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는 기세 등등한 여자를 상대로 당연히 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궁상맞은 윤혜인이 대단한 인물과 알고 지낼 리가 없을 테니까.임세희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만하게 물었다.“아주머니는 혜인 씨와 무슨 사이죠?”“나?”코웃음을 치던 문현미가 고개를 돌려 아니꼬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난 혜인이 시어머니야!”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문현미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임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이 늙은 여자가 왜 여기 있지?’문현미가 임세희를 날카롭게 째려보자 깜짝 놀란 임세희가 얼른 이준혁 뒤로 몸을 숨겼고 이준혁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물었다.“엄마, 왜 갑자기 귀국하셨어요?”“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흥미진진한 장면도 보지 못했겠지! 와이프가 다쳤는데 위로 한마디도 없이 거기서 애인이랑 애정행각 나누기 바쁘다니. 내 배에서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나온 거야? 남의 가슴에 칼이나 꽂고 말이야.”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아들을 사정없이 나무랐다. 애인이라고 칭하는 문현미의 말에 임세희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저 늙은이가 예전부터 그녀를 싫어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다니.임세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저 임세희예요. 저희 아빠는 임요한인데 혹시 저를 잊으신 건가요?”“세희? 네가 임씨 집안 딸이야?”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현미가 물었다. 임요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문현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고 그 모습에 임세희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네, 제가 어릴 때…”하지만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현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기억으론 임씨 집안은 학자 가문으로 교양이 넘치고 가풍이 올발랐던 거 같은데… 그런 분들이 키워낸 딸도 당연히 훌륭하겠지. 염치도 없이 유부남 몸에 그렇게 찰싹 달라붙는게 아닌!”문현미의 한마디에 임세희 얼굴의 미소가 그대로 굳
전까지는 허약한 척 연기한 거였지만 지금의 임세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그녀는 막말을 하는 저 늙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울에서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명문 가문 규수인데 오늘 계속 저 늙은 여자에게 애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그뿐만 아니라 문현미는 분명히 임세희를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임세희는 더욱 짜증이 났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이준혁에게 살짝 기대며 허약한 목소리로 울먹였다.“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전…”“세희 양,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앞으로도 똑똑히 기억해둬. 가정이 있는 남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적인 사회 예의라는 걸!”말을 하던 문현미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혁의 팔을 잡고 있던 임세희의 손을 째려보았고 깜짝 놀란 임세희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눈치 빠른 이준혁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세희가 많이 아프니 그런 말투로 얘기하지 마세요. 세희가 놀래요.”이준혁은 임세희를 등 뒤로 보호한 채 든든한 장벽 마냥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윤혜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윤혜인은 자신이 이제 충분히 적응됐다고 여겼는데 저런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여전히 너무 아팠다.그녀는 이미 저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이준혁을 놓아줬는데 왜 이준혁은 굳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저토록 감싸는 걸까?팍!문현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더니 이준혁을 노려보았다.“저 여자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넌 병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네 와이프를 조금이라도 걱정하긴 했어? 혜인이가 네 할아버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도로 가져오기 위해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알기나 해? 도둑놈이 휘두르는 칼에 찔리고 마취도 없
문현미는 아무 말도 못하는 윤혜인을 보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네가 내 며늘아기라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야. 이남주 그 계집애는 맨날 여기저리 돌아다니느라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거든. 난 내 며느리가 너처럼 단아하고 착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에서까지 바랐어. 그런데 하늘이 이렇게 내 소원을 들어줄 줄은 몰랐네.”문현미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윤혜인도 그녀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머님.”“아이고, 그래, 우리 착한 며느리.”환하게 웃던 문현미가 손목에 끼고 있던 옥팔찌를 빼더니 윤혜인에게 건넸다.“내가 이 옥팔찌를 40년 동안 차고 있었어. 이젠 너에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아… 아니에요! 이 선물은 너무 귀중한 거라서 전 받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는…”‘이준혁과 곧 이혼할 사이입니다.’그녀는 남은 말을 입 밖에 꺼내려고 하다가 괜히 문현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꼭 잡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손으로 칼을 막았을 때 난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어. 네가 얼마나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저렇게 강인한 눈빛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난 그 순간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내 마음을 거절하지 말고 엄마가 앞으로 널 사랑해줄 수 있게 해줘.”문현미의 말에 꽁꽁 얼어붙었던 윤혜인의 마음이 따듯하게 녹아내렸다. 아빠 엄마가 없는 윤혜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이 든 모습을 보였으며 작은 몸으로 연세가 높은 외할머니를 지켰다.그러다가 나중에 이준혁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이 소중한 인연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느라 사랑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보호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이렇게 따듯한 거였구나…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울먹이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어머님.”이때, 병실 문이 열렸고 이준혁이 걸어 들어왔다.그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윤혜인이 놀라
