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병실 안에서.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을 보며 조금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다.윤혜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변명했다.“배탈이 난 거 같아요.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니깐 신경쓰지 마요.”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윤혜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파요.”이준혁이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보니 넘어질 때 긁힌 상처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상처 치료 제대로 안 했어?”윤혜인은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기분이 우울했다.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채 화장실을 나서서 소파에 앉혔고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 가져왔다.다음 순간, 이준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상처를 소독했다.“피할 줄 몰라?”방구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밀쳐버린 사람이 바로 이준혁인데!이준혁은 알코올 면봉으로 윤혜인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독해 주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자연스럽고 별다른 뜻이 없는 행동이였지만, 윤혜인은 자꾸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윤혜인이 눈물을 찔끔 흘렸고 그녀는 작은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울고 싶었다.눈물이 떨어지려던때, 윤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참았고 이준혁에게 한마디만 물어보고 싶었다.그는 정말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걸까?하지만 이준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이때, 고개를 든 이준혁은 윤혜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를 발견했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명령하듯이 입을 열었다.“그만 깨물어.”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비스듬히 열린 베란다 문 사이로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와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 봐도 이준혁이 임세희를 달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베란다에서 시선을 거둔 채 손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히 상처가 난 건 손바닥인데 왜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이 더 아픈 걸까?그녀의 마음은 아마 평생 완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안방으로 돌아온 이준혁은 테이블에 놓인 키를 챙긴 뒤, 조금 전에 풀어헤친 넥타이를 다시 꼼꼼하게 맸다.이준혁은 차갑고 도도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한참 그녀를 쳐다보던 이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음식을 테이블에 놓고 갈 테니까 얼른 먹고 쉬어.”이준혁의 입술에는 두 사람의 키스 흔적이 남아있었다.“이준혁 씨, 가지 마세요…”이준혁이 돌아선 찰나, 윤혜인이 갑자기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성씨까지 붙여서 이준혁의 이름을 불렀다.윤혜인은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을까 봐 감히 이준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는 이준혁에게 임세희에게 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윤혜인은 이런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한 번쯤은 용기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보자고 설득했다. 딱 이번 한 번만 용기를 내서 가지 말라고 부탁해 보자고 결심했다.방안은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1초, 2초, 3초…그때,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혼을 빼놓을 정도로 계속 끊임없이 울렸다.“혜인아, 장난치지 마.”드디어 입을 연 이준혁은 그녀를 등진 채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뜯어냈고 그렇게 윤혜인의 마지막 기대로 산산조각이 났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고 이준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이때,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와 환자가 깨어났다고 전했고 김성훈이 장난을 거둔 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좀 달래 줘. 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고열이 겨우 내린 임세희는 침대에 힘겹게 기대고 있었고 의사는 그녀의 골수 이식에 거부 반응이 나타난 거라고 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고열이 발생하면 그녀의 몸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임세희는 이준혁의 손을 꽉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준혁 오빠, 나 어깨가 너무 아파, 여기저기 온몸이 다 아파. 나 이 몸으로 오래 못 버틸 거 같아. 나랑 빨리 결혼해 주면 안 돼?”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면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알았어.”이준혁의 대답에 임세희는 모든 서러움이 사르르 녹은 듯 설레는 표정으로 이준혁의 품에 기댔고 눈살을 찌푸리던 이준혁이 불편한 듯 몸이 굳은 채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그가 뒤로 피하려는 게 느껴지자 임세희가 이준혁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그녀는 몸을 배배 꼬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벨트를 풀려고 만지작거렸다.“준혁 오빠, 사실 나… 난 말이야…”애교 섞인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일찍 쉬어, 난 이만 갈게.”난감해진 임세희가 손을 거둔 채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준혁 오빠, 나랑 같이 있어주지 않을 거야?”“임씨 아주머니 계시잖아. 아주머니가 널 잘 돌봐 줄 거야.”“근데 내가 원하는 사람은 오빠라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임세희가 서러운 듯 언성을 높였지만 이준혁은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세희야, 나 아직 이혼 안 했어.”솔직히 이준혁은 목숨 걸고 그를 살린 임세희가 많이 아픈 지금, 모든 걸 제치고 그녀의 소원부터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게 맞았다.하지만 언젠가부터 모든것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고
