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퉁 부은 윤혜인의 두 눈을 보자마자 심장에 뭔가 꽂힌 듯 움찔하다가 눈빛이 착잡해졌다.“혜인아…”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윤혜인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 여자가 날 모함했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임세희를 찾아가서 따져 물을 수 있어요?”윤혜인의 돌발 질문에 흠칫하던 이준혁은 몇 초 뒤, 어두워진 안색으로 목소리를 낮췄다.“그럴 리가 없어. 세희는 절대 널 모함할 리가 없어.”예상된 대답이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 구석이 마구 아파오는 걸까.사랑하는 사람이라 무조건 믿는다는 뜻인가? 이준혁에게 있어서 임세희는 영원히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윤혜인의 행동은 그저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못난이에 불과하겠지.눈시울이 다시 붉어진 윤혜인이 자신을 비꼬며 말했다.“임세희 그 여자는 그럴 리가 없고 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 여자와 연관된 일이라면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조건 제가 잘못한 건가요? 이준혁 씨,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윤혜인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눈빛마저 암담했다.순간, 말문이 막힌 이준혁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혜인아,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넌 지금 세희가 널 모함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증거 있어?”그의 질문에 윤혜인은 심장이 아프다 못해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럼 저번에 이준혁이 그녀가 임세희를 밀었다고 확신할 땐 증거가 있었던 건가?그저 말 한마디에 그녀를 유죄로 만들어 버렸는데 지금 임세희에 관련된 일에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무조건 임세희의 편에 서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고 혹시라도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봐 입술을 꽉 깨문 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진주 마냥 귀한 것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물은 그저 눈에서 흐르는 물이나 다름없다.윤혜인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자 이준혁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혜인아, 내가 지금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네 마음속에 화가 있다는 걸 나도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임세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준혁 오빠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준혁 오빠, 나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진짜 버틸 만해.”임세희가 온화하게 웃었지만 이준혁은 쌀쌀한 표정으로 불쌍한 척 그를 쳐다보는 임세희를 힐끗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품에 갇혀 있던 윤혜인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이준혁 대표님, 대표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네요.”윤혜인은 더 이상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기 싫었으며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윤혜인의 초췌한 모습에 이준혁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난…”“괜찮아!”그 찰나,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준혁 오빠, 날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혜인 씨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으니까 혜인 씨 보내줘.”임세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눈빛으로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이준혁이 지금 이렇게 그녀를 잡고 있는 것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하라는 의도밖에 없는 건가?이런 생각에 윤혜인이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이준혁에게 사랑을 받는 여자는 진실을 왜곡해도 괜찮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도 다 괜찮다. 어차피 이준혁 마음속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사과만 하면 되는 건가요?”윤혜인이 쌀쌀하게 웃으며 이준혁에게 물었고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임세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임세희 씨.”머리를 숙이는 순간, 공을 들여 겨우 쌓았던 그녀의 자존감은 또다시 산산조각이 났지만 어차피 마음도 완벽하게 죽어버렸기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모든 걸 잃고 나서야 윤혜인은 다시 태어날
임세희는 오래전부터 그 반지를 가지고 싶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그런데 그 반지를 윤혜인 그 나쁜 계집애에게 줬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세희가 이준혁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고 왠지 모르게 이런 스킨십에 거부감이 든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었다.그의 행동에 임세희가 흠칫 놀랐다.이준혁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차가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겁을 먹은 임세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혜인이한테 내가 너에게 반지를 사줬다고 얘기했어?”이준혁의 질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임세희는 당황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난 그냥 우리가 반지 샀다고만 했는데… 다음 달 우리 이모 생신에 선물로 드릴거라고 했잖아. 설마 혜인 씨가 뭘 오해한 거야?”“세희야, 난 누가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는 걸 제일 싫어해. 내가 나중에 네가 원하는 쥬얼리는 뭐든 사준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이준혁이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며 쌀쌀하게 말하자 임세희는 안절부절못했다.‘준혁 오빠가 뭘 눈치챈 건가? 내가 말 몇 마디로 윤혜인 그 여자를 자극한 게 뭐 어때서?’예전부터 임세희를 애지중지 여긴 이준혁은 단 한번도 그녀를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윤혜인 그 여자 때문에 계속 그녀에게 따져 묻고 있다니! 역시 윤혜인 그 여자를 철저하게 없애야 한다!임세희는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임씨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이 나서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카톡 대화 내용을 보여주며 말했다.“준혁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못 믿겠으면 오빠가 직접 봐!”카톡 대화 내용으로 보면 임세희는 며칠 전부터 그녀의 이모에게 반지 사진을 보내주며 좋아하는 디자인을 물었었다.카톡 내용을 확인한 이준혁은 싸늘하게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아니면 다행이고.”“준혁 오빠, 어떻게 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내일이면 오빠 이혼할 텐데 내가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잖아?”말을 하던 임세
