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마침내 서강훈의 꼬리도 드러나게 되었다. 이미연이 나한테 이 일을 얘기해 줄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서강훈이 매일 드나드는 곳은 바로 골드 빌리지였다. 골드 빌리지는 금방 개발된 작은 별장이었다.그러자 나는 바로 그 열쇠가 떠올랐다. 어떠한 실마리도 없던 그 열쇠가 혹시 골드 빌리지와 연관이 있는 건가? 가슴 속에 큰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답답했다.오랜 시간 동안 같이 역경을 이겨내고 고생하면서 콩이한테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자고, 좋은 학구의 집으로 이사 가자고 몇 번이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신호연은 자꾸만 화제를 돌리고 시간을 끌면서 집을 사지 않았다. 그러고는 골드 빌리지에 작은 별장을 샀다.바람을 피운 신호연의 행동은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계속 뒤엎고 있었다. 신호연은 실수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쓰레기였다.위치를 확인한 나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연이 사람을 시켜 관찰하게 했다. 그 집에 사람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이미연이 나한테 연락해 빨리 오라고 했다.나는 아무 핑계나 대고 빨리 골드 빌리지로 가 이미연을 따라 그 별장에 도착했다. 아담한 별장이었지만 곳곳에 디테일을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그런 별장을 눈앞에 둔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입구에 선 채 숨을 가다듬었고 이미연은 계속해서 신호연의 욕을 했다. 열쇠를 꺼낸 나의 손바닥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열쇠를 문에 꽂자 문이 열렸다. 나는 열린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미연이 나를 당겨서 들어가지 않았으면 나는 계속 그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내가 꿈에 그리던 골드 빌리지. 내 돈으로 사들인 골드 빌리지가 왜 나에게 사주는 것이 아닌가. “그 돈을 여기에 쓴 거구나. 나도 참 바보 같지. 내 눈앞에서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내가 담담하게 얘기했다.“화내지 마, 지아야.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 신호연 그놈, 언젠가는 이런 일을 벌일 놈이었어! 그냥 네 운이 안 좋았던 거야!
겉과 속이 달라 연기를 해야 하는 나에게 요 며칠은 진짜 힘들었다. 감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사는 부부들이 대단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우리 세 식구의 삶이 연기 같았다. 각자 자기 대본만 있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나나 신호연이나 서로 지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는 듯했다. 콘돔을 발견한 후로부터 나는 그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나에게 스킨십을 하면 나는 미친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게다가 불륜녀가 보내온 그 두 사진을 본 후에는 더욱 메스꺼웠다. 신호연이 나를 다치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때마다 신호연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병원에 데려갈 그였지만 이제는 그대로 나를 포기하는 신호연을 보며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짐을 느꼈다. 요 며칠 나는 힘을 내서 이미연이 해킹해 온 진짜 데이터를 보게 되었다. 근년 간의 매출액이 생각보다 낮지 않은데다가 나의 예상보다 훨씬 높아 나는 매우 놀랐다.하지만 고객 중의 80% 정도가 내가 데려온 고객이었다. 그 당시에 그들의 잠재력을 보고 내가 점찍어 놓은 고객들이었는데 몇 년 안에 꽤 성장하여 신호연이 떼돈을 벌게 했다. 나의 공로였지만 보상은 편안히 놀고 있는 신호연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니 신호연이 눈을 밖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다. 신호연이 나에게 준 자료는 그가 요즈음에 새로 개발한 회사 같았다. 이 회사 중에서 랜덤으로 뽑아서 찾아본 결과 개발 회사라고 하지만 그냥 투기로 먹고사는 유령회사였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장부에서 보면 그 회사들은 돈을 갚을 능력이 약했다. 이미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신호연은 바보가 아니다. 많은 돈을 받지 않으면 그만큼 리스크도 커진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우리의 장부를 찾아보아도 자금이 많지 않았다. 돈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수상했다. 하
시간이 딱 맞았다. 서강훈은 내가 생각한 그 시간에 정확히 들어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사람은 다 어디간거야...”그의 입 모양이 바로 욕을 뱉어내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서강훈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보고 입을 딱 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서강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서 부장!”한참 지나서야 입을 다문 서강훈이 어버버하며 겨우 말을 뱉었다. “사모, 사모님!”“왜요? 예상하지 못했나 봐요?”나는 여전히 웃으면서 서강훈을 바라보았다.“이리 와서 앉아요. 너무 급해하지는 말고. 일하는 분들은 제가 내보냈어요.”“저, 저기... 저 좀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 일하시는 분들 시급을 챙겨드려야 해서...”서강훈은 말끝도 제대로 맺지 않고 빨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서강훈 씨! 일하시는 분한테 통화하는 건 이따가 해요.”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허한 거실에서 울려 퍼지자 조금은 무서웠다. 서강훈의 발걸음도 거기에서 굳어버렸다.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의 근육이 계속해서 떨렸고 얼굴도 점점 창백해졌다. “제가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제 말을 들어주는 게 어때요? 얼른 와서 앉아요. 서강훈 씨를 찾으러 온 거란 말이에요. 서강훈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일하시는 분들도 내보낸 건데!”나는 담담하게 서강훈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서강훈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까지 맺혀있었다.“왜요, 예전에는 지아 누님이라고 부르더니, 이제 서강훈 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가 봐요?”나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서강훈이 먼 곳에서부터 와 내 주변에서 항상 알짱거리며 나를 “지아 누님”이라고 부르곤 했다.서강훈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낯빛이 어두워져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알았다.“지아 누님, 그럴 리