”하지만 그날 준혁 오빠를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씨 아주머니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아가씨,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마세요. 준혁 도련님을 구한 사람은 아가씨일 수밖에 없어요. 반드시 기억하세요.”임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깊은 밤.병원에서 나온 이준혁은 김성훈을 찾으러 바에 갔다.룸에 들어선 이준혁은 아무 말도 없이 술잔을 들고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반쯤 풀어헤친 셔츠까지 더해져서 유난히 치명적이었다.“뭐야, 경한이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넌 왜 오자마자 술만 마셔.”말을 하던 김성훈이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술잔을 들며 말을 이어갔다.“자, 우리 경한이!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으니까 이제 꽃길만 걷게 될 거야.”김성한에게 언급된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 짧은 머리를 한 육경한의 이마에는 길게 뻗은 흉터가 있었다.그 흉터는 보기 거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흉터 덕분에 더 거칠고 카리스마 넘쳐 보였다.이준혁도 술잔을 들었고 세 사람은 그렇게 잔을 부딪친 뒤, 한 번에 마셔버렸다.“경한아, 너 이번에 완전 소문났어. 3년이야, 육씨 가문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때 당시 너를 괴롭히던 그 늙은이들은 지금 덜덜 떨고 있거든. 다들 주식 버리고 도망가기 바빠.”김성훈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육경한이 입에 담배를 문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도망 못 가.”육씨 가문에 빚진 만큼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이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면 김성훈은 상대방이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지만 육경한은 달랐다. 그는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그때 당시 육씨 가문이 파산하고 육경한의 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자 육경한의 어머니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이준혁은 김성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고 김성훈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잘 생각해. 나중에 나처럼 되지 말고. 그땐 후회해도 늦는 거야.”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뜨더니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이따가 취하면 어디로 데려다줄까?”김성훈의 물음에 이준혁이 술을 들이키면서 대답했다.“너네 집.”한편, 푹 쉬고 나니 평정심을 되찾은 윤혜인이 제 시간에 출근했다.이준혁의 마음이 확실한 만큼 윤혜인도 그에게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모습은 한 번으로 충분했고 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퇴폐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뱃속의 아이도 있고 할머니도 있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녀는 씩씩하게 잘 이겨내야 한다.월요일이라 회사의 모든 직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어진 업무를 다 처리한 윤혜인은 퇴근하기 30분 전에 이준혁의 생활 습관을 같은 조에서 일하고 있던 비서 송휘재에게 꼼꼼히 전달했다.조용히 듣고 있던 송휘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윤혜인이 얘기하고 있는 부분은 평소에 그녀가 처리하던 업무인데 왜 갑자기 그에게 얘기하는 거지? 그는 아직 실습 비서에 불과한데?송휘재가 윤혜인에게 물어보려던 그때, 대표 사무실로부터 전화가 왔고 이준혁이 윤혜인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윤혜인은 서랍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손에 들고는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대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마케팅 부서 실장이 이준혁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있었기에 윤혜인은 조용히 곁에 물러나 기다렸다.업무 보고를 끝낸 실장이 사무실을 나선 뒤, 이준혁이 고개를 들고 윤혜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윤혜인이 다가가자 이준혁이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지 잘 확인해 봐.”윤혜인이 받아보니 그 종이에는 ‘이혼 협의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윤혜인은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서류를 보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준혁은 곧 그
이준혁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윤혜인은 왜 이리 급급하게 그와 이혼하고 싶은 건가?이준혁은 눈앞에 서있는 윤혜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며칠 전까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나 이따가 하 대표랑 약속이 있어!”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이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 같아요. 하 대표님과의 약속은 내일 저녁입니다.”윤혜인은 심지어 스케줄표까지 꺼내 이준혁에게 보여주며 대꾸했고 이준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오늘이 맞아. 조금 전에 나한테 전화 왔어.”“알겠습니다.”“용건 끝났으면, 그만 나가.”기분이 착잡한 이준혁은 그녀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윤혜인은 그녀를 귀찮아 하는 듯한 이준혁의 표정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해졌다.이제 조금만 지나면 이준혁은 평생 그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자리에서 일어난 윤혜인이 조금 전에 챙겼던 봉투를 이준혁 앞에 올려 놓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윤혜인, 그때 당시 이 일자리를 달라고 졸랐던 사람은 바로 너야. 근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해? 직장이 장난 같아?”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고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나가.”그녀를 보기 싫다는 뜻이 명확했기에 윤혜인은 아무 말없이 조심스럽게 사무실을 나섰다.윤혜인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혼한 전처를 비서로 남기려고 하다니, 대체 이준혁은 무슨 생각인 걸까?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튿날부터 이준혁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뒤로 밀렸던 해외 자회사 시찰 업무가 갑자기 날짜를 앞당기게 되었고 출장이 4일이나 잡힌 탓에 이준혁은 금요일이 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다.며칠 동안 힘들게 버틴 윤혜인은 드디어 대표 사무실에 갈 기회가 생겼다. 사무실에 들어
