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서의 아내...박연희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들어오라고 해주세요.”이윽고 입구로부터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다.김이서는 두 명의 여비서를 데리고 들어오며 결코 약하지 않은 기세를 드러냈다. 박연희의 머리를 누르려고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박연희 역시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기에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조민희에게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민희 혼자 그리고 있어. 엄마는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올게.”그러자 조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하게 답했다.“착하게 있을게요.”사랑스러운 조민희의 모습에 박연희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조민희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스러웠던 박연희는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었다.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에 김이서는 마음이 쓰라려 왔다. 그녀는 원래 남편의 혼을 빼앗아간 여인이라면 분명 남편과 내통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박연희의 눈에서는 심경서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직 조은혁의 딸을 보며 온유한 표정을 짓고 있다.김이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비서에게 먼저 나가라고 당부한 뒤, 사무실에 아무도 없게 되자 박연희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저도 경서 씨와 딸이 하나 있는데 이제 세 살이에요... 저 아이보다 조금 어리겠네요.”박연희는 커피 머신으로 걸어가 커피를 끓였다.그녀는 김이서의 취향을 묻지도 않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끓였다.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작은 소리와 박연희가 가볍게 말했다.“당신이 경서 씨와 결혼할 때, 전 줄곧 외국에서 지내고 있었죠. 인제 보니 축의금을 내지 못했네요.”그녀는 어른다운 모습을 하고 여전히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박연희와는 달리 김이서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 추태를 부리며 박연희에게 따져 물었다.“경서 씨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 왜 능청스럽게 모른 척하시는 거죠?”그러자 박연희는 눈을 흘기며 반박했다.“그럼 당신이 경서 씨와 얘기해야죠. 전 당신들의 결혼생활을 위해 외
심경서의 점잖은 얼굴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박연희는 혹여나 그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다시 한번 강조했다.“4년 전, 제가 심씨 집을 떠날 때 전 이미 심씨 집과 의절했습니다.”이 말이 나오자 심경서는 바로 미쳐버리고 말았다.그는 옆에 있는 자신의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박연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의절할 수 있어요? 박연희, 어떻게 심씨 집안과 인연을 끊을 수 있습니까? 제 몸에는 아직도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고, 당신의 몸에는 어르신의 피가 흐르고 있고, 당신의 아들 진범이도 심씨 집안의 혈연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와 인연을 끊을 수 있죠?”박연희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예전 같으면 아마 불공평한 운명에 대해 분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박연희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으니 운명에는 공평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경서는 심씨 가문의 적손이고 심지철이 일념으로 키운 사람이다. 그리고 심경서와는 달리 박연희는 단지 충동의 산물일 뿐이다.그러나 그녀는 기뻐해야 한다. 박연희에게는 진범이와 조민희가 있으니까. 박연희는 항상 마음속으로 감격스러운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심씨 가문을 대하는 일이 훨씬 덤덤해 보였지만 그녀가 담담할수록 심경서가 그녀를 내려놓을 수 없음을 더욱 드러냈고 심씨 가문은 더욱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박연희를 잊을 수 없는 것도 그들이고 그녀를 강제로 가게 한 것도 사실은 그들이다...박연희와 심경서는...박연희는 예전의 아름다웠던 사람들과 대치하게 되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 역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그러자 심경서가 천천히 눈시울을 붉혔다.그런데 그때,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심경서의 얼굴이 돌아가고 이내 김이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서 씨, 그럼 당신은 나에게 떳떳합니까? 우리 몇 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당신의 마음속에는 도대체 뭐예요?”심경서는 화끈거리는 한쪽 뺨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당신은 연희 씨를 찾으러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떠날 때,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밤에 박연희는 조진범의 숙제를 검사하고 있었다.조민희는 샤워를 마치고 아기 젖소 잠옷을 입은 채 엄마 침대에 앉아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말랑한 목소리로 오늘에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기 시작했다.“오늘 엄청 무서운 아줌마가 갤러리에 찾아왔는데 엄마랑 싸웠어요. 게다가 100만 원을 줄 테니 저를 떠나라고 하고 저와 진범이 오빠도 잡아가겠다고 협박했어요...”말을 이어가며 마음이 괴로워진 조민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전 잡혀가기 싫어요.”“전 엄마 옆에 있을래요.”...한편, 조은혁은 H시에 머물고 있다.하서인과 주씨네 도련님의 일은 거의 다 처리했지만 여전히 마무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이 남아있었다.H시의 한 6성급 호텔의 창가 앞.조은혁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아이를 달래주었다.“아빠가 있잖아. 민희는 잡혀갈 일 없어.”그러자 조민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며 아빠에게 애교를 부렸다.“나 아빠 보고 싶어요.”