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한때 그와 조민희가 함께 살던 집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오랫동안 사람이 없었지만, 관리인이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둬서 집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조민희가 쓰던 옷과 액세서리들도 깔끔하게 정리된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그녀가 좋아했던 작은 장식품들, 그리고 그녀가 즐겨 보던 영화 ‘코난’의 관련 굿즈들...조진범은 설정집을 집어 들고, 작은 소리로 그 위의 적힌 문구를 읽었다.[아름다운 계절에 만난다는 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아름다운 일이야.]‘아름다운 계절에 만난다는 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아름다운 일이야.'그는 이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그날 밤, 그는 과거의 사랑을 떠올렸지만 아내는 떠올리지 못했고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의 불씨가 꺼졌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진안영에게 있어 조진범은 남편이 아니라, 평생 다가갈 수 없는 남자일 뿐이었다.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조진범은 피로에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오늘은 조민희의 결혼식 날이었다....조진범이 B시로 돌아온 건 3일째 되는 날이었다.저녁, 하늘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사실, 그와 진안영도 신혼이었다. 하지만 차가 별장에 멈추자 집 안은 지나치게 썰렁했다.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생활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활기라고 할 것도 전혀 없었다.조진범은 차 문을 닫았다.집안 도우미가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걸어가며 물었다.“사모님은?”도우미는 짐을 들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사모님은 위층에서 자수하고 계세요. 어제 친정 할머니 댁에서 자수틀을 하나 가져오셨거든요. 지금 하는 자수가 하도 화려하고 예뻐서 알아보니까 비물질문화유산 기술이라네요.”조진범은 걸음을 멈췄다.“사모님이 어제 돌아왔어요?”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은 친정 가신 당일엔 돌아오지 않으셨지만, 집에는 전화하셨어요."조진범은 그제야 이틀 동안 그들 부부는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없이 지냈다는 걸
너무 다정해서인지 진안영은 잠시 멍해졌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돌아왔어요?”책망도 없었고, 남편에게 하소연하지도 않았다.감정 없는 결혼에서 과도한 애교와 친밀함은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조진범이 자신에게 잘해주길 기대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지킬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조진범은 다가와서 그녀가 수놓은 작품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약간 감탄한 듯 말했다.“이거 오래 걸렸겠네. 따로 배운 거야?”진안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한율 선생님께 배웠어요.”한율은 국내 최고 자수 명장이었기에 그 이름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조진범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어쩐지.”조진범은 처가에 다녀오지 못한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날 너무 급하게 가느라 같이 못 갔어. 참, 회사에서 파생된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장인어른 회사에 맡길 생각이야. 수익도 괜찮아. 나중에 함께 집에 가서 식사하면서 이 일을 논의해.” 진안영은 남편을 바라보았다.이것이 그가 주는 보상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쩌죠. 마침 언니가 YS 그룹의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회사의 규모와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YS 그룹이라는 말에 조진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진은영이 벌써 유이준을 만난 건가?’유이준의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진안영이나 그녀의 친정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씨 가문과 진안영은 그저 하나의 협력 프로젝트일 뿐이었다.서로 예의를 지키면 그만, 감정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이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조진범은 지갑에서 골드 카드를 꺼내 진안영에게 건네주며 모든 지출을 이 카드로 결제하라고 했다. 이 카드의 월 한도는 40억이었다.솔직히, 그는 절대 인색하지 않았다.진안영은 그 카드를 받아
한바탕 뜨거운 시간이 지나고 조진범은 곁에 누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미간에는 좋은 시간을 보낸 후의 평안함이 보였다. 잠시 후, 진정된 그는 몸을 돌려 아내에게 물었다.“방금 몸이 안 좋았어?”진안영은 몸을 웅크린 채 그를 등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안고 있었고 새하얀 얇은 어깨는 살짝 떨려오기까지 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에요.”조진범은 잠깐 쉬다가 체력이 회복되면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그녀의 어깨를 만졌지만 진안영의 반응은 달랐다.“조금 아파요.”진안영은 조진범이 뭐라고 물을 새도 없이 침대 시트를 끌어당기며 일어나서 화장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조진범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흥미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부부 사이의 일도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한다. 그는 눈치가 무딘 사람이 아니니 그녀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아내지 못할 수가 없다. 하여 조진범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옆방으로 가서 샤워했다.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진안영은 아직도 욕실에 있었는데 아마도 일부러 그를 피하는 것 같았다...조진범은 개운한 기분으로 침대에 기댔다. 그는 진안영을 30분 동안 기다렸지만, 아직도 샤워를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먼저 잠이 들었다.부부는 밤새도록 말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먼저 잠에서 깬 조진범은 서류를 챙기러 아래로 내려갔다. 