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이준혁이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면 그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윤혜인은 숨을 고르다가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하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돼요. 당신이 계속 저를 케어 할 수는 없으니까요.”“혜인아, 우리가 앞으로 부부가 아니어도 넌 내 가족이야, 난 계속 너를 돌볼 거야.”이준혁이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차안에는 온통 이 남자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제 이 향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이준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이상 서로를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준혁 아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분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든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이다.“혜인아…”인상을 찌푸린 이준혁이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가요, 준혁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밖에서는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왜 이준혁이 바로 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세희가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하지만 이런 문제도 그녀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다.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매일 걱정하진 않을 테니.다음날, 윤혜인은 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 오전 소원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가 소원은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윤혜인은 마사지 제품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자신은 받지 않고 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혜인은 걸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제야 이준혁 곁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며 자상하게 물었다.“다 됐어?”“응, 됐어, 고마워, 준혁 오빠.”여인이 고개를 돌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고 여린 모습의 그 여인은 다름아닌 임세희였다.두 사람 곁에 서있던 매장 직원은 곱게 포장한 쇼핑백을 임세희에게 건네며 실눈을 뜬 채 말을 걸었다.“사모님, 너무 부러워요. 남편 외모가 이렇게 훌륭한 것도 모자라서 사모님한테 자상하기까지 하잖아요!”윤혜인 얼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직원이 지금… 남편이라고 한 건가? 두 사람은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걸까?갑자기 눈앞이 까매진 윤혜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발이 붙은 것 마냥 꿈쩍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툭!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옷들이 흘러나왔다.“윤혜인 씨!”고개를 돌린 임세희가 윤혜인을 발견하자 그녀를 불렀다.“여기서 혜인 씨를 보게 되네요!”이준혁도 고개를 돌렸고 의아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았다. 윤혜인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아이의 옷들을 정리해서 다시 쇼핑백에 넣었고 그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기다란 다리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이준혁은 수려한 외모덕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가까이 다가오던 이준혁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 윤혜인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 책은 조금 전에 신생아 용품 가게의 직원이 그녀에게 선물한 태교에 관한 책이었다.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은 순간 불안해졌다.“이게 뭐야…?”책을 주운 이준혁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확인하다가 책의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서 책을 확 낚아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매장 입구에 서서 손님들을 반기고 있던 직원은 윤혜인의 말에 경악에 찬 눈빛으로 임세희를 아래위로 훑었다.‘요즘 내연녀들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네, 남의 남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정실 앞에서 감히 저렇게 건방을 떨다니.’직원의 시선을 느낀 임세희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당신!”“아닌가요?”윤혜인이 여유롭게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말을 이어갔다.“할 말 있으면 하세요.”눈치가 빠른 쥬얼리 매장 직원은 두 사람에게 커피를 한 잔씩 건넨 뒤, 조용하게 물러갔고 임세희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준혁 오빠가 저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한번 맞춰볼래요?”“임세희 씨, 혹시 제 남편이 그쪽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자랑하고 싶은 거라면 죄송한데 전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남편이라는 말에 임세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쇼핑백 안에서 작은 액세서리 박스를 꺼냈다.“준혁 오빠가 저에게 선물한 반지를 정말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요?”흠칫하던 윤혜인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선물한 물건이… 반지라고?임세희가 액세서리 박스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손가락에 꼈고 일부러 손을 들어 윤혜인에게 보여주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때요? 예뻐요?”반지는 쥬얼리 매장의 환한 불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으며 그 반지 위에는 흔히 볼 수 없는 파란색 다이아몬드까지 박혀 있었다. 저번에 쥬얼리 매장을 구경했을 때 직원이 윤혜인에게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하늘색 다이아몬드 반지의 이름은 ‘푸른 눈물’로 가격이 어마어마했다.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옷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손에 꽉 쥐었고 너무 과하게 힘을 준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자국까지 선명하게 생겼지만 그녀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윤혜인은 자신에게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고 이 모든 게 자신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 임세희가 파 놓은 함정이라고
윤혜인은 눈앞에 놓인 은행 카드를 보며 뺨을 세게 맞은 듯 얼굴이 얼얼했다.그녀는 철저하게 졌다. 그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임세희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당했다.이내 윤혜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올랐고 점점 뚜렸해졌다.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준혁은 자주 L 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한 번 가면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윤혜인이 아무리 애교를 부리고 애원해도 그를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준혁은 임세희를 쥬얼리 매장에 데리고 와서 직접 반지를 고르고 있다.윤혜인 손에 끼고 있는 이 반지는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이준혁의 비서 주훈이 그녀에게 전해준 것이다.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는 주훈에게 시켜 대충 반지 하나를 구매하여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윤혜인은 너무 좋아서 샤워를 할 때마저 반지를 절대 빼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의 그 행동들은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윤혜인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이 아팠고 숨이 막혔다.‘이준혁, 당신 진짜 너무 잔인하네.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나의 마음에 칼을 꽂을 수 있지?’윤혜인은 단 일초라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준혁 오빠 올 때까지 안 기다릴 거예요?”임세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고 윤혜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싸늘하게 웃었다.“임세희 씨, 당신은 이미 목적을 이뤘잖아요. 이 청취자의 협조가 계속 필요한 건가요?”“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전 단지 그쪽이 불쌍해 보여서 이혼 전에 진실을 얘기해준 것뿐이에요.”표정이 살짝 굳은 임세희가 반박하자 윤혜인이 날카롭게 물었다.“대체 뭐가 두려운 거예요?”윤혜인은 조금 단순하긴 하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 임세희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녀를 자극하여 철저히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이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자극할 필요가 있긴 할까? 어차피 이준혁은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윤혜인은
