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남자친구 몰래 윤혜인에게 숫자 17을 그렸고 그녀의 손짓을 본 윤혜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원의 손짓은 이 남자가 그녀의 어장에 들어온 열일곱 번째 물고기라는 뜻이었다.“우리 원이가 저한테 혜인 씨 얘기를 자주 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미인인 줄 몰랐네요. 만나서 반가워요.”김재성이 손을 뻗어 윤혜인과 악수를 하려고 했다. 윤혜인은 말을 하면서 그녀를 이리저리 훑는 김재성이 눈빛에 왠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했다.김재성은 악수를 한 뒤, 손을 거두면서 실수인 척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살짝 긁었고 순간, 윤혜인은 소름이 쫙 돋았다.윤혜인이 급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김재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소원과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한참 뒤, 식사를 하던 도중에 김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룸에 둘만 남게 되자 소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혜인아, 너 괜찮아?”윤혜인은 소원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혁과의 일에 관해 소원에게 숨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은 서울에서 알아주는 상류 명문 가문이기에 임세희에 관한 일은 소원이 윤혜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대답을 하려던 찰나, 윤혜인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참 헛구역질을 하던 윤혜인이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뒤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헤헤, 오늘밤에는 무조건 따먹을 거야. 정 안 되면 술을 많이 먹이지 뭐. 젠장,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고 그래. 멍청한 여자가 계속 잠자리를 거부해. 약을 타볼까 고민중이야. 그리고 절친이라고 데려온 여자가 있는데 엄청 예뻐. 둘을 한꺼번에 잘 수 있으면 완벽한데. 나중에 침대에서 사진도 좀 찍고 동영상도 찍어서 나중에 친구들이랑 같이 즐겨야지. 그땐 반항도 못할 걸?”그 뒤의 말은 더 역겨운 말들이었고 조용히 듣고 있던 윤혜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김재성은 윤혜인을 발견하자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거들먹거렸다.“
김재성의 공격에 전혀 당황하지 않은 윤혜인은 태연하게 몸을 슬쩍 돌려 피했고 헛방을 날린 김재성은 바닥에 흘린 오디 주스를 밟고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김재성은 허리를 잡고 가까스로 바닥에서 일어나 이를 꽉 깨물며 욕을 퍼부었다.“어디 주제도 모르는 천박한 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을 찾아 나선 소원은 이런 광경을 목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윤혜인이 설명하려고 할 때, 김재성이 먼저 말을 꺼냈다.“소원아, 혜인 씨가 내 연락처를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줬거든.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내 몸에 주스를 뿌렸어…”김재성은 허리를 잡고 비참한 모습으로 일어나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고 윤혜인은 그런 김재성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저리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김재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소원아, 난 너에게 미안한 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혜인 씨를 거절한 건데…”“웩! 웩… 웩!”김재성의 말은 윤혜인의 헛구역질 소리에 끊겨버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하던 말 계속 하세요.”윤혜인이 입을 막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김재성은 화가 났다. 갑자기 말이 끊긴 바람에 조금 전의 북받쳐 오르던 감정을 잃은 그는 말을 길게 할 수도 없었다.“소원아, 넌 날 꼭 믿어줘야 돼.”“재성아, 너 왜 이렇게 바보 같아.”소원은 김재성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사랑스럽게 웃었고 김재성은 이내 의기양양했다. 이 방법은 모든 여자에게 먹혔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절친이라고 해도 남자가 끼어들면 그 우정에 금이 가기 마련이다.김재성의 눈에 소원은 그저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바보일 뿐이다. 김재성이 손을 뻗어 소원을 안으려고 한 찰나, 소원이 무릎으로 그의 아랫도리에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순간,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 김재성은 기름에 튀
소원은 이런 결정을 내린 윤혜인이 대견했다. 이준혁의 인간 관계는 너무 복잡했기에 소원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봐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넌 진작에 정신을 차려야 했어. 맨날 이준혁의 잔심부름이나 하고, 그게 뭐야! 넌 얼굴도 예쁘고 실력도 강하고.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디자인했던 작품은 상까지 받았잖아! 이산 그룹을 떠나면 네 앞날이 휘황찬란할 거야.”예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을 많이 사랑하고 있을 때 소원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할 수 없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윤혜인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고 제대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소원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그거 알아? 한구운이 돌아왔대! 대학교 다닐 때 너랑 구운 선배는 완전 선남선녀였잖아.”“선배님이 귀국했다고?”윤혜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그래, 너 한구운 선배 인스타 팔로우 안 했어? 구운 선배는 지금 주식 투자계의 다크호스야. 어마어마할 정도로 유명해졌다고.”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준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원 말고는 연락하는 동창이 거의 없었다.사실 난 그때 너와 구운 선배가 잘 되길 바랐거든. 한구운 선배가 너보다 2년 선배이긴 하지만 너에게 진짜 잘해줬어. 내가 부러울 정도였다니까.”“이상한 얘기하지 마. 구운 선배는 성격이 다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잘해줬어.”윤혜인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는 그때 당시 한구운은 그저 학생 회장으로써 신입생에게 신경을 조금 더 많이 쓴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은 윤혜인이 이런 쪽에 둔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에이그, 바보 같은 계집애.”“육경한 씨가 돌아왔다고 들었어.”윤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육경한은 소원과 약혼을 했던 사이지만 갑자기 육경한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소원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이준혁과 육경한은 꽤 친한 사이였기에 육경한이 귀국한 뒤로부터 두 집안은 비즈니스 합작이 유난히 잦았다.소원의
