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신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어머니를 부탁할게.”그는 말하고 나서 돌아서더니 옆에 있는 왕준서에게 말했다.“가자.”왕 비서는 신은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신은지는 그가 원래 하려던 말이 이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박태준이 말참견하는 바람에 갑자기 말을 바꾼 것 같았다. 그녀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흘겼지만 이미 떠난 사람은 이를 보지 못했다.박용선은 피곤한 얼굴로 병상 옆 의자에 앉아 강혜정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신은지는 돌아가서 좀 쉬라고 말하려다가 눈에 아내밖에 없는 그를 보고 눈치 있게 입을 다물었다.“아버님, 집에 가서 어머니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올게요.”“그래, 겉옷을 입고 자는 걸 싫어하니까 가는 김에 잠옷도...”말이 끝나기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간다던 박태준이 문을 잡고 서서 약간 헐떡거리면서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앞에서 주머니를 만졌다.“휴대폰이 없어졌어. 여기 두고 가지 않았나 해서.”신은지가 말하기도 전에 익숙한 벨소리가 박태준의 외투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이따금 윙윙 진동까지 수반해 실버폰 소리와 매우 흡사했다.“...”이게 무슨 난처한 상황인가.박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꺼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어디 계셔요?”그가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니 대표님이 보이지 않았다.“병실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왔어. 차를 몰고 나와 문 앞에서 대기해.”그는 전화를 끊고 신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데려다줄게.”“...”‘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병실에 두고 온 물건이 나였어?’돌아설 때 다리에 힘이 풀린 박태준은 무의식적으로 문틀을 붙잡았다.방금 아래층에 있을 때 꽃을 든 사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는데,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 상반부만 보였고 전혀 인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사람을 보고 그는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은 착각
강혜정이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주변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병실의 불은 꺼져 있었으며 구석에 있는 무드등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애를 써서야 자신이 처한 환경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는 입을 벌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자고 있는 사람을 불렀다."용선아."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 몰랐다. 물을 마시지 않아서 목이 탈 정도였다. 소리를 내려고 하자 모기 소리처럼 작은 소리가 났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그는 깨지 않았지만 그녀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뼈마디가 긴 큰 손이 빨대를 쥐고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는 목이 너무 말라 무의식적으로 두 모금 빨았다.따뜻한 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려 목은 마침내 그 건조하고 떫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았다."왜 은지더러 여기에서 자게 했어? 집에 가서 자게 하지 않고. 소파에서 자는 게 얼마나 불편한데.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데 잠을 잘 자지 못하면 어떡해."무드등 불빛이 비치는 곳은 한정돼 있어서 소파에 있는 사람은 희미하게 그림자만 보일 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 할 수 없었다.그녀에게 물을 먹인 사람이 덩치가 큰 남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당연히 소파 위에 있는 사람이 신은지라고 생각했다."가서 은지를 깨워.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서 재우고 와."강혜정이 손을 뻗어 그를 재촉하려는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낸 소리였다.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뻣뻣해졌다. 박용선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에서 뼈 소리가 들릴 정도로 경직된 동작으로 말이다.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쳤지만 강혜정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당황했다.‘왜 잘 안 보이지? 용선이는? 소파에 있는 사람은 또 누구야? 깨어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지?