다음날.아침 일찍 일어난 윤혜인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법원으로 출발했다. 오전 9시 반으로 예약했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그녀는 버스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어제 쇼핑몰에서 나온 뒤, 속이 안 좋아진 윤혜인은 소원과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고 물건을 정리하다가 그제야 쇼핑몰에서 샀던 아이의 옷이 없어졌다는 걸 발견했다.쇼핑몰 분실 센터에 전화를 해봤지만 직원은 그런 분실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윤혜인은 누군가가 주워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버스가 법원에 도착하자 윤혜인이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도착했어요.]이전의 문자는 임세희가 돌아오기 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보냈던 문자였다.[여보, 언제 돌아와요?]그날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윤혜인은 문자로 이준혁에게 얘기를 하려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큰일은 얼굴을 보고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그 문자를 보낸 지 2주밖에 안 된 사이에 모든 게 달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자는 대부분 그녀가 보냈고 이준혁은 단답형의 답장만 보내왔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윤혜인은 카톡 문자 기록을 지우며 다시는 멍청하게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법원으로 걸어가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도둑을 잡아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소리와 동시에 갑자기 튀어나온 한 남자가 그녀를 강하게 밀쳤다.그 남자는 빠르게 그녀 옆으로 지나갔고 손에는 빨간색 가방을 든 채 도망가고 있었다. 윤혜인이 반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그 남자와 부딪쳐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뒤에서 그 남자를 쫓았지만 신고 있던 높은 힐 때문에 발을 삐끗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그 여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가방 안에 저희 집안 어르
윤혜인의 말에 가방을 확인한 빨간 원피스 여인은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그대로 있어. 아가씨, 너무 고마워. 힘든데 말하지 마.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야.”이내 윤혜인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했고 일련의 검사 끝에 팔에 살짝 스친 찰과상과 손바닥에 베인 상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상처를 봉합하는 내내 빨간 원피스 여인은 계속 윤혜인의 곁을 지켰고 윤혜인은 그 여인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겁이 나서 봉합 과정을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사바늘을 무서워했으며 작은 통증도 그녀가 느끼기엔 너무 아팠기에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윤혜인은 자신이 마취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마취없이 봉합을 강행했다.바늘이 그녀의 피부를 뚫는 순간, 극심한 고통에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고 곁에서 안쓰럽게 쳐다보던 빨간 원피스 여인은 차라리 그녀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었다.봉합이 끝나고 의사가 나간 뒤, 한참 숨을 고르던 윤혜인은 그제야 이혼 수속이 생각났다.‘설마 준혁 씨가 아직도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윤혜인은 손이 불편한 탓에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핸드폰 전원이 꺼져버렸다.빨간 원피스 여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주워 윤혜인에게 건네며 다급하게 말했다.“아가야,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돼.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 아줌마한테 얘기해.”조금 전에 구급차 안에서 윤혜인과 여인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빨간 원피스 여인의 이름은 문현미였다.“아주머니, 혹시 아주머니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당연하지, 전화번호 불러봐.”윤혜인이 전화번호를 부르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문현미의 손이 흠칫했고 고개를 들며 윤혜인에게 물었다.“이 번호 주인은 너와 어떤 관계야?”“제 남편이에요.”윤혜인의 대답에 문현미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죄송한데 혹시 저 대신
“혜인아.”이준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오늘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인 경험을 처음 하게 된 윤혜인은 이준혁이 이름을 불러주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서 모든 걸 뒤로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마터면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다시는 이준혁을 못 보게 될 뻔했다. 이준혁이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뱃속의 아이는 그의 핏줄인데 윤혜인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다시 생각해 보니 뱃속의 아이도 이준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권리가 있다!“준혁 씨…”윤혜인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병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고 임세희가 다급하게 들어왔다.“혜인 씨, 몸은 좀 어때요?”임세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저랑 준혁 오빠가 법원으로 가려고 했다가 혜인 씨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은 단 일초만에 차갑게 식었고 반짝이던 눈빛마저 빛을 잃었다.‘그래,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우린 곧 이혼할 사이인데… 왜 그런 허튼 환상에 빠졌을까? 조금 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어.’“넌 왜 들어왔어?”이준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고 눈빛마저 다소 차가웠다.“준혁 오빠, 밖에 너무 추워. 내가 오늘 좀 얇게 입어서 도무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임세희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윤혜인은 그제야 그녀가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상대방은 이미 혼인신고를 위해 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윤혜인은 눈치도 없이 혼자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혜인 씨,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임세희가 윤혜인에게 다가가며 걱정하는 척 가식을 떨었지만 눈빛만큼은 분노에 들끓었다.아침 일찍부터 예쁘게 치장한 임세희는 2주 전에 맞춤 제작한 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고 오늘 예쁜 모습으로 이준혁과 혼인신고를 하려고 최
