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소미는 임세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지만 임세희는 송소미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것이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잠에서 덜 깬 거 아니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려고 너 같은 거렁뱅이랑 결혼하겠어? 이씨 사모님 꿈은 다음 생에 다시 꿔! 준혁 오빠는 세희 언니와 결혼할 거야.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데 너 같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잖아. 넌 미친 게 분명해. 집에 가서 약이나 먹어. 이 멍청한 계집애야!”송소미는 흥분한 듯 윤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윤혜인은 송소미가 흥분할수록 더욱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 욕설들이 태교에는 좋지 않은 듯했다.이때,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물어보자 송소미가 경비원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당장 이 천박한 여자를 밖으로 끌고 가!”윤혜인은 매달마다 저택에 방문해 할아버지와 식사를 했기에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송소미는 이씨 가문의 친척으로 꽤 중요한 손님이다.경비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고 송소미는 머뭇거리는 경비원을 보며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개라면 집을 잘 지켜야지! 어떻게 이런 천박한 여자를 집에 들일 수 있어?! 당장 끌고 가! 안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당신들 다 잘라버릴 거야!”개라는 욕까지 먹은 경비원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송소미는 이태수 어르신의 친척이기에 그들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송소미가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 몰랐던 윤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송소미 씨, 적당히 하세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돈이 많다고 다른 사람보다 귀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막 욕을 할 자격이 없어요!”“그래서 뭐? 너나 정신 차려, 이곳은 이씨 가문이야! 난 이씨 가문의 직속 친척이야! 내가 누굴 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참기 힘들면 지금 당장 꺼져!”송소미가 고고한 자태로 윤혜인을 내려다보며 비꼬듯이 말했고 그녀의 막
”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대답하면서 조금 전에 너무 충동적이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창피를 당하는 일만 남았겠지.이틀 뒤면 이혼할 텐데 이준혁은 절대 귀찮은 일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사이를 인정할 리가 없을 것이다.“저것 봐요, 준혁 오빠! 저 여자도 인정했잖아요…”말을 하던 송소미가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더니 윤혜인에게 덮어주었다.윤혜인도 깜짝 놀랐다. 이준혁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이기까지 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윤혜인은 여자들 중에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준혁의 외투는 그녀에게 심각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가슴 앞에 젖은 부분은 굴곡이 심했기에 잘 가려지지 않았다.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준혁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외투의 첫 번째 단추를 잠갔다. 가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는 행동이 매우 능숙하고 야릇했기에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심장은 쿵쾅거렸다.“준혁 오빠!”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고 송소미가 윤혜인을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저 염치도 없는 여자가 오빠를 꼬시려고 하잖아요! 절대 저 여자에게 속으면 안 돼요!”고개를 돌린 이준혁이 얼음장 마냥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여자 끌어내.”송소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끌어내라고? 누구를? 송소미 그녀를?“준… 준혁 오빠, 말씀 잘못하신거 아니에요?”송소미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끌어내라는 사람이 당연히 윤혜인인데 실수로 그녀를 짚은 거라고 여겼다.진작부터 송소미를 끌어내고 싶었던 경비원 두 명은 송소미 양쪽에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송소미 씨, 그만 나가주세요.”“내 몸에 손대지 마!”송소미는 그녀를 잡고 있던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어떻게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태수는 화가 나서 손까지 덜덜 떨었다.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이 감히 혜인 아가에게 저딴 짓을 저지르다니!이태수는 저 두 사람을 단 1초라도 더 보기 싫었다. 그는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꽂더니 다시 지시를 내렸다.“앞으로 저 두 사람은 절대 이 집에 들이지 마.”문미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 친척과 아랫사람에게 늘 온화하고 다정한 이태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문미정이 잘못했다고 빌려고 했지만 경비원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30초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저택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저택 안은 다시 조용했다.이태수는 윤혜인에게 다가가 마음 아픈 듯 말을 걸었다.“우리 혜인이가 많이 서운했지?”“할아버지, 저 괜찮아요.”“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그러다가 감기 걸려.”이태수는 저택에 윤혜인을 위해 방 하나를 준비했고 그 방에는 일년 사시절을 입을 수 있는 새 옷들로 가득했다.옷을 갈아입은 윤혜인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태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윤혜인 곁에 앉은 이준혁은 갈비찜이 식탁에 올라오자 그녀가 이 요리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서 갈비 하나를 집어 그녀 그릇에 넣어주었다.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쌀밥을 휘적거렸고 머릿속에는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러 갔다는 송소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임세희를 데리러 갔다고 했는데 왜 임세희는 보이지 않지?그러다가 허약한 임세희의 모습이 생각나자 윤혜인은 그녀가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소와 다른 이준혁의 태도였다. 윤혜인이 송소미에게 결혼 사실을 밝혔는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이내 윤혜인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임세희와 사이가 가까운 송소미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에 이준혁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걸 수도 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깜짝
