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윤혜인은 왜 이리 급급하게 그와 이혼하고 싶은 건가?이준혁은 눈앞에 서있는 윤혜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며칠 전까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나 이따가 하 대표랑 약속이 있어!”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이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 같아요. 하 대표님과의 약속은 내일 저녁입니다.”윤혜인은 심지어 스케줄표까지 꺼내 이준혁에게 보여주며 대꾸했고 이준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오늘이 맞아. 조금 전에 나한테 전화 왔어.”“알겠습니다.”“용건 끝났으면, 그만 나가.”기분이 착잡한 이준혁은 그녀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윤혜인은 그녀를 귀찮아 하는 듯한 이준혁의 표정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해졌다.이제 조금만 지나면 이준혁은 평생 그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자리에서 일어난 윤혜인이 조금 전에 챙겼던 봉투를 이준혁 앞에 올려 놓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윤혜인, 그때 당시 이 일자리를 달라고 졸랐던 사람은 바로 너야. 근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해? 직장이 장난 같아?”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고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나가.”그녀를 보기 싫다는 뜻이 명확했기에 윤혜인은 아무 말없이 조심스럽게 사무실을 나섰다.윤혜인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혼한 전처를 비서로 남기려고 하다니, 대체 이준혁은 무슨 생각인 걸까?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튿날부터 이준혁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뒤로 밀렸던 해외 자회사 시찰 업무가 갑자기 날짜를 앞당기게 되었고 출장이 4일이나 잡힌 탓에 이준혁은 금요일이 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며칠 동안 힘들게 버틴 윤혜인은 드디어 대표 사무실에 갈 기회가 생겼다. 사무실에 들어
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이혼 협의서에 사인하라고 한 건 분명 이준혁 아닌가?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밤 본가 저택에 식사 자리가 있으니까 잊지 말고.”이준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윤혜인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대표님.”그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은 아주 공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럼 다음주 월요일은 시간이 되시나요?”이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가던 길 가는 건데. 왜 굳이 멈춰 서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걸까!“네 마음대로 해.”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이준혁은 사무실 문을 쾅 닫았고 확실하게 약속을 잡은 윤혜인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해탈감이 들었다.그를 놔주기로 결심한 만큼 윤혜인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싶었고 이제 이혼만 하면 그녀는 더 이상 수시로 그를 마주할 필요가 없게 된다.1년, 2년, 3년 혹은 10년, 그게 언제든 윤혜인은 자신을 치유하면서 천천히 그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어느덧 저녁 6시가 되었고 운전 기사는 시간에 맞춰 윤혜인을 픽업한 뒤, 이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서울의 중심 지역에 위치한 저택은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인테리어 또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이 결혼 생활에서 윤혜인이 제일 아쉬운 게 바로 이준혁의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이준혁의 할아버지는 보통 명문 가문과 다르게 오픈 마인드였으며 계급 관념도 없었기에 단순한 윤혜인을 매우 예뻐했다.그러다가 할아버지는 병에 걸리시게 되었고 이준혁은 할아버지에게 윤혜인과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그러자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기적처럼 좋아지더니 요 몇 년 사이에는 점점 더 건강해지기까지 했다.이제 이혼하면 할아버지를 보러 올 수 없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마음이 울적했다.거실로 들어서자 집사가 윤혜인에게 할아버지가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임신 때문인
송소미는 임세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지만 임세희는 송소미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것이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잠에서 덜 깬 거 아니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려고 너 같은 거렁뱅이랑 결혼하겠어? 이씨 사모님 꿈은 다음 생에 다시 꿔! 준혁 오빠는 세희 언니와 결혼할 거야.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데 너 같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잖아. 넌 미친 게 분명해. 집에 가서 약이나 먹어. 이 멍청한 계집애야!”송소미는 흥분한 듯 윤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윤혜인은 송소미가 흥분할수록 더욱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 욕설들이 태교에는 좋지 않은 듯했다.이때,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물어보자 송소미가 경비원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당장 이 천박한 여자를 밖으로 끌고 가!”윤혜인은 매달마다 저택에 방문해 할아버지와 식사를 했기에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송소미는 이씨 가문의 친척으로 꽤 중요한 손님이다.경비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고 송소미는 머뭇거리는 경비원을 보며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개라면 집을 잘 지켜야지! 어떻게 이런 천박한 여자를 집에 들일 수 있어?! 당장 끌고 가! 안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당신들 다 잘라버릴 거야!”개라는 욕까지 먹은 경비원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송소미는 이태수 어르신의 친척이기에 그들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송소미가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 몰랐던 윤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송소미 씨, 적당히 하세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돈이 많다고 다른 사람보다 귀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막 욕을 할 자격이 없어요!”“그래서 뭐? 너나 정신 차려, 이곳은 이씨 가문이야! 난 이씨 가문의 직속 친척이야! 내가 누굴 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참기 힘들면 지금 당장 꺼져!”송소미가 고고한 자태로 윤혜인을 내려다보며 비꼬듯이 말했고 그녀의 막
