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이런 결정을 내린 윤혜인이 대견했다. 이준혁의 인간 관계는 너무 복잡했기에 소원은 윤혜인이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봐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넌 진작에 정신을 차려야 했어. 맨날 이준혁의 잔심부름이나 하고, 그게 뭐야! 넌 얼굴도 예쁘고 실력도 강하고.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디자인했던 작품은 상까지 받았잖아! 이산 그룹을 떠나면 네 앞날이 휘황찬란할 거야.”예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을 많이 사랑하고 있을 때 소원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할 수 없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윤혜인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고 제대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소원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그거 알아? 한구운이 돌아왔대! 대학교 다닐 때 너랑 구운 선배는 완전 선남선녀였잖아.”“선배님이 귀국했다고?”윤혜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그래, 너 한구운 선배 인스타 팔로우 안 했어? 구운 선배는 지금 주식 투자계의 다크호스야. 어마어마할 정도로 유명해졌다고.”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준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원 말고는 연락하는 동창이 거의 없었다.사실 난 그때 너와 구운 선배가 잘 되길 바랐거든. 한구운 선배가 너보다 2년 선배이긴 하지만 너에게 진짜 잘해줬어. 내가 부러울 정도였다니까.”“이상한 얘기하지 마. 구운 선배는 성격이 다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잘해줬어.”윤혜인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는 그때 당시 한구운은 그저 학생 회장으로써 신입생에게 신경을 조금 더 많이 쓴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은 윤혜인이 이런 쪽에 둔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에이그, 바보 같은 계집애.”“육경한 씨가 돌아왔다고 들었어.”윤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육경한은 소원과 약혼을 했던 사이지만 갑자기 육경한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소원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이준혁과 육경한은 꽤 친한 사이였기에 육경한이 귀국한 뒤로부터 두 집안은 비즈니스 합작이 유난히 잦았다.소원의
이내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한 임세희가 곁에 있던 송소미를 보며 말했다.“소미야, 내가 식당에 가방을 두고 온 거 같아.. 혹시 가서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송소미는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임세희의 말에 윤혜인을 죽일 듯이 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송소미가 떠나자 임세희가 윤혜인을 보며 환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윤혜인 씨, 그동안 저 대신 준혁 오빠 잘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요.”간단한 말 한마디로 임세희는 이준혁에 대한 소유권을 명확하게 표시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인사 말을 들으며 너무 아이러니했다.분명 이준혁의 아내는 윤혜인 그녀인데.임세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전에는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작은 모순이 생겼다고 해외로 도망가버렸거든요. 근데 준혁 오빠가 지금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진짜 너무 감동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돌아온 김에 준혁 오빠랑 결혼할 생각이에요.”이 순간, 임세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흐릿하게 들렸다. 윤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그들은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이준혁은 벌써 임세희와 결혼하고 싶은 건가?“윤혜인 씨, 윤혜인 씨?”임세희의 부름에 윤혜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네, 임세희 씨.”임세희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윤혜인을 보며 너무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윤혜인 씨, 저희 번호 주고받을까요? 준혁 오빠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데 저도 오빠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나중에 윤혜인 씨 도움도 필요할 것 같고.”윤혜인은 번호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간절하게 바라는 임세희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번호를 받은 임세희가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윤혜인 씨, 혹시 저를 저쪽까지 밀어줄 수 있을까요?”고개를 끄덕인 윤혜인이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었지만 휠체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잡이를 누른 채 허리를
말을 끝낸 이준혁은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임세희를 안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을 뒤따라가던 송소미는 바닥에 쓰러진 윤혜인을 보며 비아냥거렸다.“허튼 기대는 이제 그만 넣어둬. 넌 하수구 안에서 살고 있는 쥐에 불과해. 우리 세희 언니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간다고.”송소미의 거친 말에도 윤혜인은 전혀 들리지 않는듯 멀어져가는 이준혁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았다.윤혜인은 저렇게까지 긴장한 이준혁의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그녀에게 마음을 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검은색 벤틀리는 빠른 속도로 윤혜인 앞을 지나쳤고 윤혜인은 아랫배가 점점 더 아팠다.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배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가야…”이때,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원은 그녀에게 차가 막혀서 주차장에서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에 윤혜인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택시를 잡기 어려웠기에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몸으로 이준혁의 차를 세우려고 했다.그리고 그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윤혜인은 그녀 앞을 지나치는 차를 보며 힘겹게 다가가 온 힘을 다해 차 뒤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차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빠른 속도로 도로를 향해 나서는 검은색 벤틀리는 주인처럼 매정했다.윤혜인은 우두커니 서서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점점 더 강해지는 아랫배의 통증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배를 꼭 끌어안았다.“아가야,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말렴…”한편, 병실 안에서.의사가 임세희에게 정밀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준혁은 병원 복도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은 못 찾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떠나신듯 합니다.”전화기 너머 주훈이 솔직하게 전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이준혁 머릿속엔
