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봐도 앞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이에 윤아름은 부모님이 차 사고가 났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갑자기 닥친 슬픔에 스트레스성 실명에 걸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은 윤아름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었다.“... 아악.”잠깐 침묵하던 윤아름이 겁에 질린 듯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고 성대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너무 아팠다. 게다가 아까 억지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더 화끈거렸다.아까 식당에서 목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성대를 상한 건지 소리를 낼 때마다 너무 아팠다.하지만 윤아름은 지금 너무 무서웠다. 눈이 멀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악몽의 심연으로 빠지는 게 두려웠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아름은 의자에 묶인 채 바닥으로 넘어졌다.팔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부러질 듯 아팠고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반신불수가 딱 이런 상태일 것 같았다.이때 누군가가 큰 손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눈을 가렸던 띠를 풀었다. 윤아름은 그제야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해 보였지만 윤아름은 그런 남자의 모습이 우스울 뿐이었다.가면, 다 가면이었다.“느낌은 어때?”원진우는 뻔히 알면서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윤아름에게 그 기억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면서 마치 자선가처럼 웃으며 느낌이 어떠냐고 묻고 있으니 말이다.윤아름은 빠득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악물었다. 원진우의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내고 싶은 기분이었다.“그건 내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니야?”윤아름이 이를 갈더니 말했다.“내 부모님을 죽인 사실을 영원히 잊지 말라고 이러는 거야?”윤아름이 비아냥댔다.“이러지 않아도 기억해. 부모님을 죽인 사람인데 평생 못 잊지.”윤아름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느라 참아왔던 울분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이제는 눈치
윤아름은 색이 바랜 보고서를 읽어봤다. 의사 사인란에는 기성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기성주는 윤씨 가문에서 쓰던 가정 주치의는 맞았지만 이 보고서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려웠다.원진우는 색이 바랜 편지지를 내밀며 말했다.“너희 아버님이 남긴 유언이야.”“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너에게 줄 편지를 쓰기 시작하셨어. 일이 터지기 전에 18통의 편지를 남겼더라.”윤아름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열었다. 필적을 보아하니 아버지가 남긴 편지가 맞았다.한마디 한마디에 윤아름에 대한 미련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들이 떠난 후 아끼는 딸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혹시나 딸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를 더 걱정했다.모든 편지를 다 읽은 윤아름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슬픔에 사로잡혀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원진우는 윤아름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아냥거렸다.“사실 부모님이 죽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해. 적어도 너희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암에 걸렸다는 거 몰랐으니까.”윤아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았다.“부모님을 죽인 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해?”원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니면? 생사가 이미 결정된 사람들인데 생이별을 겪으면서 영원히 고통스러워할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 떠나는 게 낫지 않아? 내가 너 도와준 거라니까.”“아악...”윤아름은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부모님을 해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애초에 이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면 이 남자가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을 죽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부모님이 정말 암에 걸렸다 해도 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작별할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시간에 함께 하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었을 테고 갑작스럽게 생이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는데 아쉬움만 남았으니 평생 너무 안타까웠다.“아름아, 넌 너무 나약해.”
원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더니 조용히 윤아름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만끽했다. 윤아름이 단단히 겁을 먹어야만 다시 도망갈 엄두를 못 낼거라고 생각했다.윤아름은 원진우가 꺼낸 블루 하트 얘기와 진우희의 찢어진 입을 보며 뭔가 알아챘다.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윤아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위액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지어 피도 섞여 있었다.하지만 원진우의 징벌은 끝나지 않았다. 원진우는 육체적인 벌보다 마음의 벌이 더 잊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진우가 원하는 것도 윤아름이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고 다시는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원진우는 다소 차가워 보이는 얇은 입술로 차갑게 말했다.“곽경천? 아들이지? 아껴준 보람이 있더라? 진우희를 찾아내면 뭐 해. 그때는 진우희가 이미 죽고 없는데.”“건드리지 마.”윤아름이 미친 것처럼 원진우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건드리면 내가 당신 죽일 거야.”하지만 윤아름은 이내 원진우에 의해 바닥에 제압당하고 말았다.원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인한 말을 이어갔다.“진우희를 찾느라 총알을 맞았나?”