임세희는 기세 등등한 여자를 상대로 당연히 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궁상맞은 윤혜인이 대단한 인물과 알고 지낼 리가 없을 테니까.임세희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만하게 물었다.“아주머니는 혜인 씨와 무슨 사이죠?”“나?”코웃음을 치던 문현미가 고개를 돌려 아니꼬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난 혜인이 시어머니야!”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문현미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임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이 늙은 여자가 왜 여기 있지?’문현미가 임세희를 날카롭게 째려보자 깜짝 놀란 임세희가 얼른 이준혁 뒤로 몸을 숨겼고 이준혁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물었다.“엄마, 왜 갑자기 귀국하셨어요?”“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흥미진진한 장면도 보지 못했겠지! 와이프가 다쳤는데 위로 한마디도 없이 거기서 애인이랑 애정행각 나누기 바쁘다니. 내 배에서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나온 거야? 남의 가슴에 칼이나 꽂고 말이야.”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아들을 사정없이 나무랐다. 애인이라고 칭하는 문현미의 말에 임세희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저 늙은이가 예전부터 그녀를 싫어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다니.임세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저 임세희예요. 저희 아빠는 임요한인데 혹시 저를 잊으신 건가요?”“세희? 네가 임씨 집안 딸이야?”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현미가 물었다. 임요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문현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고 그 모습에 임세희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네, 제가 어릴 때…”하지만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현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기억으론 임씨 집안은 학자 가문으로 교양이 넘치고 가풍이 올발랐던 거 같은데… 그런 분들이 키워낸 딸도 당연히 훌륭하겠지. 염치도 없이 유부남 몸에 그렇게 찰싹 달라붙는게 아닌!”문현미의 한마디에 임세희 얼굴의 미소가 그대로 굳
전까지는 허약한 척 연기한 거였지만 지금의 임세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그녀는 막말을 하는 저 늙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울에서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명문 가문 규수인데 오늘 계속 저 늙은 여자에게 애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그뿐만 아니라 문현미는 분명히 임세희를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임세희는 더욱 짜증이 났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이준혁에게 살짝 기대며 허약한 목소리로 울먹였다.“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전…”“세희 양,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앞으로도 똑똑히 기억해둬. 가정이 있는 남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적인 사회 예의라는 걸!”말을 하던 문현미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혁의 팔을 잡고 있던 임세희의 손을 째려보았고 깜짝 놀란 임세희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눈치 빠른 이준혁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세희가 많이 아프니 그런 말투로 얘기하지 마세요. 세희가 놀래요.”이준혁은 임세희를 등 뒤로 보호한 채 든든한 장벽 마냥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윤혜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윤혜인은 자신이 이제 충분히 적응됐다고 여겼는데 저런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여전히 너무 아팠다.그녀는 이미 저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이준혁을 놓아줬는데 왜 이준혁은 굳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저토록 감싸는 걸까?팍!문현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더니 이준혁을 노려보았다.“저 여자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넌 병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네 와이프를 조금이라도 걱정하긴 했어? 혜인이가 네 할아버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도로 가져오기 위해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알기나 해? 도둑놈이 휘두르는 칼에 찔리고 마취도 없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
육경한은 소원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이미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게다가 무곡산의 일은 소원이 그에게 아무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생사가 달린 일이라도 다시 육경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소원의 눈빛은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육경한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소원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하느님은 장난이라도 치는 듯 아이를 선물해 줬다.육경한은 소원의 변호사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진실을 알게 된 순간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어쩌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쁨 뒤에는 늘 그렇듯 두려움이 찾아온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칠까 봐 두려웠고 그 아이가 유진과 같은 고통을 겪을까 봐 무서웠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손에 넣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경험한 두려움이 다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육경한은 간절히 기도했다.‘소원아, 제발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기회를 줘. 나한테도...’저녁.퇴근한 육경한은 소원이네 집 아래에 머물며 위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밤새 잠을 못 잤고 낮에 눈을 붙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피곤했다.3일 연속으로 육경한은 감시를 붙여놓은 사람을 찾아와 교대했다. 지금껏 보고받은 행적을 보면 지난 3일 동안 소원은 유난히 조용했고 누굴 만나기는커녕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도 모르겠지만 지난 3일간의 육경한의 삶은 그저 고문이었다. 마치 칼이 머리 위에 걸려있는 듯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답을 기다리고 있
