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우리 집은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였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다. 저녁 내내 우리 모두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아빠는 맥주 한 캔까지 원샸했다. 혹시나 많이 취하셨을까 봐 걱정됐지만 아빠는 전혀 문제없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거실로 자리를 옮겨 과일까지 함께 즐기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눴다. 시간이 늦어지자, 장영식은 집으로 가려고 준비했고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자청했다. 장영식의 집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집을 나와 같이 걷고 있는데 장영식이 먼저 말을 건넸다. “배가 너무 부른데 좀 걷지 않을래? 유빈이 얘기 좀 해봐.”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골드 빌리지 대문을 나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유빈이의 일에 대해 전부 얘기했다. 장영식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파트너로서 회사 일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다. 한참 얘기하며 걷고 있는데 외투 주머니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나보다 먼저 벨 소리를 들은 장영식이 나에게 알려줘서야 내 벨 소리임을 알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배현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벨 소리를 끊어 버리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회사 일에 대해 우리는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얘기가 항상 길어진다.이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고 장영식은 나를 보며 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아?”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배현우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왜 또 안 받아요? 나와 연락 안 할 거예요?”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딘데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오더니 배현우가 성난 목소리로 나를 행해 외쳤다. “타요!”갑자기 나타난 배현우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차 옆으로 두 발짝 걸어갔다.
배현우와 탄 차는 또 리조트를 향했다. 리조트에 도착한 후 배현우는 혼자 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미행은 본인이 해 놓고 오히려 화를 내는 이 상황에 너무 어이가 없었다.기사 아저씨도 같이 따라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아 아가씨!”나는 차에서 내려 기사 아저씨를 바라봤다. 기사 아저씨는 저 멀리 걷고 있는 배현우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도련님이 일주일 내내 쉬지도 못했는데 일 끝나자마자 아가씨 만나려고 평택에서 급히 올라온거예요. 아직 저녁도 못 드셨는데 아가씨가...”“빨리 따라와요!”배현우의 성난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 아저씨는 하던 얘기를 멈췄지만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이 남은 듯 나를 계속 쳐다봤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배현우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왜 갑자기 화를 냈는지도 너무 잘 알 것 같다.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배현우 뒤를 따랐다. 그제야 배현우의 차가운 뒷모습도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했다. 현관으로 들어간 배현우는 외투를 벗어 손에 쥔 채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나도 뒤따라갔다. 배현우는 손에 쥔 외투를 소파에 던진 후 안지 않고 오히려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멈춰 섰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걷다가 배현우 가슴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배현우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나를 소파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 소파에 누웠고 배현우는 내 위로 덮쳤다. 순간 배현우는 내 얼굴을 향해 거친 키스를 퍼부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들이닥친 그의 입술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배현우의 키스는 거칠었고 화가 나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한참 후에야 배현우는 천천히 입술을 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나 보고 싶었어요? 말해봐요.”그의 거침없는 모습에 나는 민망하여 눈을 피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나는 화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 좀 준비해 줄게요. 배고프죠?”“말해 봐요.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에 앉은 배현우 얼굴에는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는 듯했다.배현우는 내가 건넨 국과 밥을 먹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빨라진 젓가락 속도로 봐서는 배가 여간 고픈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배현우 옆을 지켰다. 턱을 괴고 앉아 배현우의 동작 하나부터 순간의 표정까지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배현우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가끔 찡긋거리는 눈썹까지 모두 나를 빠져들게 했다.배현우는 식사하면서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봤다.“실컷 봐요. 아직도 부족하죠?” 배현우는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를 보며 말했다. 밥상의 요리들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요리 솜씨가 정말 훌륭하네요.”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건 요리하는 사람들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에요!”설거지하려고 일어나자, 배현우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 좀 걸어요. 다른 사람이랑 그만큼 오래 있었으면 나랑도 그만큼 같이 걸어야 해요.”열 살 아이보다 유치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직도 분이 안 풀려요? 현우 씨랑 한 것들 그 사람이랑은 아직 하지 않았어요.”“하기만 해봐요!” 배현우는 화가 난 듯 쏘아붙였다. 질투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는 배현우를 꼭 끌어안았다. 배현우는 손으로 내 양볼을 감싸더니 내 입술을 꼭 깨물며 말한다. “경고하는데 지아 씨의 소유권은 나에게만 있어요. 알겠죠?”“악... 아퍼... 혹시 개띠세요?” 나는 깨물린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배현우를 밀쳤다. “아프지 않으면 기억 못 할까 봐요.” 배현우는 입술을 가린 내 손을 잡고 내리며 깨물린 자리를 한참 보더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아직도 아파요?”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아프죠!”배현우는 씻고 나서 남색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실크 잠옷은 배현우의 훤칠함을 더 돋보이게 했고 날 위해 준비한 짙은 파란색 긴 치마와 커플 잠옷임을 알 수 있었다.
