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으면서 대체 왜 속였어요?”...진은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조진범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정말 개자식 같으니라고.”조진범은 말없이 진은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통유리 너머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새하얀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바닥 대부분의 부부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은영 씨, 당신도 이익을 위해 유이준을 찾아갔고 그와 자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가 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진은영이 숨을 몰아쉬며 언성을 높였다.“이게 과연 똑같을까요, 조진범 씨? 저는 유이준 씨와 약혼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라고요.”조진범은 불을 붙인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몸을 기울여 진은영을 바라보며 더욱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저와 진안영의 혼약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저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 빼고는 전부 당신의 욕심 아닙니까? 진안영은 진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도 않고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직업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 진은영의 능력으로 충분히 당신의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고요. 하지만 당신들은 굳이 진철수와 끝판을 내기 위해 진안영을 나한테 보냈죠.”“진은영 씨, 우리 사실 같은 부류야.”...진은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깥세상은 유난히 푸르고 아름다웠다.그리고 조진범은 말을 마치고 어느샌가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황급히 몸을 돌려보자 과연 낯익은 훤칠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진범과 매우 비슷했지만 어쨌든 사촌 사이이니 여전히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조진범의 용모는 조금 더 진중하고 정교하다면 유이준의 용모는 더욱 남성적이다.“이준 씨.”...이틀 후, 진안영은 무사히 퇴원 절차를 밟았다.집안에서 아이를 한 명 잃었으니 고용인들은 일 처리와 말에 유난히 조심했다. 고용인들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 게다
조진범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반짝이는 크리스털 램프 아래서 그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안색이 좋지 않았고 긴 손끝은 가운을 꽉 잡은 채 한참 만에야 드레스룸을 나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아내를 바라보았다.진안영은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어두운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우리 이혼해요.”“왜?”조진범은 아내를 빤히 쳐다보는데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쉽사리 알아챌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그날 일 때문에 그래? 그날 내 태도가 좀 난폭했다는 건 인정할게. 당신도 그 아이에게 미안하고... 하지만 안영아, 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그러나 진안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반박했다.“아니요. 만회할 필요 없어요. 전 이미 충분히 고민해봤어요. 이런 결혼은 제가 원하던 결혼이 아니에요. 사실 당신도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단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 뿐이에요.”...근데 진짜 너무 많았나?사랑 없는 혼인은 참을 수 있어도 남편의 가장 기본적인 보살핌은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한마디가 언제 철드냐 라는 말이라니.그 말에 진안영은 조진범과의 평생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어졌다.그녀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갔다.어쨌든 조진범과 정식으로 혼인을 한 관계인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엄연히 따지면 두 사람의 아이도 낳은 셈이다. 너무 빨리 죽었을 뿐.진안영은 사실 그들의 이혼은 매우 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보상을 원하지 않았고 게다가 조진범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들만큼 이혼이 쉬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조진범이 결혼하는 것도 단지 합법적인 상속인을 원했을 뿐이고 사실 누구를 찾든 상관없는 데다 그녀와 이혼하면 더 나은 선택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진안영은 틀렸다.조진범은 결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조씨 가문과 진씨 가문 모두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나 조진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입가에 입술을 포갰다.그렇게 조금씩 녹아내리고 마침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누르며 그녀에게 깊은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협조하지 않아도 조진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단지 그녀의 순종 도를 측정하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조진범은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진안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예전에 키스할 땐 심장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황홀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방금은 그런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샤워하러 갈게.”조진범이 떠나고 진안영은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그저 남편이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진범의 뒤태는 훤칠하고 완벽했다. 