이내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한 임세희가 곁에 있던 송소미를 보며 말했다.“소미야, 내가 식당에 가방을 두고 온 거 같아.. 혹시 가서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송소미는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임세희의 말에 윤혜인을 죽일 듯이 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송소미가 떠나자 임세희가 윤혜인을 보며 환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윤혜인 씨, 그동안 저 대신 준혁 오빠 잘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요.”간단한 말 한마디로 임세희는 이준혁에 대한 소유권을 명확하게 표시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인사 말을 들으며 너무 아이러니했다.분명 이준혁의 아내는 윤혜인 그녀인데.임세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전에는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작은 모순이 생겼다고 해외로 도망가버렸거든요. 근데 준혁 오빠가 지금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진짜 너무 감동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돌아온 김에 준혁 오빠랑 결혼할 생각이에요.”이 순간, 임세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흐릿하게 들렸다. 윤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그들은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이준혁은 벌써 임세희와 결혼하고 싶은 건가?“윤혜인 씨, 윤혜인 씨?”임세희의 부름에 윤혜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네, 임세희 씨.”임세희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윤혜인을 보며 너무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윤혜인 씨, 저희 번호 주고받을까요? 준혁 오빠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데 저도 오빠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나중에 윤혜인 씨 도움도 필요할 것 같고.”윤혜인은 번호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간절하게 바라는 임세희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번호를 받은 임세희가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윤혜인 씨, 혹시 저를 저쪽까지 밀어줄 수 있을까요?”고개를 끄덕인 윤혜인이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었지만 휠체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잡이를 누른 채 허리를
말을 끝낸 이준혁은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임세희를 안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을 뒤따라가던 송소미는 바닥에 쓰러진 윤혜인을 보며 비아냥거렸다.“허튼 기대는 이제 그만 넣어둬. 넌 하수구 안에서 살고 있는 쥐에 불과해. 우리 세희 언니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간다고.”송소미의 거친 말에도 윤혜인은 전혀 들리지 않는듯 멀어져가는 이준혁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았다.윤혜인은 저렇게까지 긴장한 이준혁의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그녀에게 마음을 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검은색 벤틀리는 빠른 속도로 윤혜인 앞을 지나쳤고 윤혜인은 아랫배가 점점 더 아팠다.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배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가야…”이때,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원은 그녀에게 차가 막혀서 주차장에서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에 윤혜인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택시를 잡기 어려웠기에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몸으로 이준혁의 차를 세우려고 했다.그리고 그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윤혜인은 그녀 앞을 지나치는 차를 보며 힘겹게 다가가 온 힘을 다해 차 뒤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차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빠른 속도로 도로를 향해 나서는 검은색 벤틀리는 주인처럼 매정했다.윤혜인은 우두커니 서서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점점 더 강해지는 아랫배의 통증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배를 꼭 끌어안았다.“아가야,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말렴…”한편, 병실 안에서.의사가 임세희에게 정밀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준혁은 병원 복도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은 못 찾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떠나신듯 합니다.”전화기 너머 주훈이 솔직하게 전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이준혁 머릿속엔
다행히 임세희는 미리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휠체어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 나중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고자질해도 이준혁은 악독한 윤혜인이 임세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임세희는 기분이 언짢았다. 예전의 이준혁이라면 절대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다니.조금 전에 임세희는 단지 윤혜인을 떠본 것이다. 그녀는 절대 이런 멍청한 방법으로 윤혜인을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며 정말 윤혜인을 없애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절대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이준혁이 그런 여자와 2년 넘게 잠자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일그러졌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감히 그녀의 남자를 건드리다니.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는 건가!한편, 공기중에는 역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이준혁이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취조하듯 물었다.“너 임신했어?”한참 뒤,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당장 지워!”“안 돼요!”소리를 지르던 윤혜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이곳은 병원이고 조금 전 상황은 그저 윤혜인이 꾼 악몽이었다.윤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길쭉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윤혜인은 이런 곳에서 한구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구운 선배, 선배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윤혜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한구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조금 전에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소원이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과 차를 부딪쳐서 싸우고 있더라고. 차를 빼기 힘들다면서 나한테 대신 널 찾아달라고 했어.”윤혜인은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뱃속의 아이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에 대해 묻
