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소미는 임세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지만 임세희는 송소미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것이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잠에서 덜 깬 거 아니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려고 너 같은 거렁뱅이랑 결혼하겠어? 이씨 사모님 꿈은 다음 생에 다시 꿔! 준혁 오빠는 세희 언니와 결혼할 거야. 준혁 오빠가 세희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데 너 같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잖아. 넌 미친 게 분명해. 집에 가서 약이나 먹어. 이 멍청한 계집애야!”송소미는 흥분한 듯 윤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윤혜인은 송소미가 흥분할수록 더욱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 욕설들이 태교에는 좋지 않은 듯했다.이때,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물어보자 송소미가 경비원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당장 이 천박한 여자를 밖으로 끌고 가!”윤혜인은 매달마다 저택에 방문해 할아버지와 식사를 했기에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송소미는 이씨 가문의 친척으로 꽤 중요한 손님이다.경비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고 송소미는 머뭇거리는 경비원을 보며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개라면 집을 잘 지켜야지! 어떻게 이런 천박한 여자를 집에 들일 수 있어?! 당장 끌고 가! 안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당신들 다 잘라버릴 거야!”개라는 욕까지 먹은 경비원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송소미는 이태수 어르신의 친척이기에 그들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송소미가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 몰랐던 윤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송소미 씨, 적당히 하세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돈이 많다고 다른 사람보다 귀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막 욕을 할 자격이 없어요!”“그래서 뭐? 너나 정신 차려, 이곳은 이씨 가문이야! 난 이씨 가문의 직속 친척이야! 내가 누굴 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참기 힘들면 지금 당장 꺼져!”송소미가 고고한 자태로 윤혜인을 내려다보며 비꼬듯이 말했고 그녀의 막
”네.”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대답하면서 조금 전에 너무 충동적이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창피를 당하는 일만 남았겠지.이틀 뒤면 이혼할 텐데 이준혁은 절대 귀찮은 일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사이를 인정할 리가 없을 것이다.“저것 봐요, 준혁 오빠! 저 여자도 인정했잖아요…”말을 하던 송소미가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이준혁이 갑자기 정장 외투를 벗더니 윤혜인에게 덮어주었다.윤혜인도 깜짝 놀랐다. 이준혁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이기까지 했기에 윤혜인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윤혜인은 여자들 중에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준혁의 외투는 그녀에게 심각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가슴 앞에 젖은 부분은 굴곡이 심했기에 잘 가려지지 않았다.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이준혁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외투의 첫 번째 단추를 잠갔다. 가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는 행동이 매우 능숙하고 야릇했기에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심장은 쿵쾅거렸다.“준혁 오빠!”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고 송소미가 윤혜인을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저 염치도 없는 여자가 오빠를 꼬시려고 하잖아요! 절대 저 여자에게 속으면 안 돼요!”고개를 돌린 이준혁이 얼음장 마냥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여자 끌어내.”송소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끌어내라고? 누구를? 송소미 그녀를?“준… 준혁 오빠, 말씀 잘못하신거 아니에요?”송소미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끌어내라는 사람이 당연히 윤혜인인데 실수로 그녀를 짚은 거라고 여겼다.진작부터 송소미를 끌어내고 싶었던 경비원 두 명은 송소미 양쪽에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송소미 씨, 그만 나가주세요.”“내 몸에 손대지 마!”송소미는 그녀를 잡고 있던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어떻게 저런 천박한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태수는 화가 나서 손까지 덜덜 떨었다.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이 감히 혜인 아가에게 저딴 짓을 저지르다니!이태수는 저 두 사람을 단 1초라도 더 보기 싫었다. 그는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꽂더니 다시 지시를 내렸다.“앞으로 저 두 사람은 절대 이 집에 들이지 마.”문미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 친척과 아랫사람에게 늘 온화하고 다정한 이태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문미정이 잘못했다고 빌려고 했지만 경비원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30초도 안 된 사이에 두 사람은 저택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저택 안은 다시 조용했다.이태수는 윤혜인에게 다가가 마음 아픈 듯 말을 걸었다.“우리 혜인이가 많이 서운했지?”“할아버지, 저 괜찮아요.”“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그러다가 감기 걸려.”이태수는 저택에 윤혜인을 위해 방 하나를 준비했고 그 방에는 일년 사시절을 입을 수 있는 새 옷들로 가득했다.옷을 갈아입은 윤혜인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태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윤혜인 곁에 앉은 이준혁은 갈비찜이 식탁에 올라오자 그녀가 이 요리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서 갈비 하나를 집어 그녀 그릇에 넣어주었다.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쌀밥을 휘적거렸고 머릿속에는 이준혁이 임세희를 데리러 갔다는 송소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임세희를 데리러 갔다고 했는데 왜 임세희는 보이지 않지?그러다가 허약한 임세희의 모습이 생각나자 윤혜인은 그녀가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소와 다른 이준혁의 태도였다. 윤혜인이 송소미에게 결혼 사실을 밝혔는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이내 윤혜인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임세희와 사이가 가까운 송소미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에 이준혁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걸 수도 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준혁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깜짝
