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남자친구 몰래 윤혜인에게 숫자 17을 그렸고 그녀의 손짓을 본 윤혜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원의 손짓은 이 남자가 그녀의 어장에 들어온 열일곱 번째 물고기라는 뜻이었다.“우리 원이가 저한테 혜인 씨 얘기를 자주 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미인인 줄 몰랐네요. 만나서 반가워요.”김재성이 손을 뻗어 윤혜인과 악수를 하려고 했다. 윤혜인은 말을 하면서 그녀를 이리저리 훑는 김재성이 눈빛에 왠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했다.김재성은 악수를 한 뒤, 손을 거두면서 실수인 척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살짝 긁었고 순간, 윤혜인은 소름이 쫙 돋았다.윤혜인이 급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김재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소원과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한참 뒤, 식사를 하던 도중에 김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룸에 둘만 남게 되자 소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혜인아, 너 괜찮아?”윤혜인은 소원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혁과의 일에 관해 소원에게 숨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은 서울에서 알아주는 상류 명문 가문이기에 임세희에 관한 일은 소원이 윤혜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대답을 하려던 찰나, 윤혜인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참 헛구역질을 하던 윤혜인이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뒤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헤헤, 오늘밤에는 무조건 따먹을 거야. 정 안 되면 술을 많이 먹이지 뭐. 젠장,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고 그래. 멍청한 여자가 계속 잠자리를 거부해. 약을 타볼까 고민중이야. 그리고 절친이라고 데려온 여자가 있는데 엄청 예뻐. 둘을 한꺼번에 잘 수 있으면 완벽한데. 나중에 침대에서 사진도 좀 찍고 동영상도 찍어서 나중에 친구들이랑 같이 즐겨야지. 그땐 반항도 못할 걸?”그 뒤의 말은 더 역겨운 말들이었고 조용히 듣고 있던 윤혜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김재성은 윤혜인을 발견하자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거들먹거렸다.“
김재성의 공격에 전혀 당황하지 않은 윤혜인은 태연하게 몸을 슬쩍 돌려 피했고 헛방을 날린 김재성은 바닥에 흘린 오디 주스를 밟고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김재성은 허리를 잡고 가까스로 바닥에서 일어나 이를 꽉 깨물며 욕을 퍼부었다.“어디 주제도 모르는 천박한 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을 찾아 나선 소원은 이런 광경을 목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윤혜인이 설명하려고 할 때, 김재성이 먼저 말을 꺼냈다.“소원아, 혜인 씨가 내 연락처를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줬거든.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내 몸에 주스를 뿌렸어…”김재성은 허리를 잡고 비참한 모습으로 일어나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고 윤혜인은 그런 김재성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저리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김재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소원아, 난 너에게 미안한 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혜인 씨를 거절한 건데…”“웩! 웩… 웩!”김재성의 말은 윤혜인의 헛구역질 소리에 끊겨버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하던 말 계속 하세요.”윤혜인이 입을 막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김재성은 화가 났다. 갑자기 말이 끊긴 바람에 조금 전의 북받쳐 오르던 감정을 잃은 그는 말을 길게 할 수도 없었다.“소원아, 넌 날 꼭 믿어줘야 돼.”“재성아, 너 왜 이렇게 바보 같아.”소원은 김재성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사랑스럽게 웃었고 김재성은 이내 의기양양했다. 이 방법은 모든 여자에게 먹혔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절친이라고 해도 남자가 끼어들면 그 우정에 금이 가기 마련이다.김재성의 눈에 소원은 그저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바보일 뿐이다. 김재성이 손을 뻗어 소원을 안으려고 한 찰나, 소원이 무릎으로 그의 아랫도리에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순간,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 김재성은 기름에 튀
소원은 이런 결정을 내린 윤혜인이 대견했다. 이준혁의 인간 관계는 너무 복잡했기에 소원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봐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넌 진작에 정신을 차려야 했어. 맨날 이준혁의 잔심부름이나 하고, 그게 뭐야! 넌 얼굴도 예쁘고 실력도 강하고.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디자인했던 작품은 상까지 받았잖아! 이산 그룹을 떠나면 네 앞날이 휘황찬란할 거야.”예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을 많이 사랑하고 있을 때 소원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할 수 없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윤혜인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고 제대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소원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그거 알아? 한구운이 돌아왔대! 대학교 다닐 때 너랑 구운 선배는 완전 선남선녀였잖아.”“선배님이 귀국했다고?”윤혜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그래, 너 한구운 선배 인스타 팔로우 안 했어? 구운 선배는 지금 주식 투자계의 다크호스야. 어마어마할 정도로 유명해졌다고.”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준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원 말고는 연락하는 동창이 거의 없었다.사실 난 그때 너와 구운 선배가 잘 되길 바랐거든. 한구운 선배가 너보다 2년 선배이긴 하지만 너에게 진짜 잘해줬어. 내가 부러울 정도였다니까.”“이상한 얘기하지 마. 구운 선배는 성격이 다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잘해줬어.”윤혜인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는 그때 당시 한구운은 그저 학생 회장으로써 신입생에게 신경을 조금 더 많이 쓴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은 윤혜인이 이런 쪽에 둔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에이그, 바보 같은 계집애.”“육경한 씨가 돌아왔다고 들었어.”윤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육경한은 소원과 약혼을 했던 사이지만 갑자기 육경한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소원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이준혁과 육경한은 꽤 친한 사이였기에 육경한이 귀국한 뒤로부터 두 집안은 비즈니스 합작이 유난히 잦았다.소원의