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병실 안에서.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을 보며 조금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다.윤혜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변명했다.“배탈이 난 거 같아요.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깐 신경쓰지 마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윤혜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파요.”이준혁이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보니 넘어질 때 긁힌 상처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상처 치료 제대로 안 했어?”윤혜인은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우울했다.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화장실을 나서서 소파에 앉혔고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가져왔다.다음 순간, 이준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상처를 소독했다.“피할 줄 몰라?”방구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밀쳐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혁인데!이준혁은 알코올 면봉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독해 주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자연스럽고 별다른 뜻이 없는 행동이였지만, 윤혜인은 자꾸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윤혜인이 눈물을 찔끔 흘렸고 그녀는 작은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울고 싶었다.눈물이 떨어지려던때,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고 이준혁에게 한마디만 물어보고 싶었다.그는 정말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걸까?하지만 이준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이때, 고개를 든 이준혁은 윤혜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를 발견했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명령하듯이 입을 열었다.“그만 깨물어.”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소원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아이를 어머니 곁에서 빼앗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육경한은 단 한 번의 말로 다시 한번 그녀를 깊은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은 마치 자신을 가로막는 커다란 그물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주석훈은 소원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넸다. “소원 씨,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소원 씨 말대로라면 육경한 씨가 약을 복용해 온 건 확실한 사실일 겁니다. 이번엔 분명 무슨 술수를 쓴 거겠죠. 기운 내세요. 함께 노력하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변호사는 냉철했고 고작 몇 마디 말로 소원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그래, 육경한이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리 없어. 이번 결과에는 분명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주석훈은 법원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 육경한이 감정을 받은 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로 했다.그리고 소원에게 먼저 차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그렇게 소원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입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그만 한 사람과 부딪혔다.코를 세게 부딪쳐 아팠지만 그녀는 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괜찮습니다.”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소원은 멈칫했다.얼굴을 들어 확인하니 역시나 서현재였다.원래도 아팠던 코가 더 시큰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소원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이 터질까 봐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미안해요.”그리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잠시만요.”서현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소원은 그의 부름에 걸음을 뚝 멈췄고 서현재는 그녀의 손을 가리킨 후 다정하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싸매요.”여전히 따뜻하고 친절한 서현재의 모습에 소원은 더 가슴이 아려왔다.하여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괜찮습니다. 고마워요.”이내 소원이 다시 떠나려 했지만 서현재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그러고 나서 단숨에 그녀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감싸며 응급처치를 해줬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상대 변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원고 측이 제출한 약물 분석 보고서는 애초에 저희 의뢰인이 복용한 약물이 아닙니다. 저희 의뢰인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합니다. 이는 최근 신체검사 결과와 저희가 법원에 신청한 정신 감정 결과 보고서입니다.”변호사는 한 단어씩 정확하고 또박또박하게 읽어나갔다.“이 보고서는 저희 의뢰인이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음을 충분히 증명합니다.”소원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나보다 한발 앞서서 법원에 감정을 신청했다고?’그 말은 처음부터 소원이 육경한의 정신 질환 약을 가져다 증거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녀가 철저히 준비했던 모든 계획이 사실은 모두 육경한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이 사실을 알아차린 소원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주석훈도 의아했다.