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이혼 협의서에 사인하라고 한 건 분명 이준혁 아닌가?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밤 본가 저택에 식사 자리가 있으니까 잊지 말고.”이준혁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윤혜인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대표님.”그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은 아주 공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럼 다음주 월요일은 시간이 되시나요?”이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가던 길 가는 건데. 왜 굳이 멈춰 서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걸까!“네 마음대로 해.”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이준혁은 사무실 문을 쾅 닫았고 확실하게 약속을 잡은 윤혜인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해탈감이 들었다.그를 놔주기로 결심한 만큼 윤혜인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싶었고 이제 이혼만 하면 그녀는 더 이상 수시로 그를 마주할 필요가 없게 된다.1년, 2년, 3년 혹은 10년, 그게 언제든 윤혜인은 자신을 치유하면서 천천히 그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어느덧 저녁 6시가 되었고 운전 기사는 시간에 맞춰 윤혜인을 픽업한 뒤, 이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서울의 중심 지역에 위치한 저택은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인테리어 또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이 결혼 생활에서 윤혜인이 제일 아쉬운 게 바로 이준혁의 할아버지 이태수였다.이준혁의 할아버지는 보통 명문 가문과 다르게 오픈 마인드였으며 계급 관념도 없었기에 단순한 윤혜인을 매우 예뻐했다.그러다가 할아버지는 병에 걸리시게 되었고 이준혁은 할아버지에게 윤혜인과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그러자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기적처럼 좋아지더니 요 몇 년 사이에는 점점 더 건강해지기까지 했다.이제 이혼하면 할아버지를 보러 올 수 없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마음이 울적했다.거실로 들어서자 집사가 윤혜인에게 할아버지가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임신 때문인
두 아가씨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숙은 담배를 절반쯤 태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채워야 할 금액은 채우고 떠드는 거야?”두 아가씨는 영숙의 말에 입을 앙다물며 얌전하게 말했다.“이만 내려가 볼게요.”영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아가씨가 물러가고 영숙은 조세진이 있는 룸 앞으로 다가가 서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속이 탔는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데이고 말았다. 사실 영숙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듣던 영숙은 안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조세진에게 내동댕이쳐진 소원은 갈비가 부서진 것처럼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세진의 더러운 입술이 곧 소원에게 닿으려는데 소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애초에 왜 육경한에게 당했는지 잊은 거 아니죠?”조세진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말이야?”소원이 이 틈을 타서 한숨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간 거 육경한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조세진은 육경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욕마저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소원이 이렇게 말했다.“육경한이 조 대표님을 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보낸 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조 대표님을 내쫓는 것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한 거죠.”조세진은 그때 수영장에서 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다 네년 때문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일은 없었어.”조세진이 소원의 옷을 벗기며 계속 중얼거렸다.“이제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가 있잖아. 이제 더는 너를 도와줄 리 없으니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촤락.소원이 챙겨입었던 유니폼이 조세진에 의해 볼품없이 찢어지고 말았다. 소원은 얼른 손으로 찢어진 천 쪼가리를 움켜쥐고 조세진에게 따귀를 날렸다.조세진은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원의 머리