새벽의 정원은 안개가 자욱하게 꼈고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있었다. 기사도 부지런하게 아침부터 차를 닦고 있었는데 조진범을 보자 기사는 걸레질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조진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날의 새벽, 짙은 회색의 코트를 입고 멋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조진범은 입에 담배를 문 채 한 손으로 차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서류를 챙겼다.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방금 청소할 때 서류를 발견하고 대표님께 얘기하려던 참이었어요.”조진범은 한 손에 서류를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한편, 진철수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업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이 정도 눈치는 있었다. 조진범은 지금 죄를 물으러 전화한 것이다.그는 자신이 틀렸는지 생각했다. 사실 조진범은 자신의 작은 딸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조진범은 뻔뻔하게 좋은 말을 내뱉었다.“조 서방, 너무 서먹서먹하게 부르는 거 아닌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장인어른이라고 불렀잖아.”조진범은 당연히 이 말에 넘어가지 않고 휴대폰에 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 아내가 친정집으로 갔다가 기사님이 보는 앞에서 당신한테 맞았다고 하더군요. 진철수 씨, 당신이 집안을 어떻게 다스리든지 나는 상관 안 합니다. 하지만 진안영은 내 아내예요. 조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조씨 가문의 사람한테 손을 대는 것입니까? 사업이 너무 잘 돼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쉬운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러는 거예요?”진철수는 부인하려고 했지만, 조진범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진철수는 다시 전화했지만, 조진범은 받지 않았다... 시간이 아직 이르기에 그는 서류를 한 번 더 보고 하와이의 책임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니 고용인이 올라와서 얘기하길 장인어른이 왔다고 했다. 조진범은 책상 위에 있던 라이터를 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옅은 청색의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라 잘생긴 얼굴을 덮었다. 그는 잠깐 담배를 피우고는 고용인에게 말했다.“사모님이 아직 기상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당장 꺼지라고 해.”고용인은 깜짝 놀랐다. 조진범은 고용인이 오해할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아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고용인은 더 묻지 못하고 빠르게 내려가서 말을 전했다.1층에서는 진철수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절실하게 조진범을 만나고 싶었다. 조진범 앞에서 울며불며 용서를 빌라고 해도 할수 있었다... 하지만 조진범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조진범은 진철수에게 꺼지라고 했다. 진철수는 거실에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감히 진안영을
조진범은 그녀의 난처함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진안영과 오래 얘기를 하지 않았고 오늘은 조씨 가문 본가에 방문해야 하는 날이기에 진안영에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나가서 선물을 산 뒤 조씨 가문 본가로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진안영은 오늘이 조씨 가문을 방문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갑자기 떠올렸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지만 주제넘게 조진범과 실랑이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일어나서 씻으러 갔다. 아래층으로 왔을 때 조진범은 이미 식탁에 앉아있었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짙은 색의 코트는 벗어서 의자에 걸어놓고 있었고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멋진 그의 얼굴을 비추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진안영이 다가가서 앉자 조진범은 신문을 접고 일부러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샤넬의 트위드 세트를 입고 있었는데 조진범은 두 사람이 소개팅할 때 그녀가 이 옷을 입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명품 옷이었다.조진범의 눈빛이 깊어졌다...“시간이 아직 이르니 있다가 쇼핑하러 가자.”조민희 때 감정의 쓴맛을 보고 조진범도 반성을 했다. 아내에게 소홀하지 않고 아내와 시간을 함께 보내면 그의 결혼은 계속 유지 되리라 생각했다. 하여 그는 일이 바쁘지 않을 때 기꺼이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보냈다. 진안영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하지 않았고 컵을 들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조씨 가문의 고용인도 안도하면서 들뜬 말투로 말했다.“주인님과 사모님은 정말 금실이 좋으십니다.”조진범은 옅게 웃어 보였지만 진안영은 어색한 듯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아침을 먹기만 했다....아침을 다 먹고 나서 진안영은 위층에 올라가 코트를 챙겼다. 조진범은 밖에 있는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이번 외출에는 기사님과 함께하지 않았고 진안영과 단둘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진안영이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아이? 진안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모두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조진범은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조진범도 이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았고 돈을 지급할 때 담담하게 말했다.“둘이 좋겠어. 큰 애가 아들이고 작은 애가 딸이면 좋겠다.”한참 지나도 곁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왜 그래?”진안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한참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 조진범을 바라보았다.“진범 씨, 만약 제가 아들을 못 낳으면요?”