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는 오래전부터 그 반지를 가지고 싶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그런데 그 반지를 윤혜인 그 나쁜 계집애에게 줬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세희가 이준혁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고 왠지 모르게 이런 스킨십에 거부감이 든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었다.그의 행동에 임세희가 흠칫 놀랐다.이준혁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차가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겁을 먹은 임세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혜인이한테 내가 너에게 반지를 사줬다고 얘기했어?”이준혁의 질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임세희는 당황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난 그냥 우리가 반지 샀다고만 했는데… 다음 달 우리 이모 생신에 선물로 드릴거라고 했잖아. 설마 혜인 씨가 뭘 오해한 거야?”“세희야, 난 누가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는 걸 제일 싫어해. 내가 나중에 네가 원하는 쥬얼리는 뭐든 사준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이준혁이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며 쌀쌀하게 말하자 임세희는 안절부절못했다.‘준혁 오빠가 뭘 눈치챈 건가? 내가 말 몇 마디로 윤혜인 그 여자를 자극한 게 뭐 어때서?’예전부터 임세희를 애지중지 여긴 이준혁은 단 한번도 그녀를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윤혜인 그 여자 때문에 계속 그녀에게 따져 묻고 있다니! 역시 윤혜인 그 여자를 철저하게 없애야 한다!임세희는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임씨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이 나서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카톡 대화 내용을 보여주며 말했다.“준혁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못 믿겠으면 오빠가 직접 봐!”카톡 대화 내용으로 보면 임세희는 며칠 전부터 그녀의 이모에게 반지 사진을 보내주며 좋아하는 디자인을 물었었다.카톡 내용을 확인한 이준혁은 싸늘하게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아니면 다행이고.”“준혁 오빠, 어떻게 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내일이면 오빠 이혼할 텐데 내가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잖아?”말을 하던 임세
다음날.아침 일찍 일어난 윤혜인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법원으로 출발했다. 오전 9시 반으로 예약했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그녀는 버스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어제 쇼핑몰에서 나온 뒤, 속이 안 좋아진 윤혜인은 소원과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고 물건을 정리하다가 그제야 쇼핑몰에서 샀던 아이의 옷이 없어졌다는 걸 발견했다.쇼핑몰 분실 센터에 전화를 해봤지만 직원은 그런 분실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윤혜인은 누군가가 주워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버스가 법원에 도착하자 윤혜인이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도착했어요.]이전의 문자는 임세희가 돌아오기 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보냈던 문자였다.[여보, 언제 돌아와요?]그날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윤혜인은 문자로 이준혁에게 얘기를 하려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큰일은 얼굴을 보고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그 문자를 보낸 지 2주밖에 안 된 사이에 모든 게 달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자는 대부분 그녀가 보냈고 이준혁은 단답형의 답장만 보내왔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윤혜인은 카톡 문자 기록을 지우며 다시는 멍청하게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법원으로 걸어가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도둑을 잡아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소리와 동시에 갑자기 튀어나온 한 남자가 그녀를 강하게 밀쳤다.그 남자는 빠르게 그녀 옆으로 지나갔고 손에는 빨간색 가방을 든 채 도망가고 있었다. 윤혜인이 반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그 남자와 부딪쳐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뒤에서 그 남자를 쫓았지만 신고 있던 높은 힐 때문에 발을 삐끗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그 여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가방 안에 저희 집안 어르
윤혜인의 말에 가방을 확인한 빨간 원피스 여인은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그대로 있어. 아가씨, 너무 고마워. 힘든데 말하지 마.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야.”이내 윤혜인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했고 일련의 검사 끝에 팔에 살짝 스친 찰과상과 손바닥에 베인 상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상처를 봉합하는 내내 빨간 원피스 여인은 계속 윤혜인의 곁을 지켰고 윤혜인은 그 여인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겁이 나서 봉합 과정을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사바늘을 무서워했으며 작은 통증도 그녀가 느끼기엔 너무 아팠기에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윤혜인은 자신이 마취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마취없이 봉합을 강행했다.바늘이 그녀의 피부를 뚫는 순간, 극심한 고통에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고 곁에서 안쓰럽게 쳐다보던 빨간 원피스 여인은 차라리 그녀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었다.봉합이 끝나고 의사가 나간 뒤, 한참 숨을 고르던 윤혜인은 그제야 이혼 수속이 생각났다.‘설마 준혁 씨가 아직도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윤혜인은 손이 불편한 탓에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핸드폰 전원이 꺼져버렸다.빨간 원피스 여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주워 윤혜인에게 건네며 다급하게 말했다.“아가야,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돼.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 아줌마한테 얘기해.”조금 전에 구급차 안에서 윤혜인과 여인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빨간 원피스 여인의 이름은 문현미였다.“아주머니, 혹시 아주머니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당연하지, 전화번호 불러봐.”윤혜인이 전화번호를 부르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문현미의 손이 흠칫했고 고개를 들며 윤혜인에게 물었다.“이 번호 주인은 너와 어떤 관계야?”“제 남편이에요.”윤혜인의 대답에 문현미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죄송한데 혹시 저 대신