”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대답하면서 조금 전에 너무 충동적이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창피를 당하는 일만 남았겠지.이틀 뒤면 이혼할 텐데 이준혁은 절대 귀찮은 일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사이를 인정할 리가 없을 것이다.“저것 봐요, 준혁 오빠! 저 여자도 인정했잖아요…”말을 하던 송소미가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더니 윤혜인에게 덮어주었다.윤혜인도 깜짝 놀랐다. 이준혁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이기까지 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윤혜인은 여자들 중에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준혁의 외투는 그녀에게 심각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가슴 앞에 젖은 부분은 굴곡이 심했기에 잘 가려지지 않았다.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준혁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외투의 첫 번째 단추를 잠갔다. 가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는 행동이 매우 능숙하고 야릇했기에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심장은 쿵쾅거렸다.“준혁 오빠!”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고 송소미가 윤혜인을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저 염치도 없는 여자가 오빠를 꼬시려고 하잖아요! 절대 저 여자에게 속으면 안 돼요!”고개를 돌린 이준혁이 얼음장 마냥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여자 끌어내.”송소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끌어내라고? 누구를? 송소미 그녀를?“준… 준혁 오빠, 말씀 잘못하신거 아니에요?”송소미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끌어내라는 사람이 당연히 윤혜인인데 실수로 그녀를 짚은 거라고 여겼다.진작부터 송소미를 끌어내고 싶었던 경비원 두 명은 송소미 양쪽에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송소미 씨, 그만 나가주세요.”“내 몸에 손대지 마!”송소미는 그녀를 잡고 있던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어떻게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태수는 화가 나서 손까지 덜덜 떨었다.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이 감히 혜인 아가에게 저딴 짓을 저지르다니!이태수는 저 두 사람을 단 1초라도 더 보기 싫었다. 그는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꽂더니 다시 지시를 내렸다.“앞으로 저 두 사람은 절대 이 집에 들이지 마.”문미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 친척과 아랫사람에게 늘 온화하고 다정한 이태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문미정이 잘못했다고 빌려고 했지만 경비원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30초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저택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저택 안은 다시 조용했다.이태수는 윤혜인에게 다가가 마음 아픈 듯 말을 걸었다.“우리 혜인이가 많이 서운했지?”“할아버지, 저 괜찮아요.”“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그러다가 감기 걸려.”이태수는 저택에 윤혜인을 위해 방 하나를 준비했고 그 방에는 일년 사시절을 입을 수 있는 새 옷들로 가득했다.옷을 갈아입은 윤혜인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태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윤혜인 곁에 앉은 이준혁은 갈비찜이 식탁에 올라오자 그녀가 이 요리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서 갈비 하나를 집어 그녀 그릇에 넣어주었다.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쌀밥을 휘적거렸고 머릿속에는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러 갔다는 송소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임세희를 데리러 갔다고 했는데 왜 임세희는 보이지 않지?그러다가 허약한 임세희의 모습이 생각나자 윤혜인은 그녀가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소와 다른 이준혁의 태도였다. 윤혜인이 송소미에게 결혼 사실을 밝혔는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이내 윤혜인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임세희와 사이가 가까운 송소미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에 이준혁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걸 수도 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깜짝