이내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한 임세희가 곁에 있던 송소미를 보며 말했다.“소미야, 내가 식당에 가방을 두고 온 거 같아.. 혹시 가서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송소미는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임세희의 말에 윤혜인을 죽일 듯이 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송소미가 떠나자 임세희가 윤혜인을 보며 환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윤혜인 씨, 그동안 저 대신 준혁 오빠 잘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요.”간단한 말 한마디로 임세희는 이준혁에 대한 소유권을 명확하게 표시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인사 말을 들으며 너무 아이러니했다.분명 이준혁의 아내는 윤혜인 그녀인데.임세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전에는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작은 모순이 생겼다고 해외로 도망가버렸거든요. 근데 준혁 오빠가 지금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진짜 너무 감동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돌아온 김에 준혁 오빠랑 결혼할 생각이에요.”이 순간, 임세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흐릿하게 들렸다. 윤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그들은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이준혁은 벌써 임세희와 결혼하고 싶은 건가?“윤혜인 씨, 윤혜인 씨?”임세희의 부름에 윤혜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네, 임세희 씨.”임세희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윤혜인을 보며 너무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윤혜인 씨, 저희 번호 주고받을까요? 준혁 오빠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데 저도 오빠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나중에 윤혜인 씨 도움도 필요할 것 같고.”윤혜인은 번호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간절하게 바라는 임세희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번호를 받은 임세희가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윤혜인 씨, 혹시 저를 저쪽까지 밀어줄 수 있을까요?”고개를 끄덕인 윤혜인이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었지만 휠체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잡이를 누른 채 허리를
말을 끝낸 이준혁은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임세희를 안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을 뒤따라가던 송소미는 바닥에 쓰러진 윤혜인을 보며 비아냥거렸다.“허튼 기대는 이제 그만 넣어둬. 넌 하수구 안에서 살고 있는 쥐에 불과해. 우리 세희 언니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간다고.”송소미의 거친 말에도 윤혜인은 전혀 들리지 않는듯 멀어져가는 이준혁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았다.윤혜인은 저렇게까지 긴장한 이준혁의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그녀에게 마음을 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검은색 벤틀리는 빠른 속도로 윤혜인 앞을 지나쳤고 윤혜인은 아랫배가 점점 더 아팠다.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배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가야…”이때,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원은 그녀에게 차가 막혀서 주차장에서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에 윤혜인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택시를 잡기 어려웠기에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몸으로 이준혁의 차를 세우려고 했다.그리고 그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윤혜인은 그녀 앞을 지나치는 차를 보며 힘겹게 다가가 온 힘을 다해 차 뒤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차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빠른 속도로 도로를 향해 나서는 검은색 벤틀리는 주인처럼 매정했다.윤혜인은 우두커니 서서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점점 더 강해지는 아랫배의 통증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배를 꼭 끌어안았다.“아가야,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말렴…”한편, 병실 안에서.의사가 임세희에게 정밀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준혁은 병원 복도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은 못 찾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떠나신듯 합니다.”전화기 너머 주훈이 솔직하게 전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이준혁 머릿속엔
다행히 임세희는 미리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휠체어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 나중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고자질해도 이준혁은 악독한 윤혜인이 임세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임세희는 기분이 언짢았다. 예전의 이준혁이라면 절대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다니.조금 전에 임세희는 단지 윤혜인을 떠본 것이다. 그녀는 절대 이런 멍청한 방법으로 윤혜인을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며 정말 윤혜인을 없애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절대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이준혁이 그런 여자와 2년 넘게 잠자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일그러졌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감히 그녀의 남자를 건드리다니.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는 건가!한편, 공기중에는 역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이준혁이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취조하듯 물었다.“너 임신했어?”한참 뒤,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당장 지워!”“안 돼요!”소리를 지르던 윤혜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이곳은 병원이고 조금 전 상황은 그저 윤혜인이 꾼 악몽이었다.윤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길쭉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윤혜인은 이런 곳에서 한구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구운 선배, 선배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윤혜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한구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조금 전에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소원이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과 차를 부딪쳐서 싸우고 있더라고. 차를 빼기 힘들다면서 나한테 대신 널 찾아달라고 했어.”윤혜인은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뱃속의 아이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에 대해 묻
