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신연지는 박태준의 변호사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두 사람은 시내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그녀는 장 변호사에게도 연락했다.어제 보였던 박태준의 태도로 보아 오늘은 아주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연지가 도착했을 때 재경 법무팀의 변호사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곽동건, 그는 재경 로펌의 수석 변호사였다. 줄곧 거액의 소송 분쟁만 맡아 하던 그가 이혼 변호사를 자처했다는 게 의아했다.하지만 곧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재산분할 때문에 온 것이었다.“곽 변호사님, 이게 뭐죠?”곽동건은 사무적인 말투로 날카롭게 대답했다.“곽 대표님께서 결혼 전에 700억이나 되는 빚을 탕감해 주셨지요. 그건 사모님의 개인 채무이니 이혼하게 되면 대표님께서는 언제든지 변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해서 말했다.“결혼하고 3년 안에 불어난 부부 공동 자산 상황입니다. 1대1로 분할한다고 해도 사모님께서는 박 대표님께 600억을 변제해 주셔야 합니다.”신연지가 인상을 찌푸렸다.“하지만 그 빚은 결혼을 조건으로 갚아주기로 계약했는데요. 결혼했으니 이미 갚은 거 아닌가요?”정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았더라면 절대 돈 때문에 박태준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걸 박 대표님께서 사모님께 증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곽동건의 날카로운 질문에 신연지는 침묵했다.당연히 없었다.그녀의 눈빛으로 결과를 확인한 곽동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증여를 증명할 증거가 없다면 그건 증여가 아닌 겁니다.”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장 변호사도 도착했다. 곽동건을 본 장 변호사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곽 변호사님?”곽동건은 변호사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이었다. 수많은 재력가들이 그를 고문으로 초대하려고 돈을 들이부었지만 결국 그는 박태준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이혼 문제를 해결하러 자리에 나왔다니!“안녕하세요. 저는 신연지 씨 변호사 장현준입니다.”곽동건은 고개
그 말을 들은 신연지는 말문이 막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나쁜 자식!하지만 화가 나기도 잠시, 600억이라는 금액을 단기간에 무슨 수로 구할지 너무 막막했다.신연지는 짜증을 가득 안고 택시를 잡아 진유라의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점원이 그녀를 보자마자 깍듯이 인사했다.“사장님은 2층에 계세요.”“감사해요.”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진유라가 그녀를 보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신연지는 힘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 말을 들은 진유라는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남자가 너무 비겁한 거 아니야? 재경그룹 그 돈 없으면 망한대?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비겁한 짓을 할 수 있어?”신연지는 박태준의 의도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회사도 멀쩡하니 잘 돌아가고 있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진유라가 물었다.“그때 그 인간이랑 결혼한 것도 결국엔 빚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박태준 말이야. 이렇게까지 비겁한 수를 두는 걸 보면 이혼하기 싫은 게 아닐까?”신연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그런 상상은 해본 적도 없지만 그건 그대로 끔찍했다.“아니면 일단은 이혼하지 마? 박태준이 인성이 쓰레기 같지만 잘생기고 돈도 많잖아. 무제한으로 긁을 수 있는 카드까지 주고. 부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생활 요즘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걸 바라는데.”신연지는 약간 넋이 나가 있었다.3년 동안 자신의 정신력을 갉아먹은 결혼 생활을 떠올리자 혐오밖에 남은 게 없었다.“이혼은 내 선택이야. 유라야, 괜찮은 손님 있으면 의뢰 좀 맡아줘. 나 뭐든 할래.”그녀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 작업실 월급은 고정 월급이고 대부분 국가 고고학팀에서 출토한 문물이라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기에 그녀에게 돌아오는 보너스가 거의 없었다. 돈을 벌려면 결국 개인 의뢰를 받아야 했다.잠시 침묵하던 진유라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은 의뢰가 하나 있는데 네가 받기 싫어할 것 같아서 말
