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서더니 그는 금고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여기에 제가 쓴 편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혜인이에게 같이 전해줘요.”하지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지 않고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던졌다.“대표님, 혹시 저한테 숨기고 있는 다른 일이 있는 건가요?”“아까부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리십니까? 대표님은 무슨, 말씀 편하게 하세요. 다른 일은 없고 전 그저 미리 대비하는 것뿐입니다.”이준혁은 무표정하게 답했다.남자는 몇 초간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거니 그래도 예의를 차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혜인 씨는 좋은 사람이예요. 그건 저도 알 수 있어요.. 예전부터 늘 대표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대표님 건강도 아직 회복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굳이 모든 길을 끊을 필요는 없어요.”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이후 그는 자신의 바짓자락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내가 아직도 선택지가 있어 보이나요?”원래 탄탄했던 그의 종아리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이렇게 마른 다리로 키가 190에 가까운 남성의 몸을 지탱했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웠다.게다가 다리 위로는 짙은 자주색과 보랏빛으로 부어오른 혈관이 뒤덮여 있었고 독이 퍼지면서 그 혈관들은 더욱 검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이 다리는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 자체로 섬뜩했다.심지어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본 맞은편의 남자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준혁의 표정은 허망함을 지나 더 이상 담담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졌다.“저는 혜인이에게 행복을 줄 수 없어요. 차라리 깨끗이 놓아주는 게 낫습니다.”맞은편 남자의 표정도 침울해졌고 더 이상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많은 일은 직접 겪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윤혜인은 아버지와 며칠간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해외 온라인 운영 회사의 일로 바빠졌다.그녀는 몇 년간 곽씨 가문에서 건강을 잘 챙겼기 때문에 임신 초기
이렇게 해서 비행기는 출발 두 시간여 만에 서울 국제공항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구급차가 환자를 데려간 후, 윤혜인은 이제 다시 비행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승무원장이 또다시 사과하며 다가와 말했다.“승무원이 기내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비행기 안전 점검을 진행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는 아마 출발이 어려울 거고 내일 아침에나 다시 일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윤혜인은 멍해졌다.‘지금 오후인데... 그 말은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건가?’도지훈 역시 어이없어하며 당황해했다.항공사가 이렇게까지 불안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곧바로 그는 곽경천에게 연락해 항공사 대표와 연결하겠다고 했다.곽씨 가문은 육상과 해상 운송 사업뿐만 아니라 국제 항공 사업도 했기에 기타 항공사들의 대표들과 잘 아는 사이였다.하지만 윤혜인은 도지훈을 말렸다. 전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안전이 중요한 상황에서 누구도 방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그렇게 해서 승무원장의 주선으로 일등석 승객들에게 7성급 호텔 스위트룸이 마련되었다.하지만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전체를 예약한 윤혜인은 블랙카드 소유자이자 항공사의 귀빈이었다.승무원장은 매우 정중하게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사실 저희 항공사에서는 귀하께 대통령 스위트룸을 제공해드려야 하는데 오늘 밤에는 대통령 스위트룸과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모두 한 분의 결혼식 때문에 예약되어있어서요... 대형 스위트룸들이 모두 그분의 귀빈들을 위해 쓰이고 있거든요.”윤혜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이제야 생각났다. 승무원이 언급한 그 사람은 아마도 이준혁일 것이다. 며칠 동안 그녀는 일에 몰두하며 일부러 잊으려 했고 그래서 정말로 이준혁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그런데 이렇게 운명처럼 그의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에 묵게 될 줄이야.도지훈 역시 이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승무원이 계속 설명하려 하자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다른 호텔로 예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희가 직접 예약해도 상관없습
윤혜인은 앞쪽에 있는 여성의 하얗게 칠한 옆얼굴과 웨딩드레스 자락만 보일 뿐이었다.그러나 어렴풋이 그 신부가 원지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아마도 웨딩드레스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무기인 듯했다.원지민의 창백했던 얼굴이 이 순간 고급스럽게 변해 보였고 옆모습에서조차도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 느껴졌다.원지민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원지민의 성격이라면 분명 이 기회를 틈타 윤혜인을 비꼬며 몇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더니 조용히 비서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만약 그 얼굴이 원지민이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원지민이 눈앞에서 윤혜인을 비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다니 정말 드문 일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웨딩드레스의 끝자락도 보이지 않게 된 순간, 윤혜인은 삶이 참으로 꿈같다고 느꼈다.이준혁에게 쫓겨 서울을 떠난 후, 그녀는 다시는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녀가 잠시 멍해 있던 순간, 조금 전에 소리치던 비서가 성큼성큼 다가와 매우 거칠게 말했다.“당신 말이야. 왜 아직도 핸드폰을 들고 있어?”윤혜인이 좌우를 둘러봤지만 자신과 도지훈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게다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자신뿐이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비서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윤혜인은 설명했다.“저는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그냥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하지만 비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혜인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도지훈이 그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러고는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며 매섭게 말했다.“손 치우세요!”“너!”비서는 손목이 아픈 듯 화가 나서 지나가던 호텔 직원에게 소리쳤다.“여기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오늘 결혼식에 핸드폰 들고 들어오는 거 금지라면서요?”직원은 윤혜인을 잠
