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태수에게 달려가 그의 등을 쓸어주며 얼른 설명했다.“할아버지, 준혁 씨 탓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혜인아, 할아버지에 거짓말을 하지 마. 정말 저놈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거라면 이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내가 저놈을 죽여줄게!”“거짓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윤혜인이 억지웃음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태수를 한참 동안이나 어르고 달래서야 이태수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그리고는 장씨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늦은 밤, 이씨 저택에서 나온 윤혜인은 혼자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조용한 차 안에서 이준혁이 갑자기 정적을 깨며 말했다.“당분간 우리가 이혼한다는 말은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해.”“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그 어떤 충격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그리고 나중에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갈 수 있으니 걱정마.”이준혁의 말에 윤혜인도 같은 마음이었다.“네.”“그 한 글자밖에 할 말이 없어?”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준혁이 말을 이어갔다.“속은 좀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괜찮아요. 어차피 준혁 씨도 제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잖아요!”윤혜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내가 만약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윤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만약이라는건 없어. 난 절대 널 임신하게 만들지 않을거야.”이준혁이 단호한 말
”내 남편의 정인을 보러 가기 싫은 게 잘못됐어요? 이준혁 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당신 마음이에요. 제발 저만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저한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윤혜인의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며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그녀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초라한데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눈물은 줄 끊긴 구슬 마냥 하염없이 흘렀고 윤혜인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차라리 비참한 모습과 이 잔인한 현실을 다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참고만 살다가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준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윤혜인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혜인아,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윤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녀가 질투할 자격이라도 있을까?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혁 씨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린 아직 이혼하기 전이니까 적당히 자제하세요. 만약 저도 이준혁 씨처럼 다른 남자를 만나…”“윤혜인!”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고 다음 순간, 갑자기 몸을 돌려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읍!”이준혁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눈이 휘둥그레진 윤혜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윤혜인.”키스를 멈춘 이준혁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눈 감아.”당황한 듯한 그녀의 순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준혁은 왠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그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이준혁이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다면 그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윤혜인은 숨을 고르다가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하신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돼요. 당신이 계속 저를 케어 할 수는 없으니까요.”“혜인아, 우리가 앞으로 부부가 아니어도 넌 내 가족이야, 난 계속 너를 돌볼 거야.”이준혁이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차안에는 온통 이 남자의 향기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제 이 향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이준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이상 서로를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준혁 아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분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든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이다.“혜인아…”인상을 찌푸린 이준혁이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가요, 준혁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밖에서는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왜 이준혁이 바로 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세희가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하지만 이런 문제도 그녀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다.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매일 걱정하진 않을 테니.다음날, 윤혜인은 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 오전 소원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쇼핑을 즐기다가 소원은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윤혜인은 마사지 제품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자신은 받지 않고 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혜인은 걸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제야 이준혁 곁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며 자상하게 물었다.“다 됐어?”“응, 됐어, 고마워, 준혁 오빠.”여인이 고개를 돌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고 여린 모습의 그 여인은 다름아닌 임세희였다.두 사람 곁에 서있던 매장 직원은 곱게 포장한 쇼핑백을 임세희에게 건네며 실눈을 뜬 채 말을 걸었다.“사모님, 너무 부러워요. 남편 외모가 이렇게 훌륭한 것도 모자라서 사모님한테 자상하기까지 하잖아요!”윤혜인 얼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직원이 지금… 남편이라고 한 건가? 두 사람은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걸까?갑자기 눈앞이 까매진 윤혜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발이 붙은 것 마냥 꿈쩍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툭!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옷들이 흘러나왔다.“윤혜인 씨!”고개를 돌린 임세희가 윤혜인을 발견하자 그녀를 불렀다.“여기서 혜인 씨를 보게 되네요!”이준혁도 고개를 돌렸고 의아한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았다. 윤혜인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아이의 옷들을 정리해서 다시 쇼핑백에 넣었고 그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기다란 다리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이준혁은 수려한 외모덕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가까이 다가오던 이준혁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 윤혜인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 책은 조금 전에 신생아 용품 가게의 직원이 그녀에게 선물한 태교에 관한 책이었다.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은 순간 불안해졌다.“이게 뭐야…?”책을 주운 이준혁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확인하다가 책의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서 책을 확 낚아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매장 입구에 서서 손님들을 반기고 있던 직원은 윤혜인의 말에 경악에 찬 눈빛으로 임세희를 아래위로 훑었다.‘요즘 내연녀들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네, 남의 남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정실 앞에서 감히 저렇게 건방을 떨다니.’직원의 시선을 느낀 임세희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당신!”“아닌가요?”윤혜인이 여유롭게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말을 이어갔다.“할 말 있으면 하세요.”눈치가 빠른 쥬얼리 매장 직원은 두 사람에게 커피를 한 잔씩 건넨 뒤, 조용하게 물러갔고 임세희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준혁 오빠가 저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한번 맞춰볼래요?”