잔뜩 긴장한 윤혜인은 숨을 꾹 참은 채 어떻게든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더워서 그래요, 할아버지.”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울 뿐만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아 계신데 이준혁은 테이블 밑에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니,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 같았다.“역시 젊은이들이라 더위를 많이 타네. 이 늙은이는 하나도 안 더운데 말이야!”이태수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곁에 서있던 도우미가 얼른 허리를 굽혀 주우려고 하자 이태수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내가 허리를 굽히지 못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어.”말을 하던 이태수가 허리를 숙여 젓가락을 주우려고 했다. 이 순간, 할아버지가 고개만 숙이면 바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빨갛게 달아올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너무 놀라서 숨까지 참고 있었다.다행히 이준혁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던 순간, 그녀의 손을 빠르게 놔주었고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킬 뻔한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 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사레에 걸려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이태수는 바닥에서 주운 젓가락을 도우미에게 건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혜인아, 왜 또 사레에 걸린 거야?”말을 하던 이태수가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며 그를 나무랐다.“넌 혜인이가 저렇게 사레에 걸렸는데 등도 안 두드려주고 뭐 하는 거야!”이준혁이 손을 뻗자마자 윤혜인은 혹시라도 또 그에게 농락을 당할까 봐 얼른 피했고 이준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태수에게 말했다.“할아버지, 보세요. 얘가 못 건드리게 하는 거예요.”“너 혹시 우리 혜인이한테 뭐 잘못한거 있는 거 아니지?”이태수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윤혜인이 그의 가족이고 이준혁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인 듯한 태도였다.겨우 기침을 멈춘 윤혜인이 일부러 이태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이태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태수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쓸어주며 얼른 설명했다.“할아버지, 준혁 씨 탓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혜인아, 할아버지에 거짓말을 하지 마. 정말 저놈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라면 이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내가 저놈을 죽여줄게!”“거짓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윤혜인이 억지웃음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태수를 한참 동안이나 어르고 달래서야 이태수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그리고는 장씨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늦은 밤, 이씨 저택에서 나온 윤혜인은 혼자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조용한 차 안에서 이준혁이 갑자기 정적을 깨며 말했다.“당분간 우리가 이혼한다는 말은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해.”“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그 어떤 충격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그리고 나중에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갈 수 있으니 걱정마.”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같은 마음이었다.“네.”“그 한 글자밖에 할 말이 없어?”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이 말을 이어갔다.“속은 좀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괜찮아요. 어차피 준혁 씨도 제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잖아요!”윤혜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내가 만약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만약이라는건 없어. 난 절대 널 임신하게 만들지 않을거야.”이준혁이 단호한 말
”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이준혁이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면 그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윤혜인은 숨을 고르다가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하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돼요. 당신이 계속 저를 케어 할 수는 없으니까요.”“혜인아, 우리가 앞으로 부부가 아니어도 넌 내 가족이야, 난 계속 너를 돌볼 거야.”이준혁이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차안에는 온통 이 남자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제 이 향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이준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이상 서로를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준혁 아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분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든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이다.