“아까는 조금 아팠는데 이제는 별로 안 아파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했지만 사실 조금의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마취없이 봉합한 상처는 조금이 아니라 눈물이 날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물론 이준혁도 조금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걸 제일 무서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잠자리에서 첫경험을 할 때도 그녀가 너무 아파해서 꽤 힘들었었다.그래서 이준혁은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뤘다.그랬던 지금의 윤혜인은 창백한 얼굴에 머리까지 식은땀으로 젖어서 너무 병약해 보였고 이준혁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목이 메었다.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런 이준혁을 보면서 그가 이혼을 못해서 이렇게 화가 난 줄로 착각했다. 그녀가 지금 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데 이 상태로 본가로 가면 할아버지가 걱정할 것이 뻔하기에 일단 손이 좀 나으면 붕대를 풀고 본가에 가서 문현미에게 사실대로 설명할 생각이었다.“걱정하지 마요. 제 손이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여도 빨리 나을 거예요. 손에 감긴 붕대만 풀면 바로 어머님에게 설명할 테니 너무…”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고 턱에 그녀의 머리를 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조금만 이러고 있자.”윤혜인은 넋이 나가버렸다. 이준혁이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이내 자신을 비웃었다.그가 임세희를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을 그렇게 여러 번 목격하고도 어떻게 이런 착각을 계속 하는 걸까? 만약 그때 당시 임세희가 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모든 게 우연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윤혜인은 우연히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우연히 이준혁과 함께 하게 되었다.반려동물을 키워도 2년이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윤혜인은 말까지 통하는 사람이니 이준혁도
이준혁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얌전히 잠이 든 윤혜인을 보며 마음이 따스했고 집에 도착하자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주훈이 이준혁에게 보고를 올렸다.“대표님, 그 사람 구치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안색이 확 어두워진 이준혁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윤혜인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한 뒤 돌아서서 집을 나섰다.조금 뒤, 검은색 고급 외제차가 한 건물 앞에 멈췄다. 이곳은 서울에서 유명한 유흥 업소였다.차에서 내린 이준혁이 정장 단추를 풀며 날카로운 눈빛을 장착한 채 주훈에게 물었다.“정보 읊어봐.”“이름은 강인입니다. 친구와 내기를 했는데 신선한 자극을 느끼기 위해 가방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이 유흥 업소 주인은 그 사람은 부친입니다. 구치소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진단서를 제출하여 오늘 오후에 풀려났습니다.”한편, 룸에서 노란 머리 청년이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있었다.“너희들이 못 봐서 그러는데 그렇게 멋있는 계집애는 나도 처음 봤어. 얼굴도 엄청 예뻐. 진짜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겨우 참았다니까. 내가 변호사 몰래 그 여자 전화번호를 외웠어. 두고봐, 나중에 강제로라도 그 계집애를 내 여자로 만들 거야.”쾅!이때, 이준혁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정장 외투를 벗어 비서에게 던지더니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노란 머리 청년을 힐끔 쳐다보며 느긋하게 물었다.“강인?”말이 안 될 정도로 잘생긴 이준혁을 멍하니 쳐다보던 강인이 자신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이곳이 자신의 구역이라는 걸 깨닫고 욕설을 퍼부었다.“빌어먹을, 너 뭐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에 유리 재떨이가 박혀버렸고 강인의 머리에서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강인은 머리를 부여잡고 극심한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젠장, 너 뭐야! 감히 날 때려?”그는 곁에 멍하니 서있던 친구들에게 언성을 높였다.“너희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저놈 잡아!”곁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이 유흥 업소에는 경호원들이 많았다. 족히 서른 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강 사장의 명령에 전부 룸으로 들어섰다.이와 반대로 상대방은 나이도 젊어 보이는 데다가 경호원 두 명에 비서 한 명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점잖아 보이는 비서는 싸움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강 사장은 승리를 확신하며 사악하게 웃었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경호원들에게 공격하라고 했지만 젊은 남자는 전혀 겁을 먹지 않은 듯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팍팍팍!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강 사장이 정확히 보기도 전에 서른 명이 넘는 그의 경호원들은 이미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그 과정은 5분도 넘기지 않았다.상대방은 두 명이서 서른 명이 넘는 건장한 남자들을 쓰러트린 것이다.강 사장은 그제야 겁을 먹기 시작했으며 악마를 보듯 이준혁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구야?”그의 물음에 주훈이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더니 입을 열었다.“이분은 저희 이 대표님입니다.”바닥에 던져진 명함을 확인한 순간, 강 사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죄… 죄송합니다. 제가 멍청해서 대단하신 분을 몰라봤습니다. 제발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희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같은 쓰레기는 상대할 것도 못 됩니다.”“아버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러면 앞으로 내가 창피해서 어떻게 살아요…”팍!강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 사장이 돌아서서 아들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당장 그 입 다물어!”멍청한 그의 아들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존재를 건드렸는지 모르고 있다!강 사장은 곁에서 소리를 지르는 아들을 뒤로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준혁에게 말을 건넸다.“제 아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잘 모르지만 제가 대신 이렇게 사과를 드리겠습니다.”조용하게 지켜보던 이준혁이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사과는 필요 없어요. 오늘 그런 일을 저지른 만큼 당신 아들은 더 이상 손을 달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을
