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은 이준혁의 말을 듣고 순간 얼어붙었다.아이를 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내 아이는 이미 죽은 거 아니었어?’그러나 이준혁이 손뼉을 치자마자 주훈이 흰 장갑을 끼고 검은 천으로 덮인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그 순간, 원지민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무언가를 직감한 듯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오지 마! 제발 오지 마!”하지만 주훈은 원지민의 말을 무시하고 이준혁의 명령만을 따르며 상자를 그녀 앞으로 가져갔다.천이 걷히자 원지민은 그 안에 든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아아아아!!!”짧은 침묵 후, 그녀는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상자 안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아기라고 부를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네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손가락 얼굴은 둥글지만 코와 입이 없는 흉측한 형상이었다.이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숨을 쉴 수 없었고 곧바로 질식해 죽을 운명이었다.원지민은 이 광경을 보자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 역겨움과 혐오가 담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신 4D 초음파 검사를 통해 그 아이의 기형을 미리 본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의사들은 원지민에게 이 아이가 호르몬 약물 복용으로 인해 변형되었다고 말했다.임신 후에도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그녀는 계속해서 호르몬 약물을 복용했고 이로 인해 아이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특히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된 이후, 원지민은 약물 복용에 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해 더욱 많은 약물을 복용했고 결과적으로 아이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아이의 체내에는 너무 많은 수은이 축적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했다.이러한 아이가 배 속에 계속 있었으니 원지민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원지민은 이 아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윤혜인을 이용해 아이를 없애려는 결심을 굳혔다.병원 의사들도 이미 그녀에게 매수되어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즉시 비밀
원지민은 처음으로 이준혁에게 두려움을 느꼈다.원래는 병약해져 죽어가야 할 이준혁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존재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이 남자한테는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더 있는 거지?’긴장감에 원지민은 주먹을 꽉 쥔 채 애써 미소를 지어 분위기를 가볍게 넘기려 했다.“준혁아, 농담이지? 이런 농담은 좀...”하지만 이준혁의 눈은 차갑게 반짝였다.“농담 아니야. 내가 네 아들의 죽음을 억울하지 않게 해줬잖아. 혜인이는 곧 서울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그가 하는 말에서 묻어나는 냉기를 감지할 수 있었기에 원지민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분명히 느꼈다.만약 지금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하면 이준혁은 주저 없이 자신의 목을 조를 것이라는 걸 말이다.때문에 원지민은 최대한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이 일은 준혁이 네가 알아서 해.”이준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미소 속에는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원지민, 정말 이렇게 순순히 행동했었다면 넌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거야.”원지민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공포에 떨며 물었다.“이준혁, 대체 뭘 하려는 거야?”그의 차가운 태도가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곧 알게 되었다.이준혁의 얼굴은 상냥했던 표정에서 급격히 차갑게 변했고 목소리마저 얼음처럼 냉정했다.“원지민, 난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어. 하지만 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어.”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처럼 변하며 그는 무자비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여기서 조용히 쉬어. 결혼식이 열리는 날까지.”그러자 원지민은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상 그녀를 감금하겠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이준혁! 난 네 신부지 죄수가 아니라고! 날 이렇게 가둬둘 순 없어.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하면 우린 결혼 못 해!”원지민은 이 말이 자신에게 있어
‘임호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아이를 지키려고 했었잖아. 이제 이 괴물 같은 아이가 임호와 함께 저승길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황천길에서라도 둘이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 어쩌면서 좋은 일일지도 몰라.’하지만 마음속에 남은 불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아이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건 사실이지만 원지민은 손해 보는 거래는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의 아이가 죽었다면 반드시 그 대가로 몇 배의 생명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결혼식이 끝나면 찰스 가문을 통해 윤혜인과 그 가족을 전부 없애버릴 계획이었다.‘이준혁... 그 여자를 보호하겠다고?’원지민은 비웃었다.서울에서는 찰스 가문의 손이 미치지 못했지만 외국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윤혜인이 출국하면 원지민의 한 마디에 그녀는 즉시 사라질 운명이었다....병원에서 돌아온 윤혜인은 지쳐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곽경천은 소식을 듣고 동생을 찾으러 왔지만 깊이 잠든 그녀를 깨울 수 없어 조용히 기다렸다.새벽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윤혜인은 소파에서 잠든 곽경천을 발견했다.윤혜인은 조용히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에 곽경천이 깨어나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혜인아!”그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윤혜인은 오빠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서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오빠, 나 여기 있어.”곽경천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괜찮아?”그러자 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응. 괜찮아.”하지만 곽경천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그 여자 너를 몇 번이나 해치려 했어. 오빤 그냥 두지 않을 거야.”분노하는 곽경천을 달래며 윤혜인이 말을 이었다.“오빠, 그러지 마. 우리 그 사람들이랑 싸우지 말자. 서울은 우리 땅이 아니야. 그냥 떠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버지도 연로하셨는데 굳이 계속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윤혜인은 조용히 덧붙였다.