조세진은 소원의 턱을 꽉 잡더니 테이블에 내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젠장. 개가 뭔지 몰라? 내가 가르쳐줘?”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조세진이 언성을 높였다.“꺼져.”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숙에게 알려줬다.영숙이 이를 듣더니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불을 붙여줬다. 영숙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작 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러면 괴롭힘을 받아도 싸지.”순간 두 아가씨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영숙이 원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위험이 닥쳐도 직접 나서서 도와줬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줬다.선미가 제일 좋은 시범 케이스였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남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영숙이 그렇게 말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고 육 대표에게 들러붙었다가 육 대표에게 폭행을 당했을뿐더러 업소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영숙은 그 손실을 다 선미에게 돌렸고 선미도 미친 듯이 일해서 갚았지만 아직도 몇억은 더 갚아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스폰해줄 사람만 잘 만나도 금방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새 예쁜 아가씨도 많고 경쟁도 심해 선미처럼 얼굴을 뜯어고친 여자는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뒤로 영숙은 방 대표와 붙어먹었지만 방 대표는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여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선미가 그쪽으로 기술이 좋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방 대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소원의 배상을 대신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들 영숙의 말이라면 어명처럼 받들었다. 영숙은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눈치를 잘 살폈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미리 짚어주기도 했다.아가씨들은 영숙이 고개를
양옆에는 아가씨 한 명씩 서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먹는 방식이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소원은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늙은 남자는 소원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밀어내며 헤벌쭉 웃었다.“오랜만이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한 소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에 소원을 추행했던 조세진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보낸 사람이 조세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세진은 소원을 뼈저리게 미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역시 방민아는 아는 게 많았고 수단도 어마어마했다.“거기 서서 뭐 해? 오지 않고.”조세진이 재촉했다.소원이 앞으로 걸어가자 조세진은 소원이 앞에 단 명찰을 보고는 비웃었다.“아, 체리?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체리처럼 매혹적인 소원을 조세진은 진작에 노리고 있었다. 전에 소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방민아가 준 선물이 소원일 줄은 몰랐던 조세진은 쾌재를 부르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손가락으로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보고 똑같이 시중들면 돼.”소원은 역겨움을 꾹꾹 참아내며 거절했다.“같이 술 먹는 건 되는데요, 이렇게 먹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휙.조세진이 술잔을 뿌리자 소원이 피했지만 술이 그대로 소원의 얼굴을 적셨다.“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이야? 그 명찰 달았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시중을 들어야지.”조세진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얘들처럼 무릎 꿇으라고. 알아들어?”“아니요.”소원이 얼굴에 쏟아진 샴페인을 닦아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퍽.조세진이 소원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그 땅끝에 있는 마을에서 너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지금쯤 꿈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소원은 입에서 단내가 느껴졌지만 이 말을 듣자마자 매서운 눈
마음이 움직인 영숙이 이렇게 말했다.“그러면 네가 알아서 골라. 옷은 저쪽에 있어.”소원이 그쪽으로 걸어가 한참 찾았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억지로 셔츠에 짧은 치마를 고르긴 했지만 여전히 유혹하려는 의도가 뻔한 옷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매혹적이면서도 그렇게 살이 드러나지는 않은 옷이었다.영숙이 옆에서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싹수는 괜찮네.”같은 옷이지만 소원이 입으면 왠지 모르게 더 매혹적이었다. 영숙처럼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도 소원이 예쁘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비록 사장님들은 나이가 어린 아가씨를 좋아했지만 소원은 분위기가 아우라가 독보적이었다. 여우를 닮은 눈은 반달처럼 은은하면서도 깊었는데 한눈에 봐도 돈을 잘 벌어다 줄 상이었다.소원은 영숙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여기 그냥 술만 마셔주면 되는 데 맞죠?”영숙이 잔뜩 긴장한 소원을 보며 웃었다.“당연하지. 우리 여기 건전한 영업장이야. 사장님들과 얘기 나누면서 술 마셔주고 기분 달래주면 돼.”“네, 알겠어요.”소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말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신뢰 관계가 쌓이지 않은 터라 무슨 일이 터지면 소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영숙이 한마디 덧붙였다.“이제 예명도 지어야지. 전에 다니던 직원이 체리였는데 퇴사했어. 아니면 그냥 체리할래?”“네, 언니.”소원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제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었다. 이곳에 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소원도 알고 있었다.영숙은 그런 소원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소원을 찜한 사람은 그야말로 변태였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얌전하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영숙이 귀띔했다.“절대 사장님들 화나게 하지 마. 정말 화나면 나도 너 못 도와줘.”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언니.”영숙은 소원이 알았다고 하자 더는 아무 말도 하
