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시선을 서류로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야.”전예은의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르더니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그래도 2년이나 사귀었는데 진심을 들을 자격 정도는 있는 거 아니야? 나랑 사귀는 동안에는 날 좋아했어?”그녀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질문이었다.그들이 사귀게 된 건 정말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어느 날 상업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말이 통해서 조금 오래 대화를 나누었고 그렇게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사귀기도 전에 스캔들이 났다.기자들이 둘이 진짜 만나는 거냐고 박태준을 다그쳤지만 그는 정면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해명을 귀찮아하는 그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추측성 기사들을 써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전예은은 그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었다.고개를 든 박태준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예은아.”“아니, 말할 필요 없어.”전예은이 그의 말을 자르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질문을 했을까? 2년 만나면서 손 한번 잡아준 적 없는 사람인데 날 좋아할 리 없잖아? 태준 씨를 탓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잘못 없어.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박태준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답을 듣기 싫어서일까, 전예은은 그 말을 끝으로 서류도 챙기지 않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갔다. 박태준은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비서실에 연락했다.“진 비서, 예은이가 나가면서 계약서 안 챙겨갔으니까 진 비서가 좀 챙겨줘.”진영웅이 계약서를 가지고 나간 뒤, 그는 맨 위층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남성용 시계 하나가 들어 있었다.L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지만 한번도 세간에 공개된 적 없는 시계였다.그 시계는 주문제작한 제품이었다.전에 나유성이 돌아왔을 때 그가 선물했던 시계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시계였다.그 시각, 신은지는 집게로 자기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신은지는 더 이상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나유성한테는 너는 참 보는 눈이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얼굴 반반하게 생긴 놈이 거짓말을 더 잘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다.나유성의 긍정적인 눈빛을 보고 나니 더는 박태준의 나쁜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같이 커서 많은 걸 겪었으니 자기가 어떤 말을 해도 두 사람 사이 이간질을 시키기 힘들 것 같았다.지금이 오후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아파트에서 매장까지 십 분 만에 도착했다. 데려다줬는데 그냥 택시 기사처럼 그냥 보낼 수도 없어 인사차 말했다. 그래서 신은지는 눈치를 보고 물어보았다. “같이 둘러볼래? 뭐 살지 좀 봐줄래?”그냥 해본 빈말인데 나유성도 바로 차에서 내리고 말했다. “그래, 좋아.”“......”두 사람은 1층부터 6층까지 중간에 있는 여성용품과 아동용품 빼고 다 돌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허 원장님한테 드릴 선물이라 상대방이 부담될까 봐 너무 비싸도 안되고 또 성의 없다고 생각할까 봐 아무거나 저렴한 걸로 살 수도 없다. 게다가 그렇게 친분이 있는 게 아니라서 옷이나 신발처럼 개인 용품을 사도 이상하다. 그래서 결국은 서예 용품을 사게 되었다. 신은주는 경원 작업실에서 허 원장님의 서예를 본 적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멋있었고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녀는 점원이 건네 포장된 박스를 받고 나유성한테 말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 다음에 시간 있으면 내가 밥 살게.”사실 이번 선물 고르는 데 나유성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가 서예에 이렇게 관심 있는지 몰랐다. 이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서예 관계자 외는 연세가 많은 분들인 줄 알았다. “괜찮아, 별일 아닌데 뭐.” 나유성은 대답했다.두 사람은 서로 웃고 얘기하면서 매장에서 나왔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 강혜정은 옆 사람이랑 같이 급히 숨었다. 잘 걷고 있었던 사연희가 강혜정한테 끌려 숨다가 넘어질 뻔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는 사람이