많은 여자에게 있어 조진범은 매력으로 가득 찬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와 혼외로 지내길 원하는 사람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졌다.진안영이 가볍게 웃었다.10분 뒤 조진범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누런 등불 아래 누운 그녀의 몸은 얇고 선이 고왔다. 방금 유산을 했는지라 당연히 부부 일은 할 수 없지만 조진범은 며칠 내내 쉴 수 있는 시간이 항상 필요했다. 하여 그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가 계속하여 그녀의 몸을 껴안은 채, 천천히 부드럽게 만져댔다.진안영도 굳이 막지는 않았다.예전에도 그의 친밀함은 배척하지 않았는데 이젠 진정한 조진범의 아내가 됐으니 그의 모든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남편에게 고분고분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진범이 감각을 더듬으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할 때 진안영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하도경의 메시지였는데 학교 일이었다.조진범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핸드폰을 잡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더니 이내 핸드폰을 그녀에게 던져주고 스스로 몸을 뒤척이며 욕실로 내려갔다.“그 사람한테
여자의 거절을 남자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하도경의 사랑은 깊이가 있다. 그는 기혼여자를 굳이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를 언론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하도경이 계속 고백하지 않고 그녀의 주위만 맴도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하도경은 사무실을 떠나 뜨거운 햇살 아래까지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원래 햇빛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아무리 억눌러도 하도경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매일 임지유가 보양식을 보내오는 덕분에 입이 마를 날이 없었다. 사실 그녀가 매일 보양식을 살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사실 다 하도경이 사고 그녀가 달여서 보내주는 것이다. 물론 임지유가 돈을 쓰게 놔둘 수는 없어 진안영도 계속하여 몰래 보태서 돌려주곤 한다.시간이 흐르며 하도경은 줄곧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안영을 보살펴주고 돌봐주었다.가끔 그는 캠퍼스에서 진안영과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물론 진안영은 아는 것이 없다. 그녀는 유부녀의 선을 지키며 항상 하도경과의 거리를 유지하지만 남자가 진심으로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 눈빛은 숨길 수 없다. 하여 하도경이 진안영을 좋아하는 것은 학교에서도 비밀이 아닐 지경이다....JH그룹 회장실.조진범은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 가죽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다. 잠시 후 그는 또 초조한 마음에 손을 들어 양미간을 주물렀다.한편, 이 비서는 자리에 서서 업무를 보고하고 있었다.공적인 이야기를 마친 조진범은 잠시 손을 뻗어 서랍을 열고 사진 뭉치를 꺼내 책상 위에 던졌는데 그 사진들은 역시 진안영과 하도경의 사진이었다.대부분 캠퍼스의 반얀나무 대로 위의 사진이었다.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결코 별다른 기류가 흐르진 않았지만 하도경의 눈빛에 담긴 애정은 도무지 속일 수 없어 남편인 조진범은 진안영과 이에 관해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조진범은 고개를 숙인 채 고급 패션 가방을 가지고 놀며 이리저리 손가락 장난을 했다.잠시 후, 그는 다시 가방을 내려놓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전화를 끊은 후, 그는 아내와의 몇 안 되는 데이트를 떠올렸다. 비록 전부 진심이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진안영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특유의 우아한 기질이 있어 함께 지내면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다.진안영이 유산한 후에도 그는 짬짬이 시간을 내서 그녀와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노력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침대에서 키스할 때마다 진안영은 분명 그 순간의 스킨쉽을 전부 건성으로 대했고 어느 날 만약 정말로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되면 그의 몸 아래에서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이 딴 데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이런 결혼은 정말 냉담하고 무미건조한 결혼임이 틀림없다....저녁 6시, 조진범은 정시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갔다.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이 메인 저택 앞에 멈춰서고 조진범은 긴 다리로 운전석 도어를 열고 차체를 넘어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검은 머리카락 끝은 석양 아래서 거무스름하게 빛나며 순수한 남성의 기운을 더해주었다.현관을 지날 때, 고용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외투를 받아 그에게 보고했다.“아까 사돈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사모님께서 계시지 않아 다시 돌아가셨습니다.”진철수는 분명 그들에게 사정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하여 그는 말을 아끼고 화제를 돌려 고용인에게 말을 건넸다.“그나저나 부인은요? 오늘 저녁 식사하러 왔을 텐데.”고용인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두 손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아, 사모님께서는 학생 집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조진범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들어와 손을 씻은 후 식당에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고용인은 저녁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저녁 식사는 모두 여섯
