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진선호는 여름 바람막이 재킷을 들고 오더니 신은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의 옷이라 넓고 커서 옷자락이 직접 그녀의 엉덩이까지 덮었다.신은지는 옷깃을 여미었다.“유성이와 둘이 우리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창고 안에 있을 때는 그곳이 낡고 오래전에 버려진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정말 외진 곳이었다. 인적이 없이 황량한 곳이라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도 절대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진선호는 턱으로 응급실에 누워 있는 박태준을 가리켰다.“깨어나면 직접 물어봐요. 며칠 입원해야 할 것 같은데 이따 의사한테 1인실이 있는지 물어볼게요.”“...”신은지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어떤 병실을 쓸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다니.그러나 그녀는 지금 자세히 물을 정신이 없다. 박태준이 들어간 지 한참 됐는데, 상황이 어떤지, 머리는 계속 아픈지 모르겠다.문이 열리고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환자분은 경미한 내출혈에 외상도 좀 있어 며칠 입원해 관찰해야 합니다. 말씀하신 두통은 환자분이 도착했을 때 이미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깨어나신 후에 다시 검사해 봐야겠지만 현재의 검사 결과로는 큰 문제 없어 보입니다. 입원 수속을 하십시오.”진선호가 말했다.“제가 갈게요. 여기서 지키고 있어요.”입원 절차를 밟은 후 박태준은 병실로 옮겨졌다. 진선호는 정말 1인실로 잡았다.박태준이 별문제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신은지는 담소를 나눌 기분이 생겼다.“언제부터 태준과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어요?”어느새 아침이 되어 진선호는 다리를 벌린 자세로 걸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신은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고 병상에 누워 있는 박태준을 힐끗 보았는데, 눈빛에 고소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다른 사람이 없을 때 은지 씨 마음대로 해요. 두리안을 사다 드릴까요? 과육은 은지씨가 드시고 껍질은 태준이 무릎 꿇게 하면 낭비 없이 딱이겠네.”“...”이 말을 들은 신은지는 어처구니없었다.
박태준의 시선을 느낀 왕준서가 급히 입장을 밝혔다.“대표님, 저는 애완견이나 없는 사람 취급하면 됩니다.”돈만 충분히 준다면 그 자리에서 멍멍 짖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신은지는 박태준의 손을 밀쳐냈다.“이 일은 이따 다시 얘기해.”진선호가 일어나 박태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은지 씨, 깨어났는데 내려가 아침밥이라도 사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간신히 살려냈는데 굶어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요.”신은지는 그가 박태준과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가 멀리 간 후에야 진선호는 정색하며 박태준에게 질문했다.“머리는 왜 그렇게 아파요?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에 손댄 건 아니에요?”그는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박태준이 대답했다.“아니요.”“확실해요? 모르고 잘못 먹은 건 아니에요? 아까 최면 얘기를 하던데, 혹시 손댄 적이 있는데 어떤 원인으로 잊어버렸을 가능성은 없어요?”의사가 검사 결과는 문제없다고 했다. 몸에 문제없으면 무슨 원인으로 그렇게 아플까? 아무 원인도 없이 아프진 않을 것이다.박태준은 단호하게 부인했다.“없어요. 제가 먹은 약들은 의사한테 성분 분석을 의뢰했는데, 금지 성분은 들어 있지 않았어요...”그가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진선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건은 한 번 손대면 평생을 망친다. 마침 이때 나유성이 오자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밤새 한잠도 못 자고 바삐 보낸 나유성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비어있는 옆 침대에 드러누웠다. 극도로 피곤해 휘청거리는 모습은 환자인 박태준보다 더 환자 같았다.박태준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수고했어. 사례로 무슨 선물을 받고 싶은지 얼마든지 얘기해.”“뭐든 돼?”그냥 물어본 건데, 박태준이 침묵하며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말했다.“안 돼. 너는 지금 여자친구가 없는 것 외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니 은지한테 소개팅을 주선하라고 할게. 곧 설이 될 텐데, 다른 사람들은 다 쌍쌍이거나 자녀가 있고 너만 혼자
신은지는 당연히 그에게 넘겨주지 않았고, 팔을 들어 박태준의 손을 피한 후 아침밥을 협탁에 올려놓았다.“뭘 먹을지 몰라서 다 조금씩 샀어. 뭘 먹을래?”찐빵, 찐만두, 두유, 죽, 만둣국... 병원 근처에는 이런 것밖에 없었다.박태준이 살펴보더니 말했다.“만둣국.”만둣국은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담겨 있었는데 좀 뜨거워 한 손으로 들고 먹으면 국물이 쉽게 쏟아질 것 같았다.그가 팔을 다친 것을 고려해 신은지는 용기의 포장을 뜯은 후 그에게 건넸다.“침대 머리 쪽에 앉아서 먹어. 들고 먹으면 쏟기 쉬워.”박태준의 상처는 모두 상반신에 있고, 다리는 멀쩡하기 때문에 일어나서 식사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침대 머리에 기댄 채 신은지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환자야.”신은지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다른 사람들은 아프면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데.”박태준이 차 문에 끼어 부어오른 팔을 신은지에게 보여주었다.“마취가 풀렸는지 좀 아파.”이를 본 진유라는 입을 딱 벌렸다. 어디서 여우짓이야? 그녀는 심지어 박태준이 이 말을 신은지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옆 침대에 누워 있는 나유성에게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진유라도 눈치챌 수 있는 걸 신은지가 모를 리 있겠는가? 그녀는 귀찮다는 듯 눈을 흘겼다. 유치하긴! 나유성은 줄곧 자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 한 번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그녀에게 그런 뜻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박태준은 질투하고 있다.원래는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납치됐을 때 봤던 동영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져 모질게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릇을 들고 싸구려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만두를 떠서 박태준의 입에 가져갔다.그는 만두를 보지 않고 그녀의 빨간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창고에서 그녀가 우는 것을 봤을 때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떠오르는 생각을 눌렀었다.짓눌려 있던 욕망이
