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조은서가 말했다. “지혜가 사업을 B시로 옮기기로 했어요.”반 대표와 친분이 있던 서미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미연은 조은서의 말을 듣고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임지혜 씨가 B시로 오게 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언제든지 말해줘요.”조은서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고맙습니다.”서미연은 괜찮다는 듯 손짓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때 고용인이 들어와서 서미연에게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고 말했다. 서미연은 조은서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말했다. “이분은 제가 최근에 친분을 쌓고 싶던 분이에요. 몇 번을 권해서야 겨우 얼굴 한 번 비춰주셔서 잠시 실례하겠어요. 여기서 편하게 계세요.”조은서는 작게 웃으며 그녀를 보냈다. 서미연이 자리를 뜬 다음 조은서는 뒤뜰을 거닐며 여유롭게 산책했다. 거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용했다.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뜻밖에도 유선우를 보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휠체어의 무늬는 별빛이 반짝이는 밤이어서 그는 마치 어둠 속에 앉아 있는듯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선명하고 잘생겼다. 그는 예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았다...두 사람은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조은서는 주변의 모든 소란을 잊어버렸다.그녀의 얼굴 근육이 멈출 수 없이 떨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했던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심장이 요동쳤다. 웨이터가 오면서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고 유선우는 샴페인을 한 병 들어 조은서에게 한잔 마실지 물었다. 조은서는 넋이 나간 채 고개를 저었다. 유선우는 강요하지 않았고 웨이터가 떠나자 그녀를 살펴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잠깐 일 보러 온 거야? 아니면 오래 있으려고?” 조은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유선우를 바라보며 유선우가 방금 왼손으로 샴페인을 들었고 지금도 샴페인을 들고 있는 것은 여
조은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버렸고 이안이도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조은서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선우 씨, 모든 건 그때 당신이 선택한 거예요. 그러니 후회하지도 말고 이렇게 모호한 말도 하지 말아요.”그녀는 문득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제 곁에는 다른 사람이 있어요.”유선우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을 믿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자신의 귀도 믿지 못했다...조은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아주 정상적이잖아요? 그 사람은 나를 잘 돌봐주고 아이들을 좋아해요... 저는 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면 말이 잘 통한다고 느꼈어요.”그녀의 말은, 그녀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유선우는 오랫동안 넋이 나가 있다가 작게 물었다.“누군지 말해줄 수 있어?”조은서가 대답했다.“도영 씨에요.”이 대답은 유선우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조은서와 헤어진 후 그녀가 허민우를 선택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임도영을 선택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게 바로 자신이 원하던 게 아닌가, 미래에 누군가가 조은서를 아껴주고 돌봐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찢기고 있었다.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이랑 함께인 것을 원하는 남자는 없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 여행하고 함께 자고 부부 사이의 밤일도 할 것이고 언젠가는 아이도 낳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와 조은서의 모든 것이 희미해져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그는 조은서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유선우는 머리를 숙이고 오른손을 휠체어에 걸치고는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임도영 씨는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음악을 하는 사
서늘한 가을바람에 조은서는 자신의 어깨를 덮은 남성 외투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좋은 퀄리티의 원단이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에 닿았을 때 그녀는 임도영의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녀는 머리를 저으면서 부정했다.“아니에요.”임도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몸매를 가진 그녀는 임도영에게 안기면서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아주 잘 어울렸다.유선우는 휠체어에 앉아 그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는 늘 끝없는 어둠이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는 기대가 사라진 이 순간, 휠체어의 무늬까지도 한없이 처량해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조은서가 임도영의 품 안에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들이 다정함을 나누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것이었던 모든 게 다른 사람의 것이 된 것을 눈으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도영은 조은서와 함께 차고에 있는 검은색 캠핑카로 향했다. 조은서가 차에 올라타자 임도영은 차량의 지붕을 받쳤다. 큰 몸집을 약간 숙이고 있는 그의 눈은 애정으로 가득 찼다. “일찍 들어가서 자요. 내일 연락할게요.”조은서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투를 내밀었다. “사람들 만나러 가는데 셔츠만 입으면 보기 안 좋아요.”임도영은 외투를 받아 입고는 차 안에 있는 조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밤 연회용으로 연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우아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성숙한 남자로서 그는 당연히 그녀에게 더 많은 욕구가 있었지만, 그에게 조은서는 함부로 대할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임도영은 조은서를 어릴 적부터 알았기에 그녀에 대한 감정은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를 아끼는 마음도 있었다. 당연히 그는 지금의 조은서를 더 좋아했다. 지금의 조은서는 성숙한 여자의 매력이 넘쳤다. 임도영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조은서는 약간 놀랐지만 피하지 않았다. 살짝 놀라고 나서 그녀는