흠칫 놀란 윤혜인은 이준혁이 언제 들어왔는지 의아했다.유유하게 다가오던 이준혁이 침대 끝에 멈춰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거절해.”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그때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도와줄게.”그러다가 윤혜인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음성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고 윤혜인이 다급하게 말렸다.“잠깐만요! 지금 제 핸드폰으로 뭐 하려는 거예요?”“네가 말을 못하겠다면 내가 너 대신 거절해 준다고.”이준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윤혜인은 화를 참으며 그에게 차분하게 말했다.“이 사람은 제 대학교 선배예요. 제가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듣고 그냥 가볍게 저를 걱정해줬을 뿐이라고요.”“이 남자랑 밥 먹지 마.”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윤혜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싫어요.”본인은 임세희랑 다정하게 안고 스킨십을 마음대로 하면서 그녀는 왜 이준혁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더군다나 그녀와 한구운은 그저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정상적인 왕래밖에 없는데 말이다.이준혁은 겉으로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만은 매우 차가웠으며 이를 꽉 깨문 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다시 한번 말해봐.”윤혜인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이준혁의 모습에 화가 났다.“존중이라는 걸 알기나 해요? 우린 이제 이혼할 사이인데 무슨 자격으로 내 사회생활을 간섭하는 건데요?”“네가 이혼하고 싶은 게 이 사람 때문이야?”이준혁이 콧방귀를 뀌면서 묻자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담아두고 있었던 건 분명 이준혁이고 지금까지 그녀를 대체품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따져 묻는 거지?화가 잔뜩 난 윤혜인은 변명하기도 싫었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그녀를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누가 먼저 변심했는지 따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정말이야?”이준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이준혁 씨,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예요.”그녀의
이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턱을 더 높게 들어올리더니 각도를 바꾸어 조금의 틈도 벌어지지 않게 더욱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그의 키스는 차분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쳤고 꾹 다문 윤혜인의 입술을 조금씩 벌리고 있었다.너무 뜨거운 이준혁의 입술에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고 그녀의 작은 행동에 자극을 받은 이준혁은 더욱 깊은 입맞춤을 선사했다. 윤혜인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너무 놀라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이준혁은 도대체 왜 그녀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임세희인데, 왜 그녀의 마음을 자꾸 흔들고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는 걸까?입가에서 짠맛이 느껴지자 거칠게 밀어붙이던 이준혁의 행동이 살짝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귓볼에 살짝 입을 맞추다가 이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살짝 갈라진 이준혁의 목소리에 흠칫하던 윤혜인은 더욱 울고 싶어졌다.그녀는 이게 무슨 시그널인지 잘 알고 있었다.이준혁이 그녀의 몸을 원하고 있다…“계속 반항할 거야?”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정말 그녀를 덮칠까 봐 감히 그를 자극하지 못했다.“날 화나게 하지 마.”계속되는 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명령하듯 말했다.“날 봐.”이준혁의 손가락에 얼굴을 꿈쩍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았고 조금 전에 너무 거칠게 입을 맞춘 이준혁 때문에 그녀의 입술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촉촉한 윤혜인의 입술을 쳐다보던 이준혁은 또다시 참기 힘들었다.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의 갑작스로운 반항이 이준혁의 자극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윤혜인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화가 잔뜩 난 이준혁은 그녀의 남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감사합니다, 주 변호사님.”소원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를 얻기가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너무나 성의껏 도와주자 소원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다음에 제가 수고비 추가로 드릴게요.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요.”“그럴 필요 없습니다.”그러자 주석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처음에 합의한 금액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저는 사건 단위로 일을 처리하지 시간을 기준으로 하진 않아요.”“예전에 이선 그룹 이준혁 대표님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번 일도 이선 그룹 사모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거라 사건을 맡은 이상 전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소원 씨,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저와 상의하세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그렇게 주석훈과 헤어진 후, 소원은 주소에 적힌 감정 기관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도착해서 본 기관은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엄숙했다.벽에는 여러 신고 관련 홍보 문구가 붙어 있었다.