“임세희 씨, 혹시 제 남편이 그쪽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자랑하고 싶은 거라면 죄송한데 전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남편이라는 말에 임세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쇼핑백 안에서 작은 액세서리 박스를 꺼냈다.“준혁 오빠가 저에게 선물한 반지를 정말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요?”흠칫하던 윤혜인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선물한 물건이… 반지라고?임세희가 액세서리 박스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손가락에 꼈고 일부러 손을 들어 윤혜인에게 보여주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때요? 예뻐요?”반지는 쥬얼리 매장의 환한 불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으며 그 반지 위에는 흔히 볼 수 없는 파란색 다이아몬드까지 박혀 있었다. 저번에 쥬얼리 매장을 구경했을 때 직원이 윤혜인에게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하늘색 다이아몬드 반지의 이름은 ‘푸른 눈물’로 가격이 어마어마했다.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옷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손에 꽉 쥐었고 너무 과하게 힘을 준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자국까지 선명하게 생겼지만 그녀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윤혜인은 자신에게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고 이 모든 게 자신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 임세희가 파 놓은 함정이라고
윤혜인은 눈앞에 놓인 은행 카드를 보며 뺨을 세게 맞은 듯 얼굴이 얼얼했다.그녀는 철저하게 졌다. 그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임세희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당했다.이내 윤혜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올랐고 점점 뚜렸해졌다.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준혁은 자주 L 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한 번 가면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윤혜인이 아무리 애교를 부리고 애원해도 그를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준혁은 임세희를 쥬얼리 매장에 데리고 와서 직접 반지를 고르고 있다.윤혜인 손에 끼고 있는 이 반지는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이준혁의 비서 주훈이 그녀에게 전해준 것이다.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는 주훈에게 시켜 대충 반지 하나를 구매하여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윤혜인은 너무 좋아서 샤워를 할 때마저 반지를 절대 빼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의 그 행동들은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윤혜인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이 아팠고 숨이 막혔다.‘이준혁, 당신 진짜 너무 잔인하네.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나의 마음에 칼을 꽂을 수 있지?’윤혜인은 단 일초라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준혁 오빠 올 때까지 안 기다릴 거예요?”임세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고 윤혜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싸늘하게 웃었다.“임세희 씨, 당신은 이미 목적을 이뤘잖아요. 이 청취자의 협조가 계속 필요한 건가요?”“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전 단지 그쪽이 불쌍해 보여서 이혼 전에 진실을 얘기해준 것뿐이에요.”표정이 살짝 굳은 임세희가 반박하자 윤혜인이 날카롭게 물었다.“대체 뭐가 두려운 거예요?”윤혜인은 조금 단순하긴 하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 임세희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녀를 자극하여 철저히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이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자극할 필요가 있긴 할까? 어차피 이준혁은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윤혜인은
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임세희가 화상을 입어 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뻗더니 이준혁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혜인 씨를 원망하지 마. 혜인 씨는 내가 오빠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화가 난 거야…”임세희의 말에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았고 취조하듯 물었다.“그게 사실이야?”윤혜인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허접한 연기는 매장 카메라만 돌려봐도 진실을 알 수 있을 텐데 이준혁은 그녀에게 따져 묻기 바빴다.이미 판단을 했으면서 왜 쓸데없이 저렇게 묻는 걸까?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를 줘서 그녀의 죄를 입증하려는 건가?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저 두 사람이 너무 역겹게만 느껴졌기에 피식 웃던 윤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떠났다.윤혜인이 떠나자 눈살을 확 찌푸린 이준혁이 몸을 움찔하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하던 순간, 임세희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준혁 오빠, 나 몸이 많이 불편해, 혹시…”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세희야, 내가 지금 볼일이 좀 생겼어. 주훈이 널 병원에 데려다 줄 거야.”말을 마친 이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르게 떠났고 임세희는 충격에 넋이 나가버렸다.‘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이준혁이 지금 나를 버리고 떠난 거야?’이준혁은 예전부터 임세희의 건강 상태를 과하다 할 정도로 많이 걱정했다. 그녀가 몸이 불편하다고 얘기하기만 하면 이준혁은 어떤 중요한 일이든 전부 제치고 그녀를 보러 외국으로 달려왔었다.이 또한 임세희가 가장 믿고 있는 비장의 카드였는데 지금 이준혁이 그녀를 혼자 쇼핑몰에 버려 두고 윤혜인을 쫓아갔다.설마… 설마 이준혁이 윤혜인을 좋아하게 된 건가? 아니, 절대 그럴 리는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그 보잘것없는 여자는 절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한편, 비틀거리며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린 윤혜인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퉁퉁 부은 윤혜인의 두 눈을 보자마자 심장에 뭔가 꽂힌 듯 움찔하다가 눈빛이 착잡해졌다.“혜인아…”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윤혜인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 여자가 날 모함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임세희를 찾아가서 따져 물을 수 있어요?”윤혜인의 돌발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은 몇 초 뒤, 어두워진 안색으로 목소리를 낮췄다.“그럴 리가 없어. 세희는 절대 널 모함할 리가 없어.”예상된 대답이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 구석이 마구 아파오는 걸까.사랑하는 사람이라 무조건 믿는다는 뜻인가? 이준혁에게 있어서 임세희는 영원히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윤혜인의 행동은 그저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못난이에 불과하겠지.눈시울이 다시 붉어진 윤혜인이 자신을 비꼬며 말했다.“임세희 그 여자는 그럴 리가 없고 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 여자와 연관된 일이라면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조건 제가 잘못한 건가요? 이준혁 씨,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윤혜인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눈빛마저 암담했다.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혜인아,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넌 지금 세희가 널 모함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증거 있어?”그의 질문에 윤혜인은 심장이 아프다 못해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럼 저번에 이준혁이 그녀가 임세희를 밀었다고 확신할 땐 증거가 있었던 건가?그저 말 한마디에 그녀를 유죄로 만들어 버렸는데 지금 임세희에 관련된 일에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무조건 임세희의 편에 서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고 혹시라도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봐 입술을 꽉 깨문 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진주 마냥 귀한 것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물은 그저 눈에서 흐르는 물이나 다름없다.윤혜인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자 이준혁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혜인아, 내가 지금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네 마음속에 화가 있다는 걸 나도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