물은 까기가 번거로웠다. 배남준이 윤혜인에게 새우 몇 개를 까주더니 다른 것들도 골라서 윤혜인에게 집어줬다. 이내 윤혜인의 앞접시는 먹기 좋게 까놓은 해산물로 가득했다.윤혜인은 약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오빠, 오빠도 먹어요. 난 이거면 됐어요.”배남준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껍질을 까서는 윤혜인의 앞접시에 쌓아 올렸다.“오늘은 많이 먹어도 돼. 산후조리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먹는다.”윤혜인의 예정일은 아직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요즘 제일 큰 고민거리라면 바로 윤혜인이 예정일을 맞아 국내로 들어가는 게 걱정되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국내까지
솔로 기간만 30년인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가정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다행히 벗어났어. 나쁜 습관은 없을 거야. 바람피우는 일도 없을 거고. 한평생 너만 바라보면서 살게. 만약 우리가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가정을 위한 삶을 살 거야.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지만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지 열심히 공부해 볼게. 아이는 네가 갖고 싶지 않다면 안 가져도 돼. 아름이, 초롱이, 그리고 파랑이까지, 그 아이를 유일한 내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게.”초롱과 파랑은 윤혜인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지은 태명이었다.이름보다는 진지한 감이 좀 떨어질 수 있지만 윤혜인은 어릴 적 그녀를 길러준 외할머니가 간단한 이름일수록 더 키우기 쉽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시골에서 가끔 남자아이 태명을 똥강아지라고 짓고 여자아이 태명을 꼬물이라고 짓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낳아서 잘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윤혜인도 이번에는 미신을 믿기로 하고 아주 일반적인 태명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사하고 건강한 삶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솔직히 배남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평생 자기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윤혜인의 세 아이를 그의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겠다는 게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심은 아니었다.윤혜인은 전에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더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윤혜인은 소원을 떠올렸다. 사랑을 좇다가 날개가 꺾이고 나락으로 빠져 허우적댔지만 지금은 사랑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세 아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키울 자신은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이 빠지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성격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윤혜인이 고민하자 배남준이 말했다.“혜인아, 지금 당자아 대답할 필요 없어.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잖아. 일단 눈앞에 놓인 관문부터 해결하고
그러면 혼자 좋아할 자격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오빠가 한 말은 고민해 볼게요.”윤혜인이 말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넋을 잃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윤혜인은 배남준에게 거부감이 없었다. 만약 가정을 다시 꾸린다면 배남준도 좋은 선택이긴 했다.그리고 윤혜인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정확히 인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라면 무슨 일을 하든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전에는 아이가 한 명뿐이라 이런 일은 고민하지 않아도 혼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뱃속에 품은 아이까지 태어나면 고려해야 할 게 점점 늘어날 것이다.배남준은 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입에 발린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낑낑대던 배남준이 겨우 고맙다는 말밖에 내뱉지 못했다.윤혜인은 그런 배남준의 반응이 재미있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마워요. 남준 씨.”변화를 주고 싶다면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계속 배남준을 오빠라고 부르면 곽경천처럼 오빠로만 생각하지 좋은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배남준은 너무 기뻐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북안도는 다른 건 다 좋았지만 너무 추운 게 문제였다. 윤혜인은 매번 곰처럼 겹겹이 껴입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에 보들보들한 장갑을 끼워주고 나서야 윤혜인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오늘은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손을 잡지 않으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저녁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이준혁과 닮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익숙함이 전에 봤던 그림자보다 더 짙었다.어깨라인이 선명한 뒷모습에 윤혜인은 순간 그 사람이 이준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또 멍을 때리고 있자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소원, 우리 혼인신고 했어.”육경한이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소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미친 거 아니야? 혼인신고를 했다고?’한참 후, 소종은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말 속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형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 여자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시겠다고요?”소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됐다.육경한의 머리를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서 뇌 CT라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황당하고 답답할 뿐이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나마 소종은 평생을 함께하며 고난을 헤쳐온 동료였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형님...”소종은 어렵게 입을 뗐다.그가 육경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한 진심을 말할 때뿐이었다.그 호칭은 그들이 한때 얼마나 험난한 늪에서 기어 나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름이었다.지금의 안정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그런데 왜 굳이 육경한이 스스로 곁에 시한폭탄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그것도 머리맡에까지 두는지 소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만.”육경한이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부터 소원은 내 아내야. 미우 그룹의 모든 자원은 소원을 위해 조건 없이 제공될 거다. 그리고 누구든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소종은 말문이 막혔다.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차갑고 무정한 여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대표님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의 안전도 보장해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육경한이 말했다.사무실에서 나간 뒤에도 소종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그는 바로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들을 닭 잡듯이 몰아