진위를 확인한 후, 신연지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박스에 넣고 챙겨온 계약서를 전예은에게 건넸다.싸인을 마친 전예은이 말했다.“과거 미술학원에서 천재로 불리던 사람이 지금 다른 사람 조수로 일하고 있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전예은의 예상과는 다르게 신연지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림을 챙겨 돌아갔다.택시에 탄 뒤에야 신연지는 긴장을 풀고 스르륵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그림의 파손 정도를 생각하면 시간이 촉박했다. 그녀는 그림을 가지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녀는 방 두 개 중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었다.작업실로 들어간 신연지는 그림을 내려놓고 반쪽이 날아간 그림에 따뜻한 물을 뿌렸다.아주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충 첫 작업을 마치자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갑자기 들려온 핸드폰 진동음이 그녀의 집중력을 깨뜨렸다.박태준의 전화였다.그녀는 시선을 그림에 고정한 채, 받아야 할지 고민했다. 갑자기 블랙 카드를 가지고 있다며 자랑하던 전예은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인상을 쓰며 통화버튼을 눌렀다.“또 뭐야?”박태준도 인상을 찌푸렸다.“왜 받자마자 짜증인데?!“ “용건만 짧게 말해. 용건 없으면 그만 끊고.”전화를 끊으려던 그녀는 이어진 남자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내려와.”“뭐라고 했어?”신연지는 크게 당황하며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 주차장에 익숙한 벤틀리 한 대가 보였다.결국엔 여기까지 찾아냈구나.“나 바빠. 급한 거 아니면 전화로 얘기해.”그녀는 지금 이 기분으로 박태준을 만나면 귀뺨을 후려칠 것 같았다.아내에게는 변호사를 보내 빚을 물어내라고 협박하고 애인에게는 무제한 블랙 카드를 선물하다니! 이런 쓰레기가 어디 있을까?“밥 먹으러 가자.”잠시 침묵이 흐르자 박태준의 얄미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굳이 올라가서 끌고 내려와야겠어?”신연지는 단박에 거절했다.“속 안 좋아. 안 먹을래.”“어머니가 레스토랑 예약하셨어. 안 갈 거면 당신이 어머니한
또 나유성 얘기!“우리 사이의 일에 자꾸 외부인을 엮지 말아줄래?”“당신도 예은이 얘기 계속 꺼내잖아.”신연지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전예은은 현재 진행형이잖아?”박태준은 더 이상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블랙 카드를 줘? 걔 그거 아주 신나서 쓰고 돌아다니던데?”박태준의 블랙 카드는 금액 제한이 없었다. 외부인에게 금고를 거덜낼 수도 있는 카드를 그냥 준다고?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그건 누구한테 들었어?”“당신 사랑스러운 애인이 직접 말해주던데?”비꼬는 말투에 박태준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턱을 잡고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매섭게 두 눈을 빛냈다.“그 멍청한 머리로 여태 어떻게 살았어?”“박태준!”그때, 메뉴가 올라왔다. 신연지는 그의 손을 밀쳐내고 수저를 들었다.강혜정 여사는 센스 있게도 비싼 와인까지 따로 주문해 주었다. 신연지는 술잔은 건드리지도 않고 묵묵히 식사에만 전념했다.그러는 와중에 박태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에서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신연지는 입맛이 사라졌다.박태준이 수저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진예은이였다. “무슨 일이야?”잠시 후,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신연지에게 말했다.“예은이한테 일이 좀 생겨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벌써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신연지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매번 전예은 전화 한 통이면 달려나가던 사람이라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게다가 보고 있으면 입맛 떨어지는 인간이 간다니 그렇게 반가울 리 없었다.이 정도이면서 왜 이혼은 싫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빨리 이혼하고 전예은과 편하게 연애하면 좀 좋나?신연지는 창문을 통해 차에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연지?”그리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고 나유성의 얼