강혜정은 기분이 별로인 박태준을 쳐다보았다. “뭘 들었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물어보는 거에 대답해.”박태준은 결혼 후 자기 엄마한테 몇 번이나 무시당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마를 잡고 말했다.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어요. 그리고 나씨 집안에서 이혼한 여자를 반길까요?”“왜 안 반겨? 우리 은지는 싫어하면 그건 그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야.”나씨 네도 어느 집안 못지않다. 유성이한테 시집가려는 여성분들도 많다. 강혜정이 아무리 신은지를 받쳐준다 해도 이혼한 여자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거다.그러니까 언제 시간 봐서 나씨 집안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정 안되면 은지를 설득해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지.다만, 본인은 나씨 집안이랑 크게 친분이 없어서 태준이 아버지가 돌아오면 다시 알아봐야 할 거 같아. 박태준은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은 걸 보고 물어보았다. “엄마, 왜 갑자기 신은지랑 유성이를 같이 묶으려고 하세요?”“두 사람 같이 쇼핑하고 데이트하는 거까지 봤는데 내가 뭐 묶을 자격이나 있니?”강혜정은 별 좋지 않은 말투로 얘기했고 박태준한테는 마누라도 잡지 못하는 병신이라는 눈빛을 날리고 떠났다.5분 뒤 박태준은 문서를 들고 들어 온 진영웅을 보고 말했다. “지금 신은주 어디 있는지 알아봐.”진영웅은 신은지의 이름을 듣자 바로 긴장했다. 조금 전에 이미 알아봐서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사모님 지금 에서 경원 작업실의 허원장님이랑 식사하고 있습니다.”직작인으로서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다. 예전에 박태준이 신은주한테 별로 살갑게 대하지 않은 관계로 진영웅은 신은주한테 공손하게 대했지만, 호칭은 신아가씨 아니면 신비서였다. 요즘 박태준의 태도가 달라지는 걸 보고 바로 사모님으로 호칭을 바꾸게 되었다.미원은 중식당이며 인테리어도 옛날 고전 때를 참고해 한거라 멋있고 분위기 있는 곳이다.신은주는 10분이나 앞당
하원장님도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챘다. “은주야, 이분은?”신은주가 대답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박태준이 먼저 말했다. “저 은주 남편입니다. 비 오는 걸 보고 데리러 왔습니다.”말하면서 은주를 자기 품으로 당겼다.“네 맞아요. 제 남편입니다.” 신은주의 표정은 자연스럽지 못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 남편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 죄송합니다.”하원장님은 그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아이고 마다하지 마, 이건 너한테 관심 많다는 거잖아, 여기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사실 이 식당이 있는 거리가 옛 건물이 많고 이 가게도 그렇게 유명한 곳이 아니라 이름만 알고 찾아오기에도 힘들었을 것 같다.은주의 반응을 보니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 못 한 모양인데 이 마음 하나로 충분하니 은주를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았다.신은주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허원장님이 가고 나서 신은주는 표정을 바꿔 박태준한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그냥 우연은 아닌 거 같다. 정말 텔레파시가 통했다면 이혼까지 올 일이 없다.“진영웅이 여기서 밥 먹는다고 해서 왔지.”“설마 사람 붙여서 날 미행하는 거야?”여긴 박태준 회사랑 멀리 떨어져 있고 게다가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라 그의 지시가 없다면 진영웅이 어떻게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는가?박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차를 탔다.신은주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정말 나를 데리러 온 거야?”그녀는 더 이상 빼지 않고 차에 탔다. 한편으로는 자기 손이 박태준한테 잡혀 뺄 수도 없고 또 이런 날에 택시 잡기도 힘들었다. 뭐 막장 드라마의 어설픈 여자주인공처럼 굳이 있어 보이려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냥 편하게 차 타고 가기로 했다. 아직 이혼 전이니 이 차도 재산 중의 하나라 자기 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아니.” 박태준이 대답했다.신은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빨리 본색을 드러내다니......박태준은 강기