‘분명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온 거지?’법원의 감정 결과는 신뢰도가 무려 99.99%에 달한다. 게다가 상대가 먼저 감정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자신들의 패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상대 변호사는 계속해서 반박을 이어갔다.“이 모든 것이 원고 측의 억측일 뿐입니다. 게다가 원고 측은 수년에 걸쳐 국내외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원고의 신체적, 심리적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음을 증명합니다.”변호사는 이렇게 말하며 소원의 해외 진료 기록과 국내 진료 기록을 제출했다.비교해 보면 오히려 소원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이후의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결과는 명백했고 예상대로 소원은 처참히 패배했다.육경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마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만 말했을 뿐인데도 손쉽게 그녀를 이겼다.“아닙니다.”소원은 목이 메어 힘겹게 입을 뗐다.“그렇지 않아요. 저 사람은 악마예요. 미쳤다고요. 저를 협박해서 아이를 가지게 했고 지금도 저를 협박해서 다시 그 더러운 관계를 이어가려고
증거 제출 단계에 도달했다.주석훈은 먼저 한 건의 동영상 증거를 제출했는데 그것은 과거 서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영상 스캔들 사건의 영상이었다.그 영상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이는 육경한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영상은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원의 손에는 여전히 원본이 남아 있었다. 육경한의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소원이 이번 재판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가 분명해졌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속에 서현재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는 영상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화면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단단히 혼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반응에 스스로도 놀랐다.평소 서현재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내가 왜 이렇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거지?’영상이 끝난 후,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존경하는 재판장님, 방금 보신 영상은 제 의뢰인과 피고가 등장하는 영상입니다. 피고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수단으로 제 의뢰인을 협박하여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제 의뢰인이 어쩔 수 없이 요청했던 일이었지만 과정 전반에서 피고의 일방적인 폭력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저희는 피고가 정신과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주석훈은 한 보고서를 꺼내 들며 계속 말했다.“이것은 피고가 복용한 약물의 분석 보고서입니다.” 증거가 제출된 후, 판사는 이를 자세히 검토하고 나서 육경한에게 물었다.“원고 측 주장에 동의하십니까?”“동의하지 않습니다.”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재판장의 말에 반박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어깨를 움츠렸고 옆에 있던 주석훈도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느낄
게다가 만남이 잦아지면서 주석훈은 성격이 올곧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다워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접 느끼게 되었다.아니나 다를까 주석훈이 차갑게 경고했다.“제 의뢰인에게 소송을 거는 건 되지만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공공장소에서 제 의뢰인을 모욕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협박까지 하는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어요. 영상으로 남겼으니 우리도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습니다.”“...”육연주가 할 말을 잃자 주석훈이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제 의뢰인은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준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는 건 앞서 만났을 때 이미 제 의뢰인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다는 걸 증명하죠. 합법적인 방법으로 CCTV 영상까지 입수하면 오늘 사건의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어요. 그리고 아가씨가 만들어낸 얘기에 제 의뢰인이 심리적인 타격을 입었으니 제 의뢰인의 명예권을 침범한 거나 다름없어요. 민사 소송은 제기해도 되는 부분이라 끝까지 쫓아가 볼 생각입니다.”“닥쳐요.”육연주는 세도 너무 센 변호사의 말발에 약이 잔뜩 올랐다. 하필 육연주가 못 알아듣는 말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참에 변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 이참에 알게 되었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저 여자가 먼저 나 욕했어요.”육연주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영상까지 확보했는걸요.”주석훈이 말했다.“당신 정말...”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말로 벌어먹는 변호사에게 말로 덤볐으니 승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얼른 서현재를 옆으로 끌어당겼다.“현재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 여자 친구 괴롭히는 거 보고만 있을 거예요...”서현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석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육연주는 오만해도 너무 오만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육연주를 사랑했다고 서현재에게 말해줬지만 서현재는 자기가 이렇게 볼품없는 여자를 좋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육연주는 화가 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현재 오빠, 나