신은지는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반응이 둔해져서 나유성이 '태준아'라고 소리칠 때야 그녀는 가득 비웃는 표정을 한 장본인의 얼굴을 마주했다.그녀는 왜 박태준이 갑자기 돌아왔는지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박태준이 앞으로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나유성이 듣지 말았으면 한다.신은지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태준을 향해 걸어갔으나 일어나는 동작이 너무 급했는지 술기운에 비틀거려 남자의 품에 안겼다.박태준은 그녀가 품에 부딪혀도 내버려두었다.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냉담했다. 다리가 풀린 신은지는 어쩔 수 없이 남자의 팔을 잡고 억지로 서서 자리를 잡았다.그녀는 술을 많이 마신 것이 후회됐다.고개를 들어 박태준을 바라보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말하지 마."목소리에는 자신도 모르는 애교스러움과 억울함이 배어 있었다.박태준의 팽팽한 턱선 윤곽은 매섭고 음험해 보였다."왜, 저 사람한테 약을 넣었다는 걸 알게 될까 봐? 저 사람 마음속에 있는 너의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 이미지가 망가질가봐?"신은지는 눈썹을 찌푸리고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 찼다. 이 표정은 박태준이 보기에는 인정하는 거로 해석된다. 순간 그의 정서가 갑자기 격해진다.하지만 술에 취한 그녀는 그런 그의 심기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오히려 짜증이 나서,"너 가지 않았어? 왜 다시 왔어! "라고 불평했다.박태준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내가 너를 방해해서 싫어?"신은지는 그의 이상한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네 마음대로 생각해."그녀는 일어나서 그 사람을 잡던 손을 놓더니 몸을 돌려 나유성과 작별 인사를 했다."나 먼저 갈게. 방금 한 말 마음에 두지 마...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다시 밥 사줄게."마지막 이 말은 분명히 인사치레였지만 마음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귀담아들어 버렸다.나유성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길에서 조심해. ""안녕."신은지는 뒤돌아 떠나려 할 때 박태준을 아예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불편한지
박태준은 순간 진지해지면서 이마에 핏줄을 띄었다. 그는 거의 사나운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신은지!"신은지는 멍하니 남자의 무서운 눈빛을 마주치더니 가슴이 살짝 떨렸다."농담이야, 화내긴?"그는 이를 악물었다. "너 죽고 싶어? "그 후로는 한동안 다들 입을 다물고 차 안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강태산은 액셀을 감히 세게 밟지도 못했다.신은지는 다시 차 문에 몸을 붙이고 창밖의 야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차는 결국 신당동의 화원에 세워졌고 신은지는 앞에는 익숙한 베이지색의 별장이 보였다. 별장문이 스르륵 열리자 그녀는 나른하게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곳은 그녀와 박태준의 신혼집이자 그녀를 3년 동안 감금한 감옥이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되려고 노력 안 한 건 아니다. 그만큼 실망이 쌓아져 지금은 이혼만 하고 싶을 뿐이다.이런 부자 동네에서는 택시를 잡을 수 없고 또 술을 마셨기 때문에 운전도 못 한다. 그렇다고 강태산이 그녀의 부탁을 듣고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을 것 같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다행히 박태준은 전예은을 찾아갈 테고 그러면 그녀는 호텔에 묵고 있는 것처럼 눈 감고 지내면 된다.신은지는 정신이 흐리멍텅해서 방 안으로 들어갔고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 신었다.박태준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허리를 굽힌 그녀의 뒷모습은 치마가 몸에 붙어있어 색다른 섹시함이 드러났다.그녀의 피부는 매우 하얗다. 특히 오늘 입은 미니스커트는 라인을 슬림하게 드러냈고 가느다란 긴 다리는 매우 눈에 띄었다.박태준의 가슴 한구석에서 갑자기 불덩이가 올랐다. 이 불덩이는 차에서 그녀가 1대2라도 가능하다고 돌발할 때부터 생겼다.몇 년 동안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이 적지는 않았다. 스타일도 여러 가지였고 신은지 보다 예쁘고 섹시한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담이 큰 여자는 벌거벗은 상태로 그의 앞에 서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너 덜 혼났구나, 입이 무겁네?"