말하고 나서 신은지는 박태준을 한참 동안 쏘아보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기민욱이 주선해 준 약혼녀가 무척 맘에 들었나 봐.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박태준에게 이 이름은 단지 한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다. 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고통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라 평생 가도 이 세 글자를 잊기 어려울 것이다.“...”박태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부인하지 않고 정중하게 약속만 했다.“은지야, 난 그 여자를 본 적도 없고 실존하는 인물인지도 몰라. 기민욱에게 납치되어 갇혀 있을 때 그 여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건 이름뿐이야. 그러니 우리 사이 애정에 아무 실질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아.”엄숙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신은지는 마음이 아파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농담이야. 나 화나지 않았어. 기억해도 상관없어.”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그녀였다면 꿈에서도 그 이름을 부를 정도로 더 똑똑히 기억했을 것 같다.신은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너 어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뇌 검사를 했는데, 큰 문제는 없대. 두통은 최면과 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일 수 있다는데, 무슨 다른 증상은 없어?”박태준이 잠깐 머뭇거렸다.“수면 질이 안 좋고 가끔 넋을 잃어...”그는 천천히 말하면서 수시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신은지는 참다 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그리고?”“기억력이 이전보다 나빠졌어.”박태준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복수학위까지 땄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이 대답은 하나 마나 했다.신은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이전보다 나빠졌으면 어느 정도야?”“가끔 과거의 일이 기억 나지 않아.”이전에는 기억이 어렴풋할 뿐이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만 잊었지만 최근에 이런 증상이 심해졌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 그는 노트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노트에서 봐도 알게 될 뿐 기억나지는 않았다. 잊어버린 일
잠깐 사이에 박용선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다급한 뒷모습은 마치 늦으면 피하지 못할까 봐 안달한 사람 같았다.신은지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박태준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가지 않을 테니 이거 놔. 나 졸려. 좀 자야겠어.”어젯밤에 잠에서 깬 후 그녀는 다시 눈을 붙이지 못했다. 계속 긴장한 상태에 있어서 박태준이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병실에 줄곧 사람이 있어서 억지로 참고 자지 않았다.이제 겨우 조용해지고 궁금증도 해결되니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연거푸 하품을 하더니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모습은 너무 가련해 보였다.마음이 약해진 박태준은 즉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신은지가 돌아서서 비어 있는 옆 침대로 가자, 그는 나유성이 그 침대에서 잤던 것이 생각났다. 나유성의 냄새도 아직 다 가시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녀가 지금 누우면 같은 침대, 같은 이불, 같은 베개를 쓰게 되니 간접적으로 동침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이 침대에서 자.”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신은지는 어이가 없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다 병원 침대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고? 설마 네가 잤던 침대가 더 향기로워?”“응.”“...”신은지는 그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진짜 낯가죽이 밑창 천 개를 겹쳐놓은 것만큼 두껍네.”“무슨 뜻이야?”그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신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불은 박태준 냄새로 가득했고 이불 속에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그 속에 누우니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그제야 그녀는 박태준이 왜 굳이 이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진짜...얼마나 졸렸는지 이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녀가 잠든 것을