전화 건너편, 조은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거짓말이다.녀석은 집에 갈 생각도 없는데 인제 와서 아빠가 보고 싶다니... 어쨌든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로서의 다정함이 가득했지만 그가 전화를 끊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박연희의 둘째 아이가 생각났다... 은희.그 아이를 낳았다면 은희도 그와 많이 닮았을 것이다.하지만 아쉽게도 만약이란 건 없다...조은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넋을 잃었다... 사실 저번에 박연희한테 갔을 때 자세히 훑어봤는데 그녀의 아파트에는 남자 슬리퍼도 없었고 남자가 출입했던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그녀는 아직 싱글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조은혁이 오해할 때, 그녀는 해명하지 않았다.분명히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 응어리가 남아있어 그녀는 아직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조은혁은 박연희와 함께하고 싶었다. 꿈속이라도
금요일에 박연희는 접대가 잡혔는데 다름 아닌 황 사모님의 초대였다.약속대로 저녁 7시에 도착한 그녀는 룸 입구에서 아는 사람을 보았다.조은혁과 하서인.1주일 동안 못 본 사이에 하서인은 많이 말랐고 조은혁의 옆에 얌전하게 앉아 세상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혁은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황 사모님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황 사모님은 하서인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제수씨라고 불렀다.그때, 마침 박연희가 룸 안으로 들어왔다.그녀의 등장에 탁자 하나에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두 잠자코 입을 다물었고 황 사모님도 남편의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며 다급히 말을 바꿨다.“아니지.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제수씨네.”장면은 매우 미묘하고 끔찍했다.박연희도 물러서지 않았고 황 사모님의 옆에 앉아 시원시원하게 입을 열었다.“조 대표님과 저는 4년 전에 이혼했고 앞으로 결혼과 여자는 서로 상관없는 관계입니다.”오늘 저녁은 조은혁이 마련한 자리이다.하서인이 주씨 가문에 엮이는 바람에 현재 그녀의 처지는 예전의 임지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늘 저녁 식사에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 꽤 있으니 조은혁은 하서인을 그 사람에게 소개해주어야 한다.그런데 뜻밖에도 황 사모님은 박연희를 대신하여 마음에 불평을 품어 그녀를 불러온 것이다.사람이 많으면 수다스럽기 마련이기에 조은혁은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웠다.게다가 그는 박연희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씬한 손가락 사이에 하얀 담배를 낀 채 불을 붙이지 않고 박연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이런 자리에서는 하서인도 감히 함부로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 못하고 잠자코 가만히 앉아 있었다.다른 사람들도 조은혁이 정말 하서인의 사촌 오빠인 것을 모르고 있다.처음부터 끝까지 박연희는 조은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황 사모님과 잡담을 나누었지만 조은혁의 검은 눈동자는 계속하여 노골적으로 박연희를 좇았다. 식사가 끝날 무
차 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한참이 지나서야 박연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하서인에 대해 거짓말한 게 재미있었어요?”조은혁이 몸을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의 성깔도 없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너도 남자친구를 지어내서 나를 화나게 했잖아. 그 사람이... 정말 네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어?”박연희가 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그녀는 이례적으로 그에게 답변을 주었다.“그 사람은 이지훈이에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로티에 있을 때, 지훈 씨가 저를 많이 도와줬고 귀국한 후에도 계속 연락했고요.”조은혁은 예민한 남자이다.박연희는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지훈에 대해서는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결국, 조은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지훈이 너에게 구애할 때, 설렜어?”박연희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를 몰고 바깥의 어둠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다른 나라에서 보살핌을 받고 또 서로 이혼을 했으니 쉽게 동병상련의 느낌이 들죠... 설렜던 건 사실이에요.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요.”그러나 B시로 돌아온 뒤 박연희는 줄곧 조은혁에게 시간을 빼앗겼다.그날 밤 주방에서 서로 어루만지고 키스를 하며 그녀는 이지훈을 거절했다.물론 박연희는 이를 말하지 않았다. 이지훈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조은혁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해 그녀가 가졌던 충동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희미해지며 꿈처럼 느껴졌다.밤이 깊어가고...힘없는 가로등 불빛 아래 아름다운 여인이 길목에 서서 손님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아름다운 붉은 입술에 가슴이 깊게 팬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표정 속에는 생활에 쫓기는 듯한 낭패감을 가지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연희가 급정거를 했다.박연희는 차에 앉아 걷잡을 수 없이 그 여자를 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여자는 진시아였다.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날 때, 진시아는 초라하기 그지