“혜인아…”인상을 찌푸린 이준혁이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가요, 준혁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밖에서는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왜 이준혁이 바로 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세희가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하지만 이런 문제도 그녀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다.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매일 걱정하진 않을 테니.다음날, 윤혜인은 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 오전 소원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가 소원은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윤혜인은 마사지 제품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자신은 받지 않고 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혜인은 걸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제야 이준혁 곁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며 자상하게 물었다.“다 됐어?”“응, 됐어, 고마워, 준혁 오빠.”여인이 고개를 돌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고 여린 모습의 그 여인은 다름아닌 임세희였다.두 사람 곁에 서있던 매장 직원은 곱게 포장한 쇼핑백을 임세희에게 건네며 실눈을 뜬 채 말을 걸었다.“사모님, 너무 부러워요. 남편 외모가 이렇게 훌륭한 것도 모자라서 사모님한테 자상하기까지 하잖아요!”윤혜인 얼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직원이 지금… 남편이라고 한 건가? 두 사람은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걸까?갑자기 눈앞이 까매진 윤혜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발이 붙은 것 마냥 꿈쩍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툭!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옷들이 흘러나왔다.“윤혜인 씨!”고개를 돌린 임세희가 윤혜인을 발견하자 그녀를 불렀다.“여기서 혜인 씨를 보게 되네요!”이준혁도 고개를 돌렸고 의아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았다. 윤혜인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아이의 옷들을 정리해서 다시 쇼핑백에 넣었고 그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기다란 다리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이준혁은 수려한 외모덕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가까이 다가오던 이준혁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 윤혜인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 책은 조금 전에 신생아 용품 가게의 직원이 그녀에게 선물한 태교에 관한 책이었다.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은 순간 불안해졌다.“이게 뭐야…?”책을 주운 이준혁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확인하다가 책의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서 책을 확 낚아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원이 얼른 말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저 배가 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친구 차 타고 왔어요.”원보경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어느 병원에 있어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아니에요.”소원은 원보경도 술을 적지 않게 마셨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수액만 다 맞으면 집으로 갈 거예요.”“어떻게 그래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원보경은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소원이 말했다.“조금 이따 친구가 데려다줄 거예요. 여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경 씨 도착할 때쯤이면 진작 수액 다 맞았을 거예요. 병원에서 기다릴 바엔 차라리 두 사람 다 집에 가서 쉬는 편이 나아요.”원보경은 그제야 포기하고 여러 번 당부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소원은 아직도 남아있는 주석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도 얼른 들어가요. 많이 나아져서 이제 혼자 들어가도 돼요.”소원이 아까 그렇게 말한 건 수고한 원보경이 여기까지 오는 걸 막으려고 그랬다.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주석훈이 말했다.“그럴 순 없죠. 친구한테 나라는 친구가 이따 태워다 준다고 말했는데 약속 지켜야죠. 이따 바래다줄게요.”소원은 주석훈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주석훈은 성격이 밝았기에 같이 있으면 꽤 편했다.“그래요.”소원도 이미 신세를 진 이상 끝까지 신세 지기로 마음먹고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소원은 속으로 주석훈을 위해 좋은 선물을 하나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금으로 주면 너무 속물 같아서 주석훈이 받지 않을 것 같았다.게다가 주석훈은 확실히 이미 협의한 비용 외에 다른 비용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소원도 그냥 넘어가긴 마음이 걸렸다.수액이 끝나자 주석훈이 간호사를 불러와 바늘을 빼고는 휠체어를 끌어왔다. 소원은 앞에 놓인 휠체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이... 이건 필요 없지