어둠 속에 서 있는 훤칠한 얼굴의 조진범은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아내의 팔을 잡아당기고 하도경에게 작별을 고했다.하도경이 진안영을 바라보았다.그가 아무리 그녀를 사모하고 좋아한다고 해도 진안영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있기에 그녀의 남편 앞에서는 조금도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잠시 후 하도경은 씁쓸한 목소리로 덩달아 작별을 고했다.“그럼 안녕히 가세요. 진 쌤.”은은한 달빛이 나무 아래에 서 있는 하도경의 머리 위로 추적추적 쏟아져 내렸다.반은 달빛에 새기고 반은 어둠에 새겼다.조진범의 손에 붙잡힌 진안영도 애써 입술을 달싹이며 작별인사를 했다.“그럼 잘 자요.”잠시 후, 차에 탔을 때 조진범은 안전벨트를 맨 채 무심한 척 물었다.“하도경이 가서 아쉬워?”조수석에 앉은 진안영은 바깥의 끝없는 어둠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진범 씨, 지금 이게 무슨 뜻이에요? 도경 씨를 보내는 거... 설마 진범 씨 뜻이에요?”“맞아.”조진범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내 뜻 맞아. 그 사람이 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라면, 특히 내 위치에 있는 남자라면 아무도 아내가 그렇게 사랑받는 것을 참을 수 없을거야.”진안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저랑 도경 씨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러자 조진범은 굵은 손바닥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담담하게 답했다.“물론 아직은 아무것도 아닐수 있지.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단지 H시로 전근 가는 거로 끝나진 않았겠지.”말을 이으며 그는 또 한 손을 들어 아내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아름다움이 화의 근원이잖아. 뭐 어쩌겠어.”그러나 진안영은 모질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홱 돌려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았다. 가슴팍이 부르르 떨려 나며 커다란 기복을 이루고 있었다... 분명 사석에서 처리한 일이지만 진안영은 여전히 간통을 당한 아내가 되어 남편에게 무자비하게 공개
진안영은 움직이지 않았다.차 안에 있는 조진범만이 그녀를 곁눈질로 힐끗 보며 몸을 기울여 한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내려.”진안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현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조진범은 담배를 피우며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조진범의 눈빛은 깊었고 마음속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진안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사랑이라는 감정은 생기지 않는 것 같았다.그렇다고 이혼을 생각하자니 이혼도 하고 싶지 않았다.조진범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에 빠진 적은 처음이었다.그는 차 안에서 담배 두 세대를 더 피우고 나서야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가 뒤늦게 저택 거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진안영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이닝룸에 있던 두 하인이 식탁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조진범을 발견한 하인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에요. 두어 술 뜨시더니 바로 올라가시더라고요.”하인의 말에 조진범이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계단을 올라가 2층에 도착했다. 침실 문을 열어봤지만 진안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옆에 있던 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조진범은 입고 있던 검은 코트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던져놓고는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길고 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계속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욕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샤워가운을 입은 진안영이 걸어 나왔다. 갓 샤워를 마친 진안영의 온몸에서는 물기 어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작은 계란형 얼굴은 하얗고도 부드러웠다.조진범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게다가 오늘 밤은 하도경 일로 골머리까지 앓았던 탓에 조진범은 지금 아내를 굉장히 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이 그
조은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조진범은 한 손으로 아내의 몸 곁을 짚고는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조은혁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부부 모두 집으로 돌아오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조은희에게 큰일이 났다는 소식이었다.어떤 일인지는 전화로 자세히 얘기하기 곤란하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전화를 끊은 조진범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우리 집에 좀 갔다 와야겠어.”진안영이 원하던 바였다.그녀는 조진범과 한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만지는 것도, 털끝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녀는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요.”조진범은 고개를 돌려 깊은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30분 정도 지나자 조진범은 진안영과 함께 조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늦은 밤이었지만 조씨 가문 저택의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두 사람이 현관에 다다르자마자 조은혁의 고함이 들려왔다.“당장 헤어져!”조진범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는 아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빠르게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은혁 부부가 무거운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조은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곁에 서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조은희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조은혁이 딸에게 이런 식으로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조은혁이 화가 나면 조진범과 진안영이 와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은혁이 자신의 막내딸을 향해 소리쳤다.