소원이 멈칫하자 서현재가 설명했다.“소원 씨 지금 몸 상태로는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이 있더라도 조심해요.”서현재는 소원이 약속 때문에 온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숨기지 않았다.“약속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여기서 출근하고 있어요.”“...”서현재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은 대화가 끝난 줄로 알고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소원 씨.”서현재가 소원을 불러세우자 소원이 걸음을 멈췄다.“혹시 요즘 돈이 부족한가요?”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내 의지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고마워요.”소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소원은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바에는 철저히 잃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소원의 일에 끼지 않는 게 서현재의 발전에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지금처럼 기억을 쭉 잃는 것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이다. 이게 소원이 서현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일지도 모른다.서현재는 멀어져가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에 빠졌다. 왜 여기로 출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원은 이런 곳에서 출근할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원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서현재도 과도하게 참여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소원의 삐쩍 마른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소원은 이제 종이 인형처럼 말라 있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모습이 겨울에 피어난 매화와도 같았다. 그 누가 뭐라 하든 절대 꺾이지 않는 그런 매화꽃 말이다.덤덤하던 서현재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 여자를 마주칠 때마다 텅 빈 가슴이 조금씩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느낌인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떨치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았다.서현재는 소원의 뒷모습이 금빛으로 빛나는 대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직원이 소원에게 누구를 찾아왔냐며 물었다. 소원이 이름을
서현재는 물건에 부딪쳤을 때만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육연주는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내키지 않는지 가방을 주워 들고는 핸드폰을 꺼내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할아버지, 현재가 저 괴롭혀요. 저랑 파혼하겠다고 막 그러고 있어요.”육연주가 울먹거리며 일러바쳤다.서진태가 한참 말려서야 육연주는 눈물을 그쳤다.“알겠어요. 할아버지. 저도 그냥 갑자기 울분이 터져서 그래요. 현재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결혼할 텐데요.”서진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우리 연주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걱정하지 마. 정해놓은 결혼식 날짜는 변하지 않아. 네가 우리 서씨 가문 며느리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서진태가 육연주를 열심히 달래는 건 육경한과의 거래뿐만이 아니라 육씨 가문과 서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막대한 이익이 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에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서현재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서현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버렸다.코너를 돌자 핸드백을 든 소원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현재는 신분도 그렇고 육연주와 약혼한 사이라 파혼하기 전까지는 다른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가버리려 했지만 소원이 기둥에 기댄 채 막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앞에 차를 세웠다.서현재가 차창을 내리고 소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원 씨, 어디 가요?”소원은 여기서 서현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제 들어가려고요.”소원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바래다줄게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미 차 불렀어요.”서현재는 지도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지금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혀요. 차를 불렀다 해도 그렇게
조금 전 육연주가 뱉은 말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한 것일 뿐이었다.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서현재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가 정말로 파혼이라도 언급할까 봐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러나 서현재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제 신분이 연주 씨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억지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 연주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현재 씨!”육연주는 그의 말이 진심일 줄은 몰랐다.‘어떻게 나더러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할 수 있어?!’분노가 차오르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 육연주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아, 가슴이 아파요...”이 말은 스스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이미 결혼 이야기가 대외로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 상대를 바꾸는 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정말로 서현재와 결혼하고 싶었다.육연주는 서현재를 좋아했다.아니,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서현재가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다.