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팔목을 세차게 들어 올려 한구운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지지직...”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나며 한구운은 짧은 신음을 내뱉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윤혜인은 손에 들린 작은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지금처럼 한구운 씨는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남을 억누르고 강자처럼 행동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절대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한구운은 윤혜인이 자신을 전기 충격기로 공격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전혀 대비하지 못한 그는 온몸의 힘이 빠져 몇 번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을 뿐 그녀를 제어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가슴을 부여잡고 한구운은 창백한 얼굴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그 남자는? 이준혁이 지금 널 이렇게 대하는데도 넌 이준혁이 일하는 곳을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거야? 이준혁이 그렇게도 좋아?”그러자 핏기조차 없는 얼굴로 윤혜인이 고개를 숙였다.“이준혁 씨와는 이미 끝났어요. 내가 여기 서 있는 건 그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예요...”그 말만 남기고 윤혜인은 돌아서서 떠나버렸다.곧 한구운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나 그를 부축했다.경호원들은 떠나는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도련님, 저분을 막을까요?”“그럴 필요 없어.”한구운은 전기 충격으로 인한 가슴의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자 몸을 세우며 멀리서 빛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그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움과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지금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면 그때 그 몰락한 자가 무엇을 가지고 자신과 맞설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여자는 돈과 시간만 들이면 언제든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어.’한구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이 중요한 순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었다.
“네, 문제없습니다. 내일 파리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이준혁은 멀리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듯 그곳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그때 바깥에서 상황 좀 봐줘.”주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대표님, 그래도 제 생각엔 제 옆에 계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현재 이준혁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주훈은 그를 잠시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다가오는 결혼식을 앞두고 주훈은 바깥일을 마무리하느라 밤낮없이 일했고 이제는 그 중요한 순간에 이준혁의 곁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지난번 폭탄 사건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필요하다면 주훈은 이준혁을 대신해 기꺼이 희생할 생각이었다.주훈이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하나는 이준혁이 그를 발굴하고 키워준 은인이라는 점에서였다. 그 누구도 주훈을 믿지 않던 시절 이준혁은 그를 직접 길러냈다.다른 하나는 이준혁의 지혜와 능력이었다.이준혁의 머리는 마치 금융이라는 폭풍 속에서도 안정적인 항해를 이끄는 배와 같았고 그 덕분에 한국의 금융 시장이 외국인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높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국가의 명예를 세우고 외세에 무시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주훈이 지켜온 신념이었다.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국가에 기여하고 있는 이준혁 같은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괜찮아. 바깥도 중요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엔 내가 불안하니까.”이준혁이 환한 빛 속에 앉아 있었지만 주훈은 그가 어느 순간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 느낌은 잠시였고 이준혁의 말에 금세 설득당했다.이준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내부는 W에게 맡길 거야.”W는 이준혁의 해외 프로젝트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었고 주훈과 맞먹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게다가 W는 위험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위기 대처 능력은 오히려 주훈보다 더 뛰어났다.주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준혁의 지시에 따랐다.“알겠습니다, 대표님.”“이제 나가봐.
잠시 멈춰서더니 그는 금고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여기에 제가 쓴 편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혜인이에게 같이 전해줘요.”하지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지 않고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던졌다.“대표님, 혹시 저한테 숨기고 있는 다른 일이 있는 건가요?”“아까부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리십니까? 대표님은 무슨, 말씀 편하게 하세요. 다른 일은 없고 전 그저 미리 대비하는 것뿐입니다.”이준혁은 무표정하게 답했다.남자는 몇 초간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거니 그래도 예의를 차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혜인 씨는 좋은 사람이예요. 그건 저도 알 수 있어요.. 예전부터 늘 대표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대표님 건강도 아직 회복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굳이 모든 길을 끊을 필요는 없어요.”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이후 그는 자신의 바짓자락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내가 아직도 선택지가 있어 보이나요?”원래 탄탄했던 그의 종아리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이렇게 마른 다리로 키가 190에 가까운 남성의 몸을 지탱했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웠다.게다가 다리 위로는 짙은 자주색과 보랏빛으로 부어오른 혈관이 뒤덮여 있었고 독이 퍼지면서 그 혈관들은 더욱 검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이 다리는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 자체로 섬뜩했다.심지어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본 맞은편의 남자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준혁의 표정은 허망함을 지나 더 이상 담담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졌다.“저는 혜인이에게 행복을 줄 수 없어요. 차라리 깨끗이 놓아주는 게 낫습니다.”맞은편 남자의 표정도 침울해졌고 더 이상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많은 일은 직접 겪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윤혜인은 아버지와 며칠간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해외 온라인 운영 회사의 일로 바빠졌다.그녀는 몇 년간 곽씨 가문에서 건강을 잘 챙겼기 때문에 임신 초기