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병실 안에서.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을 보며 조금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다.윤혜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변명했다.“배탈이 난 거 같아요.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깐 신경쓰지 마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윤혜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파요.”이준혁이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보니 넘어질 때 긁힌 상처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상처 치료 제대로 안 했어?”윤혜인은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우울했다.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화장실을 나서서 소파에 앉혔고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가져왔다.다음 순간, 이준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상처를 소독했다.“피할 줄 몰라?”방구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밀쳐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혁인데!이준혁은 알코올 면봉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독해 주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자연스럽고 별다른 뜻이 없는 행동이였지만, 윤혜인은 자꾸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윤혜인이 눈물을 찔끔 흘렸고 그녀는 작은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울고 싶었다.눈물이 떨어지려던때,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고 이준혁에게 한마디만 물어보고 싶었다.그는 정말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걸까?하지만 이준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이때, 고개를 든 이준혁은 윤혜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를 발견했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명령하듯이 입을 열었다.“그만 깨물어.”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
소원은 소종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육경한 있나요?”“없습니다. 대표님은 회의 중이에요.”이어 소원이 말을 꺼내려 하자 소종이 말을 끊었다.“대표님은 지금 소원 씨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바쁘십니다. 소원 씨, 지난번 결혼식에 용감히 난입했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심정으로 소원 씨를 그곳에서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서씨 가문과의 협력이 몇 건이나 엎어졌습니다. 물론 서씨 가문에서 먼저 끊은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그 서씨를 못마땅해하셔서 직접 협상 테이블을 뒤엎었거든요. 뭐, 그때는 속 시원했지만 지금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친 몸으로 말이죠.”소원은 소종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얘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육경한이 무슨 일을 하든 소원은 관심 없었다.서씨 가문의 테이블을 뒤엎든 말든 그건 소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씨 가문의 재산은 서현재에게 돌아갈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오히려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함부로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하지만 지금 소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유진이의 안위뿐이었다.유진이 안전한지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소 비서님, 육경한한테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을까요? 정말 급한 일이 있습니다.”그러자 소종은 비웃듯 물었다.“대표님더러 일하다 말고 소원 씨 전화를 받으라는 말씀이세요?”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정말 급한 일이에요...”하지만 소종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원 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는 이어서 말했다.“소원 씨가 대표님에게 연락해서 좋은 일로 이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소원 씨와 관련된 일은 항상 문제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은 매번 소원 씨의 뒷수습을 하느라 애쓰시네요.”“이번
차에 탄 뒤, 소원은 다급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경원 별장으로 가 주세요.”경원 별장은 육경한의 대저택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산기슭까지만 갈 수 있었는지라 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그 대저택은 우리 같은 택시가 올라갈 수 없게 막혀 있습니다. 혹시 위에서 허가를 받은 게 있으신가요? 그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들어가길 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자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셔야 할 것 같네요.”결국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금을 지불한 후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소원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또 어떤 남자한테 상처받고 찾아온 여자겠지.’이 산 중턱에는 몇몇 재벌 가문의 대저택들이 모여 있었기에 운전기사는 궁금했다.‘과연 어느 재벌 2세가 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게다가 저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텐데.’소원은 첫 번째 보안 초소에 도착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지만 소원은 육경한 집의 출입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이 비밀번호는 과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몰래 알려준 것이었다.혹시나 유진이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소원이 들어가지 못해 문제라도 생길까 봐 미리 대비해둔 것이다.그렇게 소원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체력이 약한 데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걸어가야 했기에 소원은 정말 힘들고 지쳤다.이런 대저택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집안 관리인들조차도 전용 차량을 이용했기에 두 발로 이동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40분 넘게 걸어가서야 소원은 경원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저택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소원은 문을
하지만 유진은 특별한 아이였고 아줌마는 몇 년 동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진에게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유진은 늘 아줌마를 할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소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했다.[아줌마, 유진이 목소리 너무 오래 못 들어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들려줘요.]그쪽은 답장이 매우 빨랐다.[아가씨, 다음 기회에 몰래 녹음해 드릴게요. 다른 도우미들이 한눈을 팔아야지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잘 지내고 있고 아가씨 얘기도 거의 안 꺼내고 있어요.]소원은 경거망동하기 싫어 더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아줌마의 마지막 한마디는 사실 매우 불필요한 말이었다. 아줌마는 소원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진이 이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얘기는 소원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도 너를 버렸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말과 같았고 소원에겐 무조건 자극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아줌마가 소원을 따라다닌 지도 어언 7년이었고 거의 가족처럼 힘든 일 궂은일 다 같이 했다. 아줌마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 어떤 약점도 없었고 누군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유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소원은 이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7년 만에 갑자기 변할 일은 없었고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지금 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줌마는 예전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만약 아줌마를 빼돌린 거라면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소원은 전에 육경한에게 유진은 아줌마 없이 안 된다고 말했고 육경한도 아줌마를 잘 챙겨주겠다고, 다른 시터가 있어도 아줌마가 홀대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원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한참 지나 그쪽에서 영상을 하나 더 보내왔다. 