“전 정말 몰라요! 그저... 그저 신 대표님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밖에 몰라요. 그 불륜녀가 누구인지는 정말 모릅니다!”서강훈의 낯빛이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변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신 대표님... 신 대표님이...”“바람을 피우는 건 알면서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다고요? 서강훈 씨...”“지아 누님, 진짜입니다! 전 정말 몰라요! 밖에서 데리고 다니신 적이 없거든요. 전 그저 뒷모습을 두 번 정도 본 게 다입니다...”나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신호연이 꽤 조심하면서 다닌 모양이었다. 혹은 서강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나는 화를 억누르면서 감정을 자제했다.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요.”내가 또 화제를 돌렸다. 한껏 누그러진 말투에, 내가 한발 양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역시나 서강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숨을 돌리며 얘기했다.“네, 지아 누님이 얘기하시면 제가 꼭 하겠습니다!”“내게 숨기고 있던 재무 보고서와 최근의 고객 리스트를 줘요.”내가 과감하게 얘기했다.서강훈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표정관리에 실패한 그는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지아 누님...”“왜요? 없어요?”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아 누님, 진짜 없어요... 예전의 재무 보고서는 이미 가져다 보여드렸습니다.”서강훈은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에게 얘기했다.“진짜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요 몇 년간 신 대표님을 잘 따랐던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지아 누님의 회사잖아요! 저도 양심이 있죠! 끝까지 지아 누님을 따를 겁니다!”“신 대표를 끝까지 따르는 게 아니라요?”내가 차갑게 물었다. 말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뻗어있었다.“...”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서강훈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가 공허한 거실에서 울려 퍼졌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그 어떤 욕설보다도 무서웠다. 나는 태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서
내가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순간, 신호연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재빨리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은 신호연이 또 고객과 몇 마디 하더니 나에게 그 여자를 소개해 주지도 않고 바로 신사처럼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앉혀 보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지성적인 면이 있는 그 여자는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 여자도 나를 보더니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누구야?”내가 물었다.“그저 고객이야.”신호연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나의 어깨에 올리고 물었다.“어디 갔었어?”나의 행적에 완전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묻고 있었다. 나는 귀엽게 웃어 보이면서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얘기했다.“안 알려줄 거야!”그리고 퇴근하기 전까지 서강훈은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서강훈은 내가 보고 싶다고 한 자료를 몰래 내 사무실에 가져다주었다. 그 표정은 내가 쉽게 묘사할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지아 누님, 진짜... 제 상황이 얼마나 난처한지 아세요? 전...”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첫째로는 그의 비밀을 고발할까 봐였고 두 번째는 신호연이 그의 배신을 알아차릴까 봐였다.“하는 거 보고요. 일단 나가요.”나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 본 여자가 떠올라서 서강훈을 붙잡았다. “어제 퇴근 전에 회사에 와서 신호연이랑 있던 여자, 누구인지 한번 알아봐 줘요. 이름, 신분, 전화번호도요.”서강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갔다. 나는 한시 빨리 회사의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 불륜녀도 나에게 문자를 보내느라고 바빴다. 나의 카톡까지 추가해서 끊임없이 문자를 보냈다. 신호연이 살짝 눈치를 챈 모양인지 나의 행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 불륜녀가 그에게 얘기를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강훈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럴 담이