말을 마친 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그 후로는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저녁 식사도 방으로 배달되어 왔다.식사를 하면서 윤혜인은 습관적으로 경제 채널을 켰는데 화면에 바로 이준혁의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 나왔다.그녀는 잊고 있었다. 이곳은 해외의 경제 채널이 아니었다.지금 서울의 모든 채널이 아마도 그 남자의 전례 없는 결혼식 현장을 방송하고 있을 것이다.화면에 나오는 건 점심시간의 감사 연회로 손님들이 넘쳐나고 현장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꽃바다로 빛났다.이 결혼식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이 분명했다.잘 차려입은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신부는 입구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연단으로 향했다.여기까지 보고 나서 윤혜인은 더 이상 볼 마음이 사라졌다.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현재 임신 중이니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고 괜히 스스로 불편함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감정이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법, 상대의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된 것만으로 그녀는 꽤나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이 이제 막 TV를 끄려는 순간, 화면 속의 배경음이 갑자기 딱 하고 꺼졌다.곧 단정하고 세련된 하얀 정장 차림을 한 한구운이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오늘 정말 기쁜 날이군요.”한구운은 신랑 신부를 바라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이씨 집안을 대표하여 형님께 축하드립니다.”순간, 현장이 술렁였다.‘이씨 집안을 대표한다고? 무슨 뜻이지?’그동안 몇 번의 소란이 있었지만 이선 그룹의 명성을 위해 그런 소식들은 모두 차단되었다.그래서 약간의 소문은 있었을지 몰라도 현장에 있던 많은 협력업체들은 한구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사람들은 궁금해했다.‘저 사람이 왜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거지?’높은 자리에 서 있던 이준혁의 표정은 불만으로 가득했다.한구운과 이천수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몇몇 주주들 또한 입장이 금지되었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청첩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이
원지민은 슬쩍 이준혁을 훔쳐보며 속으로 크게 놀랐다.‘왜 준혁이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하지만 그 놀라움도 잠시일 뿐이었고 곧 다가올 장면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특히 윤혜인이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서 이 모든 걸 몰래 보고 있을 생각에 속이 시원해졌다.아까 윤혜인을 비꼬지 않은 이유는 바로 곧 있을 이 장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준혁이 사람을 붙여 원지민을 감시하며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원지민은 윤혜인을 비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윤혜인이 서울에 돌아온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담담한 남자의 표정을 보니 그가 내린 처벌이라는 것이 생각났다.그 처벌은 고작 윤혜인을 해외로 내쫓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처벌이라는 거야? 내가 받은 처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 괴물 같은 아이를 내 침대 곁에 두어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게 하는 게 더 끔찍하다고.’이틀 연속으로 원지민은 임호가 온몸이 불에 타서 끔찍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목을 졸라대는 꿈을 꾸었다.사실 아이가 이준혁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원지민은 그 아이를 없애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가 이준혁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기에 잠시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그러나 기회가 되면 당장 그 아이를 없애버리려는 마음은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결국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남의 아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래서 원지민은 무리하게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몸을 해쳤다. 아이를 없앨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원지민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들을 모두 이준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으로 합리화했다.자신이 이미 이만큼을 희생했는데 만약 이준혁을 얻지 못한다면 너무 큰 손해라고 느꼈다.그래서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그 누구보다도 잘생긴 이준혁의 얼굴을 바