“...”윤아름은 소리를 지르려 해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암에 걸린 부모님도 원진우 손에 죽었고 그녀를 위해 정보를 전달하려던 진우희도 죽었고 그녀를 찾으러 다니던 곽경천도 총알을 맞고 생사를 알 수 없었다.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를 도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될 불행을 당한 것이다.구슬을 품은 것이 그 죄라는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한 건 다 윤아름 때문이었다.윤아름은 몸을 천천히 웅크리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이 살짝 줄어들 것 같았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그 고통은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한 원망에서 온 것이었다.윤아름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만 가져다주는 자신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남준이 예상했던 것처럼 곽경천에게 총을 쏜 사람은 곽경천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지 정말 목숨을 앗아가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더는 조사하지 말라고, 아니면 피를 볼 것이라고 에둘러서 경고하고 있었다.하지만 곽경천은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다. 이런 행보를 보인다는 건 진실과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윤아름을 찾을 희망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윤혜인은 시간만 나면 진우희의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곽경천을 보며 휴식을 더 취하라고 타일렀다. 일어난 지 고작 며칠이었다. 총상을 입었으니 두세 달은 족히 몸조리해야 할 것 같았다.곽경천은 겉으로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돌아서면 몰래 배남준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토론했다.그들은 눈길을 진우희가 돌보던 몇몇 가문으로 돌렸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일제히 원진우에게로 향했다.하지만 그들은 원진우와 윤아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곽경천은 곽진명에게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곽진명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이야기를 들은 윤혜인과 곽경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원지민의 셋째 삼촌과 어머니 윤아름이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정말 그런 거라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윤아름의 실종이 원진우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윤아름이 지금 원진우에 의해 북안도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곽경천과 윤혜인은 너무 기뻤다.드디어 엄마 윤아름을 만날 날이 다가온 것이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주한 사실은 잔인했다. 어떻게 원진우의 별장을 수색할지가 문제였다.북안도는 서울과는 달랐다. 아무리 서울이라고 해도 확실한 증거와 검찰에서 발부한 수색영장이 없으면 용의자의 집을 수색할 수 없었다. 북안도는 무법천지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북안도는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법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택에 침입한 자들을 그대로 사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만약 억지로 진입한다면 무력 충돌이 있을 수밖
엄마 윤아름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였다.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이신우는 연락을 받은 날 밤, 제일 빠른 속도로 북안도에 도착했다.이신우는 그간 외국에서 쌓은 인맥이 대단했다. 복잡한 입국 절차도 이신우는 프리패스할 수 있었다.아침이 되자 이신우는 윤혜인이 잠시 지내는 별장에 도착했다. 이신우가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 몰랐던 윤혜인은 하마터면 배남준과 쇼윈도 부부라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다행히 이신우의 신경은 온통 윤아름에게 빼앗겨 있어 왜 신혼부부인 윤혜인과 배남준이 같이 지내지 않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이신우는 곽경천이 준 윤아름의 자료를 가지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3일 뒤에야 다시 나타났다.곽경천과 윤혜인을 찾아온 이신우가 이렇게 말했다.“별장은 조사해 봤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곳곳에 원진우가 혼자 사는 흔적만 있었지 여성이 생활한 흔적이나 생활용품은 없더라고요.”곽경천과 윤혜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이신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혹시 누가 아름... 콜록콜록...”이신우는 말실수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마른기침하며 말했다.“사모님 본 적 있나요?”곽경천이 고개를 저었다.“본 사람은 없어요.”곽경천도 조사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약을 사 간 것을 기반으로 한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윤아름을 본 사람은 없었다.그렇다는 건 윤아름의 생사도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일은 다시 답보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원진우의 저택은 다른 곳과 달랐다. 이신우가 한번 들키지 않고 들어갔다고 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이때 이신우는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이준혁이 걸어온 전화였다.이신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준혁아.”이준혁은 이신우가 윤아름의 행방을 찾는다는 걸 알고 중요한 단서를 하나 제공했다.“원진우의 저택은 대부