조은서가 운전 기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차를 세워주세요.”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가에 세우고 고개를 돌려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조은서 씨, 무슨 일이에요?” 조은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걷고 싶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운전기사는 뒤를 돌아보고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음을 짐작하여 자연스럽게 말했다. “예전에 살던 곳을 다시 보고 싶으신 거군요.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조은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운전기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알겠다며 차에서 내려 조은서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말했다. “조은서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임도영 씨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더 얘기하지 않고 몸에 걸친 가디건을 가볍게 여미며 그 쓸쓸한 집으로 걸어갔다.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조은서의 하이힐이 바닥 타일 위를 밟으며 맑고 외로운 소리를 낸다. 마치 이 저택처럼 쓸쓸했다. 그녀는 문 앞에 도착해 고개를 들어 ‘진이 정원'이라 쓰인 글자를 바라봤다. 이 저택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어린 시절이 있다.그리고 이 저택에는 그녀와 유선우가 함께했던 제일 좋은 순간들도 있다. 그들이 결혼한 여러 해 동안, 가장 좋았던 순간들은 사실 이혼 후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진짜 부부처럼 함께 생활했으며 매일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유선우의 따뜻한 품에서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느꼈다. 그녀는 그때의 다정함과 그때 깊이 새겨진 기억이 없었다면 아마 이토록 잊기 힘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조은서는 더는 과거에 잠기고 싶지 않아 돌아서려는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유선우가 보였다. 유선우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마치 이 씨 저택에서처럼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한참 지나, 유선우는 조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왜 왔어? 임도영 씨와 사귀고 있다면서? 행복한
그녀가 몸부림쳤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유선우는 그녀를 굳게 붙잡고 있었는데 그의 왼손 힘이 엄청났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다...조은서는 그가 자극을 받았는지 정말 몰랐다. 유선우는 그녀를 살짝 풀어주고 매우 진지한 태도로 사과도 했다.“미안해, 조은서. 방금은 내가 실례했어.” 조은서는 입술을 떨고 있었고 두 발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유선우를 한 번 바라보고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차준호에게서 걸려온 예상치 못한 전화였는데 한번 만나자는 얘기였다. 그는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매우 공손하게 말했다.조은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동의했다. 전화를 끊은 후 유선우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차준호랑 가깝게 지내?”“가끔 연락해요.” 조은서가 가볍게 대답했다.그녀는 원래 상태로 회복하고는 유선우를 보면서 갑자기 1년도 넘은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이준이를 임신한 지 4개월쯤 되었을 때인데 임지혜와 반성훈이 결혼식을 올렸었다.결혼식 전에 그녀는 유선우가 오지 않을까 계속 기다렸었다. 만약 유선우가 하와이로 와서 그녀가 임신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녀는 유선우를 보지 못했고 마음이 완전히 식은 순간은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임지혜의 결혼식이 끝난 후, 그녀도 더는 유선우가 오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서서히 이 감정에서 벗어나면서 며칠 전 임도영이 고백하자 그 고백을 받아주었다...임지혜를 떠올리며 조은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 대표가 세상을 떴어요. 지혜가 반 대표의 아이를 데리고 B시로 돌아와서 생활할 계획이에요. 여자 혼자서 사업하기 정말 어려워요. 차준호 씨와 만나는 것도 괜히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유선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했다.“두 사람이 결
