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임세희는 미리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휠체어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 나중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고자질해도 이준혁은 악독한 윤혜인이 임세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임세희는 기분이 언짢았다. 예전의 이준혁이라면 절대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다니.조금 전에 임세희는 단지 윤혜인을 떠본 것이다. 그녀는 절대 이런 멍청한 방법으로 윤혜인을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며 정말 윤혜인을 없애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절대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이준혁이 그런 여자와 2년 넘게 잠자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일그러졌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감히 그녀의 남자를 건드리다니.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는 건가!한편, 공기중에는 역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이준혁이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취조하듯 물었다.“너 임신했어?”한참 뒤,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당장 지워!”“안 돼요!”소리를 지르던 윤혜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이곳은 병원이고 조금 전 상황은 그저 윤혜인이 꾼 악몽이었다.윤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길쭉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윤혜인은 이런 곳에서 한구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구운 선배, 선배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윤혜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한구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조금 전에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소원이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과 차를 부딪쳐서 싸우고 있더라고. 차를 빼기 힘들다면서 나한테 대신 널 찾아달라고 했어.”윤혜인은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뱃속의 아이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에 대해 묻
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병실 안에서.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을 보며 조금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다.윤혜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변명했다.“배탈이 난 거 같아요.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깐 신경쓰지 마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윤혜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파요.”이준혁이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보니 넘어질 때 긁힌 상처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상처 치료 제대로 안 했어?”윤혜인은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우울했다.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화장실을 나서서 소파에 앉혔고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가져왔다.다음 순간, 이준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상처를 소독했다.“피할 줄 몰라?”방구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밀쳐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혁인데!이준혁은 알코올 면봉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독해 주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자연스럽고 별다른 뜻이 없는 행동이였지만, 윤혜인은 자꾸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윤혜인이 눈물을 찔끔 흘렸고 그녀는 작은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울고 싶었다.눈물이 떨어지려던때,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고 이준혁에게 한마디만 물어보고 싶었다.그는 정말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걸까?하지만 이준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이때, 고개를 든 이준혁은 윤혜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를 발견했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명령하듯이 입을 열었다.“그만 깨물어.”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비스듬히 열린 베란다 문 사이로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와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 봐도 이준혁이 임세희를 달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베란다에서 시선을 거둔 채 손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히 상처가 난 건 손바닥인데 왜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이 더 아픈 걸까?그녀의 마음은 아마 평생 완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안방으로 돌아온 이준혁은 테이블에 놓인 키를 챙긴 뒤, 조금 전에 풀어헤친 넥타이를 다시 꼼꼼하게 맸다.이준혁은 차갑고 도도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한참 그녀를 쳐다보던 이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음식을 테이블에 놓고 갈 테니까 얼른 먹고 쉬어.”이준혁의 입술에는 두 사람의 키스 흔적이 남아있었다.“이준혁 씨, 가지 마세요…”이준혁이 돌아선 찰나, 윤혜인이 갑자기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성씨까지 붙여서 이준혁의 이름을 불렀다.윤혜인은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을까 봐 감히 이준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는 이준혁에게 임세희에게 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윤혜인은 이런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한 번쯤은 용기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보자고 설득했다. 딱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서 가지 말라고 부탁해 보자고 결심했다.방안은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1초, 2초, 3초…그때,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혼을 빼놓을 정도로 계속 끊임없이 울렸다.“혜인아, 장난치지 마.”드디어 입을 연 이준혁은 그녀를 등진 채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뜯어냈고 그렇게 윤혜인의 마지막 기대로 산산조각이 났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고 이준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이때,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와 환자가 깨어났다고 전했고 김성훈이 장난을 거둔 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좀 달래 줘. 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고열이 겨우 내린 임세희는 침대에 힘겹게 기대고 있었고 의사는 그녀의 골수 이식에 거부 반응이 나타난 거라고 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고열이 발생하면 그녀의 몸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임세희는 이준혁의 손을 꽉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준혁 오빠, 나 어깨가 너무 아파, 여기저기 온몸이 다 아파. 나 이 몸으로 오래 못 버틸 거 같아. 나랑 빨리 결혼해 주면 안 돼?”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면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알았어.”