“혜인아.”이준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오늘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인 경험을 처음 하게 된 윤혜인은 이준혁이 이름을 불러주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서 모든 걸 뒤로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마터면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다시는 이준혁을 못 보게 될 뻔했다. 이준혁이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뱃속의 아이는 그의 핏줄인데 윤혜인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다시 생각해 보니 뱃속의 아이도 이준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권리가 있다!“준혁 씨…”윤혜인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병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고 임세희가 다급하게 들어왔다.“혜인 씨, 몸은 좀 어때요?”임세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저랑 준혁 오빠가 법원으로 가려고 했다가 혜인 씨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은 단 일초만에 차갑게 식었고 반짝이던 눈빛마저 빛을 잃었다.‘그래,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우린 곧 이혼할 사이인데… 왜 그런 허튼 환상에 빠졌을까? 조금 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어.’“넌 왜 들어왔어?”이준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고 눈빛마저 다소 차가웠다.“준혁 오빠, 밖에 너무 추워. 내가 오늘 좀 얇게 입어서 도무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임세희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윤혜인은 그제야 그녀가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상대방은 이미 혼인신고를 위해 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윤혜인은 눈치도 없이 혼자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혜인 씨,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임세희가 윤혜인에게 다가가며 걱정하는 척 가식을 떨었지만 눈빛만큼은 분노에 들끓었다.아침 일찍부터 예쁘게 치장한 임세희는 2주 전에 맞춤 제작한 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고 오늘 예쁜 모습으로 이준혁과 혼인신고를 하려고 최
임세희는 기세 등등한 여자를 상대로 당연히 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궁상맞은 윤혜인이 대단한 인물과 알고 지낼 리가 없을 테니까.임세희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만하게 물었다.“아주머니는 혜인 씨와 무슨 사이죠?”“나?”코웃음을 치던 문현미가 고개를 돌려 아니꼬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난 혜인이 시어머니야!”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문현미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임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이 늙은 여자가 왜 여기 있지?’문현미가 임세희를 날카롭게 째려보자 깜짝 놀란 임세희가 얼른 이준혁 뒤로 몸을 숨겼고 이준혁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물었다.“엄마, 왜 갑자기 귀국하셨어요?”“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흥미진진한 장면도 보지 못했겠지! 와이프가 다쳤는데 위로 한마디도 없이 거기서 애인이랑 애정행각 나누기 바쁘다니. 내 배에서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나온 거야? 남의 가슴에 칼이나 꽂고 말이야.”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아들을 사정없이 나무랐다. 애인이라고 칭하는 문현미의 말에 임세희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저 늙은이가 예전부터 그녀를 싫어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다니.임세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저 임세희예요. 저희 아빠는 임요한인데 혹시 저를 잊으신 건가요?”“세희? 네가 임씨 집안 딸이야?”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현미가 물었다. 임요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문현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고 그 모습에 임세희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네, 제가 어릴 때…”하지만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현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기억으론 임씨 집안은 학자 가문으로 교양이 넘치고 가풍이 올발랐던 거 같은데… 그런 분들이 키워낸 딸도 당연히 훌륭하겠지. 염치도 없이 유부남 몸에 그렇게 찰싹 달라붙는게 아닌!”문현미의 한마디에 임세희 얼굴의 미소가 그대로 굳
전까지는 허약한 척 연기한 거였지만 지금의 임세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그녀는 막말을 하는 저 늙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울에서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명문 가문 규수인데 오늘 계속 저 늙은 여자에게 애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그뿐만 아니라 문현미는 분명히 임세희를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임세희는 더욱 짜증이 났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이준혁에게 살짝 기대며 허약한 목소리로 울먹였다.“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전…”“세희 양,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앞으로도 똑똑히 기억해둬. 가정이 있는 남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적인 사회 예의라는 걸!”