홍보 문구에는 ‘의사나 조수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익명 신고 시 거액의 포상이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이런 점을 보면 이 기관이 사법 당국에서 전문 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인맥이 아닌 철저한 절차와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소원은 육경한이 어떻게 이런 철저한 검사를 피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주석훈이 소개해 준 동창, 강백호를 찾아가 감정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강백호는 말했다.“저희는 각 과정마다 최소 다섯 번 이상 검증을 거칩니다. 이렇게 철저히 검증하는 이유는 어떤 작은 오류나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초반 두 번의 검사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후반 세 번의 검사는 다른 기관으로 혼합 샘플을 보내 재검사하기 때문에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 재검사 기관들은 모두 비공개로 운영되며 샘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작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대해야 마땅하지. 잘 대해줘봤자 소용없어!’“민아 씨한테 사과해.”육경한은 방민아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주려는 듯 말했다.이내 소원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그녀는 유진을 떠올리며 결국 마지못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해서 그런 말을 했어요. 물론 민아 씨도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다행이고요.”소원이 잠시 멈추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나중에 엄마가 되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다는 걸요.”소원은 사과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방민아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유진에게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워낙 통찰력이 뛰어났던 방민아는 이를 단번에 알아챘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물론이죠. 이해합니다. 저와 경한 씨와 결혼 후 바로 임신 준비를 할 예정이에요. 벌써 엄마의 마음이 어떤지 느껴지네요. 모든 엄마가 아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지 않을 겁니다.”가벼운 대답인 듯 보였지만 방민아 역시 소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미리 축하드릴게요.”자연히 그 뜻을 이해한 소원이 답했다.그러자 방민아는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그들의 대화를 들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은 방민아에게 고개를 숙여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요?”방민아가 말했다.“한 번 해볼게요.”한 걸음 내디디자마자 소원은 고통스러운 듯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윽...”결국 육경한은 방민아를 들어 올리며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차가운 바람이 지나가자 소원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휘감으며 유진에 대한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그때 주석훈이 나와 말했다.“소원 씨, 육경한 씨가 감정을 의뢰한 기관은 이곳입니다.”그는 소원에게 주소를 건네며 덧붙였다.“이곳은 전문 사법 기관으로
방민아는 온몸을 육경한의 품에 기댄 채, 힘없는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애처로워 보였고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저... 저는 괜찮아요. 소원 씨랑은 상관없어요.”이 말은 소원을 감싸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갈등을 피하려는 방민아의 태도를 부각시켰다.억울함을 감내하는 부잣집 딸, 이 얼마나 보기 좋은 이미지인가.방민아의 말에 육경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원을 향했다.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민아 씨한테 사과해.”자신이 본 상황이 전부였기에 그는 방민아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이 순간, 육경한은 예전의 그 차갑고 냉정한 남자로 되돌아갔다.소원이 자신의 뜻을 계속 거스르자 육경한은 이번에 확실히 그녀에게 교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소원을 달래거나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원하는 건 소원이 두려워하고 겁을 먹으며 예전처럼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소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첫째, 난 민아 씨를 밀지 않았어. 둘째, 내가 민아 씨를 죽이겠다고 한 건 민아 씨가 유진이에게 악의를 품었기 때문이야. 육경한, 만약 민아 씨가 유진이를 해치는 걸 묵인한다면 너도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소원의 말에 방민아는 입을 가리고 크게 놀란 척하며 말했다.“소원 씨, 왜 이러세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한 적 없어요. 그냥 소원 씨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물은 뺨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저는 단지 엄마로서 소원 씨가 안쓰러워서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소원 씨, 제발 사실을 왜곡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이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육경한에게 말했다.“경한 씨, 저희 집안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저는 절대로 아이에게 나쁜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저
방민아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소원 씨, 방금 법정에서 경한 씨가 아이를 이용해 소원 씨를 다시 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하셨죠? 제 생각엔 그건 오해인 것 같아요.”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경한 씨랑 약혼한 지 몇 달이 됐는데 그동안 저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잘 지내왔어요. 게다가 결혼 날짜도 정해졌고요. 그래서 저는 경한 씨를 믿어요.”소원은 이 말을 듣고 방민아가 의도적으로 자신과 육경한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민아 씨가 육경한을 믿는 건 민아 씨 일이고 굳이 저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소원이 단호히 대답했다.“민아 씨는 민아 씨가 믿는 걸 믿으시면 되고 저도 제가 믿는 걸 믿을 겁니다.”방민아는 망신을 당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고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한 씨는 항상 말을 간결하게 하는 사람이라 어쩌면 소원 씨가 그 뜻을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어요. 