신은주는 멍때리다가 박스에 보인 신발을 보니 이 남자가 뭐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이 짧은 시간에 이 남자는 자기 발목을 잡게 되었다......박태준의 손이 따뜻해 양말을 신었어도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신은주는 불편하여 발을 빼고 싶었다. “나 혼자 할게.”이런 청춘 드라마에서 나올 뻔한 장면이 눈앞에 있다니 너무 창피했다. 게다가 옆에 두 사람이 저렇게 눈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어느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 싶었다.그들의 부러운 눈빛을 보니 속으로는 이 장면이 되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 거다. 신은주는 자기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분명히 박태준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이런 낭만적인 게 어울리지 않기에 몰입할 수 가 없었다.신은주의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박태준의 모습을 보니 길고 긴 눈썹과 각진 얼굴을 보게 되었다. 신은주가 움직이자, 박태준은 그녀의 발목을 더 세게 쥐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함이 가득했다. “움직이지 마.”신발을 벗기니 신은주의 하얀 속살을 보게 되었다. 발 뒤의 상처가 훤히 보였고 피까지 흘린 걸 보게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이 상황에 남자주인공이 마음 아파하면서 상처를 보게 되지만 박태준은 어이없는 말투로 말했다. “신은주, 너 혹시 바보냐? 이렇게까지 되도록 왜 참고 있었어? 아프다고 찍소리 못해?”“내가 무슨 쥐도 아니고 찍소리를 왜 해? 네가 해봐.” 신은주는 자기 발목을 남자의 손에서 뺐다. 계속 이렇게 잡히면 참지 못하고 한발 걷어찰 수도 있다.그녀가 힘으로 뺀 건지 아니면 박태준이 힘을 빼서 그런 건지 쉽게 빠질 수 있었다.판매원은 운동화에다 순면 양말까지 사 왔다. 신을 때 조금 고생이었다. 발 까진 데가 양말에 섞이니 더 아프게 되었다. 신은주가 신으려 하자 박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판매원한테 물었다. “혹시 밴드 있으세요?”이러한 청춘 드라마를 보게 된 두 판매원은 정신 차리고 밴드를 넘겼다.신은주는 혼자 밴드를 붙이려 했지만, 박태준이 밴드를 뺏어가 자기 상처에 붙이는
신진하가 대체 무슨 말을 계속할지 듣고 싶었지만, 웨이터가 이미 문을 열었다. 안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신연주는 웃으면서 박태준 옆에 앉았다. 다른 곳에 앉고 싶었지만, 자리가 여기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물어보았다. “뭐 얘기하고 있었어?”박태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어렸을 때 자기가 여동생이랑 친하고 예뻐했다고.”그는 신은주의 가정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언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언제 들어왔는지, 게다가 어렸을 때 신진하가 신지연을 위해서 자기한테 어떤 벌을 줬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학교에 빠졌는지도 알고 있었다.신은주가 고개를 들고 신진하의 긴장된 표정을 보게 되었다. 하마터면 신은주를 대신하여 말할 뻔했다.“응, 좋았지, 여태까지 별일 없이 잘살고 있는 거 보니.”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신진하는 앞에 말을 듣더니 표정이 조금 풀렸지만 뒤에 말을 들으니 다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이걸 농담이라고. 태준이 앞에서 무슨 말이야, 오해하잖아.”“내 남편이니 우리 가족이잖아요. 마음대로 말도 못 하나요?” 신은주는 다 알고 있었다. 신진하는 뭐 두 자매가 친하다는 걸 과시해 박태준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다.그리고 무심한 듯 이어서 얘기했다. “아니면 아버지는 태준이를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돈주머니라고 생각했나요?”“그 입 다물지 못해?” 신진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식탁에 놓인 손은 꼭 쥐고 너무 힘을 많이 써 핏줄까지 보였고 떨기까지 했다.신지연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화를 낮추겠끔 했다. 그리고 눈시울이 빨개지고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어떻게 아빠한테 이렇게 얘기해요?”“이 정도로 감당 못 하면 여기 왜 있어?” 신은주가 웃음기를 빼니 그제야 차갑고 냉정한 표정이 나오게 되었다.“언니......”신지연이 더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신진하는 그녀를 막았다. 이런 거로 먹히지 않은 걸