그는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며 차를 길가에 세웠다.“대표님, 죽은 사람이... 공예지래요.”순간 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구?”“공예지요, 대표님께 마사지해 줬던 그 공예지요.”박태준이 딴사람인 줄 알까 봐 그는 자세히 설명했다.“사건이 발생한 지점은 수영장이고, 경찰이 지금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하고 있대요. 곧 대표님 차례가 될 거예요.”“...”어젯밤 은지가 납치된 곳은 정원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수영장이 있었다. 그녀가 나간 그 시간에 마침 공예지도 연회장에 없었다.박태준이 냉정한 목소리로 분부했다.“이 일을 사모님한테 알리지 마.”경찰이 그녀를 찾지 않는 한 공예지가 죽은 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신은지는 잠을 꽤 오래 잤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주황빛 석양이 커튼에 막혀 자극적이지 않았다. 옆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던 박태준이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깼어?”“응.”신은지는 가볍게 외마디 대답을 했다.“휴대폰은 어디서 났어?”그들의 휴대폰은 납치된 후 압수당했다.“방금 진영웅이 보내온 거야.”박태준은 침대 협탁에 놓인 박스를 가리켰다.“네 것도 샀어.”신은지는 너무 오래 자서 온몸이 나른하니 힘이 없고 움직이기도 싫어 옆으로 누운 자세로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뭘 보고 있어?”“뉴스.”박태준은 휴대폰으로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뉴스를 본다. 경제, 정책 등 어쨌든 다 무미건조한 것들이다. 신은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만 심심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물었다.“주식은 올랐어?”“몰라.”“그럼 무슨 기사를 보는데?”박태준은 공유 욕구가 넘치는 듯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설문조사를 보고 있어. 질문은 ‘남편과 시어머니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야. 너는 누굴 먼저 구할 거야?”“...”그녀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아내와 엄마가 아니었어? 여기서는 왜 남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은지가 아직 안 나왔어요?”공예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신은지였다는 사실이 전에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 확실해졌다.“여기 우리 셋밖에 없는데, 은지가 나오지 않은 게 안 보여요?”진유라는 경찰서에 불려 왔을 때 어리둥절했고,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서야 공예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지에게 알리려 할 때, 그녀와 박태준이 경찰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박태준을 쳐다보았다.“박 대표님은 이 일을 사전에 몰랐어요? 대표님인데 정보가 빨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큰일을 뜬소문이라도 못 들었나요?”박태준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전 세계의 시시콜콜한 일을 다 알지는 못해요. 저는 인간이지 CCTV가 아니잖아요.”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진유라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당신은 CCTV가 아니지만 공예지는 여우가 맞아요. 옆에 서 있으면 여우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요.”“공예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은지일 거예요.”이건 곽동건에게 한 말이다.“이 일을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진작은 아니고, 점심에 기도윤을 만나러 갔을 때 알게 됐어요. 그자가 알려준 거예요. 형사사건의 용의자는 길어서 며칠까지 구속할 수 있어요?”곽동건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이 사건의 상황으로 볼 때 최대 14일이에요.”진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진작에 알았으면 준비를 했겠죠? 은지가 잠시 후에 나오는 건가요?”“은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진유라는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잠깐 가졌던 안도감도 다시 불안감으로 바뀌었다.“뻔히 알면서...”흥분하니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그녀는 도둑처럼 주변의 경찰 눈치를 살핀 후 목소리를 낮추었다.“왜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방금 형사 사건은 최대 며칠까지 구속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무슨 뜻이에요? 당신도 은지를 의심하고, 은지를
곽동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진유라는 운전석 문을 연 후, 한 손을 차창 틀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몸을 구부리고 그를 바라보았다.“우리가 헤어졌는데, 계속 제 차를 타는 건 아니지 않나요?”“확실해요? 정말 헤어져요?”진유라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노예주에게 착취당하다 못해 들고일어난 노예와 같아 감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노예 위치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것이다.곽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신은지 씨 사건은 매우 복잡해요. 목격자도 있고 증거 영상도 있어서 은지 씨가 죽인 것이 아니라 해도 공예지가 수영장에서 죽었기 때문에 물에 빠진 후 일어선 적이 있다거나 다른 범인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과실치사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요...”진유라는 급히 올라타더니 곽동건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후 가녀린 목소리로 아양을 떨었다.“여보...”“...”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직접 등급이 업그레이드됐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헤어진 게 아니었어요?”“누가 그래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요?”진유라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격분하며 말했다.“제 남자친구는 잘생기고 성품이 좋고, 몸도 좋고 체력도 좋고, 심지어 그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업계 롤모델이거든요. 그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일등 남친인데, 제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헤어질 리 없죠.”그녀는 손가락을 들고 맹세했다.“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은 후 유골도 함께할 거예요. 함께할 뿐만 아니라 한데 섞어 당신과 헤어지기 싫은 저의 결심을 증명할 거예요.”그녀는 구역질 나서 토하기 전에 멈췄다. 그의 면전에서 토를 한다면 방금 한 말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진유라는 곽동건을 빤히 쳐다보며 아첨하는 얼굴로 그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여보, 정말 당신이 말한 그 두 가지 상황에 마주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거예요? 정말 과실치사로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