배현우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내가 을이라는 느낌을 더 짙게 한다. 갑과 을이 된 것 같은 상황은 늘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내 불안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배현우 눈을 피했고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배현우에 대한 마음이 좋아하는 감정 이상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배현우라는 늪에 내가 더 깊게 빠져들고 있다. 함정이다.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큰 함정에 빠져있다. 그러나 배현우는 의외로 확실했다. 캄캄한 바다에서도 길을 정확히 알고 있는 타수처럼 배현우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전부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나는 배현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배현우의 좋아한다는 표현이 그저 듣기 좋게 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배현우의 좋아한다는 표현이 진심인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배현우의 신분, 위치, 외모, 나이... 이 모든 게 나와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나는 나이도 많고 이제 막 4살인 딸도 있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실패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든 배현우 옆에 있고 싶어 할 것이다. 배현우 옆자리를 쟁취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것이다.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현우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내 마음과 몸, 그리고 머릿속까지 모두 배현우를 생각하고 있었다.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배현우 곁을 떠나 마음 정리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상처받을 사람도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전화를 안 받은 진짜 이유는, 나를 피하려고 그런 거죠?” 배현우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나도 모르게 두 발짝 뒤로 물러나 그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정원 내부를 비추는 불빛이 배현우 얼굴을 밝게 비췄다.“맞아요. 피한 거예요. 더 이상 현우 씨에게 빠지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요. 왜냐면... 누가 봐도 내가 아주 부족해요. 어쩌면 나 혼자 김칫국물 마시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현우 씨는 전혀 생각도 없
한참 지나서야 배현우는 나를 꼭 껴안은 팔을 내렸고 내 귀에 쐐기 박듯 얘기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도 말아요!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얘기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알겠죠?”나는 배현우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배현우는 내 눈물을 닦아 주고는 나와 다시 깍지를 끼고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에 올라갔다. 옥상은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처럼 주위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옆 벤치에 와인과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배현우는 와인 한 잔을 따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마셔봐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나는 배현우의 늠름한 모습과 잘생긴 얼굴에 홀린 듯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 다 마시고 나니 진짜 배현우 말대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배현우는 난간 옆으로 나를 이끌었다. 캄캄한 밤하늘에는 정월 대보름처럼 큰 달이 걸려있었고 우리 둘만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배현우는 등 뒤에서 나를 꼭 안은 채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비워요. 저기 저 크고 둥근 달처럼 깨끗하게. 그리고 모든 걸 나에게 맡겨요.”배현우는 나를 품에 껴안으며 얘기했다. “강가에서 지아 씨를 처음 구할 때부터 다짐했어요. 지아 씨를 꼭 지키겠다고. 우리 뒤돌아보지 말고 이제 앞만 봐요.”“이게 내 마음이에요.” 배현우는 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배현우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드니 달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이날 밤, 우리는 리조트에서 달을 감상하며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나는 배현우의 품에 안겨 술에 취해 천천히 잠들었다.잠에서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일어나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그러나 배현우의 굵은 팔이 나를 다시 침대로 잡아당겼다.“오늘만큼은 휴가 냈다고 생각해요.”배현우 품은 따뜻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와 연락이 안 돼서 급해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점심이 돼서야 우리
이해월은 사무실 문 앞에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요. 우리 회사에 온 이상 다 고객이죠.”이해월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게 왠지 불안하네요.”“어차피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어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어요.” 나는 덤덤한 태도로 계속 말했다. “스스로 찾아온 고객인데 돌려보내면 안 되죠. 들어오시라고 해요.”“알겠습니다. 그럼, 모시고 오겠습니다. 대표님! 긴장하지 마세요.” 이해월은 밖으로 걸어 나갔고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해월은 우리 회사에 정말 필요한 직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월이 양대수를 데려왔다. 30대를 훨씬 넘어 40대처럼 보이는 느끼한 아저씨가 사무실로 들어왔고 나를 향해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한 대표님. 안녕하세요.”“양 주임님.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나는 책상 앞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고객 접대용 소파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양대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드디어 한 대표님을 뵙네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사업을 크게 하고 계신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나는 양대수의 아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양 주임님. 정보가 잘 못 된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은 업계에서는 다 알고 있을 텐데요? 우리 회사 곧 문 닫기 직전입니다. 양 주임님이 말씀하신 큰 사업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양대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잘못된 정보라니요. 한 대표님 너무 겸손하십니다.”나는 정색해서 다시 물었다. “양 주임님.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신 이유가...?”“아... 네!" 양대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정색하며 말한다. “제가 온 이유는요. 한 대표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최근 형원그룹에서 담당한 복층 건물이 이슈가 있어 준공이 늦어지다 보니 메인 구역은 전부 완성되었는데 몇 동의 복층 건물만 아직 안 돼서 난처한 상황이라고 했다.