신은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정신 차리고 다시 남자의 입술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려는 차에 남자의 품에 안겼다. “십분.”앞 뒤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알아 들었다.잠자리는 갖지 않았어도 3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냈다. 이 남자 몸에서 뿜어 나온 냄새를 익숙해 했다. 신은지는 그의 품에 안겨 귀가에는 가슴 뛰는 소리 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이 남자한테서 편하게 안기고 싶었다. 전에 겪은 심신 고통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박태준한테 완전히 기대고 말았다. “그 사람도 나한테 이런 적 있었어.”너무 오래된 일이라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신은지는 천천히 얘기를 꺼냈고 박태준도 막을 생각 없었고 귀찮다는 표정도 없었다. 회사에서 박태준한테 혼나던 직원들이 그의 표정을 보게 되면 대낮에 귀신 본 듯 놀라워했을 거다.“아마 초등학교였을 거야, 같은 반 친구들한테 물건 훔쳤다고 오해받아 나를 밀어 뒷골이 책상에 부딪혔거든. 일이 커져서 담임선생님한테까지 갔거든. 그 친구의 가족들은 다 학교로 왔는데 부모님 빼고 심지어 사돈의 팔촌까지도 다 와서 한 20명 가까이 되어 담임선생님 사무실까지 꽉 찰 정도였으니까. 근데 그 사람이 혼자서 여러 사람을 물려 치우고 나를 모욕한 그 학생을 제대로 때려주고 얼굴에 상처까지 입고 그랬어.”지금 다시 생각하니 예전에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고 그 사람이 신지은을 위해 자기한테 벌 준것만 기억에 남았다.박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고개를 쓰다듬었다.고개를 숙이니 여자의 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을 보였다.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귀여운 모습이 평소에 난리 친 거랑 비교하면 너무 사랑스러워 키스하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냥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지 그렇게 참을성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10분이 되자 그녀는 바로 일어나 아무 일 없는 듯 그를 바로 뿌리치며 꼬르륵하고 소리 나는 배를 만졌다. “나 배고파, 음식 왜 아직 안 나
사실 경매장에 온 사람들은 여러 행사에서 자주 얼굴을 보게 되어 서로 친분이 있었다. 방금 그의 말에 옆 사람은 바로 대화를 이어갔다.“그래? 잘못 본 거 아니고?”초대장은 입구에서 보여주는 건데 지금 전예은은 이미 계단에 올라갔다.“차에서 내릴 때 초대장이 떨어져 곁눈으로 보니 씨가 보이던데.”“박” 씨가 여기서는 보기 드문 성씨라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 중에는 박태준 밖에 생각이 안 났다.“전에 두 사람 기사도 났었잖아, 그때 저분이 무대에서 떨어졌을 때 박사장님이 안고 갔잖아. 지금 초대장까지 들고 온 거 보니 뭐 잘 돼 가고 있는 거 같은데.”강혜정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모님은 박태준이 이미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너무 화가 나 말했다.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 멋대로 말하네, 진짜 못 배운 사람처럼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강혜정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박태준을 때려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상황에 전예은이 왜 본인 초대장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박태준이가 밖에서 살림을 하나 더 차렸다고 생각할 것이다.지금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가 되었지만, 전예은 손에 든 초대장이 정말 박태준이 준거라면 웃을거리밖에 안 될 거 같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여기 매체들도 많이 있는데 일이 커지면 당하는 건 신은지가 분명하니 속이 터져도 어쩔 수 없다.너무 짜증이 났다!아니 이 자식을 낳고 미역국까지 먹었다니 속이 터질 것 같다.전예은은 등 뒤에는 v자 모양인 하얀 드레스를 입었고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한 긴 머리를 내려 등 뒤는 보인 듯 안 보인 듯하니 더 이뻐 보였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무용을 해 자세도 좋고 스타일도 좋아 여기 그 어느 사모님보다 눈에 띄었다.그녀는 한바뀌 돌아보더니 강혜정과 눈을 맞추게 되었다. 잠깐 놀라웠다가 고민을 한 듯 걸어왔다. “어머님.”손에 든 초대장은 마치 불통인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