지금 모든 것이 변해버린 상황에서 윤혜인은 이 다리를 다시 한번 건너기로 결심했다.이제 이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말이다.다리 위에 서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윤혜인의 눈에는 멀리 있는 이선 그룹의 거대한 네온사인이 들어왔다.‘이선’이라는 두 글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정말 멋지지 않아?”한 남자의 목소리가 윤혜인의 귀에 들려왔다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한구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윤혜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하지만 한구운은 윤혜인의 표정 변화를 전혀 개의치 않고 깊고 검은 눈으로 빛나는 두 글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나도 여기 서서 보는 걸 좋아해. 여기에 서면 저 고층 건물을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거든.”곧 윤혜인이 돌아서서 가려 하자 남자는 그녀의 팔을 단번에 붙잡았다. 그러자 윤혜인이 힘껏 팔을 빼려 하며 소리쳤다.“이... 이 손 놔요!”하지만 한구운은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하게 윤혜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한구운... 으음...”그는 윤혜인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으며 남은 말을 삼켜버리도록 했다.그 어두운 눈빛에는 광적인 기운이 감돌았다.“흥분하지 마. 난 그저 너와 대화하고 싶을 뿐이니까.”윤혜인은 숨이 막혀서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애초에 남녀 간의 힘의 차이는 너무나 컸고 그녀는 몸부림칠수록 체력이 고갈될 뿐이었다.그래서 윤혜인은 최대한 몸에 힘을 풀며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한구운은 윤혜인이 얌전해진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어릴 때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말은 바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었어. 왜 저 사람은 떳떳하게 소위 말하는 부자의 삶을 누리는데 나는 누구에게나 미움받고 쥐새끼처럼 숨어 살아야 하는 사생아로 살아야 했을까?”윤혜인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손을 가방 쪽으로 움직였다.한구운은 술을 많이 마신 듯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약
윤혜인은 팔목을 세차게 들어 올려 한구운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지지직...”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나며 한구운은 짧은 신음을 내뱉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윤혜인은 손에 들린 작은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지금처럼 한구운 씨는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남을 억누르고 강자처럼 행동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절대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한구운은 윤혜인이 자신을 전기 충격기로 공격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전혀 대비하지 못한 그는 온몸의 힘이 빠져 몇 번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을 뿐 그녀를 제어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가슴을 부여잡고 한구운은 창백한 얼굴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그 남자는? 이준혁이 지금 널 이렇게 대하는데도 넌 이준혁이 일하는 곳을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거야? 이준혁이 그렇게도 좋아?”그러자 핏기조차 없는 얼굴로 윤혜인이 고개를 숙였다.“이준혁 씨와는 이미 끝났어요. 내가 여기 서 있는 건 그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예요...”그 말만 남기고 윤혜인은 돌아서서 떠나버렸다.곧 한구운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나 그를 부축했다.경호원들은 떠나는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도련님, 저분을 막을까요?”“그럴 필요 없어.”한구운은 전기 충격으로 인한 가슴의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자 몸을 세우며 멀리서 빛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그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움과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지금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면 그때 그 몰락한 자가 무엇을 가지고 자신과 맞설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여자는 돈과 시간만 들이면 언제든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어.’한구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이 중요한 순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었다.