생각할 것도 없다. 소원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까..하지만 육경한이 제안한 조건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진을 만날 수도 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다.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삼킬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수만 있다면 임신 중에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지만...”육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소송을 진행하면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 거야.”소원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육경한은 그의 스타일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의외는 아니었다.“육경한, 아이를 꼭 낳으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육경한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너랑 나 사이의 아이니까.”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육경한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그는 임신한 소원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러면 예전에 유진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그러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생각해 보고 연락할게.”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황 비서가 데려다 줄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아무리 걱정되어도 직접 배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물론 거절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소원은 혼자 있고 싶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육경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래.”소원이 문에 다다르자 육경한도 그녀를
“육경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잘 들어, 난 반드시 아이를 지울 거야.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날 감시할 수 있어? 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이를 지울 방법이 백 가지나 있어. 아이로 날 통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제발 현실을 직시해. 아이를 낳으라고? 네가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육경한은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했다.“소원아,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건 알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이혼하고 나서도 유진을 보고 싶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면 돼.”차분한 표정과 달리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일었다.원래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다. 이준혁의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묶어두는 건 두 사람에게 모두 상처가 되니까.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충동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이 아이를 임신한 이상 절대 지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알고 있다. 이 아이가 그들의 관계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소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꿈 깨라고.”다만 절대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란 확신은 변함없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것 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소원은 위에 적힌 조항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측 모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며 누구랑 함께 살지는 아이의 결정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다. 육경한은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상대는 교활함이 몸에 배인 육경한이니 소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려고 이러는
이건 소원에 대한 시험이다. 육경한은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아이를 볼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미 큰 양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소원이 결혼할 계획이 있다면 아이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육경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렇게 할게.”어차피 처음부터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결혼에 대한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육경한은 흔쾌히 승낙하는 소원을 보고선 마음속의 불편한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이때 소원이 물었다.“또 있어?”“응.”육경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육경한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소원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낳으라고.”“나... 임신 안 했어.”누군가가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던 소원은 힘겹게 답했다.유진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는데 기적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뒤로 육경한과 얽혔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걸 육경한은 분명히 알고 있다.그러므로 소원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육경한은 진료 기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소원에게 다가가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원아, 난 아무런 조사 없이 막연한 추측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니야.”그 위에는 소원의 검사 기록과 약 처방 기록이 명확하게 쓰여있었다.육경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는 건 절대 안 돼.”그는 진료 기록을 받
아이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소원의 임신 증상은 유독 선명했다.그녀는 최대한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여러 번 심호흡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추슬렀다.마침내 심장 박동이 진정되자 입을 헹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육경한은 180cm는 넘는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조성한다.그는 소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원은 가까스로 당황함을 감추며 침착하게 말했다.“아침에 따뜻한 죽을 먹자마자 차가운 걸 마셨거든. 그래서 그런지 속이 안 좋네.”하지만 그녀가 말을 마친 후에도 육경한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소원은 불안함이 밀려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내가 원래 위가 안 좋잖아.”육경한은 또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많이 아프면 병원 가봐.”그의 말투는 무덤덤했다.소원은 그의 말을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설득이 효과가 된 건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예의를 지키는 건 당연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그녀는 말을 이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아이를 만나도 돼.”육경한은 빙빙 돌리는 게 아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소원은 너무도 기뻤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걱정이 밀려왔다.“원하는 게 뭐야?”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육경한은 갑자기 아이를 만나게 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 아니기에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다.어제 주석훈이 육경한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건 말지만 육경한은 결코 말이 쉽게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그러니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 육경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육경한은 경계에 찬 소원의 눈빛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맞아. 조건이 있어.”소원은 육경한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비록 유진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지만,