경한 씨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사실 소원은 방민아와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소원은 방민아에게 짧고도 간단한 대답을 해줬다.그러자 얼굴에 살짝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방민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더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소원의 변호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방민아는 곧 표정을 바꾸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소원 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이 잘 돌볼 테니까.”이 말에 소원의 얼굴이 굳어졌다.잘 돌본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었다.방민아는 유진이를 빌미로 소원을 위협하려는 것이 분명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소원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유진이를 건드리면 그쪽도 후회하게 될 겁니다.”그러나 방민아는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소원 씨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그녀는 육연주처럼 무모
소원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아이를 어머니 곁에서 빼앗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육경한은 단 한 번의 말로 다시 한번 그녀를 깊은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은 마치 자신을 가로막는 커다란 그물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주석훈은 소원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넸다. “소원 씨,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소원 씨 말대로라면 육경한 씨가 약을 복용해 온 건 확실한 사실일 겁니다. 이번엔 분명 무슨 술수를 쓴 거겠죠. 기운 내세요. 함께 노력하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변호사는 냉철했고 고작 몇 마디 말로 소원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그래, 육경한이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리 없어. 이번 결과에는 분명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주석훈은 법원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 육경한이 감정을 받은 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로 했다.그리고 소원에게 먼저 차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그렇게 소원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입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그만 한 사람과 부딪혔다.코를 세게 부딪쳐 아팠지만 그녀는 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괜찮습니다.”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소원은 멈칫했다.얼굴을 들어 확인하니 역시나 서현재였다.원래도 아팠던 코가 더 시큰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소원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이 터질까 봐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미안해요.”그리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잠시만요.”서현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소원은 그의 부름에 걸음을 뚝 멈췄고 서현재는 그녀의 손을 가리킨 후 다정하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싸매요.”여전히 따뜻하고 친절한 서현재의 모습에 소원은 더 가슴이 아려왔다.하여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괜찮습니다. 고마워요.”이내 소원이 다시 떠나려 했지만 서현재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그러고 나서 단숨에 그녀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감싸며 응급처치를 해줬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상대 변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원고 측이 제출한 약물 분석 보고서는 애초에 저희 의뢰인이 복용한 약물이 아닙니다. 저희 의뢰인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합니다. 이는 최근 신체검사 결과와 저희가 법원에 신청한 정신 감정 결과 보고서입니다.”변호사는 한 단어씩 정확하고 또박또박하게 읽어나갔다.“이 보고서는 저희 의뢰인이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음을 충분히 증명합니다.”소원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나보다 한발 앞서서 법원에 감정을 신청했다고?’그 말은 처음부터 소원이 육경한의 정신 질환 약을 가져다 증거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녀가 철저히 준비했던 모든 계획이 사실은 모두 육경한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이 사실을 알아차린 소원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주석훈도 의아했다.‘분명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온 거지?’법원의 감정 결과는 신뢰도가 무려 99.99%에 달한다. 게다가 상대가 먼저 감정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자신들의 패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상대 변호사는 계속해서 반박을 이어갔다.“이 모든 것이 원고 측의 억측일 뿐입니다. 게다가 원고 측은 수년에 걸쳐 국내외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원고의 신체적, 심리적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음을 증명합니다.”변호사는 이렇게 말하며 소원의 해외 진료 기록과 국내 진료 기록을 제출했다.비교해 보면 오히려 소원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이후의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결과는 명백했고 예상대로 소원은 처참히 패배했다.육경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마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만 말했을 뿐인데도 손쉽게 그녀를 이겼다.“아닙니다.”소원은 목이 메어 힘겹게 입을 뗐다.“그렇지 않아요. 저 사람은 악마예요. 미쳤다고요. 저를 협박해서 아이를 가지게 했고 지금도 저를 협박해서 다시 그 더러운 관계를 이어가려고