차 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며 차 안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비좁고 숨 막히는 작은 공간 속, 두 사람의 체취가 필사적으로 상대의 몸을 파고들며 서로를 꼼짝없이 차 안에 가둬두었다...하지만 가장 비참한 건, 조은서는 분명 유선우의 옆에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유선우는 차창을 반쯤 열어두고 조용히 밖을 내다보았다.“아이들은 왜 안 데려왔어? 이준이도 이제 두 살 됐겠네.”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상황이 들이닥치니 조은서는 결국 눈을 붉히고 말았다.유선우는 진즉 알고 있었다.조은서가 임신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준이의 존재를. 그런데도 유선우는 여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도 모르고 조은서는 우습게도 줄곧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유선우만을 기다려왔다.하지만 조은서는 더 난처해질 것이 뻔했기에 이런 걸 유선우에게 직접 물어볼 리는 없다. 조은서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되물었다.“그렇다면 원하는 게 뭐예요?”그러자 유선우가 무뚝뚝한 얼굴로 덤덤하게 대꾸했다.“난 당시 우리 사이에 맺었던 계약이 있는 거로 기억하는데. 만약 임신하게 되면 그 아이는 내가 데려갈 거라고. 만약 남자아이라면 유씨 가문의 가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배양할 거라고 말이야.”조은서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유선우를 노려보며 의지와는 달리 계속하여 떨려오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또 절 협박하는 거예요?” 유선우는 속상해하는 조은서의 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물었다.“만약 네가 임도영과 헤어져야 아이를 돌려준다면... 조은서, 넌 어떻게 선택할 거야?”하지만 조은서가 선택하기도 전에 유선우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 어둑어둑 내려앉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장난이야. 앞으로 나도 새로운 가정이 생기고 아이를 가질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널 곤란하게 하겠어? 조은서, 그 계약서는 그저 장난이었어. 맞아... 그냥 너한테 장난친 거야.”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선우는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은서야, 난 그저 죄
늦은 밤, 깜깜하게 드리워진 어둠이 현관의 쓸쓸함을 한층 더해주었다.아파트로 돌아온 조은서는 현관문에 기대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은서의 다리는 아직도 저도 모르게 후들거렸다...B시로 돌아오면 유선우와 마주치게 될 거라는 건 진즉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유선우가 진이 정원에서 했던 모든 행동은 조은서를 더욱 물러서게 하였다.여자의 직감이 지금의 유선우는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주고 있다. 애초에 B시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준이의 비염이 너무 심각해 하와이에 계속하여 머물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오랫동안 넋을 놓고 있던 조은서가 손을 뻗어 등불을 켰다.이윽고 환한 등불이 그녀의 작고 예쁜 얼굴을 밝게 비춰주었다. 참으로 희고 부드러운 얼굴이다. 비록 두 아이를 낳은 엄마이지만 세월의 우대라도 받은 것인지 조은서의 용모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조은서는 한참 후에야 몸을 곧게 펴고 와인셀러로 다가가 문을 열고 샴페인 하나를 꺼냈다.술 한잔하기 딱 좋은 밤이다.잔에 따라 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임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따가 접대가 있어 호텔에 늦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 조은서더러 먼저 자라고 알렸다.그래도 애인 사이인지라 조은서는 간단히 응하고는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며 자연스럽고도 다정하게 답했다.이윽고 전화 너머로 임도영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알아요.”하지만 남자들 사이에 술을 적게 마실 수 있는 접대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임도영도 이젠 술을 마시는 것이 적응되었는지 술고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조은서는 통화를 마친 뒤, 와인잔을 들고 테라스의 작은 바로 가 자리에 앉았다.이렇게 한가한 날도 조은서에겐 흔한 게 아니었다.평소에는 아이를 돌보랴 THEONE의 경영을 돌보랴 바삐 돌아쳤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충실하게 보냈기에 조은서는 이러한 바쁜 생활에 감사함을 느꼈다. 덕분에 유선우
이윽고 차에 시동이 걸렸다...유선우는 줄곧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가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팔만 멀쩡했다면 아무리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하더라도 유선우는 아마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 조은서에게 다시 그의 곁에 돌아와달라고 빌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만일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이튿날, 조은서는 차준호와 만나기로 약속했다.원래는 커피만 조금 마시며 몇 마디만 나누다가 갈 예정이었지만 차준호는 통화 중에 기어코 함께 식사하자며 고집을 부렸다.“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젠 제 체면도 생각해주지 않는 거예요?”결국, 그들은 고급 클럽에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하지만 식사를 할 마음이 없었던 차준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오직 조은서에게 집중했다.조은서도 차준호가 자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를 통해 임지혜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조은서는 식전 술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준호 씨, 저와 만나려 했던 이유는 저도 알아요. 지혜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죠? ... 네, 반성훈 씨가 떠난 건 맞아요. 하지만 준호 씨와 지혜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에요. 오랜 시간이 흘러 지혜에게도 새로운 연인이 생기겠지만 그 사람이 준호 씨가 될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이건 제가 준호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차준호는 여전히 임지혜와 한번 만나고 싶었다.조은서는 와인잔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이제 그럴 필요가 있나요? 차준호 씨... 당신이 지혜한테 가져다준 상처를 제외하고도 당신은 유부남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 지혜 좀 그만 괴롭혀요. 지혜는 이미 당신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어요.”조은서는 한숨에 해야 할 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과하고 자리를 떴다.차준호도 마음속으로는 조은서가 더 이상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