단추형 추적기였다. 전에 결혼식 답례품에 있던 제비 자수에 심은 것이었다.매 답례품에 빼놓지 않고 다 심어놓았을뿐더러 잘못 터치할까 봐 복잡한 공법으로 수놓은 것이었기에 윤아름만 어떻게 푸는지 알 수 있었고 그래야 추적기를 촉발할 수 있었다.곽경천은 어깨에 입은 상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노트북을 꺼내 추적기의 위치를 찾아봤다. 5초 만에 알아내 위치는 원진우의 저택이었다. 저택에서 사람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지하실일 것이다.지하실 입구만 찾아내면 윤아름을 찾을 수 있다.이신우는 바로 계획을 세우고 원진우의 저택에 잠입할 준비를 했다.잠입 계획을 실시하는 날이 되었지만 이신우는 들어갈 수 없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원진우가 며칠 전 북안도에서도 유명한 황실 능묘의 장인을 불러와 별장에 그 유명한 ‘불모래’를 설치했다.불모래는 말 그대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별장 전체에 불이 달리기 쉬운 모래가 쏟아지면서 화염에 휩싸일 수 있는 물질이었다.원진우는 저택을 아예 능묘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이신우가 주저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들어간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뿐만 아니라 원진우에 의해 지하실에 갇힌 윤아름의 목숨도 위험해졌다.원진우의 행보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불모래를 심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이는지 알 수 없었다.사람을 찾으러 들어가는 일은 일단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이신우는 연세가 있는 장인들을 찾아가 불모래의 특점을 알아보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며칠을 연구해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돌파구라면 바로 원진우를 밖으로 유인한 후에 집으로 잠입해 신속하게 조사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문제는 원진우가 이미 연속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누가 초대하든 거절한다는 것이었다.그럴수록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혜인도 이 일도 연속 며칠간 불안해했다.윤혜인의
윤혜인은 눈을 의심했다. 이준혁은 지금 국내에서 재활 중이라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원래대로라면 재활 훈련을 한 달 동안 더 받아야 했다. 그래도 다 낳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달간 조심하면서 힘이 들어가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뭘 그렇게 봐?”배남준은 윤혜인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이렇게 물었다.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왜 다른 사람을 이준혁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요즘 엄마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를 떠올릴 새가 거의 없었다. 좋은 징조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누군가를 천천히 잊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길을 거닐다가 비슷한 그림자를 보고 심장이 저릿해질 수는 있다.식당에 도착하니 윤혜인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배남준은 친절하게 손수건을 건네며 땀을 닦으라고 하더니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했다. 거의 해산물이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북안도는 해산물 자원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임신한 관계로 혹시나 아이에게 영향 줄까 봐 늘 조금씩만 먹었다.하지만 오늘 주문한 해산물은 배남준이 다 계산해서 주문한 것이라 임산부도 적정량을 지켜서 먹으면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시름 놓고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껍질이 있는 해산물은 까기가 번거로웠다. 배남준이 윤혜인에게 새우 몇 개를 까주더니 다른 것들도 골라서 윤혜인에게 집어줬다. 이내 윤혜인의 앞접시는 먹기 좋게 까놓은 해산물로 가득했다.윤혜인은 약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오빠, 오빠도 먹어요. 난 이거면 됐어요.”배남준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껍질을 까서는 윤혜인의 앞접시에 쌓아 올렸다.“오늘은 많이 먹어도 돼. 산후조리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먹는다.”윤혜인의 예정일은 아직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요즘 제일 큰 고민거리라면 바로 윤혜인이 예정일을 맞아 국내로 들어가는 게 걱정되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국내까지
솔로 기간만 30년인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가정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다행히 벗어났어. 나쁜 습관은 없을 거야. 바람피우는 일도 없을 거고. 한평생 너만 바라보면서 살게. 만약 우리가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가정을 위한 삶을 살 거야.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지만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지 열심히 공부해 볼게. 아이는 네가 갖고 싶지 않다면 안 가져도 돼. 아름이, 초롱이, 그리고 파랑이까지, 그 아이를 유일한 내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게.”초롱과 파랑은 윤혜인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지은 태명이었다.이름보다는 진지한 감이 좀 떨어질 수 있지만 윤혜인은 어릴 적 그녀를 길러준 외할머니가 간단한 이름일수록 더 키우기 쉽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시골에서 가끔 남자아이 태명을 똥강아지라고 짓고 여자아이 태명을 꼬물이라고 짓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낳아서 잘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윤혜인도 이번에는 미신을 믿기로 하고 아주 일반적인 태명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사하고 건강한 삶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솔직히 배남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평생 자기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윤혜인의 세 아이를 그의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겠다는 게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심은 아니었다.윤혜인은 전에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더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윤혜인은 소원을 떠올렸다. 사랑을 좇다가 날개가 꺾이고 나락으로 빠져 허우적댔지만 지금은 사랑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세 아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키울 자신은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이 빠지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성격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윤혜인이 고민하자 배남준이 말했다.“혜인아, 지금 당자아 대답할 필요 없어.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잖아. 일단 눈앞에 놓인 관문부터 해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