신은지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한번 훑어보았다. 과연 그녀는 떼 지어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태준을 보았고 그의 옆에는 공예지가 서서 다소 어색하게 두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공예지는 이런 파티에 오는 게 처음이라 아무리 등을 꼿꼿이 세우고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가난했던 생활환경 때문인지 이런 자리에 자주 참석했던 재벌 2세들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파티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서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처지를 신은지처럼 만들어도, 일이 생겼을 때 같은 반응을 보여도 신은지와 똑같아 질 수는 없었다. 신은지도 전보다 초라해지긴 했지만 그건 좀 지나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배워야 할 예의는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배웠었다.진유라는 신은지가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고 말했다."박태준 씨가 공예지를 데리고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아니네, 성씨 가문이 무슨 신분이라고. 그 집 딸의 약혼식은 말할 것도 없고 성씨 가문 할머니가 약혼한다고 해도 박태준을 초대할 정도의 지위는 안 돼.""초청받은 사람은 태준이가 아니라 공예지야."그날 차 안에서 신은지 앞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도도한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변했을뿐더러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속였다.‘접대가 있기는 무슨? 이게 무슨 접대야.'진유라는 의문이 들었다. 관계가 좀 복잡해서 그녀는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박태준이 공예지의 남자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리려고 했다."이 여우 년이 어딜 넘봐? 내가 오늘 제대로 가르쳐줄게. 자기 것이 아니면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너 오늘 드레스를 입었잖아, 소매가 어디 있어. 일단 가지 마."신은지가 그녀를 제지했다.그녀는 오히려 공예지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는 지를 알고 싶었다. 의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 광경을 본 내가 질투 때문에 박태준과 말다툼이
신은지는 물결이 출렁이는 수영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공예지는 바로 그녀 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신은지의 무방비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박태준이 왔기 때문에 다들 홀에 있었고 그와 말을 걸고 싶어 했다.오늘의 손님들은 모두 성씨 집안과 같은 계층이었다. 평소라면 박태준과 같은 곳에 있기는커녕 멀리서 한 번 만날 기회도 없으니 그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바람이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자 사박사박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공예지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녀는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노력으로 어떤 찬란한 미래를 그려나갈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긴장되고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생인 공예함이 그 사람에게 끌려갔기 때문이었다.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싸우는 것 같았다.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였다.공예지의 손이 신은지의 등에 닿으려 할 때, 수영장을 보고 넋을 잃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렸고 공예지는 깜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이 모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신은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태준이를 좋아한다면 지금이 단둘이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아니에요? 파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고 반쯤 취해서 알딸딸할 때가 가장 좋은 기회잖아요. 그쪽이 조금만 더 신경 써도 성공할 수 있는데..."공예지는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 몰랐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어서 모욕당한 듯 얼굴을 붉혔다.신은지는 그녀에게 박태준과 잘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하든 박태준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었다."..."‘나를 얼마나 열등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말할까.'그러나 그녀가 열등감을 가지든지 말든지 신은
그녀는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파닥거리는 힘은 점점 작아졌고 물보라너머로 공예지는 수영장 밖에 서 있는 신은지를 보았다. 신은지는 정교한 드레스를 입고 공예지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는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그녀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처음 느끼는 수치였다.‘만약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무조건...'‘무조건?'그녀의 생각은 이미 혼돈에 빠지기 시작했고 정신이 혼미하고 손발이 허약해졌다.펑.공예지는 무언가에 맞았다. 아프지 않았고 약간 부드러웠다. 애써 눈을 떠보니 앞에 있는 건 분홍색 튜브였다. 누가 던진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필사적으로 튜브를 붙잡고 가라앉지 않으려고 했다.죽음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야 공예지는 정신을 차리고 발로 땅을 밟았다. 고개를 돌려 신은지가 방금 서 있던 곳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홀에 있는 박태준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신은지가 나간 지 2분이 지났다.신은지가 떠났을 때, 박태준도 따라서 나가려고 했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와서 그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다. 그들을 따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그녀가 떠난 방향을 보고 그는 그녀가 화장실에 간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홀을 둘러보니 공예지도 사라져 있었다.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두 번 정도 울렸고 그는 사람들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진유라가 가방에서 익숙한 휴대전화를 꺼내는 걸 보았다.전화를 끊은 박태준이 성큼성큼 걸어갔다."은지가 화장실 간 지 2분이나 지났는데 아직 안 나왔어요. 한 번 확인해 주세요."그를 변태 보듯 쳐다보는 진유라가 입을 열었다."여자가 화장실에 가면 오래 걸리는 게 정상 아닌가요? 박태준 씨, 변태세요?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관리하세요?"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박태준도 너무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웠다."사람을 데려왔으면 잘 돌봐야죠. 은지가 방금 술을 너무 많이 마
문을 닫은 그 사람이 더 힘을 주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자 끼인 곳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와 점차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가 1대10으로 싸운다고 한들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니 유인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신은지는 차 문을 쳐다보았다. 조금만 빨랐으면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태준아, 빨리 손 놔."피가 문을 타고 뚝뚝 떨어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그의 손이 정말 부러질 것 같았다.그녀는 박태준이 그녀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신은지는 완전히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차를 몰던 그 사람은 틈틈이 뒤를 돌아보면서 악을 쓰며 말했다."그냥 얘도 기절시켜서 차에 올려."그들은 박태준의 이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 임무를 받았을 때 인터넷에 찾아보았었다. 만약 정말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그를 건드렸겠는가. 원래는 이 여자가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데려 가려고 했는데 재수 없게 박태준에게 걸릴 줄은 몰랐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어쨌든 그들의 임무는 단지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니 뒷일은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박태준을 함께 묶었으니 도망갈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감히 박태준을 죽일 수 없었다. 많은 돈을 가지고도 안절부절못하면서 쓰고 싶지 않았다."기절시킨다고?"팔도 내밀지 못하는 문틈을 보고 뒷줄 사람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보스, 이거 어떻게 해요? 아니면 제가 문을 좀 열고 칼로 찔러버릴까요? 고통을 계속 참을 리 없어요."그는 감히 직접 문을 열지 못했다.박태준은 차에 탄 사람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 보스라는 사람이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약 같은 거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차 안이 조용해지자 모두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쯧쯧, 소문으로는 살아있는 염라대왕처럼 무섭다던 박태준이 여친 바보라니."