잔뜩 긴장한 윤혜인은 숨을 꾹 참은 채 어떻게든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더워서 그래요, 할아버지.”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울 뿐만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아 계신데 이준혁은 테이블 밑에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니,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 같았다.“역시 젊은이들이라 더위를 많이 타네. 이 늙은이는 하나도 안 더운데 말이야!”이태수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곁에 서있던 도우미가 얼른 허리를 굽혀 주우려고 하자 이태수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내가 허리를 굽히지 못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어.”말을 하던 이태수가 허리를 숙여 젓가락을 주우려고 했다. 이 순간, 할아버지가 고개만 숙이면 바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빨갛게 달아올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너무 놀라서 숨까지 참고 있었다.다행히 이준혁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던 순간, 그녀의 손을 빠르게 놔주었고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킬 뻔한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 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사레에 걸려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이태수는 바닥에서 주운 젓가락을 도우미에게 건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혜인아, 왜 또 사레에 걸린 거야?”말을 하던 이태수가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며 그를 나무랐다.“넌 혜인이가 저렇게 사레에 걸렸는데 등도 안 두드려주고 뭐 하는 거야!”이준혁이 손을 뻗자마자 윤혜인은 혹시라도 또 그에게 농락을 당할까 봐 얼른 피했고 이준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태수에게 말했다.“할아버지, 보세요. 얘가 못 건드리게 하는 거예요.”“너 혹시 우리 혜인이한테 뭐 잘못한거 있는 거 아니지?”이태수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윤혜인이 그의 가족이고 이준혁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인 듯한 태도였다.겨우 기침을 멈춘 윤혜인이 일부러 이태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이태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태수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쓸어주며 얼른 설명했다.“할아버지, 준혁 씨 탓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혜인아, 할아버지에 거짓말을 하지 마. 정말 저놈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라면 이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내가 저놈을 죽여줄게!”“거짓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윤혜인이 억지웃음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태수를 한참 동안이나 어르고 달래서야 이태수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그리고는 장씨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늦은 밤, 이씨 저택에서 나온 윤혜인은 혼자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조용한 차 안에서 이준혁이 갑자기 정적을 깨며 말했다.“당분간 우리가 이혼한다는 말은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해.”“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그 어떤 충격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그리고 나중에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갈 수 있으니 걱정마.”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같은 마음이었다.“네.”“그 한 글자밖에 할 말이 없어?”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이 말을 이어갔다.“속은 좀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괜찮아요. 어차피 준혁 씨도 제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잖아요!”윤혜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내가 만약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만약이라는건 없어. 난 절대 널 임신하게 만들지 않을거야.”이준혁이 단호한 말
”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이준혁이 일하는 회의장 밖에 도착했다.이미 소식을 들은 주훈이 미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주 비서님,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요?”주훈은 순간 멈칫하며 혹시 이준혁이 자신의 피의 대부분을 헌혈한 사실을 윤혜인이 알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그는 약간 망설였다.지난번에도 사실을 말하다가 이준혁에게 한 소리 듣고 근 반년 동안 탄페니아에 보내져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급여나 처우는 그대로였지만 황토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고단한 생활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 하나 찾기 힘든 환경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그곳의 여자들은 주훈을 보고 마치 신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여기며 하룻밤에도 서너 명이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친해지려 하는 일들이 많았다.겁이 난 나머지 주훈은 급히 벽돌로 집을 짓고 문을 굳게 닫고 지냈다.물론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주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말씀하세요.”윤혜인은 물었다.“대표님의 다리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요.”주훈은 두어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다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이준혁이 어떻게 다리를 다쳤는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였다.‘그럼 이제 그 얘기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곧 주훈은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대표님은... 북안도의 전문가들 소견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거라네요.”“회복 불가능하다고요?”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고 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술받으면 서서히 회복될 거라 하지 않았나? 심지어 퇴원하기 전에는 혼자 서 있는 모습까지 봤었는데?’그녀는 주훈의 팔을 꽉 쥐고 다급히 물었다.