“내 기억으론 그 진석이라는 사람, 네 가정 교사 아니었니? 게다가 지금 교수로 앞날도 창창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너희 둘이 엮인 거냐? 엮이는 건 그렇다고 쳐도 왜 본가에 민며느리가 있을 거라는 건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그 여자가 B시까지 와서 울고불고 난리 치다가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반신불수가 됐다더구나. 이제 그 여자는 책임을 진석에게 묻겠지.”“넌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몇 달 후 가을 10월쯤.방유설이 주연한 《청홍》이 대히트를 치며 영화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 당일 날 조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방유설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다음에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계속 전했다. 방유설은 매우 감동했다. 진안영이 갓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이렇게 와서 자신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유설은 진안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어요.” 진안영은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방유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우현이랑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활발해져! 우현이가 사람을 잘 챙긴다고 네 아주버님이 자주 칭찬하셔.” 방유설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진안영과 얘기했다. 조은희는 사탕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평소에 연기하면서 다이어트해도 이럴 때는 사탕 하나 드세요. 나중에 여우주연상 받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방유설은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사탕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조은희는 살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언니예요! 다른 여배우들보다 언니가 훨씬 이뻐요.” 조우현은 여동생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건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외모만 보고 결정되면 긴장감이 없잖아.” 조은희는 달콤한 사랑을 떠먹은 기분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때 최우수 남자주연상이 발표되었고 다른 영화의 남자 주연이 받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도원이었다. 그는 국내에 없어서 촬영 감독이 대신 상을 받으며 발언 중 여러 번 방유설을 언급했다. 갑자기 설원 커플 팬들이 들썩이며 이 장면을 모든 플랫폼에 퍼뜨렸다. 설원 커플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팬들은 102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인기 있는 커플이었다. 조우현은 아내의 직업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저 코를 머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방유설은 가장 떠들썩한 설날을 보냈다. 3월쯤 그녀는 조우현과 결혼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베일은 무려 3미터 길이였고 어르신들은 베일이 길수록 결혼이 오래 지속된다고 했기에 조우현은 3미터 길이의 베일을 디자인하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방유설은 조진범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조우현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의 가족도 그녀의 가족이 되어 함께 기쁨과 고난을 나누게 되었다. 10여 미터의 거리. 그 길은 마치 그들이 걸어온 4년과 닮아 있었다. 순백의 제단 앞에서 조진범은 방유설을 동생에게 넘기며 가볍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대해라.” 조우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베일 너머로 방유설을 바라보았다. 오늘에 그녀는 순백의 모란꽃 같았다. 조우현은 부드럽게 방유설의 베일을 올리며 그녀에게 그의 눈을 바라보게 하며 결혼식을 마치려 했다. 그들은 이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목격할 것이고 잠시 후 서약을 마치면 그들은 진정한 부부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약속한 평생의 로맨스였다.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그들의 감정은 깊었고 후회는 없었다! 방유설은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생중계가 이루어졌고 그녀는 생중계 수익은 모두 산간 지역의 아이들에게 기부했다. 네티즌들은 광고비를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고 한 번의 생중계에서만 160억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네티즌들은 생중계를 보며 신나서 토론했다. [와! 조우현의 큰형도 잘생겼네.] [너무 아쉬워. 결혼을 너무 일찍 했어.] [여동생도 엄청 이쁘네! 이 가족은 다들 왜 이렇게 훈훈하지?] [저런 부모님이라니. 부러워!] 조씨 가문에 대한 댓글이 잠잠해지고 이번에는 유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YS 그룹 대표도 너무 잘생겼잖아!] [영국에 모델 같아. 혼혈인가?] [100% 순수 본토! 얼굴이 완벽할 뿐!]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저택 앞 계단에서 조우현과 방유설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박도원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 밤 그는 유난히 단정하고 멋져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우현은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박도원이 공작새처럼 너무 화려하게 꾸미고 왔기 때문이다. 조우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유설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나랑 박도원중에 누가 더 잘생겼는지. 박도원은 저물어가는 노을 속을 걸어왔다. 