“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얼굴이 정말 밝아 보이네요.”“대표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아마 방민아 씨와 관련된 일이겠죠.”“방민아 씨랑 늘 사이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꼭 방민아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그럼 누구 때문인데요?”직원들이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들 그렇게 한가해요?”직원들이 고개를 돌리자 소종이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소 비서님...”소종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일 안 하고 대표님 뒷얘기나 하다니. 다음번에 근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월간 개근 수당 전부 삭감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요.”직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흩어졌지만 모퉁이를 돌아가면서도 계속 속삭였다.“소 비서님, 왜 이렇게 분노하신 거예요? 뭔가 이상한 냄새 나는데.”“대표님 기분은 좋아 보이던데 소 비서님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죠?”“그만해요. 또 걸리면 진짜 큰일 나요. 빨리 일이나 하자고요...”소종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는 방금 홍보 부서에서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30분 전, 육경한은 그에게 방씨 가문과의 결혼 취소에 대한 공식 발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발표는 회사 안팎으로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단순히 대표의 개인사가 아니라 방씨 가문과 여전히 협력 관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터진 폭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만약 방민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소종은 속으로 기도했다.‘제발 방민아가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 줬으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그러나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그는 방민아를 조금은 비웃고 있었다.‘사모님 자리를 꿰찰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패배하다니. 쓸모없네.’그렇게 소종은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육경한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프로젝트 제안서를 수정하고 있었
소원은 밤새 이어진 피곤함에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보니 침대에 남아 있어야 할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몸 아래 깔린 침대 시트도 전날의 짙은 색에서 은은한 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원은 희미하게 기억났다.‘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던 건... 너무 젖어서 못 잘 지경이었으니까.’이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남자의 지나친 무절제함에 화가 치밀었다.‘도대체 이 거래는 누구한테 유리한 거야? 완전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처럼 굴었잖아.’처음의 분위기조차 그저 식전 음식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소원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방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사모님, 깨어나셨습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소원은 곧 대답했다.“네, 깼어요.”“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침묵했다.‘우리가 어제 얼마나 늦게까지 했는지 다들 아는 걸까...’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굳이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10분 뒤에 가져와 주세요.”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한쪽 다리가 휘청이며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속으로 육경한을 욕한 뒤 이를 악물며 욕실로 가 재빠르게 씻었다.방으로 올라온 아침 식사를 보니 준비된 음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죽, 깔끔한 반찬, 그리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보양식 위주의 메뉴였다.소원은 생각보다 배가 고팠는지라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그녀의 속이 가벼워진 건 단순히 음식을 먹어서만이 아니었다.유진이와 아주머니의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음속 큰 짐이 내려간 덕이었다.‘아주머니는 그동안 유진이를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아주머니를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좋은 치료를 받게 해야 해.’그녀는 어제 전문가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아주머니의 몸 상태가 70% 정도는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특히 소원
게다가 남자는 온갖 수를 다 써서 소원을 자극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외쳤다.‘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그의 과감한 행동과 적재적소에서의 신경 자극은 소원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이건 육경한의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아.’그는 그녀의 입술 대신 다른 곳에 입맞춤을 했다.그 덕분에 상황이 더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손목을 고정하던 손을 천천히 놓고는 소원의 목을 지그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수건 아래로 들어갔다.소원이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는 소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그녀가 불편하게 여기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라 눈을 질끈 감았다.‘이 모든 게 거짓이야. 단지 각자 필요한 걸 얻기 위해 몸을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소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육경한은 결코 그녀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그는 그녀의 방어선과 수치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듯 무릎을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건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소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유리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곧게 펴졌다.‘이 사람이 미쳤나? 어떻게 이런 일을...’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욕실 벽면의 반사된 모습을 향했고 흐릿한 증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보였다.그는 마치 새로운 경험을 주는 듯 그녀의 모든 감각을 흔들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분노를 터뜨렸다.“육경한, 진짜 정신 나갔어?”하지만 그는 소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그리고 소원의 입술을 강하게 붙잡고 깊은
소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몸 앞의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그 행동에 육경한은 비웃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감추는 거야? 내가 못 본 데라도 있나?”그의 말투는 낮게 깔리면서도 약간 장난스러워 듣는 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수건을 꽉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당신더러 들어오라 했어?”육경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했다.“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소원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나가줘. 옷 입어야 하니까.”그러자 육경한은 침대 위에 놓인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는 대충 소원에게 던졌다.“그냥 이거 입어. 어차피 내가 못 본 것도 없잖아.”“...”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었는지라 소원은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욕실에서 옷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던진 것은 옷이 아니라 얇고 거의 투명한 속옷 같은 옷이었다. 꼭 가릴 곳만 어렴풋이 가려진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없는 옷이었다.과거에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인간이 정말...!’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은 소리쳤다.“육경한! 이게 뭐야!”그 순간,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육경한이 문턱에 느긋하게 기댔다.“나 불렀어?”소원은 수건을 꼭 붙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부른 거 아니야, 나가!”육경한은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분명 내 이름을 불렀잖아?”소원은 그의 태도에 답답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그건 당신더러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야!”그러나 육경한의 깊은 눈빛이 소원을 강하게 응시하자 그녀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그와 결혼을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선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