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탄 후에도 박연희는 여전히 조금 전의 감정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러자 조은혁은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잡고 몸을 옆으로 돌리며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생각 하고 있어?”박연희는 그의 팔을 껴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은혁 씨, 전 아직도 가끔 자정에 꿈을 꾸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해요... 경서 씨는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분이 얽매여 선 넘는 일을 할 수 없어요. 하물며 아직 과거의 인연이 있는데.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어르신은 왜 저를 용납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브레이크의 일은 아직도 마음에 걸려요.”...그녀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조은혁이 약간 쉰 목소리로 답해주었다.“권세 때문이지. 심지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심경서를 일으켜 세워야 하니까.”“그럼 그의 마음속에서 전 경서 씨의 오점인가요?”박연희는 조금 슬펐다.그러자 조은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내 마음속에서 넌 항상 1순위야.”확실히 위로가 되었다.모든 억울함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이 가벼워졌다.박연희의 마음도 좀 가라앉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조은혁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저, 당신, 우리 오빠, 그리고 장씨 어머니와 아이들까지... 은혁 씨, 남은 생 동안은 저한테 잘해주셔야 해요.”조은혁이 가볍게 응해주었다.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30분 후, 검은색 캠핑카가 별장으로 들어섰다.메인 저택 입구에는 장씨 아주머니가 많은 고용인을 거느리고 두 줄로 서 있었다. 조민희는 작은 손에 꽃다발을 든 채, 장씨 아주머니 앞에 서 있었고 아빠 엄마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조은혁에게 꽃을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어린 목소리로 장씨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가르친 말을 또박또박 내뱉었다.“이 꽃은 저의 영광스러운 아버지에게 바칩니다.”그
...결혼식 일은 대부분 조은서와 심정희가 도맡았고 박연희는 계속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집중했다.사실 이번의 아이는 지난번과 달리 오히려 진범이를 임신했을 때와 반응이 비슷했다. 하여 박연희는 마음속으로 남자아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조은혁은 딸을 바라고 있었기에 차마 그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괜히 말하면 잠도 못 자고 또 아이를 가지려 할까 봐 무서웠다.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의 향기가 점점 무르익어갈 때쯤.창밖의 파초 잎은 이미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잎 가장자리는 점점 더 오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때때로 엷은 흰 서리를 한층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다... 별장에도 난방이 시작되고 집안 곳곳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늑했다.박연희는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저녁이 되어 조은혁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밖에서 저녁 식사 겸 수선을 맡겼던 드레스를 입어보자는 내용이었다. 박연희는 흔쾌히 동의했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그때, 아래층 마당에서 승용차 소리가 들려왔고 박연희는 당연히 조은혁이 데리러 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잠시 후 장씨 아주머니가 위층으로 올라와 문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 심씨 댁 사노님께서 사모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어떡할까요? 보시겠어요... 아니면 돌려보낼까요?”심씨 댁 사모님?당시 박연희가 심씨 저택에서 지낼 때, 최민정은 박연희에게 극도로 잘 대해주었기에 인정과 정을 따져서라도 박연희는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잠시 후, 최민정은 2층 거실로 초대되었다.최민정은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총 3가지 선물이었다.차 향기가 사방에 가득 퍼지고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얼굴을 마주하였다. 최민정의 얼굴은 예전보다 조금 더 수심에 잠긴 듯 했지만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매우 부드러웠다.“이 중에는 저와 연희 씨 오빠의 몫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경서가 부탁한 선물도 함께 넣어놨어요... 그리고 어르신이 연희 씨를 위해 준비한 것도 있어요. 연희 씨, 연희 씨가 우리 집에 크게 실망한 건 알지만 이 세
최민정이 떠나고 대략 5분 후, 조은혁이 돌아왔다.조은혁이 막, 별장 로비에 들어서자 장씨 아주머니가 살금살금 걸어와 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방금 심씨 가문 사모님께서 다녀가셨는데 감정적인 말을 했는지 사모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장씨 아주머니의 말을 듣자 조은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전했다.이윽고 그는 접대실에서 박연희를 찾았다.향명은 오래전에 식어버렸고 박연희는 영국식 비단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멍을 때리고 있었다. 조금 전, 최민정의 방문에 속상했던 것이다.그러자 조은혁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기분이 안 좋으면 드레스는 다음에 입어볼까?”그 말에 박연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노을 아래 그의 잘생긴 얼굴은 옅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매우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박연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가고 싶어요... 저도 예쁜 모습으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박연희를 바라보는 조은혁의 눈빛이 그윽하게 빛났다.이윽고 그는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들은 예정대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후 드레스를 입어보기 위해 웨딩숍으로 향했다.조은혁은 전에 옷을 입어봤기에 VIP룸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며 차분히 박연희를 기다렸다.대략 30분 정도 지나고 박연희는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흰 빛깔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투명한 베일을 머리 뒤로 걷어 올려 우아한 은빛 화관을 드러내었고 양쪽의 가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려 그야말로 인간 세상의 비현실적인 미모를 자랑하였다.그 순간, 조은혁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조은혁의 눈빛 속에는 꿀이 뚝뚝 흘러내렸다.직원들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보고 곧바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렇게 큰 VIP룸에는 그들 둘만 남게 되었고 조은혁은 박연희를 가볍게 안아 거울 앞으로 데려오더니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채 거울 속의 박연희를