증거 제출 단계에 도달했다.주석훈은 먼저 한 건의 동영상 증거를 제출했는데 그것은 과거 서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영상 스캔들 사건의 영상이었다.그 영상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이는 육경한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영상은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원의 손에는 여전히 원본이 남아 있었다. 육경한의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소원이 이번 재판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가 분명해졌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속에 서현재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는 영상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화면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단단히 혼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반응에 스스로도 놀랐다.평소 서현재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내가 왜 이렇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거지?’영상이 끝난 후,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존경하는 재판장님, 방금 보신 영상은 제 의뢰인과 피고가 등장하는 영상입니다. 피고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수단으로 제 의뢰인을 협박하여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제 의뢰인이 어쩔 수 없이 요청했던 일이었지만 과정 전반에서 피고의 일방적인 폭력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저희는 피고가 정신과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주석훈은 한 보고서를 꺼내 들며 계속 말했다.“이것은 피고가 복용한 약물의 분석 보고서입니다.” 증거가 제출된 후, 판사는 이를 자세히 검토하고 나서 육경한에게 물었다.“원고 측 주장에 동의하십니까?”“동의하지 않습니다.”육경한은 망설임 없이 재판장의 말에 반박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어깨를 움츠렸고 옆에 있던 주석훈도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느낄
게다가 만남이 잦아지면서 주석훈은 성격이 올곧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다워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접 느끼게 되었다.아니나 다를까 주석훈이 차갑게 경고했다.“제 의뢰인에게 소송을 거는 건 되지만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공공장소에서 제 의뢰인을 모욕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협박까지 하는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어요. 영상으로 남겼으니 우리도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습니다.”“...”육연주가 할 말을 잃자 주석훈이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제 의뢰인은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준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는 건 앞서 만났을 때 이미 제 의뢰인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다는 걸 증명하죠. 합법적인 방법으로 CCTV 영상까지 입수하면 오늘 사건의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어요. 그리고 아가씨가 만들어낸 얘기에 제 의뢰인이 심리적인 타격을 입었으니 제 의뢰인의 명예권을 침범한 거나 다름없어요. 민사 소송은 제기해도 되는 부분이라 끝까지 쫓아가 볼 생각입니다.”“닥쳐요.”육연주는 세도 너무 센 변호사의 말발에 약이 잔뜩 올랐다. 하필 육연주가 못 알아듣는 말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참에 변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 이참에 알게 되었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저 여자가 먼저 나 욕했어요.”육연주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영상까지 확보했는걸요.”주석훈이 말했다.“당신 정말...”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말로 벌어먹는 변호사에게 말로 덤볐으니 승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얼른 서현재를 옆으로 끌어당겼다.“현재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 여자 친구 괴롭히는 거 보고만 있을 거예요...”서현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석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육연주는 오만해도 너무 오만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육연주를 사랑했다고 서현재에게 말해줬지만 서현재는 자기가 이렇게 볼품없는 여자를 좋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육연주는 화가 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현재 오빠, 나
법원 입구라 원래도 시비가 많이 갈리는 곳이었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내연 관계로 싸우는 경우도 파다했기에 딱히 놀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소원 씨,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일단 무릎 꿇고 싹싹 빌겠어요. 삼촌도 사실 그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소원 씨처럼 교양 없는...”육연주는 말하면 말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소원이 손을 들어 육연주의 뺨을 후려갈겼다.철썩.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육연주는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한참 반응하던 육연주가 그제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봤다.“미... 미쳤어요?”육연주는 소원이 싸대기를 날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빈약한 소원은 자기를 보호할 힘이 없어 남자에게 빌붙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소원은 예전부터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은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예전대로 육경한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소원은 육경한이 한 짓이 틀렸다고 증명하는 걸 포기한 적이 없었다.“육연주 씨, 이 따귀는 내가 맞은 걸 그대로 돌려주는 거예요.”소원이 말했다.“그리고 내 아이는 잡것이 아니에요. 나와 육경한 사이에 일어난 일은 삼촌이 직접 들려준 얘기를 들은 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뭐 육연주 씨가 지적한다고 해서 듣지는 않을 테지만요. 하지만 이 따귀는...”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내 원칙이라.”소원은 늘 다른 사람이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연주처럼 어이없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대해주는 게 답이었다. 소원은 이제 홀몸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강해져야 했고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그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육연주는 소원이 한 말에 놀랐는지 벙어리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옆에 있던 서현재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