“그날 밤, 오빠 보러 온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한 후, 곽경천은 윤혜인이 눈꺼풀이 축 처진 채로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어젯밤 잠을 못 잔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좀 잠을 설쳤어.”곽경천은 그녀가 이번 작전 때문에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하듯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네 안전은 꼭 지킬 테니까.”“응. 나 걱정 안 해.”윤혜인이 말했다.“그런데 오빠... 혹시 이준혁 씨 다리에 관한 얘기 알고 있어? 다리 상태가... 어느 정도인 거야?”그러자 곽경천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사실 이준혁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가 원하지 않는 이상 곽경천이 윤혜인에게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게다가 곽경천은 내심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과거의 죄책감에 다시 빠져들어 더 힘들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만약 윤혜인이 직접 물어보고 이준혁이 대답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곽경천은 이준혁이 분명 윤혜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잘 달래줄 거라고 믿었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오빠, 난 자꾸... 내가 다가가면 그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줄 것 같아서 두려워.”곽경천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심리 전문가가 아니지만 윤혜인의 엉킨 감정이 끊지 못할 만큼 복잡하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곽경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혜인아, 때로는 불행의 반대가 행운일 수도 있어. 사람마다 선택하는 건 다 달라. 넌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무의미하게 살아갈 거야?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매 순간이 소중하고 기억될 시간을 보낼 거야?”“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한쪽 시선에 가두지 말자. 마음이 편치 않으면 그 문제를 풀어가며 완전히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해보는 거야.”곽경천의 말에 윤혜인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늘 원지민의 말에 현혹되어 있었다.자신이 이준혁에게 불행을 안겨준 원흉이라고 생각해온 것이다.그러나 지금
이 말을 하고 나서 윤혜인은 남자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마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더 있다가는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특히 그가 방금 정유미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윤혜인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뚜렷하게 느꼈다.너무 위험했다.‘간신히 그 자책감에서 벗어났는데... 정말 다시 빠져들고 싶지 않아.’...다음 날.윤혜인은 퇴원하여 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떠날 때, 그녀는 이준혁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자꾸만 피어오르는 감정을 차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윤혜인은 자신이 쉽게 흔들린 이유가 이준혁의 다리 때문이라고 여겼다.‘그래. 다리가 불편하니까 더 우울해 보였던 거야. 그래서 내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동정이나 연민을 느낀 거야.’그리고 윤혜인은 이 감정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별장에 돌아온 후, 마음이 진정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휠체어에서 일어나려는 이준혁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장면은 마치 각인이라도 된 듯 윤혜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 순간 윤혜인은 자신이 얼마나 이준혁을 곁에서 격려해주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북안도의 날씨는 늘 예측할 수 없었다.갑자기 밖에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윤혜인은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며 따뜻한 실내에 있음에도 그 냉기가 창문을 뚫고 들어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일종의 심리적인 효과였다.그녀는 아직 북안도의 날씨에 익숙하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자신조차 이곳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는데 이준혁은 다리가 아픈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걱정되었다.타국인 북안도에서 통증을 홀로 견디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점점 선명해졌다.또다시 이 장면에 마음이 흔들린 윤혜인은 예전에 외할머니가 가르쳐주신 한 방법이 떠올랐다.바로 추운 날씨에 고통이 심해질 때 도움이 되는 간단한 방법이었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자세한 방법을 적은 후 윤
윤혜인은 정유미가 생각나 티 나지 않게 슬쩍 물었다.“유미 씨는 왜 안 보여요?”이준혁이 휠체어에 앉아 앞을 주시하며 말했다.“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갔어. 여기 남아있으면 뭐 하게?”윤혜인이 멈칫했다.“잘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는 사람도 없고 환경도 낯선데 나갔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해요?”“이하진 따라다니잖아.”이하진의 이름이 나오자 윤혜인의 심장이 덜컹했다.“하지만 하진이는 유미 씨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준혁 씨가 챙겨주는 게 낫지 않아요?”이준혁이 멈칫하더니 해명했다.“하진이가 성격이 대범해 보이긴 해도 정말 위험이 닥치면 절대 정유미 씨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정유미 씨?’윤혜인은 이 호칭에서 이준혁이 정유미에 대한 거리감을 확 느낄 수 있었다. 정유미 씨라는 호칭은 아예 정유미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이준혁의 성격이 늘 그랬듯 차가웠기에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그래도 준혁 씨 따라서 온 사람인데 무슨 일이라도 나면 준혁 씨도 피곤해질 거 아니에요.”윤혜인이 타일렀다. 정유미가 남자를 바꿔가며 잠자리를 가지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비록 농담인 건 알고 있었지만 화가 난 상태에서 술집에 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북안도의 치안은 서울의 10퍼센트도 미치지 못했다.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다 생각이 있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윤혜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이 말에 이준혁이 휠체어를 멈추더니 눈꺼풀을 들고는 까만 눈동자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준혁의 눈빛에 윤혜인의 얼굴이 뜨거워졌다.“속사포 질문을 한 게 결국에는 이걸 물어보고 싶은 거였어?”윤혜인의 심장이 덜컹했다.‘내가 오해했나?’윤혜인은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게 신기했다.“내가 뭘 또 속사포 질문을 했다고 그래요. 그냥 유미 씨를 별로 안 챙기는 것 같아서 물은 거지.”이준혁이 덤덤하