이렇게 해서 비행기는 출발 두 시간여 만에 서울 국제공항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구급차가 환자를 데려간 후, 윤혜인은 이제 다시 비행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승무원장이 또다시 사과하며 다가와 말했다.“승무원이 기내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비행기 안전 점검을 진행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는 아마 출발이 어려울 거고 내일 아침에나 다시 일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윤혜인은 멍해졌다.‘지금 오후인데... 그 말은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건가?’도지훈 역시 어이없어하며 당황해했다.항공사가 이렇게까지 불안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곧바로 그는 곽경천에게 연락해 항공사 대표와 연결하겠다고 했다.곽씨 가문은 육상과 해상 운송 사업뿐만 아니라 국제 항공 사업도 했기에 기타 항공사들의 대표들과 잘 아는 사이였다.하지만 윤혜인은 도지훈을 말렸다. 전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안전이 중요한 상황에서 누구도 방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그렇게 해서 승무원장의 주선으로 일등석 승객들에게 7성급 호텔 스위트룸이 마련되었다.하지만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전체를 예약한 윤혜인은 블랙카드 소유자이자 항공사의 귀빈이었다.승무원장은 매우 정중하게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사실 저희 항공사에서는 귀하께 대통령 스위트룸을 제공해드려야 하는데 오늘 밤에는 대통령 스위트룸과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모두 한 분의 결혼식 때문에 예약되어있어서요... 대형 스위트룸들이 모두 그분의 귀빈들을 위해 쓰이고 있거든요.”윤혜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이제야 생각났다. 승무원이 언급한 그 사람은 아마도 이준혁일 것이다. 며칠 동안 그녀는 일에 몰두하며 일부러 잊으려 했고 그래서 정말로 이준혁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그런데 이렇게 운명처럼 그의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에 묵게 될 줄이야.도지훈 역시 이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승무원이 계속 설명하려 하자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다른 호텔로 예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희가 직접 예약해도 상관없습
윤혜인은 앞쪽에 있는 여성의 하얗게 칠한 옆얼굴과 웨딩드레스 자락만 보일 뿐이었다.그러나 어렴풋이 그 신부가 원지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아마도 웨딩드레스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무기인 듯했다.원지민의 창백했던 얼굴이 이 순간 고급스럽게 변해 보였고 옆모습에서조차도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 느껴졌다.원지민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원지민의 성격이라면 분명 이 기회를 틈타 윤혜인을 비꼬며 몇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더니 조용히 비서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만약 그 얼굴이 원지민이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원지민이 눈앞에서 윤혜인을 비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다니 정말 드문 일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웨딩드레스의 끝자락도 보이지 않게 된 순간, 윤혜인은 삶이 참으로 꿈같다고 느꼈다.이준혁에게 쫓겨 서울을 떠난 후, 그녀는 다시는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녀가 잠시 멍해 있던 순간, 조금 전에 소리치던 비서가 성큼성큼 다가와 매우 거칠게 말했다.“당신 말이야. 왜 아직도 핸드폰을 들고 있어?”윤혜인이 좌우를 둘러봤지만 자신과 도지훈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게다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자신뿐이었는지라 윤혜인은 이내 비서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윤혜인은 설명했다.“저는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그냥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하지만 비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혜인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도지훈이 그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러고는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며 매섭게 말했다.“손 치우세요!”“너!”비서는 손목이 아픈 듯 화가 나서 지나가던 호텔 직원에게 소리쳤다.“여기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오늘 결혼식에 핸드폰 들고 들어오는 거 금지라면서요?”직원은 윤혜인을 잠
말을 마친 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그 후로는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저녁 식사도 방으로 배달되어 왔다.식사를 하면서 윤혜인은 습관적으로 경제 채널을 켰는데 화면에 바로 이준혁의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 나왔다.그녀는 잊고 있었다. 이곳은 해외의 경제 채널이 아니었다.지금 서울의 모든 채널이 아마도 그 남자의 전례 없는 결혼식 현장을 방송하고 있을 것이다.화면에 나오는 건 점심시간의 감사 연회로 손님들이 넘쳐나고 현장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꽃바다로 빛났다.이 결혼식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이 분명했다.잘 차려입은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신부는 입구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연단으로 향했다.여기까지 보고 나서 윤혜인은 더 이상 볼 마음이 사라졌다.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현재 임신 중이니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고 괜히 스스로 불편함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감정이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법, 상대의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된 것만으로 그녀는 꽤나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이 이제 막 TV를 끄려는 순간, 화면 속의 배경음이 갑자기 딱 하고 꺼졌다.곧 단정하고 세련된 하얀 정장 차림을 한 한구운이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오늘 정말 기쁜 날이군요.”한구운은 신랑 신부를 바라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이씨 집안을 대표하여 형님께 축하드립니다.”순간, 현장이 술렁였다.‘이씨 집안을 대표한다고? 무슨 뜻이지?’그동안 몇 번의 소란이 있었지만 이선 그룹의 명성을 위해 그런 소식들은 모두 차단되었다.그래서 약간의 소문은 있었을지 몰라도 현장에 있던 많은 협력업체들은 한구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사람들은 궁금해했다.‘저 사람이 왜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거지?’높은 자리에 서 있던 이준혁의 표정은 불만으로 가득했다.한구운과 이천수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몇몇 주주들 또한 입장이 금지되었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청첩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이