말을 하던 문현미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혁의 팔을 잡고 있던 임세희의 손을 째려보았고 깜짝 놀란 임세희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눈치 빠른 이준혁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세희가 많이 아프니 그런 말투로 얘기하지 마세요. 세희가 놀래요.”이준혁은 임세희를 등 뒤로 보호한 채 든든한 장벽 마냥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윤혜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윤혜인은 자신이 이제 충분히 적응됐다고 여겼는데 저런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여전히 너무 아팠다.그녀는 이미 저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이준혁을 놓아줬는데 왜 이준혁은 굳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저토록 감싸는 걸까?팍!문현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더니 이준혁을 노려보았다.“저 여자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넌 병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네 와이프를 조금이라도 걱정하긴 했어? 혜인이가 네 할아버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도로 가져오기 위해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알기나 해? 도둑놈이 휘두르는 칼에 찔리고 마취도 없
문현미는 아무 말도 못하는 윤혜인을 보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네가 내 며늘아기라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야. 이남주 그 계집애는 맨날 여기저리 돌아다니느라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거든. 난 내 며느리가 너처럼 단아하고 착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에서까지 바랐어. 그런데 하늘이 이렇게 내 소원을 들어줄 줄은 몰랐네.”문현미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윤혜인도 그녀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머님.”“아이고, 그래, 우리 착한 며느리.”환하게 웃던 문현미가 손목에 끼고 있던 옥팔찌를 빼더니 윤혜인에게 건넸다.“내가 이 옥팔찌를 40년 동안 차고 있었어. 이젠 너에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아… 아니에요! 이 선물은 너무 귀중한 거라서 전 받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는…”‘이준혁과 곧 이혼할 사이입니다.’그녀는 남은 말을 입 밖에 꺼내려고 하다가 괜히 문현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꼭 잡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손으로 칼을 막았을 때 난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어. 네가 얼마나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저렇게 강인한 눈빛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난 그 순간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내 마음을 거절하지 말고 엄마가 앞으로 널 사랑해줄 수 있게 해줘.”문현미의 말에 꽁꽁 얼어붙었던 윤혜인의 마음이 따듯하게 녹아내렸다. 아빠 엄마가 없는 윤혜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이 든 모습을 보였으며 작은 몸으로 연세가 높은 외할머니를 지켰다.그러다가 나중에 이준혁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이 소중한 인연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느라 사랑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보호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이렇게 따듯한 거였구나…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울먹이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어머님.”이때, 병실 문이 열렸고 이준혁이 걸어 들어왔다.그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윤혜인이 놀라
“아까는 조금 아팠는데 이제는 별로 안 아파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했지만 사실 조금의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마취없이 봉합한 상처는 조금이 아니라 눈물이 날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물론 이준혁도 조금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걸 제일 무서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잠자리에서 첫경험을 할 때도 그녀가 너무 아파해서 꽤 힘들었었다.그래서 이준혁은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뤘다.그랬던 지금의 윤혜인은 창백한 얼굴에 머리까지 식은땀으로 젖어서 너무 병약해 보였고 이준혁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목이 메었다.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런 이준혁을 보면서 그가 이혼을 못해서 이렇게 화가 난 줄로 착각했다. 그녀가 지금 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데 이 상태로 본가로 가면 할아버지가 걱정할 것이 뻔하기에 일단 손이 좀 나으면 붕대를 풀고 본가에 가서 문현미에게 사실대로 설명할 생각이었다.“걱정하지 마요. 제 손이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여도 빨리 나을 거예요. 손에 감긴 붕대만 풀면 바로 어머님에게 설명할 테니 너무…”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고 턱에 그녀의 머리를 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조금만 이러고 있자.”윤혜인은 넋이 나가버렸다. 이준혁이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이내 자신을 비웃었다.그가 임세희를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을 그렇게 여러 번 목격하고도 어떻게 이런 착각을 계속 하는 걸까? 만약 그때 당시 임세희가 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모든 게 우연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윤혜인은 우연히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우연히 이준혁과 함께 하게 되었다.반려동물을 키워도 2년이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윤혜인은 말까지 통하는 사람이니 이준혁도