정말이지 하늘이 한구운을 돕고 있었다.한구운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을 이었다.“오늘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어떤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선의로 입양했을 뿐인데 이 혈연관계가 없는 형이라는 사람은 오히려 저를 배제하고 제 자리를 차지하려 들고 있어요. 저와 아버지를 내쫓으려는 자가 바로 저 사람입니다.”그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준혁을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나요. 이준혁 씨?”그 ‘이준혁 씨'라는 호칭은 극도로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들렸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거나 수치심에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고 마치 자신이 지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듯했다.한구운은 자신만만한 상태였으나 이 순간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이준혁의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은 불안해졌다.‘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지?’이때, 이천수가 무대로 올라오며 입장을 밝혔다.회사 내에서 이준혁과 다툼을 벌였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준혁아, 비록 우리가 피는 안 섞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너를 아들로 여기며 가르쳐 왔다. 네가 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구운이를 그렇게 잔혹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니? 그 방법은 너무 가혹했다!”이천수는 눈물을 훔치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도 내 잘못이 크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난 너에게 정말 큰 실망을 했다.”이천수의 연기는 마치 철이 들지 않는 자식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애타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준혁은 정말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법적 규정상으로도 이준혁은 이선 그룹을 상속받을
이준혁의 말에 이천수는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도 할 수 없이 너를 상대로 재산 침탈 혐의로 고소할 수밖에 없어!”“그래요. 이천수 씨 말대로 저희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으니 제가 이천수 씨를 친척이라고 여길 이유도 없죠.”이준혁은 차갑게 말했다.이천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왜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를 쓰는 거지? 그럴 리가 없어. 그 당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와 아저씨뿐인데... 절대로 제삼자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왜 저렇게 확신하면서 말하는 거지?’이태수는 평생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왔다.그가 이천수에게 절대 이준혁의 출생 비밀을 외부에 퍼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결코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주진희는 이태수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고 그 사건에 개입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게 다였다.바로 그 비밀 때문에 주진희는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고 이천수는 그가 오래전에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주진희가 그 비밀로 이천수가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이준혁을 탄핵하려던 회의에서 그가 왜 패배하고 굴복했겠는가?주진희는 노회한 이태수에게서 배운 늙은 여우였다. 이천수는 그들 둘 모두가 극도로 교활하다고 생각했다.만약 이태수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이천수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하지만 이태수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이천수는 그를 이길 확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태수가 세상을 뜬 후에야 이선 그룹에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침투시킬 수 있었다.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렸다.이태수가 이천수의 야망을 눈치챘는지 회사 내에서 이천수가 큰 결정을 내리는 데 관여하지 못하도록 차단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태수조차 자신의 급작스러운 병세를 예측하지 못했고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아
이준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과분한 거 맞죠. 당연한 겁니다.”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이천수의 표정이 굳었다.더 이상 부처님 같은 연기는 할 수 없었다. 속이 끓어오르자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이 빌어먹을 자식...”하지만 금방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몇 번 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고쳤다.“준혁아, 네가 이렇게 끝까지 고집을 부리니 나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너를 아들로 대하려 했지만 네가 나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으니 나도 더는 너에게 아버지 행세를 할 수 없다. 여기서 선언하마. 이제 너와 이선 그룹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앞으로 우리는 서로의 길을 가고 남처럼 지내자!”그 말을 마치며 이천수는 거짓으로 눈물을 훔치며 더욱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간신히 짜낸 악어의 눈물이 마치 진심처럼 보였다.사람들은 이천수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고 그의 사주를 받은 몇몇 사람들이 분위기를 몰아갔다.“이 대표 너무하는군. 어떻게 그렇게 은혜를 저버릴 수 있어? 회장님이 이 대표를 몇십 년이나 길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맞아. 이번엔 이 대표가 잘못한 거야. 나도 자네가 젊고 유능한 인재라 생각했는데 도덕과 효심이 부족하군.”“천재라 해도 마음이 나쁘면 결국 사람들한테 외면받게 되지.”이천수는 이런 말들이 들려오자 마치 신이 돕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경계심이 풀렸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준혁아, 앞으로는 우리 이씨 집안의 도움이 없으니 지민이에게 잘 의지해야 할 거다. 그래도 그나마 굶을 걱정은 없겠지.”하지만 이준혁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천수는 그가 사람들의 말에 기가 눌려 침묵한 것으로 생각하고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그는 이선 그룹의 주인으로서 권위를 부여받은 듯 고개를 들어 명령했다.“오늘 결혼식이 끝난 후로 더 이상 이씨 집안의 본가에 돌아오지 마라. 어차피 너는 이씨 집안의 자손이 아니니 그곳은 너에게 맞지 않다. 오직 자격 있는 사람만이 그곳에 머물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