원지민은 슬쩍 이준혁을 훔쳐보며 속으로 크게 놀랐다.‘왜 준혁이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하지만 그 놀라움도 잠시일 뿐이었고 곧 다가올 장면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특히 윤혜인이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서 이 모든 걸 몰래 보고 있을 생각에 속이 시원해졌다.아까 윤혜인을 비꼬지 않은 이유는 바로 곧 있을 이 장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준혁이 사람을 붙여 원지민을 감시하며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원지민은 윤혜인을 비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윤혜인이 서울에 돌아온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담담한 남자의 표정을 보니 그가 내린 처벌이라는 것이 생각났다.그 처벌은 고작 윤혜인을 해외로 내쫓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처벌이라는 거야? 내가 받은 처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 괴물 같은 아이를 내 침대 곁에 두어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게 하는 게 더 끔찍하다고.’이틀 연속으로 원지민은 임호가 온몸이 불에 타서 끔찍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목을 졸라대는 꿈을 꾸었다.사실 아이가 이준혁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원지민은 그 아이를 없애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가 이준혁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기에 잠시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그러나 기회가 되면 당장 그 아이를 없애버리려는 마음은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결국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남의 아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래서 원지민은 무리하게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몸을 해쳤다. 아이를 없앨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원지민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들을 모두 이준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으로 합리화했다.자신이 이미 이만큼을 희생했는데 만약 이준혁을 얻지 못한다면 너무 큰 손해라고 느꼈다.그래서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그 누구보다도 잘생긴 이준혁의 얼굴을 바
정말이지 하늘이 한구운을 돕고 있었다.한구운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을 이었다.“오늘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어떤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선의로 입양했을 뿐인데 이 혈연관계가 없는 형이라는 사람은 오히려 저를 배제하고 제 자리를 차지하려 들고 있어요. 저와 아버지를 내쫓으려는 자가 바로 저 사람입니다.”그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준혁을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나요. 이준혁 씨?”그 ‘이준혁 씨'라는 호칭은 극도로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들렸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거나 수치심에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고 마치 자신이 지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듯했다.한구운은 자신만만한 상태였으나 이 순간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이준혁의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은 불안해졌다.‘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지?’이때, 이천수가 무대로 올라오며 입장을 밝혔다.회사 내에서 이준혁과 다툼을 벌였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준혁아, 비록 우리가 피는 안 섞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너를 아들로 여기며 가르쳐 왔다. 네가 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구운이를 그렇게 잔혹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니? 그 방법은 너무 가혹했다!”이천수는 눈물을 훔치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도 내 잘못이 크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난 너에게 정말 큰 실망을 했다.”이천수의 연기는 마치 철이 들지 않는 자식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애타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준혁은 정말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법적 규정상으로도 이준혁은 이선 그룹을 상속받을
방씨 가문에서 지키려 한다 해도 방민아의 인생은 별로 희망이 없었다.육연주는 적게 연루되기도 했고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구치소에 한 달 구금되었다가 나왔다. 육경한이 육연주에게 변호사를 찾아줬지만 육연주 모녀는 이를 소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부러 육연주를 구치소에 들여보냈고 육경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연주 모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원칙인 방씨 가문은 방민아가 이 지경까지 된 게 다 육연주 탓이라고 생각한 이상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그 후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그다음은 서씨 가문이었다. 육연주가 서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지만 서현재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이 점점 이상해진 데다 원래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재벌 집 아가씨라 서씨 가문에 척을 진 사람이 많았다.지금의 서씨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서현재가 암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서씨 가문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줄곧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육연주가 계속 서울에서 나댄다면 앙심을 품은 서씨 가문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복수해 올 수도 있기에 아예 이지애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피신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모녀는 육경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소원에게 홀려 인사불성이라고만 생각했다.이지애는 끌려가면서 육경한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했다.“경한아,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우리가 잘해준 거 다 잊은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내치겠다고?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사실 잘해줬다고 할 것도 없었다. 상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 몇십만 원 쥐여준 게 전부였다. 이지애도 그때는 살만했기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었고 조금의 ‘선심’을 베풀었지만 육경한은 갚아야 할 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많은 돈으로 보답했다.다만 이지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빚쟁이 대하듯 대했다. 돈이 많으니 이걸로는