소원은 운전기사의 성격이 이렇게 불같을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운전기사를 하나 뽑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임신한 관계로 차를 직접 운전할 수가 없어 맨날 차를 잡고 다녔는데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차를 다시 잡으려는데 어떤 차가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소원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소원 씨? 소원 씨가 왜 여기 있어요?”소원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 주석훈을 만날 줄은 몰랐다. 쪽팔리지만 택시 기사가 길가에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는 얘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주석훈이 씩씩거리며 말했다.“해도 해도 너무하네. 어떻게 소원 씨를 길가에 버려두고 가요. 위험한데.”주석훈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타요. 데려다줄게요. 시간이 늦어서 택시 잡아서 가는 건 위험해요.”맞는 말 같아 소원은 주석훈의 차에 올랐다.“근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마칠 퇴근하는데 길에서 소원 씨를 만나다니.”주석훈이 말했다.“그러게요. 기막힌 우연이네요. 아참, 저번 일은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고마워요. 주 변호사님.”소원은 그날 현장에서 주석훈이 육연주를 제압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인사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주석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 다만 육경한이 더 가까이 서 있어서 소원을 구한 것이다. 그것 외에 재판에 관한 일도 성심성의껏 소원을 대신해 타이르고 있었다.“별말씀을. 소원 씨, 우리 안 지 꽤 오래 지났는데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주석훈은 늘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온화했다. 가끔 소원은 주석훈을 화나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아무튼 감사 인사는 꼭 전하고 싶었어요.”소원이 말했다.“그러면 소원 씨 시간 될 때 밥이나 한번 사줘요.”주석훈이 말했다.“당연하죠.”소원이 웃으며 대꾸했다.주석훈은 소원의 목적지가 병원인 줄 몰랐기에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에 가본 적이 있어서 주소가 어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원보경을 해고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알고 보니 원보경은 한이 그룹으로 오기 전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소원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보경처럼 말도 잘하고 여러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려면 일개 영업팀 직원이 아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그러다 원보경이 미우 그룹에서 일하던 사원이라는 걸 알고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한이 그룹처럼 작은 회사에 남으려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소원은 육경한의 그 어떤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엄숙하게 원보경에게 사직을 권고했지만 원보경이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대표님 회사로 온 건 돈을 벌기 위해서 온 거지 시간 때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여러 큰 기업에서 제 이력서를 통과했지만 결국엔 미우 그룹에서 나와 한이 그룹을 선택했습니다. 원인이라면 이곳에서는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미우 그룹을 포함한 다른 회사는 워낙 인재가 많으므로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써먹을 기회도 없을뿐더러 얄팍한 수단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큰 기업에는 저보다 능력 좋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외모도 빼어난 게 없고 능력도 특출난 건 아닌데 동료들과 이익 다툼도 해야 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여러모로 생각하고 검토한 결과 한이 그룹으로 오는 걸 선택했습니다. 육 대표님이 보내서 온 게 아닙니다.”“사실 육 대표님이 황 비서님께 빠릿빠릿한 사원을 뽑으라고 해서 저는 선택받지 못했고 더 노련한 분이 선택받았는데 미우그룹을 떠나 전망도 모르는 작은 회사로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하지만 저는 한이 그룹 자료를 찾아보고 황 비서님께 먼저 지원한 사람입니다. 황 비서님도 제가 의향이 강하니까 결국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게다가 미우 그룹에서 이미 퇴사해서 제가 모실 분은 이제 육 대표님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 남으려고 한 건 제 능력을 인
집으로 돌아간 소원은 일단 다른 건 제쳐두고 잠부터 잤다.사실 황산이 하늘에 흩뿌려졌을 때 소원도 마음속으로 너무 두려웠다. 여자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몸에 난 상처는 옷으로 가려본다 해도 얼굴은 어떻게 가려도 가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황산으로 인한 상처는 아무리 돈을 들여도 완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기에 영향이 매우 컸다.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악독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절체절명의 순간 육경한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왔는데 소원도 사람인지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육연주를 먼저 건드린 것도 아니고 육경한이 오냐오냐 키우지만 않았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무법천지가 될 일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원의 마음속에 생겼던 감격도 많이 줄어들었다.육경한은 사람에게 잘해줄 때 적정선이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자기가 심어놓은 화근에 걸려들고 말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소원은 정신이 말짱해졌다. 그 뒤로도 병원은 가볼 시간이 없었다. 육경한이 입원해 있는 동안 소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낮에는 한이 그룹 일로 바빴다. 회사는 진작 등록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다시 일어서는 게 생가보다 너무 어려웠다.몇 년간 여러 기업이 생겨나고 바뀌면서 한이 그룹 같은 오래된 기업은 에너지 영역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게다가 처음엔 능력 좋은 사람들을 채용하지 못해 혼자서 여러 사람의 업무를 도맡아 하느라 보고서도 만들고 회의도 하고 프로모션도 해야 했다.일이 너무 많기도 했고 임신 초기라 마침 피곤할 때였기에 거의 매일 휴식이 모자란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저녁이 되면 유진도 봐야 했고 중간중간 짬을 내 요양원에 어머니 보러도 가야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육경한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소원이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것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두 아이가 원하는 걸 선택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잡혀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