“네, 문제없습니다. 내일 파리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이준혁은 멀리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듯 그곳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그때 바깥에서 상황 좀 봐줘.”주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대표님, 그래도 제 생각엔 제 옆에 계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현재 이준혁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주훈은 그를 잠시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다가오는 결혼식을 앞두고 주훈은 바깥일을 마무리하느라 밤낮없이 일했고 이제는 그 중요한 순간에 이준혁의 곁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지난번 폭탄 사건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필요하다면 주훈은 이준혁을 대신해 기꺼이 희생할 생각이었다.주훈이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하나는 이준혁이 그를 발굴하고 키워준 은인이라는 점에서였다. 그 누구도 주훈을 믿지 않던 시절 이준혁은 그를 직접 길러냈다.다른 하나는 이준혁의 지혜와 능력이었다.이준혁의 머리는 마치 금융이라는 폭풍 속에서도 안정적인 항해를 이끄는 배와 같았고 그 덕분에 한국의 금융 시장이 외국인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높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국가의 명예를 세우고 외세에 무시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주훈이 지켜온 신념이었다.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국가에 기여하고 있는 이준혁 같은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괜찮아. 바깥도 중요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엔 내가 불안하니까.”이준혁이 환한 빛 속에 앉아 있었지만 주훈은 그가 어느 순간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 느낌은 잠시였고 이준혁의 말에 금세 설득당했다.이준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내부는 W에게 맡길 거야.”W는 이준혁의 해외 프로젝트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었고 주훈과 맞먹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게다가 W는 위험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위기 대처 능력은 오히려 주훈보다 더 뛰어났다.주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준혁의 지시에 따랐다.“알겠습니다, 대표님.”“이제 나가봐.
잠시 멈춰서더니 그는 금고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여기에 제가 쓴 편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혜인이에게 같이 전해줘요.”하지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지 않고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던졌다.“대표님, 혹시 저한테 숨기고 있는 다른 일이 있는 건가요?”“아까부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리십니까? 대표님은 무슨, 말씀 편하게 하세요. 다른 일은 없고 전 그저 미리 대비하는 것뿐입니다.”이준혁은 무표정하게 답했다.남자는 몇 초간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거니 그래도 예의를 차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혜인 씨는 좋은 사람이예요. 그건 저도 알 수 있어요.. 예전부터 늘 대표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대표님 건강도 아직 회복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굳이 모든 길을 끊을 필요는 없어요.”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이후 그는 자신의 바짓자락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내가 아직도 선택지가 있어 보이나요?”원래 탄탄했던 그의 종아리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이렇게 마른 다리로 키가 190에 가까운 남성의 몸을 지탱했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웠다.게다가 다리 위로는 짙은 자주색과 보랏빛으로 부어오른 혈관이 뒤덮여 있었고 독이 퍼지면서 그 혈관들은 더욱 검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이 다리는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 자체로 섬뜩했다.심지어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본 맞은편의 남자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준혁의 표정은 허망함을 지나 더 이상 담담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졌다.“저는 혜인이에게 행복을 줄 수 없어요. 차라리 깨끗이 놓아주는 게 낫습니다.”맞은편 남자의 표정도 침울해졌고 더 이상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많은 일은 직접 겪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윤혜인은 아버지와 며칠간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해외 온라인 운영 회사의 일로 바빠졌다.그녀는 몇 년간 곽씨 가문에서 건강을 잘 챙겼기 때문에 임신 초기
이렇게 해서 비행기는 출발 두 시간여 만에 서울 국제공항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구급차가 환자를 데려간 후, 윤혜인은 이제 다시 비행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승무원장이 또다시 사과하며 다가와 말했다.“승무원이 기내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비행기 안전 점검을 진행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는 아마 출발이 어려울 거고 내일 아침에나 다시 일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윤혜인은 멍해졌다.‘지금 오후인데... 그 말은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건가?’도지훈 역시 어이없어하며 당황해했다.항공사가 이렇게까지 불안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곧바로 그는 곽경천에게 연락해 항공사 대표와 연결하겠다고 했다.곽씨 가문은 육상과 해상 운송 사업뿐만 아니라 국제 항공 사업도 했기에 기타 항공사들의 대표들과 잘 아는 사이였다.하지만 윤혜인은 도지훈을 말렸다. 전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안전이 중요한 상황에서 누구도 방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그렇게 해서 승무원장의 주선으로 일등석 승객들에게 7성급 호텔 스위트룸이 마련되었다.하지만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전체를 예약한 윤혜인은 블랙카드 소유자이자 항공사의 귀빈이었다.승무원장은 매우 정중하게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사실 저희 항공사에서는 귀하께 대통령 스위트룸을 제공해드려야 하는데 오늘 밤에는 대통령 스위트룸과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모두 한 분의 결혼식 때문에 예약되어있어서요... 