“경한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구나. 쟤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날 욕하고 때리고...”이지애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소원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육경한은 이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육경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경호원들은 두피가 저릿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이지애는 육경한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 재빨리 다각 그의 손목을 잡았다.“역시 경한이가 최고야. 우린 가족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저 여자가 우리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연주가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도 많이 빠졌어. 삼촌이 무시한다며 얼마나 울었는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애는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경호원이 왜 나한테 오지?’‘저 천박한 계집애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잠깐만... 지금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한이는 저 여자를 끌어내라고 한 거야. 옆에 있는 변호사까지 묶어서 밖으로 쫓아내.”경호원들은 이지애처럼 눈치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육경한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이지애였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빽이 있다며 대표님과 미우 그룹을 언급하는지...’‘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경호원들은 이지애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현실 부정 중인 이지애는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경한아, 말 좀 해봐. 저 여자 쫓아내려고 했잖아. 나는 네 누나야.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외부인 편을 들 수 있어? 경한아...”이지애는 눈물을 쏟았다.“말 좀 해봐.”“누나.”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러 번 말했잖아요. 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대뜸 욕을 바가지째로 먹었다.그럼에도 이지애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X신들. 멍청하기는.”방금까지 동정심을 느끼던 여자에게 심한 욕을 먹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말을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렇게 추잡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그러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면 구치소에 수감되었겠어요?”이지애는 여론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는지 더욱 흥분했다.“너희들이 뭘 알아.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쳤고 내 딸은 피해자야. 이 여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감될 일도 없었어.”사람들은 더 이상 이지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없어 보였다.“그쪽이 돈 많고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면 당연히 빼냈겠죠.”이때 한 아주머니가 일침을 놓았다.“맞는 말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지.”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이유 없이 사람을 잡았다면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가 일 순위이겠죠.”“됐어요. 됐어요. 이만하고 다들 들어갑시다. 구경났어요?”아파트 단지 관리자가 달려와 구경 중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그 시각.육경한은 고위급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황진수는 전화를 받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육경한은 해외의 유명 대기업과 협상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황진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갔다.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육경한에게 다가가 보고 했다.그러자 육경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황진수를 회의석으로 끌어당겼다.“네가 해.”‘지금 나한테 이 중요한 회의를 떠맡기고 간 거야? 내가 이런 걸 할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소원 씨, 괜찮아요?”말을 건넨 사람은 주석훈이었다.오늘 아침 두 사람은 합의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드는 이지애를 목격했고 소원이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부축했다.옆에서 발악하던 이지애는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에게 제압되었다.“너 누구야? 감히 날 막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경호원에게 꽉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당장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미우 그룹 대표가 내 동생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구나. 내 동생이 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울에서 쫓겨날 거야.” 이지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반응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육경한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경호원들은 육경한과의 관계를 듣고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소원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기에 이지애가 해치지 못하게 손을 묶어두었다.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지애와 소원이 다투고 있을 때 곧바로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이지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소원을 부축하는 주석훈을 보며 막말을 퍼부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동생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너는 남자를 꼬시는 게 취미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여튼 개 버릇 남 못 준다니까.”이지애의 말은 듣기 굉장히 거북했고 소원은 방금 한 대만 때리고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그 시각 주석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애를 바라봤다.“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처벌 대상입니다. 제 의뢰인이 내연녀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일방적인 모함에 속하고 법에 의거하여 충분히 고소할 수 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