법원 입구라 원래도 시비가 많이 갈리는 곳이었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내연 관계로 싸우는 경우도 파다했기에 딱히 놀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소원 씨,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일단 무릎 꿇고 싹싹 빌겠어요. 삼촌도 사실 그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소원 씨처럼 교양 없는...”육연주는 말하면 말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소원이 손을 들어 육연주의 뺨을 후려갈겼다.철썩.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육연주는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한참 반응하던 육연주가 그제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봤다.“미... 미쳤어요?”육연주는 소원이 싸대기를 날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빈약한 소원은 자기를 보호할 힘이 없어 남자에게 빌붙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소원은 예전부터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은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예전대로 육경한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소원은 육경한이 한 짓이 틀렸다고 증명하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다.“육연주 씨, 이 따귀는 내가 맞은 걸 그대로 돌려주는 거예요.”소원이 말했다.“그리고 내 아이는 잡것이 아니에요. 나와 육경한 사이에 일어난 일은 삼촌이 직접 들려준 얘기를 들은 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뭐 육연주 씨가 지적한다고 해서 듣지는 않을 테지만요. 하지만 이 따귀는...”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내 원칙이라.”소원은 늘 다른 사람이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연주처럼 어이없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대해주는 게 답이었다. 소원은 이제 홀몸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강해져야 했고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그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육연주는 소원이 한 말에 놀랐는지 벙어리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옆에 있던 서현재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살아 돌아왔고 피바람이 몰아치는 업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육경한인데 여자 하나 끊어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일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인데 더 빠져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이튿날.소원은 초록색 코트를 입고 법원에 도착했다. 초록색은 여자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컬러가 아니었지만 소원이 입으니 너무 예쁘고 매혹적이었다. 소원이 이렇게 입은 건 제일 좋은 상태로 결과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주석훈이 옆에서 그런 소원을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육경한에게 정신질환이 있고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 있으면 절대 양육권이 육경한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정신질환은 어쩌면 큰 결격사유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 어떤 법도 고작 몇 살밖에 안 되는 유진이 시한폭탄과도 같은 육경한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소원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은 소원이 어떤 약점을 쥐고 있는지 몰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는 소원에게 기회가 되었다.주석훈은 시간이 거의 되자 이렇게 말했다.“준비됐으면 이제 들어갈까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귀청을 때리는 가느다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어머, 이렇게 튀는 색깔을 입었다고요? 우리 삼촌 버리고 바람피운 걸 다른 사람이 몰라줄까 봐 일부러 그랬나?”소리를 들어보니 육연주였다. 소원은 상대하기 싫었지만 육연주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서현재가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본 것에 심통이 나 있는 육연주였다.육경한은 육연주에게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으니 천천히 받아줄 거라 했지만 서현재는 아직도 그런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봤다. 육연주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눈빛 말이다.소원은 대꾸하지 않고 육연주와 함께 법원에 나타난 서현재를 바라봤다. 그레이 슈트를 입은 서현재는 젊고 잘생겨 보였고 손에는 하얀 여성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참 변함없이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 친절함을 누리는 사
소원은 육경한이 준 상처가 너무나도 많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육경한은 그렇게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는 아직 섬뜩한 핏자국이 고여있었는데 다 육경한의 손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다.소원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그 핏자국을 바라봤다. 소원, 그리고 소원의 가족들이 흘린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밖으로 나와보니 햇살이 눈을 찌를 정도로 셌다. 육경한은 해를 쏴서 떨어트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올랐다.마중 나온 소종이 육경한의 표정과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보고는 마음이 철렁했다.“대표님, 손이... 얼른 치료해야겠어요.”소종은 육경한이 차에 오를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어주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구급상자를 꺼내 붕대를 가지는데 육경한이 낚아챘다. 육경한은 아무렇게나 붕대를 감더니 이내 치료가 끝났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대표님, 소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그럴 필요 없어.”육경한이 차갑게 대답했다. 소독은 무슨, 이제 이런 상처 따위는 육경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소종은 썩을 대로 썩은 육경한의 표정을 보며 또 그 여자와 싸웠겠거니 생각했다. 참으로 분수를 모르는 여자였다.육경한은 어제 큰 프로젝트와 관련된 파티에 참석하던 중 소식을 듣고 파티에 참석한 거물들을 제쳐둔 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소종을 파티에 남기긴 했지만 외국에서 온 대표 하나가 노발대발하며 물었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가는 건가요?”소종이 스무스하게 넘기려 했지만 상대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육경한에게 돌아올 것을 건의했지만 육경한은 프로젝트를 잃어도 좋다는 답변만 보내왔다.말은 쉬웠지만 수천억을 호가하는 큰 프로젝트라 성공적으로 따내면 회사가 다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소원을 위해, 아무것도 몰라주는 소원을 위해 날려버린 것이다.사랑에 빠진 남자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어디로 갈까요?”소종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렇게 물었다.“오아시스로 가자.
