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중에 시큼한 알코올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박태준은 고개를 숙이고 엉망이 된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서야 조금 전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이 뭐였는지 알 것 같았다.“박태준, 나 토할 것 같아.”“젠장!”박태준이 더 화가 나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그렇게 잠깐이 지나고 결국 그는 그녀에게 물 한잔을 가져다준 뒤, 욕실로 들어갔다.10분이 지나 박태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신연지는 이미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그는 머리에 물기를 말리고 사람을 시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게 했다.그리고 창가로 가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고개를 돌려보니 신연지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잠드니까 그나마 온순해지네.“ 박태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침대에 누우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침대에 앉자마자 얌전하게 자고 있던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허벅지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꺼져!”아무런 대비도 없던 상황에서 갑자기 다리가 날아오자 박태준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신연지!”그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그녀의 턱을 잡았다.“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달게 자고 있었다.그렇게 잠든 신연지는 아침에 햇살이 창문을 비쳐 들어오면서 잠에서 깼다.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보고 있자니 어딘가 낯선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호텔 방이었다.신연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어제 입고 있던 옷은 어디로 사라지고 널찍한 남성용 셔츠를 입고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비싼 재질이 느껴졌다.셔츠에서는 3년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셔츠가 그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신연지는 느긋하게 씻고 방 안을 둘러봤지만 입고 온 옷이 발견되지 않자 밖에 나가보기로 했다.어제 그렇게 취하고 중간에 필름이 끊겼지만 평소에 그녀를 대하는 박태
박태준은 옷만 받아서 신연지에게 건넸다.그녀가 쇼핑백을 들고 욕실로 가려는데 박태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이따가 어머니 건강검진 들어가실 건데, 그땨 나랑 같이 가.“나 좀 이따가 출근해야 해.”그녀도 강혜정이 걱정되는 건 맞지만 연속 이틀이나 작업실에 휴가를 낼 수는 없었다.“결과 나오면 나한테 알려줘.”박태준은 여자의 등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고작 청소부 일 때문에 엄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야?”신연지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어차피 며칠 지나면 남남이 될 거잖아.”그 말을 들은 박태준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매번 만날 때마다 이혼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녀가 괘씸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비웃듯 말했다.“우리 엄마 3년 동안 그렇게 예뻐해 줬는데 개한테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당신보다는 나았을 거야.”그 말을 들은 신연지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비난할 수 있는 거지?매번 강혜정이 아플 때면 3년 동안 병원에 불려다니며 보호자 사인한 사람은 신연지였다. 그녀가 그렇게 바쁠 동안 박태준은 언제 한번 나타나서 도와준 적 없었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개한테 정성을 쏟으면 꼬리는 흔든다던데 난 당신을 위해 3년 동안 도시락을 챙겨줬는데 이런 취급이나 당하고. 차라리 개한테 예쁨 줄 걸 그럤어.”박태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신연지는 당당히 룸을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택시를 잡았다.가는 길에 그녀는 진유라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물었다.“어제 다친 건 괜찮아?”마태준이 굵직한 다리로 온 힘을 다해 걷어찼으니 괜찮을 리 만무했다.진유라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 개 같은 자식, 병원에서는 뼈에 금이 가서 며칠 쉬어야 한대. 나 그 자식 고소할 거야. 그런데 엔조이에서 CCTV는 죽어도 못 제공한다는 거야. 아, 짜증 나!”“일단 병원에서 진단서 잘 챙겨. 나머지는 내가
그 한 마디에 전예은의 얼굴이 그만 파랗게 질러 버렸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그녀는 박태준의 아내이자 가족이니 초대장을 굳이 두 개나 보낼 필요는 없다는 말이였다. 신연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 전예은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허 원장을 의식해서 결국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허 원장에게 담담하게 말했다.“허 원장님, 실버의 행적을 좀 알아봐 주세요. 비록 소속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업계 내에서 유명하신 허 원장님이라면 프리랜서 복원사 한 명 찾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실버가 이 의뢰를 맡아줄 의향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허 원장은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신연지를 힐끗 바라보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퇴근 후, 신연지는 작업실을 나오자마자 문 앞에 세워진 박태준의 차를 발견했다.번쩍거리는 한정판 벤틀리의 위엄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타.]신연지는 그냥 무시하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방향으로 걸어갔다.불필요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사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예전에 저 차 한번 잘못 탔다가 재경의 직장 동료들에게 온갖 비아냥과 시기 질투를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박태준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남자의 차는 신연지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의 옆으로 간 박태준은 차 창을 내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제로 태워주길 기다리는 거야?”