그러자 하서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정말요?”박연희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물론이지.”“형수님 말을 따를게요.”바로 그때, 조은혁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그는 들어오자마자 울고 있는 하서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평소 같으면 진즉 한 대 쥐어박았겠지만 지금은 박연희도 곁에 있다. 조은혁은 줄곧 박연희의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기에 하서인에게도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왜 그래? 왜 울고 있어?”그러자 하서인은 난감해하며 등을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박연희는 그녀더러 먼저 나가라고 다독여주었고 그렇게 하서인이 대기실을 나섰다...조은혁은 문을 닫은 뒤 몸을 돌려 박연희에게 물었다.“서인이 도대체 왜 저래? 평소에는 얼마나 털털한 사람인데... 설마 연희 너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저러는 건 아니지?”박연희는 상황이 우스워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주원 씨를 봤대요.”그 말에 조은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잠시 후,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대체 그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거야? 한없이 가벼운 사람인데 헤어져도 아까울 것 없다니까.”박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대표님 말이 맞아요.”그 말에 조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난 왜 네가 날 저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그러자 박연희는 몸을 돌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며 메이크업을 정리했다.“그래요? 느낌이 아니라 저격한 게 맞는데요.”“...”...하서인은 대기실에서 나온 뒤, 주원과 그의 아내와 마주치게 되었다.나란히 걸어가는 그들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고 두 사람은 집안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듯했다... 그리고 하서인을 만난 순간, 주원의 시선이 조금 그윽해졌다.그는 하서인이 입고 있는 붉은빛의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그 영롱한 몸매가 매우 매력적이었다.지금까지도 주원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하서인의 희고 고운 몸은 그의 몸 아래에서 거의 녹아내리듯 싶었
사회자가 멘트를 마치자 심정희와 장씨 아주머니가 나란히 무대에 올라섰다.오늘, 심정희는 며느리를 얻게 되고 장씨 아주머니는 딸을 시집보내게 된다... 양가 어머니는 모두 환한 옷차림에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심정희는 일찍이 과거를 떨쳐냈고 이젠 그저 조은혁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다.장씨 아주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줄곧 대표님과 사모님이 화목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지금 그들은 화목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성대한 결혼식까지 진행하게 되었다...그리고 뱃속에는 사랑의 결실이 들어있었다.장씨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렇게 그녀는 심정희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결혼식장 직원이 차 두 잔을 가져다 놓았고 그들은 자단이 그려진 받침을 정성스럽게 내려놓고 오늘의 새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 하객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그리고 심지철도 멀리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원래 그의 것이어야 하는 자리에 웬 엉뚱한 늙은 고용인이 앉아 부부의 인사를 받게 되는 것은 심지철에게 있어 말로 이룰 수 없는 큰 수치였다.박연희는 이제 정말 자신의 아버지와 인연을 끊은 것이다.도무지 견딜 수 없어 식장에서 나가려던 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심지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한 쌍의 아름다운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는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고 여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 그들의 모습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심정희와 장씨 아주머니는 너무 기뻐 인사를 받기도 전에 그들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그 모습에 박연희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고 조은혁은 좌우에 각각 찻물을 한 잔씩 따른 뒤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양가의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드렸다... 심정희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고 장씨 아주머니도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연신 입을 열었다.“그만 일어나세요.”사모님의 뱃속에는 아직 아이가 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박연희의 눈가가 더욱 촉촉해지고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맞잡았다.이 길을 걸어오면서 그들은 마침내 진정으로 결합하게 되었다.그리고 이날, 하늘과 땅이 그들 사랑의 증인이 되었다.조은혁과 박연희는 영원히 동고동락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갈 것이다....