정원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뒤따라온 건 지울 수 없는 어색함이었다.윤혜인은 기세등등해서 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꼬시고 싶다고, 두 사람 다 싱글인데 좋아한다고 뭐가 문제냐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아까는 정말 뭐에 홀린 것 같았다. 이준혁의 체면을 가리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할 말 못 할 말 한꺼번에 다 내뱉었지만 그 말이 휩쓸고 간 자리가 너무 어색했다. 윤혜인은 혹시나 이준혁이 난감해질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아까는 급해서 헛소리했는데 신경 쓰지 마요. 필요하면 내가 해명...”윤혜인은 정유미가 생각났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이준혁이 정유미가 한 말들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정유미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하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윤혜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필요하면 내가 해명할게요.”윤혜인의 해명을 다 듣고 나서야 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괜찮아 난 신경 안 써.”이준혁이 신경 쓰지 않는다니 윤혜인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 윤혜인은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그가 아까 몰래 일어서는 연습을 하려던 모습이 생각나 코끝이 찡했고 심장이 저릿했다. 이런 고통은 겪어도 겪어도 적응하기 어려웠다.‘다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에겐 관심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두 사람 곁에는 이미 각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지금 관심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윤혜인은 다른 사람과 애매모호한 관계를 가지는 게 싫었다.“푹 쉬고 빨리 나아요.”윤혜인은 그래도 이 말만은 참을 수가 없어 말하고 나서 얼른 몸을 돌렸다.“혜인아.”이준혁이 윤혜인을 불러세웠다.“아이는 잘 지내?”이준혁이 물었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약간은 울먹이며 말했다.“아이는 아주 잘 지내요. 아주 귀여워요. 준혁 씨 나으면 같이 놀아줘요.”“그래. 아이들 꼭 잘 챙겨야 해.”두 아이는 한번
뚱보는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빠에게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여자가 비명을 지르더니 뚱보에게 달려가며 남자를 노려봤다.“미쳤어요?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고작 이걸로 때렸다는 거야?”남자가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내가 어떻게 오늘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당신이 낳은 모자란 새끼 때문에 다 망했다고.”여자가 뚱보를 마음 아파했다.“내가 낳은 거라니요. 그러면 당신 아들이 아니라는 소리예요?”“내 아들?”남자가 갑자기 서늘하게 웃기 시작했다.“그래. 내 아들이 아니지.”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헛소리에요? 어떻게 갑자기 당신 아들이 아닌데요?”“나 무정자증이라 친구 찾아서 낳은 거야.”남자가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줬다. 아이를 갖는 게 목적이기도 했고 여자를 옆에 묶어두고 싶기도 했다. 그땐 여자의 가문에 돈이 꽤 많았지만 남자는 별 볼 일 없는 백수였다. 출세하기 위해 외동딸인 여자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 앞으로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여자가 조금 못생겨도 참았다. 얼굴까지 예쁘면 절대 남자 차례가 올 리가 없었다.일단 먼저 여자에게 접근하고는 친구에게 부탁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게 하고 임신하면 아이를 빌미로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못생겨도 너무 못생겨서 부탁을 들어주려는 친구가 없어 큰돈을 들여서 일을 성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남자는 하고 싶은 사업을 마음껏 하면서 오늘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늘 자랑으로 여겼던 사업이 한순간 망하고 말았다.남자가 저지른 일은 북안도에서는 사형까지 갈 것 같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까지 들춰낸다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인생이 쫑났다는 생각에 남자는 이성을 잃고 벨트를 풀어 손에 들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빌어먹을 새끼.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내가 오늘 너 죽이고 만다.”여자가 뚱보를 감싸자 남자는 여자와 뚱보를 같이 패기 시작했다. 순간 병원 앞은 비명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망했다는 걸 직감한 것 같았다.북안도에서 조사가 끝나면 서울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한편, 밖에서 기다리던 뚱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쭐대고 있었다.“봤지? 아빠랑 엄마가 저 절름발이 혼쭐을 내줄 거야. 그리고 나를 욕한 저 여자도 무사하진 못할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들어서 룸살롱에 팔아버릴 거야.”임서현이 콧방귀를 뀌었다.“꿈 깨. 예쁜 누나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뚱보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너야말로 딱 기다려. 아빠, 엄마 못 하는 게 없어. 안에 두 명 혼내주고 나오면 바로 밥버러지 너희 아빠랑 네 차례야. 