육연주는 다짜고짜 소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탁자 위로 내리눌렀다.힘껏 눌러대며 외쳤다.“오늘 반드시 내가 그날 느낀 굴욕과 분노를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하지만 소원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방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우리가 한 대로 이행해주세요.”방민아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될 일을 피하려고 애써 돌려서 말했다.소원은 방민아가 무슨 꾀를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렇지 않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육연주는 샴페인과 맥주를 들고 소원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술 좋아한다며?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 잘 마셔 봐!”알코올이 따갑게 소원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소원은 눈을 꼭 감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육연주는 더욱 흥분하며 소원의 뺨을 두 차례나 세게 때렸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술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까지 했다.그 순간, 방민아가 육연주의 손목을 꽉 잡아 멈췄다.“연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겉으로 티 나는 상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그들의 관심은 소원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벌가 자제 이미지가 더러워질까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육연주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굴러갔다.방민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목숨을 앗아가선 안 되고 모욕하고 짓밟는 건 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육연주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소원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날 결혼식에서 소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는지, 모든 사람들에
“네, 괜찮아질 거예요...”잠시 충전한 덕에 상태가 많이 나아진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언니, 이제 가서 일 봐요. 저도 제 일하러 갈게요.”“응.”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소원은 방민아가 말한 그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민아가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옆에 육연주가 함께 앉아 있었다.소원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물었다.“방민아 씨, 제가 뭘 하면 되죠?”방민아는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서 그쪽을 부른 게 아니에요. 연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소원은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육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소원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며칠 못 봤더니 눈이 멀었나 봐? 나 못 봤어?”소원의 얼굴은 한쪽으로 젖혀졌고 귀가 웅웅거릴 정도로 아팠다.이 뺨 한 대를 때리기 위해 육연주는 며칠 동안이나 참아왔던 것이다.지난번 그녀가 결혼식에 난동을 부렸을 때 이미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당시 육경한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소원은 이미 서씨 가문 사람들에게 반쯤 죽도록 맞았을 것이다.그런데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소문에 따르면 그는 소원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은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육연주와 같은 재벌 2세는 그들에게 단지 걸어 다니는 금고와 같았다.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육경한이 앞으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북쪽 사람들은 원한을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결혼식 후, 육연주는 소원을 제대로 혼내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소원이 육경한의 사람들에게 데려가져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그녀는 부모도 두렵지 않고 세상 무엇도 겁내지 않았지만 육경한만큼은 무서웠다.육경한은 냉혹하게 행동할 때 진정으로 냉혹했으며 혈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다행히 방민아가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친 것도 없었고요.”그러나 사실 그녀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육경한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녀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각한 일을 겪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숙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작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영숙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 왜 온 건지 말해봐.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봐도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같은데?”“오늘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제가 아는 단골 손님이 요청해서요.”소원이 답했다.“단골 손님?”영숙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누군데?”소원은 이곳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녀의 손님은 대부분 영숙이 직접 배정해준 사람들이었다.때문에 소원이 말하는 ‘단골 손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영숙은 알 수 없었다.영숙의 걱정은 진심이었다.소원은 왜 영숙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숙이 굳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하지만 소원은 이번 일의 진실을 영숙에게 말할 수 없었다.방민아가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밖에 흘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이를 어기면 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었다.“괜찮아요, 언니. 정말 아는 손님이라니까요.”소원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그러자 영숙은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며 비웃듯 말했다.“넌 이제 네 멋대로 하는구나. 내가 상관할 수 없겠네.”소원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언니가 저를 이 일로 이끌어주셨잖아요. 