밤이 되고 조은혁은 하객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건네며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마지막엔 소꿉친구들이 직접 나서서 겨우 뜯어말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의 반쯤 안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부축해 6성급 호텔의 프레지던트 허니문 스위트룸으로 데려다주었다.스위트룸 문이 닫히자 조은혁의 취기는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버렸고 그의 눈빛은 전례 없이 맑았다.같은 시각, 박연희는 거실에서 선물을 뜯고 있었다.마침 이지훈이 선물한 값비싼 금장 세트를 뜯고 있었는데... 비싼 것 말고는 다른 뜻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선물이었지만 조은혁은 질투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그는 그 물건을 들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정말 할 말이 없었다.마지막으로 그는 소파에 앉아 매우 시큰둥하게 말했다.“이지훈은 예전에 조은서도 좋아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은서는 여전히 유선우의 아내였어. 그리고 또 얼마 전에 또 날 좋아했잖아... 그 사람은 뭐 다른 사람 아내를 좋아하는 게 취미래?”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은 그저 아내가 그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그러자 박연희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이지훈 씨가 저를 좋아할 때 저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라 솔로였는데요.”“그럼 후회돼?”조은혁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박연희를 가볍게 품 안으로 끌어안더니 그녀의 뒷덜미를 잡은 채 그녀에게 매달려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한 후에야 조은혁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후회해도 늦었어. 넌 이미 조은혁의 아내가 되어버렸어.”박연희는 그의 유치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리고 박연희는 원래 남은 선물은 내일 뜯어보고 오늘은 먼저 샤워를 하고 화장을 지우려 했지만 그때, 손에 있던 상자에서 귀한
같은 시각, 호텔 복도에는 또 한 쌍의 옛정이 맺힌 커플이 있다.임지혜와 차준호는 호텔 안뜰의 협로에서 만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그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졌고 온몸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직 임지혜를 볼 때만은 약간의 진심을 드러내곤 한다.“지혜야, 오랜만이다.”차준호는 평소에 이런 인사치레를 하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는 인사 치렛말 외에는 선을 넘지 않는 말이 없었다.반성훈이 세상을 떠난 지도 몇 년이 되었다.그리고 그도 아내와 이혼한 지 오래되어 그의 신변에 더 이상 장애가 될만한 것이 없었다. 하여 차씨 집안의 모든 것들이 이제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 그녀가 B시에 돌아온 후,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 곁에 나타나지 않았고 또한 조은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며 매년 임지혜의 생일 때가 되면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여 그녀에게 보내곤 했다.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오늘 밤, 차준호는 더 이상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었고 더 이상 허송세월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여기에서 임지혜를 기다렸던 것이다.늦가을, 임지혜는 또다시 차준호와 마주 보고 있다.한참 만에야 임지혜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오랜만이네.”그녀의 담담한 미소는 너무나도 평화로워 옛날의 불행 따위 보이지 않았고 단지 눈꼬리 한 군데의 가느다란 주름이 그녀가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상징하고 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것 같은데 말이다.차준호는 임지혜의 등 뒤에서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그 말을 내뱉었다.“만약 결혼하는 사람이 너였다면 난 분명 엄청 기뻤을 거야.”오랜 세월이 흐르며 두 사람 모두 셀 수 없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짧은 몇 초와 몇 마디 말.차준호는 사실 그녀의 냉담함과 거절을 느낄 수 있었다. 똑똑한 남자라면 진즉 그만두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바랬던 순간인데 차준호가 어떻게 이렇게 얻기 힘든 기회를 놓칠
서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박연희를 되찾은 그 날의 장면도 오늘 밤처럼 떠들썩했었다. 온 심씨 집안에 갖가지 장식품들을 걸어놓고 집안 곳곳에 유리 등을 걸어놓았었다...그렇다. 그 유리 등은 상당히 아름다웠다.추억에 잠긴 심지철이 서 비서를 불러와 유리 등을 가지고 놀고 싶다며 덤덤하게 한 개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서 비서는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후, 심지철에게 차를 한 잔 끓여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잊으셨군요... 저택 안의 유리 등은 지난번에 모두 깨뜨렸습니다.”“깨버렸다고? 한 개도 남기지 않았단 말이야?”서 비서는 차마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하여 심지철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외로움을 느꼈다.시간이 흐르니 그도 의외로 외로워진 모양이다.박연희의 일 때문에 몇 년 동안 심경서와 암암리에 대립했고 심철산 부부도 그와 멀어졌으며 김이서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힘에 부쳐 눈을 감자 고용인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심윤 도련님께서 또 열이 나십니다.”그러자 심지철은 곧바로 슬픔에서 빠져나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또 열이 나? 애 엄마는?”그러자 고용인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밖에서 접대하고 계십니다. 아마 사모님들과 카드놀이를 하는 것 같네요.”심지철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심경서 일이 터지고 김이서는 항상 밖에서 나돌아다니며 접대를 다녔고 오늘은 카드놀이에 내일은 춤을 추는 일상을 반복했다... 사실 그녀의 소문을 들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눈감아 줬을 뿐이다....새벽 2시 반.일련의 정밀 검사 후 심윤은 급성 혈액 질환으로 초보적인 판정을 받았고 가장 좋은 치료법은 골수를 이식받는 것이다.혈액 병...심지철은 여러 산전 수고를 겪으며 늘그막에 또 타격을 입자 뜻밖에도 갑자기 복도 벤치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밤바람이 한바탕 몰아치며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그때, 멀리서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