이준혁의 대답에 임세희는 모든 서러움이 사르르 녹은 듯 설레는 표정으로 이준혁의 품에 기댔고 눈살을 찌푸리던 이준혁이 불편한 듯 몸이 굳은 채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그가 뒤로 피하려는 게 느껴지자 임세희가 이준혁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그녀는 몸을 배배 꼬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벨트를 풀려고 만지작거렸다.“준혁 오빠, 사실 나… 난 말이야…”애교 섞인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일찍 쉬어, 난 이만 갈게.”난감해진 임세희가 손을 거둔 채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준혁 오빠, 나랑 같이 있어주지 않을 거야?”“임씨 아주머니 계시잖아. 아주머니가 널 잘 돌봐 줄 거야.”“근데 내가 원하는 사람은 오빠라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임세희가 서러운 듯 언성을 높였지만 이준혁은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세희야, 나 아직 이혼 안 했어.”솔직히 이준혁은 목숨 걸고 그를 살린 임세희가 많이 아픈 지금, 모든 걸 제치고 그녀의 소원부터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게 맞았다.하지만 언젠가부터 모든것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고
”하지만 그날 준혁 오빠를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씨 아주머니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아가씨,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마세요. 준혁 도련님을 구한 사람은 아가씨일 수밖에 없어요. 반드시 기억하세요.”임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깊은 밤.병원에서 나온 이준혁은 김성훈을 찾으러 바에 갔다.룸에 들어선 이준혁은 아무 말도 없이 술잔을 들고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반쯤 풀어헤친 셔츠까지 더해져서 유난히 치명적이었다.“뭐야, 경한이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넌 왜 오자마자 술만 마셔.”말을 하던 김성훈이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술잔을 들며 말을 이어갔다.“자, 우리 경한이!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으니까 이제 꽃길만 걷게 될 거야.”김성한에게 언급된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 짧은 머리를 한 육경한의 이마에는 길게 뻗은 흉터가 있었다.그 흉터는 보기 거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흉터 덕분에 더 거칠고 카리스마 넘쳐 보였다.이준혁도 술잔을 들었고 세 사람은 그렇게 잔을 부딪친 뒤, 한 번에 마셔버렸다.“경한아, 너 이번에 완전 소문났어. 3년이야, 육씨 가문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때 당시 너를 괴롭히던 그 늙은이들은 지금 덜덜 떨고 있거든. 다들 주식 버리고 도망가기 바빠.”김성훈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육경한이 입에 담배를 문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도망 못 가.”육씨 가문에 빚진 만큼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이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면 김성훈은 상대방이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지만 육경한은 달랐다. 그는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그때 당시 육씨 가문이 파산하고 육경한의 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자 육경한의 어머니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이준혁은 김성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고 김성훈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잘 생각해. 나중에 나처럼 되지 말고. 그땐 후회해도 늦는 거야.”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뜨더니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이따가 취하면 어디로 데려다줄까?”김성훈의 물음에 이준혁이 술을 들이키면서 대답했다.“너네 집.”한편, 푹 쉬고 나니 평정심을 되찾은 윤혜인이 제 시간에 출근했다.이준혁의 마음이 확실한 만큼 윤혜인도 그에게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모습은 한 번으로 충분했고 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퇴폐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뱃속의 아이도 있고 할머니도 있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녀는 씩씩하게 잘 이겨내야 한다.월요일이라 회사의 모든 직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어진 업무를 다 처리한 윤혜인은 퇴근하기 30분 전에 이준혁의 생활 습관을 같은 조에서 일하고 있던 비서 송휘재에게 꼼꼼히 전달했다.조용히 듣고 있던 송휘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윤혜인이 얘기하고 있는 부분은 평소에 그녀가 처리하던 업무인데 왜 갑자기 그에게 얘기하는 거지? 그는 아직 실습 비서에 불과한데?송휘재가 윤혜인에게 물어보려던 그때, 대표 사무실로부터 전화가 왔고 이준혁이 윤혜인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윤혜인은 서랍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손에 들고는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대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마케팅 부서 실장이 이준혁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조용히 곁에 물러나 기다렸다.업무 보고를 끝낸 실장이 사무실을 나선 뒤, 이준혁이 고개를 들고 윤혜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윤혜인이 다가가자 이준혁이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지 잘 확인해 봐.”윤혜인이 받아보니 그 종이에는 ‘이혼 협의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윤혜인은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서류를 보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준혁은 곧 그
이준혁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윤혜인은 왜 이리 급급하게 그와 이혼하고 싶은 건가?이준혁은 눈앞에 서있는 윤혜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며칠 전까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나 이따가 하 대표랑 약속이 있어!”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이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 같아요. 하 대표님과의 약속은 내일 저녁입니다.”윤혜인은 심지어 스케줄표까지 꺼내 이준혁에게 보여주며 대꾸했고 이준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오늘이 맞아. 조금 전에 나한테 전화 왔어.”“알겠습니다.”“용건 끝났으면, 그만 나가.”기분이 착잡한 이준혁은 그녀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윤혜인은 그녀를 귀찮아 하는 듯한 이준혁의 표정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해졌다.이제 조금만 지나면 이준혁은 평생 그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자리에서 일어난 윤혜인이 조금 전에 챙겼던 봉투를 이준혁 앞에 올려 놓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윤혜인, 그때 당시 이 일자리를 달라고 졸랐던 사람은 바로 너야. 근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해? 직장이 장난 같아?”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고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나가.”그녀를 보기 싫다는 뜻이 명확했기에 윤혜인은 아무 말없이 조심스럽게 사무실을 나섰다.윤혜인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혼한 전처를 비서로 남기려고 하다니, 대체 이준혁은 무슨 생각인 걸까?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튿날부터 이준혁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뒤로 밀렸던 해외 자회사 시찰 업무가 갑자기 날짜를 앞당기게 되었고 출장이 4일이나 잡힌 탓에 이준혁은 금요일이 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며칠 동안 힘들게 버틴 윤혜인은 드디어 대표 사무실에 갈 기회가 생겼다. 사무실에 들어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