잔뜩 긴장한 윤혜인은 숨을 꾹 참은 채 어떻게든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더워서 그래요, 할아버지.”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울 뿐만 아니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아 계신데 이준혁은 테이블 밑에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니,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 같았다.“역시 젊은이들이라 더위를 많이 타네. 이 늙은이는 하나도 안 더운데 말이야!”이태수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곁에 서있던 도우미가 얼른 허리를 굽혀 주우려고 하자 이태수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내가 허리를 굽히지 못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어.”말을 하던 이태수가 허리를 숙여 젓가락을 주우려고 했다. 이 순간, 할아버지가 고개만 숙이면 바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빨갛게 달아올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너무 놀라서 숨까지 참고 있었다.다행히 이준혁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던 순간, 그녀의 손을 빠르게 놔주었고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킬 뻔한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 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사레에 걸려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이태수는 바닥에서 주운 젓가락을 도우미에게 건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혜인아, 왜 또 사레에 걸린 거야?”말을 하던 이태수가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며 그를 나무랐다.“넌 혜인이가 저렇게 사레에 걸렸는데 등도 안 두드려주고 뭐 하는 거야!”이준혁이 손을 뻗자마자 윤혜인은 혹시라도 또 그에게 농락을 당할까 봐 얼른 피했고 이준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태수에게 말했다.“할아버지, 보세요. 얘가 못 건드리게 하는 거예요.”“너 혹시 우리 혜인이한테 뭐 잘못한거 있는 거 아니지?”이태수가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윤혜인이 그의 가족이고 이준혁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인 듯한 태도였다.겨우 기침을 멈춘 윤혜인이 일부러 이태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이태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태수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쓸어주며 얼른 설명했다.“할아버지, 준혁 씨 탓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혜인아, 할아버지에 거짓말을 하지 마. 정말 저놈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라면 이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내가 저놈을 죽여줄게!”“거짓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윤혜인이 억지웃음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태수를 한참 동안이나 어르고 달래서야 이태수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그리고는 장씨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늦은 밤, 이씨 저택에서 나온 윤혜인은 혼자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조용한 차 안에서 이준혁이 갑자기 정적을 깨며 말했다.“당분간 우리가 이혼한다는 말은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해.”“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그 어떤 충격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그리고 나중에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갈 수 있으니 걱정마.”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같은 마음이었다.“네.”“그 한 글자밖에 할 말이 없어?”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이 말을 이어갔다.“속은 좀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괜찮아요. 어차피 준혁 씨도 제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잖아요!”윤혜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내가 만약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만약이라는건 없어. 난 절대 널 임신하게 만들지 않을거야.”이준혁이 단호한 말
”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이준혁이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면 그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윤혜인은 숨을 고르다가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하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돼요. 당신이 계속 저를 케어 할 수는 없으니까요.”“혜인아, 우리가 앞으로 부부가 아니어도 넌 내 가족이야, 난 계속 너를 돌볼 거야.”이준혁이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차안에는 온통 이 남자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제 이 향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이준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이상 서로를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준혁 아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분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든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이다.“혜인아…”인상을 찌푸린 이준혁이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가요, 준혁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밖에서는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왜 이준혁이 바로 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세희가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하지만 이런 문제도 그녀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다.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매일 걱정하진 않을 테니.다음날, 윤혜인은 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 오전 소원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가 소원은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윤혜인은 마사지 제품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자신은 받지 않고 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혜인은 걸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제야 이준혁 곁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며 자상하게 물었다.“다 됐어?”“응, 됐어, 고마워, 준혁 오빠.”여인이 고개를 돌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고 여린 모습의 그 여인은 다름아닌 임세희였다.두 사람 곁에 서있던 매장 직원은 곱게 포장한 쇼핑백을 임세희에게 건네며 실눈을 뜬 채 말을 걸었다.“사모님, 너무 부러워요. 남편 외모가 이렇게 훌륭한 것도 모자라서 사모님한테 자상하기까지 하잖아요!”윤혜인 얼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직원이 지금… 남편이라고 한 건가? 두 사람은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걸까?갑자기 눈앞이 까매진 윤혜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발이 붙은 것 마냥 꿈쩍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툭!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옷들이 흘러나왔다.“윤혜인 씨!”고개를 돌린 임세희가 윤혜인을 발견하자 그녀를 불렀다.“여기서 혜인 씨를 보게 되네요!”이준혁도 고개를 돌렸고 의아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았다. 윤혜인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아이의 옷들을 정리해서 다시 쇼핑백에 넣었고 그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기다란 다리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이준혁은 수려한 외모덕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가까이 다가오던 이준혁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 윤혜인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 책은 조금 전에 신생아 용품 가게의 직원이 그녀에게 선물한 태교에 관한 책이었다.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은 순간 불안해졌다.“이게 뭐야…?”책을 주운 이준혁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확인하다가 책의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서 책을 확 낚아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