“하여튼 잔머리는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윤혜인은 응석 부리며 말했다.기분이 좋아진 이준혁은 그녀를 꼭 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스했다.윤혜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만해요... 아기가 자고 있잖아요.”이준혁은 매력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답했다.“알아. 그냥 안고 싶어서.”이제 딸도 컸으니 두 사람은 애정 행각을 벌일 때마다 아이가 없는 곳으로 피했다.아이가 잠든 방에서 관계를 갖는 건 불가능했으니 가끔 지금처럼 같이 자고 싶어 하면 이준혁은 욕구를 참아야만 한다.따뜻한 포옹에 안정감을 느낀 윤혜인은 긴장을 풀고 그의 팔을 베며 자연스럽게 안겼다.졸음이 밀려온 듯한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고 애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혜인아, 난 너무 행복해. 너랑 아이가 곁에 있으니까...”운혜인은 이미 졸음에 취했다.“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예요.”“응. 영원히.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야.”이준혁은 애틋했다.“고마워. 여보.”...다음날.소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육경한과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이상 불가피한 접촉은 분명히 발생할 것이고 소성 전 조정 기간까지 더하면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비록 마음이 심란했지만 소원은 약을 꺼내 삼키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울린 핸드폰 진동 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차를 마시려던 찰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잘못건 전화라면 다시 걸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니 소원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육경한의 비서였다.“소원 씨 맞으시죠?”소원은 그렇다고 답했다.“저는 육 대표님의 비서인 황진수라고 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소원은 어리둥절해하
육경한이 듣고 행동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이 말을 이었다.“내가 서현재에게 투자할 의향이 있는 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서현재가 이번 일로 인해 감옥에 간다면 소원 씨가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 봐. 적어도 후회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이준혁은 의리와 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친한 친구가 늪에 빠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손을 뻗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당사자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건져내고 싶었다.파티가 끝난 후 저마다 걸음을 옮겼다. 김성훈은 계속 술집에 머물렀고 이준혁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고 몸에 남아있던 술 냄새를 깨끗하게 씻었다.곧이어 아기방으로 향한 그는 잠든 아기를 보며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두 아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안방으로 들어가자 윤혜인은 이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옆에는 새끼 고양이 같은 아이가 자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아름이가 엄마, 아빠랑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린듯하다.침대는 아이와 아내의 향기로 가득했다.조심스럽게 누웠지만 가벼운 동작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눈을 떴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나지막이 물었다.“왔어요?”“응. 깨워서 미안해.”이준혁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윤혜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괜찮아요. 낮에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깊게 잠들지는 못했어요.”윤혜인이 말을 이었다.“오늘 밤에 경한 씨랑 같이 있었던 거예요?”“응. 맞아.”술집에 가기 전,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누굴 만나는지 알려줬다.이내 윤혜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괜찮아졌어요?”“최대한 설득했는데 그래도 똑같으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이준혁이 답했다.“정말 못된 사람이에요.”윤혜인은 불평을 늘어놓았다.“소원이가
이준혁은 육경한이 뭐라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소원 씨가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넌 지금 뭐 하는데?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소원 씨에게 얼마나 큰 상처일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네 아이도 그럴 거야. 아이한테 엄마를 만나고 싶은지 직접 물어본 적은 있어?”이준혁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육경한의 마음에 와닿았다.유진이는 비록 겉으로 아빠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매일 집에서 침울한 모습으로 조용히 지낼 뿐이었다.유진이는 그를 두려워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기에 이를 지켜보는 집사들조차 걱정할 정도였다.이준혁은 그의 표정만 봐도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은 그도 아버지가 된 후에야 깨닫게 된 것들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었다.“경한아, 후회할 일 만들지 마.”그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친구로서 육경한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걸 막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원망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그뿐이었다.이준혁은 지금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얻기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절친인 육경한 또한 행복하길 바랐다.옆에서 듣고 있던 김성훈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준혁아, 고민 상담 왜 이렇게 잘해?”이준혁은 김성훈의 농담을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결혼도 안 한 사람이 이 행복을 어떻게 이해하겠어...’김성훈은 웃으면서 육경한의 어깨를 두드렸다.“난 네게 특별히 해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