감히 나한테 대들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임서현은 나이가 어렸기에 뚱보가 이렇게 말하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예쁜 누나와 잘생긴 삼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뚱보가 더 만만하게 볼 것 같아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매섭게 쏘아붙였다.“어떡하지? 나는 너 하나도 안 무서운데.”“너... 내가 너 죽일 거야.”뚱보는 당장이라도 임서현을 덮치려고 했지만 뒤에 서 있던 보디가드에게 잡히고 말았다. 만약 보디가드가 뚱보와 꼬맹이를 감시하지 않았다면 뚱보는 진작 꼬맹이와 손잡고 임서현을 매질했을 것이다.“젠장. 아빠, 엄마 나오면 넌 죽었어.”뚱보는 평소 보고 들은 게 부모님이 한 나쁜 짓이었다. 문제는 부모가 돼서 아이를 앞에 두고 말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쩍하면 아들에게 돈만 있으면 권력과 유착해 북안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뚱보도 믿는 구석이 있어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갔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맞고 나온 남자가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 이런 봉변을 당한 것도 다 아들이 시발점이었다. 아들이 밖에서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이런 대단한 사람을 욕보일 일도 없
그러다 한쪽 이익이 침범을 당하면 사이는 바로 틀어지게 된다. 지금처럼 남자가 멍청하게 하나로 프로젝트의 총괄 담당자를 욕보인 이상 위쪽에서 조사하기 시작하면 병원을 폐쇄해야 할지도 모른다. 폐쇄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장은 당장 해임될 수도 있다.여자와 그 남편도 너무 멍청했다. 아직도 누가 최종 보스인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북안도의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최고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일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남자가 지내는 데 불편한 게 없이 극진히 모실 수밖에 없었다.원장은 보디가드처럼 날마다 단련하는 것도 아니니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발차기 몇 번에 숨을 헐떡이더니 바로 뒤에 선 보디가드에게 말했다.“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안 튀어와?”보디가드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귀한 손님이었던 두 사람이 더 귀한 손님을 욕보인 게 틀림없었다. 이제 더는 눈치 볼 거 없이 있는 힘껏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3, 4명의 보디가드가 부부를 에워싸고 매질하기 시작했다. 과정에 뚱보와 뚱보가 데려온 졸병들은 내보낸 상태였다. 임서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윤혜인이 주훈에게 아이들은 일단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아이가 보는 건 적절치 않았다.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맞는 게 맞았다.원장이 보디가드에게 멈추라고 하지 않은 건 이준혁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이준혁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릴 만큼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휠체어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데리고 나가세요.”“네. 네. 알겠습니다.”원장이 연신 대답했다.“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남자는 너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원장이 남자에게 굽신거리는 모습과 대표님이라는 호칭에서 금세 알아챘다.‘대표님...’남자는 서울 갑부 이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등급을 보아하니 이씨 가문을 이끄는 사람 같았다. 그제야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여자도 같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너희들 눈멀었어? 끌어내야 할 사람은 저기 있잖아.”여자가 손을 내밀어 멀지 않은 곳에 놓인 휠체어에 앉은 남자와 기세등등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연놈들 끌어내라고.”하지만 여자도 이내 보디가드에게 끌려 나갔다.원장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중요한 손님을 욕보였으니 양국의 화목을 깨트린 죄로 상부에 보고할 거예요.”“뭐라고요?”여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엄중한 후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양국의 화목을 방해한 죄는 북안도에서 본토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설립한 죄명이었다. 만약 죄가 성립된다면 북안도에서 영영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국제 통행증에 빨간 줄이 그어지면 다른 나라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어진다.여자는 아직도 원장이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노망이라도 난 거예요?”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내가 누군지 봐요. 나야말로 당신들과 협력을 맺은 사람이에요. 끌어내려면 저기 앉은 저 쓰레기 같은 연놈들을 끌어내야지.“맞아요.”남자도 보디가드가 방심한 틈을 타 원장을 향해 달려오더니 소리를 질렀다.“나 정부 의료 부문 관리자와 친해요. 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요.”보디가드는 원래 두 사람을 끌어낼 때 그렇게 큰 힘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까만 해도 병원의 귀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장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하자 원장이 잘못 지시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남자가 원장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요. 내가 누군지. 끌어내야 할 사람은 저 절름발이라니까요.”남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원장은 남자의 싸대기를 힘껏 후려갈겼다. 남자의 입에서 금세 피가 흘러나왔고 넋을 잃은 채 원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원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남자의 오른쪽 입가에도 피가 새어 나왔다. 화풀이한 원장이 휠체어에 앉은 이준혁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