나는 일부러 가격을 더 높게 불렀다. 무슨 목적으로 왔든 이렇게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나는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는 양대수의 표정을 한번 살펴보았다.양대수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바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한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도 형원 그룹 아시잖아요. 서울에서 꽤 잘나가는 회사로서 상품의 질에 대한 추구는 엄청 납니다. 저는 전적으로 우리 대표님 말을 따르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양대수의 말을 듣다 보니 나는 자신이 생겨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린 신흥을 방금 인수 했고, 전에 저와 신호연이 이혼 문제 때문에 살짝 삐끗했던지라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란 말이죠. 그 때문에 우린 모든 고객을 정말 신중에 신중을 가해서 고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그쪽도 저를 심사하고 감시해야하겠지만, 우리 쪽에서는... 지금 협력하는 기초로 예산의 30%를 선불로 내는 걸 조건으로 걸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진중하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하지만 이 조건들은 내가 들어도 너무했다. 하... 너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원한다면 하는거고 원하지 않다면 그냥 이 일은 없었던 거로 하면 됐다.양대수는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분명 속으로 이렇게 염치가 없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이번엔 양대수도 정말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 아, 한 대표님! 우리 이럽시다! 서로 딱 한 발짝씩만 양보해요. 사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좋게 좋게 가는 거죠!”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설계도를 보여주면 우리가 그에 맞춰서 가격을 제시할게요. 어때요? 이러면 그냥 아무 근거 없이 흥정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 같은데. 양 실장님이 보기엔 어떠신가요?”양대수는 듣고는 희망이라도 생긴 듯 얼른 말했다. “어휴! 너무 좋죠! 역시 우리 한 대표님이 머리가 잘 돌아가네요! 좋
생각이 확실해지자 나는 장영식과 전에 건이가 극구 반대를 하던 그 몇몇 공급업체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았다.나는 건이를 불러들여 같이 전략을 짜보았다. 그리고 저녁에 건이가 이해월과 함께 남아서 회식 장소를 토론하고 수원 레스토랑으로 룸 하나를 예약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렇게 겉치레를 막 차린 적은 없었다. 직원들에게 가끔 밥을 사준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식적인 장소에서 음식을 대접하는건 처음이었다.모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특히나 신입 사원들은 더더욱 흥분한 상태였다.이 수원 레스토랑은 원래 전문적으로 모임이나 연회를 하기 위해 준비된 그런 장소였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사람은 보통 대접할 때나 모임을 열 때 많이 오는 곳이었다.가던 길에서 배현우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배현우는 내가 어디서 대접하는지 물었고 나는 수원 레스토랑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는 덤덤하게 ‘네’ 한마디 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술은 안 돼요!”“네? 제가 우리 직원들하고 밥 먹는다는데 이것까지 뭐라 하면서 상관하는 건 좀 아니죠!”나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기뻤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배현우의 간섭을 받는 게 좋았다.“지아 씨는 제 여자잖아요. 이 정도 간섭도 안 돼요?” 그가 반박하자 나는 푸흡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배현우의 웃는 모습이 막 그려지는 거 같았으니까.“그럼 바쁜데 끊을게요! 너무 늦으면 안 돼요!” 그는 당부하고는 바로 끊어버렸다.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배현우가 ‘지아 씨는 제 여자잖아요’ 라 하는 말이 너무 좋았다. 그의 박력은 늘 나에게 귀속감을 주었다.메뉴는 이해월이 미리 예약을 해두었고 우리가 도착하자 바로 요리들이 나왔다. 이해월은 정말 가성비가 좋은 메뉴들로만 잔뜩 시켜놨다. 마음에 쏙 들었다.그녀는 정말 유용한 조수다. 비록 며칠 못 봤지만 우리의 케미는 여전히 좋았고 호흡이 척척 맞았다. 정말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어시스트였다. 특히 그녀의 기억력은 정말 내가 본 사람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