대형 스위트룸들이 모두 그분의 귀빈들을 위해 쓰이고 있거든요.”윤혜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이제야 생각났다. 승무원이 언급한 그 사람은 아마도 이준혁일 것이다. 며칠 동안 그녀는 일에 몰두하며 일부러 잊으려 했고 그래서 정말로 이준혁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그런데 이렇게 운명처럼 그의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에 묵게 될 줄이야.도지훈 역시 이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승무원이 계속 설명하려 하자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다른 호텔로 예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희가 직접 예약해도 상관없습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원이 얼른 말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저 배가 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친구 차 타고 왔어요.”원보경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어느 병원에 있어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아니에요.”소원은 원보경도 술을 적지 않게 마셨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수액만 다 맞으면 집으로 갈 거예요.”“어떻게 그래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원보경은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소원이 말했다.“조금 이따 친구가 데려다줄 거예요. 여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경 씨 도착할 때쯤이면 진작 수액 다 맞았을 거예요. 병원에서 기다릴 바엔 차라리 두 사람 다 집에 가서 쉬는 편이 나아요.”원보경은 그제야 포기하고 여러 번 당부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소원은 아직도 남아있는 주석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도 얼른 들어가요. 많이 나아져서 이제 혼자 들어가도 돼요.”소원이 아까 그렇게 말한 건 수고한 원보경이 여기까지 오는 걸 막으려고 그랬다.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주석훈이 말했다.“그럴 순 없죠. 친구한테 나라는 친구가 이따 태워다 준다고 말했는데 약속 지켜야죠. 이따 바래다줄게요.”소원은 주석훈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주석훈은 성격이 밝았기에 같이 있으면 꽤 편했다.“그래요.”소원도 이미 신세를 진 이상 끝까지 신세 지기로 마음먹고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소원은 속으로 주석훈을 위해 좋은 선물을 하나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금으로 주면 너무 속물 같아서 주석훈이 받지 않을 것 같았다.게다가 주석훈은 확실히 이미 협의한 비용 외에 다른 비용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소원도 그냥 넘어가긴 마음이 걸렸다.수액이 끝나자 주석훈이 간호사를 불러와 바늘을 빼고는 휠체어를 끌어왔다. 소원은 앞에 놓인 휠체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이... 이건 필요 없지
소원은 운전기사의 성격이 이렇게 불같을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운전기사를 하나 뽑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임신한 관계로 차를 직접 운전할 수가 없어 맨날 차를 잡고 다녔는데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차를 다시 잡으려는데 어떤 차가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소원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소원 씨? 소원 씨가 왜 여기 있어요?”소원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 주석훈을 만날 줄은 몰랐다. 쪽팔리지만 택시 기사가 길가에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는 얘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주석훈이 씩씩거리며 말했다.“해도 해도 너무하네. 어떻게 소원 씨를 길가에 버려두고 가요. 위험한데.”주석훈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타요. 데려다줄게요. 시간이 늦어서 택시 잡아서 가는 건 위험해요.”맞는 말 같아 소원은 주석훈의 차에 올랐다.“근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마칠 퇴근하는데 길에서 소원 씨를 만나다니.”주석훈이 말했다.“그러게요. 기막힌 우연이네요. 아참, 저번 일은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고마워요. 주 변호사님.”소원은 그날 현장에서 주석훈이 육연주를 제압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인사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주석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 다만 육경한이 더 가까이 서 있어서 소원을 구한 것이다. 그것 외에 재판에 관한 일도 성심성의껏 소원을 대신해 타이르고 있었다.“별말씀을. 소원 씨, 우리 안 지 꽤 오래 지났는데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주석훈은 늘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온화했다. 가끔 소원은 주석훈을 화나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아무튼 감사 인사는 꼭 전하고 싶었어요.”소원이 말했다.“그러면 소원 씨 시간 될 때 밥이나 한번 사줘요.”주석훈이 말했다.“당연하죠.”소원이 웃으며 대꾸했다.주석훈은 소원의 목적지가 병원인 줄 몰랐기에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에 가본 적이 있어서 주소가 어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원보경을 해고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알고 보니 원보경은 한이 그룹으로 오기 전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소원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보경처럼 말도 잘하고 여러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려면 일개 영업팀 직원이 아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그러다 원보경이 미우 그룹에서 일하던 사원이라는 걸 알고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한이 그룹처럼 작은 회사에 남으려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소원은 육경한의 그 어떤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엄숙하게 원보경에게 사직을 권고했지만 원보경이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대표님 회사로 온 건 돈을 벌기 위해서 온 거지 시간 때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여러 큰 기업에서 제 이력서를 통과했지만 결국엔 미우 그룹에서 나와 한이 그룹을 선택했습니다. 원인이라면 이곳에서는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미우 그룹을 포함한 다른 회사는 워낙 인재가 많으므로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써먹을 기회도 없을뿐더러 얄팍한 수단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큰 기업에는 저보다 능력 좋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외모도 빼어난 게 없고 능력도 특출난 건 아닌데 동료들과 이익 다툼도 해야 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여러모로 생각하고 검토한 결과 한이 그룹으로 오는 걸 선택했습니다. 육 대표님이 보내서 온 게 아닙니다.”“사실 육 대표님이 황 비서님께 빠릿빠릿한 사원을 뽑으라고 해서 저는 선택받지 못했고 더 노련한 분이 선택받았는데 미우그룹을 떠나 전망도 모르는 작은 회사로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하지만 저는 한이 그룹 자료를 찾아보고 황 비서님께 먼저 지원한 사람입니다. 황 비서님도 제가 의향이 강하니까 결국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게다가 미우 그룹에서 이미 퇴사해서 제가 모실 분은 이제 육 대표님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 남으려고 한 건 제 능력을 인