‘현재 씨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하고 한 발만 더 다가왔더라면...’하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웠다.그리고 서현재는 육연주의 연기를 더 이상 참아주지 않았다.“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말은 단호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육연주는 충격을 받았다.‘날 달래기는커녕 파혼하자고?!’“현재 씨, 현재 씨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날 정말 사랑했잖아요...”육연주는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그녀와 서현재 사이에는 ‘예전’이라 불릴 만한 진짜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모두 육연주와 그의 외삼촌 육경한, 그리고 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였을 뿐이지.당시 육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육경한에게 하소연을 했고 육경한은 그녀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믿지 않았던 그녀는 몇 주 뒤, 서현재의 할아버지인 서진태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의 외삼촌과 관계가 있는 그 비밀스러운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신경 쓰고 있다 하기엔 과장일 수도 있었지만 서현재는 늘 차가운 성격이었기에 그 여자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육연주의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두 사람의 눈빛 교환 하나하나가 육연주에게 불길한 예감을 들게 했다.왜냐하면 서현재는 그녀에게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사실 육연주는 서현재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생각에 점점 더 불안해지던 육연주는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현재 씨, 지금 아이 가지면 결혼식 때는 티도 안 날 거예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아닐까요?”서현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않았다.육연주의 스킨십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고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가끔 서현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와 육연주가 ‘연인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사실이라면 육연주의 스킨십에 이토록 거부감이 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옷깃조차 스치지 않길 바라는 자신을 보며 의문이 들곤 했다.아이를 갖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여 서현재는 단순히 무심하게 대답했다.“다음에 얘기해요.”하지만 육연주는 그 말이 회피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희망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 제가 집에 갈까요? 우리...”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서현재는 발걸음을 떼며 육연주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뿌리치고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곤란해요.”이 정도 표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거절이었다.서진태는 항상 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는 건 안 된다. 연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항상 체면을 세워줘야 해.”그러나 육연주와의 관계는 서현재에게 끝없는 인내심을 요구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특별 대
소원은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퇴원을 고집했다.결국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고 소원은 퇴원 수속을 마친 뒤 계좌를 확인하다가 거기에 꽤 많은 돈이 입금된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소종이 대신 납부한 병원비일 것이다.하여 소원은 미우 그룹의 회사 계좌를 찾아 병원비를 곧바로 송금했다.그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경한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그와 조금의 연관조차 맺고 싶지 않았고 오직 유진이의 양육권을 되찾을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아침에 알아본 바로는 병원에 안지철의 진료 기록이 없었고 근처 다른 병원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안지철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마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컸다.유시연 쪽으로 연락이 닿을 가능성도 없었다.이미 발각된 이상, 소종은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테니 말이다.소원은 소종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 손을 대면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반년 동안 추적해왔던 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절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소원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 했다.2층 복도 멀리서, 서현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그는 아래층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소원의 모습을 보았다.희미한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또 그 여자네?’왠지 모르게 익숙한 감정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소원의 모습은 생기라고는 없는 듯했다.생각에 잠긴 채 그녀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걸어가고 있었다.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이 저릿한 서현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자꾸 통제되지가 않아...’“현재 씨!”밝은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서현재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육연주가 다가오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그러자 서현재는 소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