하루라도 스승이면 영원히 스승인데 제가 언제 영숙 언니 말 안 들은 적 있나요?”이 말을 듣고 영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이렇게 말재간이 좋은 애인 줄 몰랐네.”“스승이니 뭐니 하지 마. 내 밑에 평생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조금 안정되면 얼른 나가.”사실 영숙은 방민아와 관련된 일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래서 그는 방민아가 나중에 유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유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방민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그녀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 믿었다.“필요 없어. 임 교수님에게 빨리 수술 일정 잡아달라고 해줘.”육경한이 결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임수에 휘말려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는 다른 사람이 낳지 않은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소종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육경한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그의 마음이 완전히 굳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육경한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다만 소종은 이런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소종조차도 대를 이을 아이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별을 떠나 건강한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었다.어쩌면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육경한의 방식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그럼에도 소종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전화를 걸기 위해 소종이 막 나가려다가 육경한이 불러 세웠다.“잠깐.”“무슨 일이세요?”육경한은 말했다.“이 소식을 민아 씨에게 알려.”소종은 잠시 멍해졌다.‘정관 수술 한다는 걸 예비 신부에게 알리라고? 이건 결혼하기 전에 도망가라고 부추기는 일 아닌가?’그러나 육경한의 목적은 방민아를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이전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 말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방민아더러 함께하자고 했다.그러자 방민아는 주저 없이 동의했다.육경한이 방민아에게 난관 수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건 이것이 신체에 손상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결혼을 약속한 상대라면 충분한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스스로 수술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이번에 소종을 통해 이 소식을 흘린 건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표정조차 변화가 없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소종이 입을 열었다.“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간신히 밝아졌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육경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소종의 말을 묵인하는 듯 말이다.이제 됐다 싶어 소종은 긴 숨을 내쉬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육경한이 이번에 얻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친 그가 이제는 소원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지금과 같이 냉정한 사람은 마음이 다치면 자신을 철저히 닫아버린다.육경한의 모습은 그야말로 심장이 죽은듯한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남자는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이제 마음도 몸도 여기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붙잡는 건 양쪽 모두를 아프게 할 뿐이었다.소원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서현재 역시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육경한이 많이 참은 셈이었다.육경한이 물어보지 않았기에 소종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대신 육경한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여러 번 말을 해봤지만 소원은 전혀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진정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었다.소종은 소원이 방민아가 유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유진의 상태를 더 꼼꼼히 살피고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방민아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다만 소종은 방민아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잠시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다.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방민아 씨가 과연 유진이를 자신의 자식처럼 대할 수 있을까? 자기 아이를 갖게 되면 유진이에 대한 태도가 변하진 않을까?’소종이 이런저런 생
소원은 방민아와 이런 복잡한 말싸움을 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연기를 하듯 감정을 숨기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방민아 씨, 아주머니를 만나볼 수는 없나요?”“그건... 방금 경한 씨한테 전화했잖아요? 경한 씨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소원 씨.”방민아는 곤란하고 미안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사실 소원이 대문 앞에서 보인 모든 행동을 방민아는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소원이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한 모습을 보며 방민아는 확신했다.이제 자신이 육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고.방민아는 속으로 생각했다.‘다행히 연주의 말을 믿고 소원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 그냥 현명한 아내이자 자상한 엄마처럼 행동했더니 효과가 좋네. 경한 씨도 이제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어. 소원? 이제 별로 두려워할 존재도 아니지.’소원은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낮추어 물었다.“그럼... 유진이랑 통화라도 할 수 있을까요?”