집으로 돌아간 소원은 일단 다른 건 제쳐두고 잠부터 잤다.사실 황산이 하늘에 흩뿌려졌을 때 소원도 마음속으로 너무 두려웠다. 여자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몸에 난 상처는 옷으로 가려본다 해도 얼굴은 어떻게 가려도 가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황산으로 인한 상처는 아무리 돈을 들여도 완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기에 영향이 매우 컸다.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악독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절체절명의 순간 육경한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왔는데 소원도 사람인지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육연주를 먼저 건드린 것도 아니고 육경한이 오냐오냐 키우지만 않았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무법천지가 될 일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원의 마음속에 생겼던 감격도 많이 줄어들었다.육경한은 사람에게 잘해줄 때 적정선이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자기가 심어놓은 화근에 걸려들고 말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소원은 정신이 말짱해졌다. 그 뒤로도 병원은 가볼 시간이 없었다. 육경한이 입원해 있는 동안 소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낮에는 한이 그룹 일로 바빴다. 회사는 진작 등록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다시 일어서는 게 생가보다 너무 어려웠다.몇 년간 여러 기업이 생겨나고 바뀌면서 한이 그룹 같은 오래된 기업은 에너지 영역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게다가 처음엔 능력 좋은 사람들을 채용하지 못해 혼자서 여러 사람의 업무를 도맡아 하느라 보고서도 만들고 회의도 하고 프로모션도 해야 했다.일이 너무 많기도 했고 임신 초기라 마침 피곤할 때였기에 거의 매일 휴식이 모자란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저녁이 되면 유진도 봐야 했고 중간중간 짬을 내 요양원에 어머니 보러도 가야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육경한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소원이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것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두 아이가 원하는 걸 선택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잡혀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황진수는 소원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도망치듯 병실에서 나왔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불러야 하는데 황진수가 없으니 소원도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소원은 병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수술하느라 마취를 투여하긴 했지만 양이 많지 않았기에 약기운이 반쯤 빠진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이렇게 외쳤다.“소원아.”목소리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육경한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윤혜인도 처음이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또 한 번 소원의 이름을 불렀다.“소원아...”상처를 금방 치료했는데 이렇게 움직이면 다시 갈라질 게 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마른기침하며 가까이 다가갔다.“나 여기 있어.”육경한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너 괜찮아?”“괜찮아.”소원이 대답하고 나서야 육경한이 그나마 시름을 놓았다.아까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고 말았다. 육연주가 칼을 들고 소원에게 달려드는데 그 칼이 마침 소원의 아랫배에 꽂히는 꿈이었다.육경한이 갑자기 손을 뻗어 소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머리가 마침 소원의 배에 닿았지만 육경한은 너무 바짝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아 상처가 벌어져 아픈데도 불편한 자세로 아이의 존재를 느끼려 했다.“소원아, 이 아이 절대 버리지 마. 알았지?”소원은 갑작스러운 포옹이 불편해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육경한이 팔에 힘을 더 세게 줬다. 바짝 기대지 않고 비스듬히 기댔지만 손은 여전히 소원의 옷을 잡고 있었다.“부탁이야...”육경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들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봤다.“소원아. 내가 이렇게 빌게. 아이는 버리지 마. 약속한 건 무조건 지킬 테니까.”소원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표정도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묻어났다. 이런 무의식적인 거부감이야말로 몸속 제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반응이었다.육경한이 멈칫하더니