신연지는 인상을 확 찌푸리고 대꾸했다.“옷 갈아입어야 해.”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옷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박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신연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걸음을 재촉했는데, 차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막고 멈춰서더니 누군가의 손이 나와 그녀를 안으로 잡아당겼다.그 과정에서 신연지는 발목이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저도 모르게 욕설이 새어나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주변이 조용해졌다.어리둥절한 얼굴로 밖으로 나가니 세면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태준이 보였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되물었다.“나왔는데 내가 있어서 실망했어? 누가 데리러 와주길 기대했던 거야?”신연지는 곱지 않게 그를 흘기며 대꾸했다.“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이상한 소리하지 마.”그녀는 다가가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요동치던 가슴은 진정되었지만 창백한 얼굴은 여전했다.박태준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시선을 맞추었다.“그까짓 시계 하나 보고 멘탈이 나가버린 거야?”신연지의 눈빛에 분노가 일렁거렸다.“일부러 그런 거였어?”박태준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냥 평범한 장신구일 뿐이야. 나한테 일부러 그랬냐고 물어보기 전에 당신 자신한테 물어보지 그래? 아직도 나유성 잊지 못한 거냐고.”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힘주어 말을 이었다.“재경의 안주인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신연지는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신분은 그녀에게 아무런 기쁨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오히려 속박과 괴로움만 줬을 뿐.그녀는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바스락거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신연지, 그날 나랑 잔 거 후회해?”신연지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이 걸렸다.“그 시계 아니었으면 당신이랑 그런 일도 없었을 거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여자를 와락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뜨겁게 와닿았다.“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때 내 얼굴을 알아보고 그렇게 발광을 해댔으니. 만약 그때 내가 아닌 나유성이 거기 있었더라면 당신의 처음은 고통이 아닌 쾌락이었겠지?”“박태준,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속 시원해?”박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싫은 사람 옆에 있느라 많이 힘들었겠어. 이제 좋아하는 남자가 돌아왔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나랑 이혼하고 나유성 찾아가려는 거잖아.
신연지는 잠시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나유성은 조금 취했는지 눈빛이 흐트러져 있었고 셔츠도 구겨진 상태였다.잠시 후,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3년 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신연지의 눈이 아련하게 바뀌었다.아마 고백 영상이 인터넷에 퍼진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그때 그녀는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빌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영상이 퍼지며 그녀의 처지는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그때 사람들은 그녀를 무슨 더러운 쓰레기 취급했다.3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고통스러웠다.“그거 말하는 거라면 이미 지나갔어. 어차피 그때 나도 순수한 마음이 아닌 필요에 의한 거래를 제안한 것뿐이니까.”신연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고 나를 속물이라고 욕할 수도 있어. 하지만 왜 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린 거야? 아무리 내가 싫었어도 그건 하지 말았어야지. 남자라면!”신연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나유성은 그 말을 듣자 실소를 터뜨렸다.“그 영상 내가 퍼뜨렸다고 생각해?”신연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날 그 장소에는 두 사람뿐이었고 장소도 나유성이 선택한 고급 커피숍이었다. 음질이 깔끔한 것으로 봤을 때 아주 근거리에서 녹음된 것이었다.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나유성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정색해서 말했다.“나 아니야.”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신연지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이라 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그녀는 박태준의 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 싸인 이곳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베란다 공간이 넓었기에 신연지는 최대한 나유성과 멀리 떨어져서 핸드폰을 봤다.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다가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나유성이었다.“어떻게 지냈어?”핸드폰을 끄적이던 신연지는 멈칫하다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그냥 그랬어. 그때 당신 말 들었어야 했는데.”가장 친