다행히 임세희는 미리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휠체어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 나중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고자질해도 이준혁은 악독한 윤혜인이 임세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임세희는 기분이 언짢았다. 예전의 이준혁이라면 절대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다니.조금 전에 임세희는 단지 윤혜인을 떠본 것이다. 그녀는 절대 이런 멍청한 방법으로 윤혜인을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며 정말 윤혜인을 없애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절대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이준혁이 그런 여자와 2년 넘게 잠자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일그러졌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감히 그녀의 남자를 건드리다니.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는 건가!한편, 공기중에는 역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이준혁이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취조하듯 물었다.“너 임신했어?”한참 뒤,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당장 지워!”“안 돼요!”소리를 지르던 윤혜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이곳은 병원이고 조금 전 상황은 그저 윤혜인이 꾼 악몽이었다.윤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길쭉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윤혜인은 이런 곳에서 한구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구운 선배, 선배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윤혜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한구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조금 전에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소원이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과 차를 부딪쳐서 싸우고 있더라고. 차를 빼기 힘들다면서 나한테 대신 널 찾아달라고 했어.”윤혜인은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뱃속의 아이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에 대해 묻
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병실 안에서.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을 보며 조금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다.윤혜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변명했다.“배탈이 난 거 같아요.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깐 신경쓰지 마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윤혜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파요.”이준혁이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보니 넘어질 때 긁힌 상처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상처 치료 제대로 안 했어?”윤혜인은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우울했다.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화장실을 나서서 소파에 앉혔고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가져왔다.다음 순간, 이준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상처를 소독했다.“피할 줄 몰라?”방구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밀쳐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혁인데!이준혁은 알코올 면봉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독해 주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자연스럽고 별다른 뜻이 없는 행동이였지만, 윤혜인은 자꾸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윤혜인이 눈물을 찔끔 흘렸고 그녀는 작은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울고 싶었다.눈물이 떨어지려던때,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고 이준혁에게 한마디만 물어보고 싶었다.그는 정말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걸까?하지만 이준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이때, 고개를 든 이준혁은 윤혜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를 발견했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명령하듯이 입을 열었다.“그만 깨물어.”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비스듬히 열린 베란다 문 사이로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와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 봐도 이준혁이 임세희를 달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베란다에서 시선을 거둔 채 손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히 상처가 난 건 손바닥인데 왜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이 더 아픈 걸까?그녀의 마음은 아마 평생 완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안방으로 돌아온 이준혁은 테이블에 놓인 키를 챙긴 뒤, 조금 전에 풀어헤친 넥타이를 다시 꼼꼼하게 맸다.이준혁은 차갑고 도도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한참 그녀를 쳐다보던 이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음식을 테이블에 놓고 갈 테니까 얼른 먹고 쉬어.”이준혁의 입술에는 두 사람의 키스 흔적이 남아있었다.“이준혁 씨, 가지 마세요…”이준혁이 돌아선 찰나, 윤혜인이 갑자기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성씨까지 붙여서 이준혁의 이름을 불렀다.윤혜인은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을까 봐 감히 이준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는 이준혁에게 임세희에게 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윤혜인은 이런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한 번쯤은 용기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보자고 설득했다. 딱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서 가지 말라고 부탁해 보자고 결심했다.방안은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1초, 2초, 3초…그때,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혼을 빼놓을 정도로 계속 끊임없이 울렸다.“혜인아, 장난치지 마.”드디어 입을 연 이준혁은 그녀를 등진 채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뜯어냈고 그렇게 윤혜인의 마지막 기대로 산산조각이 났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고 이준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이때,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와 환자가 깨어났다고 전했고 김성훈이 장난을 거둔 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좀 달래 줘. 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고열이 겨우 내린 임세희는 침대에 힘겹게 기대고 있었고 의사는 그녀의 골수 이식에 거부 반응이 나타난 거라고 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고열이 발생하면 그녀의 몸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임세희는 이준혁의 손을 꽉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준혁 오빠, 나 어깨가 너무 아파, 여기저기 온몸이 다 아파. 나 이 몸으로 오래 못 버틸 거 같아. 나랑 빨리 결혼해 주면 안 돼?”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면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알았어.”이준혁의 대답에 임세희는 모든 서러움이 사르르 녹은 듯 설레는 표정으로 이준혁의 품에 기댔고 눈살을 찌푸리던 이준혁이 불편한 듯 몸이 굳은 채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그가 뒤로 피하려는 게 느껴지자 임세희가 이준혁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그녀는 몸을 배배 꼬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벨트를 풀려고 만지작거렸다.“준혁 오빠, 사실 나… 난 말이야…”애교 섞인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일찍 쉬어, 난 이만 갈게.”난감해진 임세희가 손을 거둔 채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준혁 오빠, 나랑 같이 있어주지 않을 거야?”“임씨 아주머니 계시잖아. 아주머니가 널 잘 돌봐 줄 거야.”“근데 내가 원하는 사람은 오빠라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임세희가 서러운 듯 언성을 높였지만 이준혁은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세희야, 나 아직 이혼 안 했어.”솔직히 이준혁은 목숨 걸고 그를 살린 임세희가 많이 아픈 지금, 모든 걸 제치고 그녀의 소원부터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게 맞았다.하지만 언젠가부터 모든것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고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