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임세희가 화상을 입어 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뻗더니 이준혁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혜인 씨를 원망하지 마. 혜인 씨는 내가 오빠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화가 난 거야…”임세희의 말에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았고 취조하듯 물었다.“그게 사실이야?”윤혜인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허접한 연기는 매장 카메라만 돌려봐도 진실을 알 수 있을 텐데 이준혁은 그녀에게 따져 묻기 바빴다.이미 판단을 했으면서 왜 쓸데없이 저렇게 묻는 걸까?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를 줘서 그녀의 죄를 입증하려는 건가?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저 두 사람이 너무 역겹게만 느껴졌기에 피식 웃던 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떠났다.윤혜인이 떠나자 눈살을 확 찌푸린 이준혁이 몸을 움찔하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하던 순간, 임세희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준혁 오빠, 나 몸이 많이 불편해, 혹시…”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세희야, 내가 지금 볼일이 좀 생겼어. 주훈이 널 병원에 데려다 줄 거야.”말을 마친 이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르게 떠났고 임세희는 충격에 넋이 나가버렸다.‘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이준혁이 지금 나를 버리고 떠난 거야?’이준혁은 예전부터 임세희의 건강 상태를 과하다 할 정도로 많이 걱정했다. 그녀가 몸이 불편하다고 얘기하기만 하면 이준혁은 어떤 중요한 일이든 전부 제치고 그녀를 보러 외국으로 달려왔었다.이 또한 임세희가 가장 믿고 있는 비장의 카드였는데 지금 이준혁이 그녀를 혼자 쇼핑몰에 버려 두고 윤혜인을 쫓아갔다.설마… 설마 이준혁이 윤혜인을 좋아하게 된 건가? 아니, 절대 그럴 리는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그 보잘것없는 여자는 절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한편, 비틀거리며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린 윤혜인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퉁퉁 부은 윤혜인의 두 눈을 보자마자 심장에 뭔가 꽂힌 듯 움찔하다가 눈빛이 착잡해졌다.“혜인아…”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윤혜인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 여자가 날 모함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임세희를 찾아가서 따져 물을 수 있어요?”윤혜인의 돌발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은 몇 초 뒤, 어두워진 안색으로 목소리를 낮췄다.“그럴 리가 없어. 세희는 절대 널 모함할 리가 없어.”예상된 대답이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 구석이 마구 아파오는 걸까.사랑하는 사람이라 무조건 믿는다는 뜻인가? 이준혁에게 있어서 임세희는 영원히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윤혜인의 행동은 그저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못난이에 불과하겠지.눈시울이 다시 붉어진 윤혜인이 자신을 비꼬며 말했다.“임세희 그 여자는 그럴 리가 없고 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 여자와 연관된 일이라면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조건 제가 잘못한 건가요? 이준혁 씨,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윤혜인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눈빛마저 암담했다.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혜인아,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넌 지금 세희가 널 모함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증거 있어?”그의 질문에 윤혜인은 심장이 아프다 못해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럼 저번에 이준혁이 그녀가 임세희를 밀었다고 확신할 땐 증거가 있었던 건가?그저 말 한마디에 그녀를 유죄로 만들어 버렸는데 지금 임세희에 관련된 일에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무조건 임세희의 편에 서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고 혹시라도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봐 입술을 꽉 깨문 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진주 마냥 귀한 것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물은 그저 눈에서 흐르는 물이나 다름없다.윤혜인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자 이준혁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혜인아, 내가 지금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네 마음속에 화가 있다는 걸 나도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임세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준혁 오빠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준혁 오빠, 나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진짜 버틸 만해.”임세희가 온화하게 웃었지만 이준혁은 쌀쌀한 표정으로 불쌍한 척 그를 쳐다보는 임세희를 힐끗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품에 갇혀 있던 윤혜인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이준혁 대표님, 대표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네요.”윤혜인은 더 이상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기 싫었으며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윤혜인의 초췌한 모습에 이준혁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난…”“괜찮아!”그 찰나,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준혁 오빠, 날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혜인 씨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으니까 혜인 씨 보내줘.”임세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눈빛으로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이준혁이 지금 이렇게 그녀를 잡고 있는 것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하라는 의도밖에 없는 건가?이런 생각에 윤혜인이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이준혁에게 사랑을 받는 여자는 진실을 왜곡해도 괜찮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도 다 괜찮다. 어차피 이준혁 마음속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사과만 하면 되는 건가요?”윤혜인이 쌀쌀하게 웃으며 이준혁에게 물었고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임세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임세희 씨.”머리를 숙이는 순간, 공을 들여 겨우 쌓았던 그녀의 자존감은 또다시 산산조각이 났지만 어차피 마음도 완벽하게 죽어버렸기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모든 걸 잃고 나서야 윤혜인은 다시 태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