경찰을 본 육연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괴롭힘을 당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황산을 구했고 그저 소원을 망가트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하자 졸렸는지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나 아니에요. 난 그런 적 없어요.”육연주가 울음을 터트리며 불쌍한 척하기 시작했다.“경찰관님, 저도 피해자에요. 저 방금 성폭행당했어요. 저를 성폭행한 사람이 사주를 받았다는데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아니, 저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육연주에게 팔을 잡힌 경찰이 미간을 찌푸리며 뿌리치더니 물었다.“아가씨, 일단 진정하고 이거 놓고 얘기해요.”“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시킨 거예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황산을 뿌린 거예요.”그도 그럴 것이 육연주는 아직 머리가 남아있었다. 육경한이 손을 떼자 바로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이다. 만약 소원이 사주한 게 맞다면, 그래서 육연주가 복수하러 온 거라면 이 일의 성질이 달라진다. 분노로 인한 우발적 살인이면 양형기준이 조금 달라질 것이고 육연주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 퍼센트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그때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급대원이 육경한을 들것에 올려 차에 실었다. 등 쪽의 옷감은 황산에 녹아 없어진 상태였고 너머로 보이는 피부도 너덜너덜한 게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상처가 등에 나 있으니 육경한도 어쩔 수 없이 들것에 엎드려 있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육연주는 아직도 자기가 처한 상황만 생각했고 한걸음에 들것까지 달려가 들것에 엎드린 남자를 잡으며 울먹였다.“삼촌, 나 좀 살려줘요. 또 들어가면 안 돼요. 제발 좀 도와줘요. 제발요...”육연주는 육경한의 상처를 누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손에 힘을 줬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육경한은 말도 내뱉지 못했고 땀만 뚝뚝 흘리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오래 버틴 것이었다. 진작 몸이 불편했지만 누군가 소원을 해치기라도 할까
육연주가 어릴 적부터 사랑만 받고 자랐다 해서 다른 사람은 진흙탕에서 자란 게 아니었고 괴롭힘을 당해도 그저 꾹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육연주는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었다.“네가 서현재를 꼬시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괴롭힐 일은 없었지. 다른 사람은 다 내버려두고 너한테만 그랬을 때는 너도 반성해 봐야지. 안 그래?”이렇게 되물으니 너무 웃겼다.소원은 육연주가 가스라이팅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잘못한 건 육연주인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발끈하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소원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허허.”소원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개가 나를 물었는데 개가 무슨 생각으로 물었는지까지 생각해야 해요?”소원이 덧붙였다.“미안해요. 나는 짐승의 언어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짐승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그게 무슨 헛소리에요.”육연주는 소원이 개라고 욕할 줄은 몰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런 욕을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지금 나 욕한 거야? 독사 같은 년. 삼촌 봐봐요.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여자라니까요. 삼촌이 있는데도 이렇게 욕하는데 뒤에서는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않겠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게 이 여자 원인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모함하는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 가지고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소원은 육연주, 그리고 방민아 같은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소원은 인성, 도덕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먼 악마였다.“착각하지 마요. 난 당신들이랑은 달라요. 나를 까밝힐 수 있는 증거가 있으면 가져와 봐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소원은 육연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희열을 느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건데 피해자인 소원이 반성해야 할 건 없었다.아까 그 염산만 놓고 보더라도 육경한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작 얼굴이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서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다 해도 튕겨 나온 황산이 어떤 상처를 입힐지는 알 수 없었
육경한이 그래도 대꾸하지 않자 육연주는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다.“삼촌, 나 성폭행당했어요. 흑흑흑...”이말에 현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육경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육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육연주는 면죄부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육경한의 관심만 남아있다면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육경한에게는 살아있는 혈육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육연주와 이지애가 제일 가까운 가족이었다. 게다가 육경한은 육연주가 커가는 걸 지켜본 사람이었기에 그 정은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나도 몰라요... 방씨 가문인지 서씨 가문인지 모르겠어요. 내 눈을 가리고 골목으로 끌고 가서 바닥에 누르고는... 반항할 새도 없이...”육연주는 이미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마구 울어대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꼴이 왜 그 모양인지, 괴롭힘당한 흔적은 뭔지 알 것 같았다.경비원들은 이미 육연주를 잡고 경찰이 오면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고의로 해치려고 한 건 엄연한 죄였기에 그대로 놓아줄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육연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하지만 소원은 육연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태도 그렇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꺼낸 걸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지가 실추될 수도 있는 일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말할 여자는 이 세상에 없었지만 그중 어딘가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요소도 들어있는 것 같았다.“삼촌, 삼촌,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육경한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육연주의 사정이 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네가 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비록 소원이 다치지 않게 육경한이 막아주긴 했지만 육연주가 정말 해치려든 사람은 소원이었기에 육경한이 용서한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