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방민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소원 씨, 그건 저도 힘들 것 같네요. 경한 씨가 소원 씨가 유진이와 접촉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거절당한 소원은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했다.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소원 씨, 제가 기회를 드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오늘 밤 일하러 가세요. 기분이 좋으면 유진이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죠.”이 말에 놀란 소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인가요?”“그럼요.”방민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경한 씨가 없을 땐 이 육씨 가문내 일이 다 제 손에 달려 있으니까요.”소원은 방민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육경한은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내부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좋아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유진이를 반드시 만나게 해줘야 해
소원은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지만 두 명의 건장한 보안요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보안요원은 그녀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습니다. 저희는 월급 받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누구도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제발 좀 협조해 주세요.”소원은 필사적으로 외쳤다.“제 아이가 위험해요! 경찰 부를 거예요, 경찰 부를 거라고요!”그러자 보안요원은 피식 비웃었다.“지금 농담하세요? 작은 도련님은 매일 베란다에서 뛰어놀 만큼 건강해 보이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혹시 망상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에요?”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안도했지만 마음속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보안요원은 이어서 말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경찰이 이런 걸 받아주지도 않을 겁니다. 신고해 보세요. 아마 처음에 잡혀갈 사람은 그쪽일 겁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도련님은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방민아 씨는 정말 좋은 새엄마예요. 얼마나 세심한지 매일 작은 도련님을 돌보러 오신다니까요.”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방민아는 결혼 전까지는 유진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라면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지금 아주머니를 건드린 것도 육경한의 반응을 떠보는 일환이라 확신했다.육경한이 아주머니의 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유진이의 위험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아니, 육경한이 아주머니를 걱정하더라도 방민아의 속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이 모든 것은 소원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사란 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의 가능성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갑자기 소원이 크게 외쳤다.“방민아 씨! 나와요! 방민아 씨, 당장 나와요!”보안요원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소원은 두 보안요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대문 앞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며 계속 외쳤다.“방민아 씨! 방민아 씨!”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소원은 일부러 유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혹여 유진이가 자극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유진이는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소원은 아이의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신중했다.소원은 입을 열어 크게 외쳤다.“백씨 아주머니! 백씨 아주머니, 계세요?”몇 번 부르지 않았는데 보안요원이 달려와 그녀를 막았다.“여기서 이렇게 소리치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주거 지역이에요. 계속 그러시면 강제로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보안요원의 말투는 점점 공손함을 잃어가고 있었다.상대가 까다로운 사람이든 아니든 겁낼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행동을 보니 그녀가 육 대표님과 친분이 깊을 리는 없어 보였다.만약 친분이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테고 육경한이 이미 문을 열어줬을 것이다.그러나 소원은 보안요원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말했다.“오늘은 반드시 아주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아주머니 이름 부르는 게 싫다면 백해란 아주머니가 여기 계신지만 확인해 주시면 돼요. 확인만 해 주면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보안요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런 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저택 안에 들어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렇게 계속 소리 지르시면 지금 당장 내보낼 겁니다.”보안요원의 태도는 한층 강경해졌고 소원은 이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아주머니와 연락이 끊겼어요. 걱정돼서 왔습니다. 오늘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하면 저는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쪽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렇게 하죠. 아주머니가 계신지 확인하고 그분이 저에게 전화만 주시면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어때요?”소원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타협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보안요원들은 상황을 재빨리 판단해야 했다.안으로 들어가 관리인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건 큰일이 아니었지만 이 여자를 억지로 끌어내렸다가 경찰에 신고라도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