방유설은 앞으로 나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제 그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조우현은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친밀해야 해?” 방유설과 박도원의 포옹이 끝나자 조우현은 자신도 박도원과 포옹하겠다고 나섰다. 박도원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순간 조우현의 힘에 거의 날아갈 뻔했다! 조우현은 다가가 박도원을 단단히 끌어안고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떠난다니 정말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아.” 박도원은 말문이 막혔다. 방유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조우현이 자기 집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는데 어쩜 아직도 저렇게 유치할까? 밥은 다 먹은 후에도 조우현은 여전히 소심하고 질투가 많았다. 그러나 박도원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조우현 같은 사람만이 방유설의 차가운 삶을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었다. 박도원은 자신이 방유설을 온전히 채워줄 수 없음을 느꼈다. 박도원은 방유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했고 방유설에 대한 감정도 너무 단순했다. 하지만 조우현은 달랐다. 그에게는 든든한 형제자매와 부모님이 있었다. 박도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엔 질투 좀 해도 되겠지. 그날 밤은 박도원이 B시에 머무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P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식사 중 몇 잔의 술이 오갔고 모두 조금씩 취기가 올라왔다. 두 남자는
조우현은 설날 전에 본가를 나와 방유설과 함께 살겠다고 했고 조은혁은 찬성하며 말했다.“그래. 서둘러서 나가거라. 나와 네 엄마가 좀 오붓하게 살아보자.”조우현은 큰 짐을 능숙하게 옮긴 후 동생을 내세우며 말했다“아버지, 그러게 왜 셋이나 낳았어요.”조은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네 여동생까지 데려가지 그러냐?”조우현은 큰 짐을 어깨에 메고 말했다“아버지도 참, 저랑 유설이도 신혼이라고요. 두 분이 좀 더 참으세요. 은희가 시집가고 나면 진짜 두 분만 오붓하게 보내실 수 있어요. 저희 애들도 나중에 두 분 게 맡기지 않을게요.”아들을 나무라던 조은혁은 서둘러 예비 며느리한테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약간 감상에 젖었다. 조우현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꽤 어려웠고 그도 심지철이랑 싸우느라 아들을 많이 돌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던 그 작은 아들이 어느덧 결혼을 한다니.조은혁이 방유설에게 준 별장은 명의도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부부싸움 하더라도 집을 나가야 하는 사람은 조우현이었다. 가족이 없는 방유설을 조은혁 부부는 더 많이 아껴주고 싶었다.조은혁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두 며느리는 모두 참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도 자신의 아들들을 만났고 그 덕분에 며느리들은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하면서 그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그런 조은혁의 생각을 박연희는 한눈에 알아챘다.…겨울 저녁, 조우현의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은 이미 인테리어가 거의 끝났지만 아직 가정부를 들이지 않아 지금은 그와 방유설 두 사람만 살고 있었다. 가끔 조우현의 비서가 임시 가정부를 부르기도 했지만 그 외의 식사는 모두 방유설이 준비했고 조우현은 집안일을 도와주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맛있는 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조우현은 차에서 내린 후, 짐을 현관 쪽에 대충 던져두고 방유설한테 바로 다가갔다.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긴 머리를 간단히 집게 핀으로 고정한 채 요리를 하고 있었
조우현은 동생의 입에 방울토마토 하나 넣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냐? 정말 보고 싶다면 그 사람을 찾으러 가 봐!”조은희는 캑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죽고 싶어?’그때 그 사람과 헤어진 이유는 집안에서 반대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갈 엄두나 나지 않았다.조우현은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다 뭔가를 생각난 듯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 아직도 여기 있어. 이사도 안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여쁜 아내를 맞은 것도 아니더라고. 은희야, 나는 네가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유설이도 나한테 상처를 줬지만 다시 만났을 때 울면서 나를 붙잡았잖아. 그래서 난 거절할 수 없었던 거고.방유설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른들 앞이라 반박하기가 민망했다.보다 못한 박연희가 아들을 꾸짖었다.“또 헛소리하냐? 유설이가 도망가면 그땐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어.”조은희가 옆에서 거들었다.“그러니까요! 둘째 오빠 원래 울보잖아요.”조우현은 동생의 목을 조르는 시늉 하며 그만하라고 위협했고 조은희는 웃겨서 눈물이 글썽한 채 사과했다.그 모습을 보며 방유설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그때 조진범도 주방에 들어섰다. 방유설은 적어도 아주버님만큼은 진지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처음 보는 반찬을 보자 바로 맛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우현의 가족들에 둘러싸인 방유설은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고 조은혁 부부는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들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그래서 조씨 가문의 남자들이 분주히 부엌을 드나들며 음식을 날랐고 여자들은 수저를 놓으며 저녁 먹을 준비하고 있었다.조은희는 둘째를 임신한 진안영을 도와 조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식사 중에는 자연스럽게 조우현과 방유설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두 사람은 이미 다음 해 초에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당분간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이 점에 대해 조은혁 부부도 찬성했다“유설이는 아직 젊으니 급하지 않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