소원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 넌 정말 나날이 더 파렴치해지는구나. 역겨움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너를 보면서 똑똑히 알겠어.”육경한은 전혀 자극이 되지 않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이제 답을 해줄 때가 된 것 같은데? 내일 소송 취하할 거야, 아니면 이 기회를 날려버릴 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이제 얌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버팀목이었던 서현재가 사라졌으니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소원은 주먹을 꽉 부여잡는 것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증오를 꾹꾹 눌러 담았다.“유진이 뺏어갈 생각하지 마. 난 유진이 너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싫어. 너 같은 사람은 아이가 있으면 안 돼.”아직도 얌전해지지 않은 소원을 보며 육경한은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더니 소원의 옷자락을 확 부여잡았다.“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유진이가 내 핏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그래. 나도 그 부분이 제일 싫어. 선택할 수 있다면 너는 아니었겠지. 유진이는 원하는지 물어봤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이 상처받았다. 소원이 유진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게 유진의 몸에 그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선택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서현재였으면 좋겠다는 건가? 미쳤네.’육경한은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이를 악물었다.“원하지 않을 게 뭐가 있어? 나를 위해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너는 내 아이를 가진 걸 축복으로 생각해야 해. 아니면 네가 이렇게 설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하하하...”소원은 너무 크게 웃은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정말 그 자신감 하나는 여전하구나.”소원이 비아냥댔다.“그래. 너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 줄 섰지. 하지만 일단 애인부터 시작해서 온갖 수모와 곤욕을 치른 다음 도우미처럼 밥하고 빨래하면서 시중
이 말에 소원의 표정이 변했다. 그제야 여기가 병원이고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전부 기억났다.‘현재를 만났는데...’슬픈 듯 아닌 듯한 표정이 소원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육경한은 그런 표정이 너무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아직도 꿈꾸지 말아야 할 걸 꿈꾸는 거야?”육경한이 경멸에 찬 말투로 말했다. 서현재가 돌아왔다는 사실과 이제 더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현재의 기억을 조작하는데 육경한도 힘을 보냈을 것이다.아니,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거대한 슬픔이 소원의 마음을 덮쳤다.소원과 서현재는 마치 실험용 생쥐처럼 육경한과 서씨 가문에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들이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는 빈껍데기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말은 똑같았다.마음이 복잡해진 소원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나가.”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정말 한시라도 소원을 불쌍하게 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밤새 옆에서 소원이 꿈을 꾸며 불안해하는 걸 지켜본 육경한은 마음이 살짝 약해졌고 유진을 만나게 해주는 것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육경한도 소원이 유진을 만나는 순간 다시 이런저런 꿍꿍이를 생각해 내며 그가 잠깐 한눈판 사이 아이를 데리고 멀리 훨훨 떠나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아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소원이 연이라면 아이는 연을 묶은 실과도 같아 실만 잘 지켜도 연은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미동도 없자 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링거 바늘을 뽑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소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소원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뭐 하는 거야?”소원이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너랑 한 지붕 아래에 있는 게 역겨워서 그런다. 네가 안 가면 나라도 가야지.”육경한도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나랑 있는 게 역겨우면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