말이 끝나자마자 조은혁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박연희의 손에 쥐어져 있는 차 키를 가져가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진범이 지금 병원에 있대. 빨리 가자.”박연희는 묻지도 않고 그를 바짝 따라갔다.지금, 이 순간에는 진시아와 하서인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진범이, 그들의 아들만이 우선이다. 심지어 조은혁은 밤에 술을 마신 것도 잊은 채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박연희도 뒤따라 차에 올라탔다.안전벨트를 매고 있을 때, 조은혁이 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에는 심지철에게 전화한 것이다.그는 대표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어르신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직접 심지철, 그의 이름을 불렀다.“심지철, 진범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나, 조은혁 심씨 가문과 목숨을 걸고 싸울 거야.”전화 건너편의 심지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조은혁은 휴대폰을 시트에 내동댕이쳤다.가속페달을 밟자 BMW는 빠른 속도로 병원을 향해 질주했다.차창이 내려오고 차가운 밤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박연희는 그의 옆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길목의 빨간 등불에 따뜻한 손바닥 하나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지금, 박연희는 이 온기가 필요했다...30분 후, 차는 입원실 아래층에 주차되었고 B시 병원의 최고급 병동에서 조은혁과 박연희는 그들의 아들인 진범이를 보게 되었다. 소파에 멀쩡히 잘 앉아있었지만 소매는 걷어 올리고 팔꿈치에는 흰색 테이프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방금 피를 뽑은 것이 분명했다.병실 입구, 조그마한 불빛들이 한곳에 모여있었다.진범이가 작은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조은혁은 안색이 극도로 안 좋아 보였지만 진범이에게 다가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나지막이 물었다.“피 얼마나 뽑았어?”그러자 진범이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럽게 답했다.“500mL요.”“500mL?”조은혁은 조용히 다시 한번 반복하고는 이내
김이서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어려서부터 명문 출신으로 넉넉한 조건으로 살아오던 그녀가 어느 날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큰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의 시댁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그녀는 잠깐 넋을 잃고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당신은 심씨 가문이 당신과 맞설 것이 두렵지도 않아요?”“당연히 두렵죠.”조은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문짝에 내리치자 김이서의 머리에는 즉시 커다란 혹을 부풀어 올랐다.“당신 정말 법이라는 걸 모르는군요!”조은혁은 그녀의 머리를 꼭 누르고 심지철을 바라보며 반문했다.“법이란 바로 당신들이 내 아들을 데려와 동의 없이 그의 피 500mL를 뽑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심지철의 법이냐고요?”말을 마치자 그는 김이서를 내던지고 바로 심지철의 코를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다음에 또 이러면 피를 흘리게 되는 건 심경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 심지철일 겁니다. 나 조은혁, 당신에게 아무리 수단과 권세가 많아도 당신 종손이 죽든 살든 그건 저, 그리고 조진범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당신이 내 아들의 피를 더 원한다면 나 조은혁, 제일 먼저 심씨 가문을 뒤집어엎을 것이니 각오하세요... 어쨌든 처음도 아니니까.”...심지철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고 폭풍우의 전야가 닥쳐왔다.그러나 조은혁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비꼬았다.“어르신의 몇십 년간의 위풍은 확실히 흔들리기 쉽지 않죠. 하지만 뒤처리를 깨끗이 했는지 잘 생각해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약점이라도 잡히면 어쩌시려고요.”백열등 아래, 심지철이 조은혁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조 대표, 정말로 나와 맞서려는 거야?”“어르신도 이제 노망들었군요. 당신들이 먼저 내 아들을 잡아서 500mL의 피를 빼앗아간 거잖아요. 내가 당신 심씨 가족을 잡아서 피를 흘린 게 아니라... 하지만 만약 어르신께서 이 책임을 꼭 제 머리에 덮어주신다면 사실 저도 개의치
심지철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심지철의 입가는 계속하여 경련을 일으켰다. 당시 김이서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은 그녀가 예의를 지키고 도덕이 있는 여자라 여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100억에 박연희를 없애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참다못한 심지철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화를 냈다.“이 멍청이 같으니라고.”“저도 심씨 가족을 위해서입니다.”김이서가 울먹거리며 변명하자 참다못한 최민정이 입을 열었다.“연희 씨도 결국 아버님의 혈육인데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김이서는 마음이 답답했지만 남들 앞에서 그녀의 고뇌를 발설하기 싫어서 입술을 꼭 오므리고 고집을 부렸다.그러자 조은혁은 그녀를 향해 냉소를 터뜨렸다.“100억이라, 당신 눈에는 제가 거지로 보입니까?”조은혁은 진심으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그는 지갑에서 돈다발을 꺼내 김이서의 얼굴에 굴욕적으로 내동댕이쳤다. 날카로운 지폐가 그녀의 잘난 체하는 얼굴에 핏자국을 두 줄 그렸다.그러자 김이서는 얼굴을 가리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다...“다음에 또 그런다면 당신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 각오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진범이를 안아 올린 뒤, 다른 한 손으로 박연희를 끌어당겼다.깊은 밤.바깥 복도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고 오직 세 식구의 또렷한 발걸음 소리만이 점점 멀어져 갔다...병상에 누워있던 심윤이가 울기 시작했고 김이서는 얼굴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아들을 안으며 달래주었다.“괜찮아. 괜찮아.”그러나 심윤은 그녀의 품을 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이리저리 몸을 꼬며 눈 속에는 말로 이룰 수 없는 공포감이 깃들어 있었다.김이서는 눈을 들어 심지철을 바라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혈액은행에는 피가 부족하고 이런 혈액형은 어디에도 없어요. 다음에 심윤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어르신께서 박연희에게 다시 말씀하셔서 설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뭘 설득해?”“진범이 더러 윤이의 혈액은행 역할을 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