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면 진별이가 유치원 입원 테스트를 받는 날이었다.진은영이 유치원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유이준이 굳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진은영은 이런 사소한 일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아 알겠다고 했다.이제 막 전화를 끊었는데 하연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다.“어제 오후에 이준이 진별이랑 비서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왔었어. 아무 말 없이 영양제를 두고 가더라고. 딱봐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어.”진은영은 멈칫하고 말았다.“지금까지 내가 너의 옆에 없어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몰랐어. 난 자격 없는 엄마라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는 못해도 이 한마디는 해야겠어. 이준이 아직 너한테 마음 있는 것 같아. 괜한 자존심을 부리는 거지. 남자아이가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막 괴롭히고 그러잖아. 존재감을 발휘하려고... 난 이준이가 딱 그 남자아이 같아.”진은영은 듣고서 시무룩해하더니 말했다.“나 이제 곧 준식 씨랑 결혼해. 이제부터 이런 말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어.”하연은 하려던 말을 꾹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10분 뒤, 유이준이 진별이를 데리고 도착했다.유이준은 차에서 기다리는 대신 한 손으로 진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를 하연에게 건넸다. 하연은 눈치가 보이는지 진은영을 힐끔 쳐다보았다.유이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어제 농장에서 바로 따온 거예요. 드셔보세요.”하연은 그제야 과일바구니를 받았다.이때 유이준은 검은색 코트에, 가슴에 브로치까지 한 진은영을 쳐다보았다. 파마머리를 하고 있어 평소보다 더욱 여성스러워 보였다. 딱봐도 정성껏 꾸민 모습이었다.유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다.“예쁘네요. 이래야 사모님처럼 보이죠.”칭찬 속에 씁쓸함이 묻혀있었다.진은영은 못 들은 척 진별이의 손을 잡았다. 진별이는 반응이 어찌나 빠른지 바로 다른 한 손으로 유이준의 손을 잡는 것이다. 세 가족이 드디어 모인 것이다.유이준은 진은영 모녀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이준이 이 유치원에 큰돈을 들였
이 순간의 감동은 그들이 여러 번 사랑을 나눴을 때보다 더 깊었다. 유이준은 여러 번 그녀를 도와주었고 금전이며 자원도 아낌없이 쏟아부었지만 이렇게 따뜻한 온정을 보여준 적은 드물었다. 진은영은 원래부터 울컥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유이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 같았고 진짜 부부처럼 보였으며 진별이의 완벽한 부모처럼 보였다. 한편 서정숙은 진별이에게 그림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지를 내주었다. 진별이는 원장의 품에 기대어 반짝이는 눈망울을 빛내며 말했다. “이건 병아리, 이건 오리...” 서정숙은 눈물을 머금고 칭찬했다. “아가야, 정말 똑똑하구나.” 진별이는 자랑스러움 가득한 얼굴로 유이준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귀여운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빠는 마음이 녹을 것만 같았고 이렇게 완벽한 존재가 자기 아이란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별이에 반한 서정숙은 진별이를 학교에 남겨두기로 했고 유이준과 진은영에게 오후 4시 20분에 아이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는 유이준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진별이를 저희에게 맡기세요, 유 대표님! 여기 음식 안전과 신변 안전은 절대 문제없어요...” 유이준은 믿었다. 음식은 그가 유기농 농장에서 직접 들여온 것이고 학교의 경비도 YS 그룹 보안 회사의 최정예 요원으로 교체했으니 진별이는 이곳에서 아주 안전할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교사가 진별이를 반으로 데려갔다. 진별이는 세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빠, 잘 가요. 학교 끝나면 꼭 데리러 오세요.” “아빠...” 유이준은 고개를 돌려 진은영을 바라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 “진별이가 엄마가 있다는 걸 깜빡했나 봐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은영의 입술은 유이준에게 점령당했다. 부드럽고 소중하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이. 진은영은 눈을 뜬 채로 유이준을 마주 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유이준은 한 번도 그녀를 이렇게 키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살며시 흘러내렸다. 짠맛과 함께. 그가 이내 그녀를 놓아줄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감싸 안고는 미친 듯이 더 깊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거칠고도 강렬한 키스는 그녀의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듯했다. 눈물은 계속 쏟아졌다. 한참 뒤, 유이준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진은영은 정신이 멍해져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악당 같은 남자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 날 신고해도 돼요. 아니면 한 대 때려서 화풀이해도 되고.” 몇 초 후,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짝!’ 소리가 맑게 울렸다. 진은영의 가슴은 격렬히 뛰었고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다. 번진 립스틱과 번진 아이라인, 이마에 붙은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마치 한참 울고 나온 여자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유이준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면에 차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손해 볼 줄은 모르네요?” 진은영은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러면 당신 혀를 물어버릴 거예요.” 유이준은 갑자기 그녀를 다시 잡아당기더니 거칠게 입을 맞췄다...진은영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은 뒤엉키듯 몸을 밀쳤다... 결국 그녀는 그의 품에 파묻혀 울며 소리쳤다. “유이준 씨, 당신은 정말 나쁜 놈이에요! 진별이의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했잖아요. 저를 외도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저 결혼해야 돼요!” “나쁜 놈, 저 결혼해야 된다고요!” “알고 있어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유이준은 진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