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시곡을 외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와. 우리 유진이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방민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사진을 찍더니 아이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주고는 시터가 아이를 씻기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육경한에게 답장했다.“경한 씨, 미안해요. 유진이랑 놀아주느라 핸드폰 확인을 못 했네요. 씻기고 침대에 눕히니 이제 조금 확인할 시간이 나네요. 내게 가정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방민아는 유진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육경한에게 보내주더니 시터에게 눈치를 주자 시터가 방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방민아는 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이렇게 물었다.“그 아줌마 요 며칠 좀 어때요?”방민아가 물은 아줌마는 전에 소원이 유진을 보살펴달라고 위탁한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유진에게 진심이었기에 절대 유진을 해치지 않았고 돈으로 매수될 사람도 아니었다.하여 방민아는 그 아줌마가 먹는 식수와 음식에 다른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미량의 독을 탔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다 더는 유진을 보살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방민아가 제일 좋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도 여전히 무슨 질병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했다.아줌마는 소원의 위탁을 받았는지라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옆에 꼭 붙어있으려 했다. 유진은 이제 아줌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원 못지않게 유진을 챙기고 보호했다.방민아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유진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별장 뒤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게 했고 사람과 의사를 보내 아줌마를 보살폈기에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종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보고할 때면 늘 방민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시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방민아의 눈빛이 살짝 빛나더니 웃으며
유진이 처음 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고슴도치 같았고 평소 그를 보살펴주던 시터와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봤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육경한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종은 최근 방민아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유진을 보살피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속 휴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방민아가 매일 육씨 저택으로 가서 유진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유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육씨 저택은 유진이 올 때부터 데려온 아줌마 외에 전문적인 시터 두 명을 따로 들였기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칠 걱정도 없었다.“방민아 씨 아이를 꽤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가정 심리 주치의도 작은 도련님 진료를 보고는 진보가 크다며 매우 만족해하셨거든요.”소종의 말에 육경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방민아가 요 며칠 보낸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많이 보낸 건 아니었고 하루에 한두 개 정도, 그것도 다 육경한의 몸을 걱정하는 문자지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유진의 사진도 틈틈이 보내왔다. 유진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사진, 책을 보는 사진,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진, 그리고 밥 먹는 사진까지... 진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긴 했다.육경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장을 보냈다....한편, 차 안에 있는 유진은 얌전하고 부드럽던 아까와는 달리 방민아를 살짝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모, 나랑 약속했잖아요.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면 엄마 보여주겠다고.”방민아도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조금 더 노력해야지. 아빠가 진짜 만족해야만 엄마 볼 수 있어.”유진은 금세 김이 빠졌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아까 그 연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했다.왜냐하면 방민아가 육경한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와 몇 마디 대화해 아빠를 기쁘게 해주면
육경한은 방민아의 유도가 유진의 반감을 살까 봐 입을 열려는데 유진이 한발 빨랐다.“몸은 좀 나아졌어요?”나지막한 목소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유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빠.”이 말에 병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방금... 뭐라고?”육경한은 믿을 수가 없어 큰소리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이 착하지... 다시 한번 말해봐.”육경한이 흥분하자 유진이 살짝 놀랐는지 머리를 방민아 뒤로 숨기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민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유진과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우리 아까 한 말 다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게 어떨까?”유진이 방민아와 육경한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이렇게 말했다.“많이 좋아졌요? 아빠.”이 목소리는 전보다 컸고 전보다 뚜렷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상처가 찢어져 너무 아팠지만 육경한은 꾹 참으며 유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유진아... 아빠 괜찮아.”육경한에겐 머리를 만져주는 게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어릴 때 육경한의 아버지가 육경한을 격려할 때도 머리를 쓰다듬어줬기에 육경한에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종의 인정이자 칭찬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경한은 자기 자신을 꼭꼭 싸맨 상태였고 괴물로 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로잡힌 육경한은 가족 간의 사랑이나 윤리 도덕은 안중에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이 아빠라고 부르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리는 그동안 육경한이 저지른 수많은 죄를 씻어내리는 천사의 목소리와 같아 육경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기침했다.“민아 씨, 여기 아이가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에요. 일단 유진이 데리고 돌아가요.”“그래요. 경한 씨. 몸조리 잘해요. 국 좀 가져왔는데 이따 챙겨 먹어요.”방민아가 테이블에 놓인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