신은지는 드레스가 불편하고 핸드백을 들기 귀찮아서 오기 전에 휴대전화를 진유라의 가방에 넣어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들고올 걸이라고 후회했다.하지만 납치를 한 이상 휴대전화를 그들에게 남겨주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희망을 가지진 않았다. 그저 물어봤을 뿐이었다."없어."박태준이 입은 양복은 몸에 살짝 달라붙어서 휴대전화가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주변이 조용해졌다. 신은지는 폐소공포증도 없었고 어두운 것도 두렵지 않지만 귀신을 무서워했다. TV에서는 이런 어둡고 음침하며 습하고 낡은 곳이 가장 음흉하다고 했다.그녀는 의자를 힘들게 옮겨 박태준 옆으로 기대어 그와 붙어 있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윽."박태준이 끙끙거렸다.신은지가 뒤늦게 자신이 그가 다친 팔을 건드렸다는 걸 알아채고 자리를 조금 옮겼다."미안해. 손에 상처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잠시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헷갈렸을 뿐 그녀는 그가 다쳤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박태준은 신은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가 당황해서 자책하는 소리만 들렸다."팔이 아픈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묶여 있은 탓에 다리가 저려서 그래."신은지는 걸상을 그의 등 뒤로 옮기고 손목의 매듭을 풀기 위해 애썼다."내가 먼저 매듭을 풀어줄 수 있는지 없는지 해 볼게.”그는 이미 시도해 보았는데 매듭 묶는 방법이 매우 전문적인 데다가 의자 등받이가 구부러져서 더더욱 풀기 어려웠다. 적어도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는 풀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신은지가 좀 바빠져야 쓸모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왜 약혼식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어?"그는 그날 차 안에서 그녀가 특별히 자신에게 수요일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때 아마 공예지로부터 문자를 받았을 것이었다. 오늘 밤 성씨 가문에 가기 전에 박태준은 이미 준비를 해두었다. 하지만 저녁 파티에 신은지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고 그 사람이 목표를 그에서 신은지로 바꿀 줄은 더더욱 생
이곳은 황폐해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 먼지가 가득했다.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일렁이는 먼지가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넘어질 때 그녀의 팔꿈치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고 지독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넘어지는 신은지를 본 박태준은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하고 화가 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이 누굴 건드려."그의 목에 핏줄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묶여서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신은지는 그의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파티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납치까지 당했다.게다가 이 무리의 상대는 뜻밖에도 외부인인 신은지였다.박태준은 손으로 손목 위쪽을 애써 만졌다. 딱지가 앉은 지 얼마 안 된 흉터 한 군데를 말이다.분노에 휩싸인 남자의 가슴 아픈 외침에 신은지는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가려진 시선이 그 둘 중 한 사람을 향했다.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데 보아하니 동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뒤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박태준의 입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아저씨를 만나야겠어."들어온 두 사람 중 한 명은 영상을 찍었고 다른 한 명은 말을 걸었다. 그중 한 명은 박태준의 말을 듣고 돌아섰다."박 대표님의 뼈가 얼마나 굵은지 다 알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쓸 생각입니다.""신은지 씨 양손은 문화재 복원을 하는 데 쓰이고 상도 받았다죠? 소중히 다뤄야겠네요."신은지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손이 무슨 대수라고. 손이 망가지면 사업 하지 뭐.'펑.박태준이 혼신의 힘을 다해 걸상까지 든 채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신은지의 손에 쏠려 있었고 박태준이라는 사람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는 밧줄을 매우 단단하게 묶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다. 사람은 고사하고 소 한 마리라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방심하다가 달려드는 박태준에게 그대로 깔렸다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