“나유성은 당신한테 관심 없어. 만약 관심이 있더라도 나랑 이혼한 여자랑 결혼할 간 큰 짓은 하지 않을걸? 그건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신연지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이혼 사유가 자존심 상하면 바꿔줄 수 있어. 난 지금 당신만 보면 토가 올라오거든. 그래서 부부생활이 안 된다고 하면 되잖아!”“신연지!”박태준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신연지는 그가 이성을 잃고 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말투를 누그러뜨렸다.“무슨 이유가 됐든 우린 언젠가는 이혼할 사이잖아. 다른 부부들 봐봐. 우리처럼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3년 동안 남자한테 냉대받고 신경 써서 주문한 도시락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 그녀는 이 결혼이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박태준은 여자의 눈이 빨갛게 변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는 순간 짜증이 치밀어서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그녀의 허리에 팔을 올렸다.졸지에 남자에게 안긴 신세가 된 신연지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귓가에서 그의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와 숨결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그와 침대에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의 피부는 시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등 돌려 누우려고 바둥거렸지만 정수리 위에서 박태준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만히 좀 자자. 뒤척이지 말고.”신연지는 더워서 이마에 땀이 났다.“안겨 있으니까 불편하다고.”다리를 들어 간격을 벌리려던 그녀의 무릎에 무언가가 닿았다.순간 그녀의 눈이 당황함으로 가득했다.“당신….”하지만 박태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신연지, 난 당신한테 관심 없는 거지 기능 장애가 있는 거 아니야. 자꾸 움직이면 유혹의 의미로 생각하고 무슨 짓 할지 몰라. 흥미가 없지만 욕구는 가끔 해결해 줘야 하는 법이거든.”신연지는 언젠가 박태준이 시체가 되어 숲에 버려진다면 분명 저 입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많이 옅어
결국 신연지는 택시를 타고 신당동 저택으로 갔다. 그녀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태준도 뒤따라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아줌마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사모님이 안 계셔서 요새 대표님 표정이 정말 안 좋았어요. 청소하는데 얼마나 눈치가 보이던지!”손영숙은 신연지가 직접 고용한 가정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신연지만 보면 평소에 불편했던 얘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안 싸우고 사는 부부가 어디 있겠어요? 솔직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신연지는 박태준에 대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아줌마, 혹시 아줌마 남편분은 아줌마가 배달 시켜준 음식을 맛있게 드시나요?”손영숙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하죠. 우리 남편은 음식을 가리지 않아요. 시켜주는 대로 다 먹어요.”신연지가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남편은 내가 시켜준 음식을 단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어요. 심지어는 내가 직접 요리한 건 쳐다도 보지 않았어요!“ 말문이 막힌 손영숙은 현관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는 음침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신연지를 노려보고 있었다.신연지는 곧장 침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익숙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물건들이 그녀가 떠나던 때와 똑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을 보아 박태준은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서 잠을 잔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짐 정리를 하게 된 터라, 신연지는 따로 캐리어를 준비하지 않았다. 집에는 가장 큰 사이즈의 캐리어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 꽉꽉 채워도 절반 이상이 남았다.두고 간 옷들은 전부 박태준이 사준 옷들이었다. 일반인은 쳐다도 못 볼 비싼 명품들이 옷장에 꽉 차 있었다.결혼하고 3년 동안 그녀에게 정을 주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물질적으로 신연지는 아주 풍요롭게 살았다. 가끔은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
다음 날 아침, 신연지는 박태준의 변호사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두 사람은 시내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그녀는 장 변호사에게도 연락했다.어제 보였던 박태준의 태도로 보아 오늘은 아주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연지가 도착했을 때 재경 법무팀의 변호사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곽동건, 그는 재경 로펌의 수석 변호사였다. 줄곧 거액의 소송 분쟁만 맡아 하던 그가 이혼 변호사를 자처했다는 게 의아했다.하지만 곧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재산분할 때문에 온 것이었다.“곽 변호사님, 이게 뭐죠?”곽동건은 사무적인 말투로 날카롭게 대답했다.“곽 대표님께서 결혼 전에 700억이나 되는 빚을 탕감해 주셨지요. 그건 사모님의 개인 채무이니 이혼하게 되면 대표님께서는 언제든지 변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해서 말했다.“결혼하고 3년 안에 불어난 부부 공동 자산 상황입니다. 1대1로 분할한다고 해도 사모님께서는 박 대표님께 600억을 변제해 주셔야 합니다.”신연지가 인상을 찌푸렸다.“하지만 그 빚은 결혼을 조건으로 갚아주기로 계약했는데요. 결혼했으니 이미 갚은 거 아닌가요?”정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았더라면 절대 돈 때문에 박태준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걸 박 대표님께서 사모님께 증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곽동건의 날카로운 질문에 신연지는 침묵했다.당연히 없었다.그녀의 눈빛으로 결과를 확인한 곽동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증여를 증명할 증거가 없다면 그건 증여가 아닌 겁니다.”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장 변호사도 도착했다. 곽동건을 본 장 변호사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곽 변호사님?”곽동건은 변호사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이었다. 수많은 재력가들이 그를 고문으로 초대하려고 돈을 들이부었지만 결국 그는 박태준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이혼 문제를 해결하러 자리에 나왔다니!“안녕하세요. 저는 신연지 씨 변호사 장현준입니다.”곽동건은 고개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