이게 혼내는 거라고?신은지는 화가 치밀어서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래, 나 입이 무거워. 누구처럼 아랫도리가 가볍지는 않지 !"3년 동안 박태준에 대한 이해로는 박태준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생과부로 3년을 지낼 필요가 없다.전에는 혼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도발이든 유혹이든 무엇이든지 해봤지만, 마지막에 얻은 것은 남자의 비웃음뿐이었다.방금은 박태준이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일 거야. 지금은 또 냉정해진 걸 보니 정신이 들었나 보다."가려면 빨리 가, 잘 가. "말이 끝나자 신은지는 몸을 돌려 2층 객실로 올라갔다. 한바탕 말싸움하는 바람에 술기운이 거의 사라졌다. 억지로 욕실로 가서 샤워하고 나오는데, 아래층에 차가 떠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박태준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방금 그가 그녀를 억압하고 있을 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여러 번 울렸었다.신은지는 커튼을 걷어 올리고 유리 창문에서 구불구불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몽롱한 비안개에 휩싸였다.진짜 사랑인가보다. 이렇게 큰비가 오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까...전예은이 묵은 호텔은 댄서팀에서 정한 것이다. 박태준이 도착했을 때 김청하가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박 사장님…"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김청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저었다."요즘 전예은 씨가 쉬고 있어서 제가 인계받고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니 예은님한테서 말씀을 들으세요."1709 방문밖에 도착하자 박태준은 문을 두드렸는데 문틈이 살짝 열렸다...전예은은 조심스럽게 살펴보더니 박태준인 것을 보고 입술을 오므리며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그녀는 호텔의 목욕가운을 입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있으며 화장기가 없는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이고 눈시울을 보면 조금 전 운 게 분명하다.여자의 몸에는 지저분한 향수
박태준의 눈빛이 짙어졌다.바람을 피운 증거? 참, 감히 생각하네."전 그냥 전예은 씨 쪽에서 숨어서 기다리는 것밖에 안 했어요. 예은 씨를 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그럼 사진 찍었어?""아니요. 사모님이 원하는 것은 노출 사진이에요. 사모님은 사장님이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걸 원하세요. 그리고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전예은 씨가 모든 걸 잃게 만들겠다고 했어요.."박태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악기가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조금 전 소란에 호텔 경비원들이 올라왔을 땐 박태준은 이미 손을 풀었다."이 사람 경찰서로 보내세요. "경비원이 바로 사람을 데리고 갔다.박태준은 진영웅에게 전화하여 간단하게 일의 경과를 말하고 그에게 가서 처리하라고 했다.그는 전예은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미행한 사람을 잡았으니 이제 안심해."전예은은 턱을 올려 쳐들고 그냥 그만두지 않으려 했다."그럼 신은지를 어떻게 할 거야? 걔가 사람을 보내 나를 미행하고 나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겠다는데 이건 불법이야."박태준의 기색은 변하지 않았고 어투는 여전히 소탈했다."이건 그 사람의 일방적인 말일 뿐이고 구체적인 상황은 더 조사해 봐야 해. 늦었으니 쉬어. "그는 말을 끝내고 가버렸다. 전예은은 홀로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 후로 신은지는 낮에는 작업실에 출근하고 저녁에는 전예은의 그림을 복원하는데 바삐 돌아쳤다. 그는 하루 6시간씩 잠을 자고 밥을 먹는데도 시간을 쪼개야 했다.그날 밤 그녀는 진유라의 전화를 받고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에서 분노의 욕설이 들려왔다."그놈 새끼가 한편으로 너를 질질 끌어 이혼하지도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불륜녀랑 다정다감하게 지내고 있어. 업보가 두렵지 않은가?"신은지는 하루 종일 작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머리를 위로 향하니 천장이 도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뭐?""너 몰라? 박태준이 전예은을 데리고 호텔 들어가는 모습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