진안영의 어머니는 딸을 두 명 낳았는데 그녀를 낳을 때 난산으로 하여 불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해 운명이 비참했다. 진안영은 자기도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을까 봐 두려웠고 조진범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무서웠다.조진범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딸도 좋아! 조씨 가문에는 조우현도 있잖아.”진안영은 안도했다. 이때, 샤넬의 점원이 봄 신상 옷을 몇 벌 가지고 와서는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요즘 들어온 신상인데 저희가 아직 내놓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어요. VVVIP 회원만 구매할 수 있는 상품입니다. 한번 착용해보시겠습니까?”진안영은 머뭇거렸다. 조진범은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다 착용해봐. 내가 보기에는 너한테 다 어울리는 것 같아.”점원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이쪽으로 오시죠.”진안영은 한 번씩 다 입어보았는데 모두 그녀에게 어울렸다. 조진범은 그것들을 다 결제하고 점원에게 정리해서 차에 가져가라고 했다. 조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또 아이에 관해 얘기했다. 조진범은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낳고 나서 일을 계속해도 돼. 아이는 엘리트 팀이 맡아서 보살펴 줄 거야.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진안영은 그 말이 의외였다.“태어나서부터요?”조진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태어나서부터.”남자아이라면 더
욕실의 물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조진범은 욕실의 문을 열었고 긴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그의 샤워 가운은 절반 정도 풀어져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빛이 났다. 물줄기가 굴곡이 선명한 턱에 맺혔고 가슴을 따라 튼튼한 복근까지 흘러내리다가 관능적인 치골에서 자취를 감췄다...그는 젖은 머리를 닦으며 검은 눈동자가 침대 위의 아내를 응시했다. 그녀는 밝은 빛이 습관 되지 않아 침대 머리의 빛을 어둡게 조절해 놓았는데 희미한 불빛은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은은한 광채를 한 겹 씌워준 듯 부드럽고 아름다웠다.마음속의 솔직히 얘기하자면 남자의 처지에서 봤을 때 두 사람의 부부 생활은 아주 원만했다.아내는 경국지색의 여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은 매혹적이었고 그는 관계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아내의 반응과 표정을 좋아했다. 남자에게는 결혼생활에서 성생활이 조화롭다면 그렇게 무료하지 않게 된다.그리고 그녀는 성격이 온순하고 반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흠을 잡을 데가 없었다. 조진범은 젖은 머리카락을 닦은 수건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침대를 향해 걸어가 아내의 몸 위에 덮치면서 관계를 맺었다. 하늘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진안영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연말이 되기 전에 진안영은 진씨 가문의 저택에 한 번 들렀다. 차 문이 열리자 진씨 가문의 고용인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둘째 아가씨 오셨습니까. 사모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침에는 특별히 주방에 와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몇 개 더하라고 당부했습니다.”진안영이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여전히 유원원이었고 그는 트렁크에서 영양제를 꺼낸 다음 먼저 차를 몰고 떠났다.진안영은 그제야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남혜란이 위층에서 뛰어 내려왔다. 작은딸을 보는 순간, 남혜란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침부터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왜 안 오나 방금까지도 외웠는데 차 소리가 들렸지 뭐니... 저녁까지 있어. 은영이가 일찍 돌아오겠대.”남혜란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녀도 아이를 갖고 싶었다. 진안영의 얼굴에 슬픈 빛이 비껴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날 밤, 그녀는 처가에 남아 밤을 보냈기에 오후 4시쯤 조진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자신의 일정을 알려주며 특별히 덧붙였다. “내일 아침 기사를 보내지 않아도 돼요. 우리 집 차를 타고 학교로 가면 돼요.” JH 그룹 대표실. 조진범은 핸드폰을 붙잡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서류를 검토했다. 그리고 서류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인을 마친 후 이 비서에게 건네주었다. “복사하고 전달하세요.” 이 비서는 즉각 떠나지 않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회사 연말 파티가 있는데 상무님과 같이 참석합니까?” 조진범은 이미 전화를 끊고 낮게 웃었다. “그 사람은 이미 처가로 갔어요.”이 비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가지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조진범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서랍에 손을 뻗어 한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건 그와 조민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앳된 모습이었고 20살 초반의 가장 좋은 나이였다. 조민희는 조진범에게 몸을 기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조진범은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진안영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건 아마도 몇 년 전 이맘때쯤 그가 조민희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진범은 조민희에게 약속한 결혼을 진안영에게 주었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파티는 그녀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참 간사했다. 그가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조진범은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저녁 7시가 되었을 때 그의 보조 비서가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파티는 8시부터 시작입니다. 지금 출발하시겠습니까?” “가지.” 조진범은 슈트 외투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