참가한 회사는 모두 여섯 개였다. 우리 신흥 건재가 아마도 제일 작은 회사인 듯했다. 즉, 가장 경쟁력이 약한 상대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큰 기대를 걸고 온 것은 아니다. 그저 신호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쇼였다.입찰회에 요청된 회사들은 큰 회의실에 모여서 천우 그룹의 대표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회의는 요청된 회사들이 자기 회사의 능력을 최대한 보여주고 협력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아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시간이 5분이나 지났지만 천우 그룹의 책임자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회의실 내부가 웅성거리고 있을 때, 회의실의 문이 갑자기 열렸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까지 한 젊은 남자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준수하게 생긴 얼굴은 나이를 알 수 없게 깨끗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의 뒤에는 비서 한 명, 그리고 이 프로젝트와 연관 있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는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회의장의 중간 자리에 와서 선 후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조 대표님께서 오늘 갑작스러운 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제가 대신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배현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자리에 앉았다.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그는 어딘가 도도하고 차가워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왜 조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중요한 회의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젊은 남자를 보내다니. 여섯 회사 중 두 회사는 이미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배현우는 그들에게 질문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오늘 시간이 좀 빠듯하니 얼른 시작하죠.”그리고 그가 한 회사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순서대로 부르
그 전화는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친정에 가보지 않은지 2년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내가 항상 봐줘야 하고 신호연은 항상 바빠서 내가 혼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렇게 친정에 들르지 않은 지 이제 2년이나 되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나의 일상생활을 쓸어가는 기분이었다. 부모님께는 자식이 나 하나뿐이었다. 하나뿐인 외동딸을 대학에 보낸 후 우리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곤 했다. 이제 와서 보니 요 몇 년간 그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그 생각에 나의 양심이 아팠다. 자기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관심이 시집 부모님에 대한 것 보다 못했다. 항상 부모님은 건강할 것이라고 믿어왔지만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불효녀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셨지만 지금의 나는 제대로 된 효도를 해드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가정이 파탄 날 위기에 놓여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친부모님한테 얘기하는가 말이다!나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재빨리 신호연의 사무실에 도착해 울먹이면서 얘기했다.“여보, 얼른 비행기 티켓을 끊어줘! 나 친정에 가봐야 할 것 같아!”각 부문의 주임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신호연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여보!”그리고 손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나가게 하고 가까이 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천천히 얘기해 봐!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엄마가 아까 전화가 왔어... 아빠가 위독하시대! 나 얼른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어느새 나의 눈에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태까지, 나는 큰일이 나에게 들이닥칠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했다.신호연은 나의 등을 두드려 주며 위
나는 실망하면서 보안 검색대를 지나 탑승구로 걸어갔다. 이렇게 힘들 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도 그걸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신호연은 빠르게 사라졌다. 회사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면서 나는 이미연에게 연락했다. 친정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홀에서 초조하게 탑승을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내가 신호연과 같이 친정에 간 건 딱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졸업하던 그해, 우리 둘의 마음을 확인한 후 그를 데리고 집에 갔었다.두 번째는 우리가 창업하기로 결심했을 때 창업할 자금이 없어 부모님께 돈을 빌리러 갔었다. 세 번째는 우리 부모님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후 그 대출금을 다 갚았을 때, 신호연이 나를 데리고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그 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한 번도 같이 돌아가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말로는 이해한다고 하셨다. 홀로 창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고,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고 언제나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다. 창업한 첫 두 해는 진짜 한시도 쉴 새 없이 바빴다. 우리 두 사람으로 시작해서 회사를 이렇게 큰 규모로 이끌어 오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후에는 내가 임신하고 혼자서 친정에 다녀왔다. 그리고 콩이를 낳았을 때 부모님이 나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우리는 같이 있은 시간 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어쩌면 그저 나의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슬펐다. 이런 불효녀가 또 있을까. 부모님은 나를 위해 뭐든지 해주셨는데 나는 여태껏 뭘 해줬나. 마음이 급할수록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급한 내 마음도 모르고 비행기는 계속해서 연착되고 있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하늘도 점점 어두워졌다. 어느새 저녁 여덟 시가 되었다. 이미 7시간이나 연착되었다. 항공 시간은 한 시간 좌우밖에 되지 않지만 나는 이미 공항에서 7시간이나 기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