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이 뒤엉키고 떠들썩한 가운데, 나는 더욱 허탈해졌고, 마음속에는 이미 대세가 가버린 황량함이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도 모두 조용히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신호연이 방금 나한테 흘린 정보에 따라 나는 천우 그룹의 도련님이 누구일까 생각해봤다.원래 협력했던 단골손님 몇 분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걸 봤는데, 얼굴에 웃음기가 다 무감각해서 최대한 빨리 최종 선고를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온 건 결국 이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닐까?사람이란 이런 것이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품고 있다.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작고 외롭고 무기력한지 느끼며, 순간순간 나는 정말 작은 도시로 도망가서 편안히 딸을 지키며 세상과 다투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누군가가 무대에 올라갔고, 모두가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많은 사람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주먹을 꽉 쥐었다.예전에는 천우 그룹이 내 생사가 걸린 것일 줄 몰랐다.어느새 신호연은 내 곁에 서 있었고, 넋을 잃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다 원하는 걸 다 얻었는데 왜 나한테 달라붙어 있냐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욕했다.무대 위에서 각종 발언과 번거로운 절차가 진행됐는데, 마치 신비로운 시상식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에 한 어르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갑자기 홀 전체의 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 줄기 강한 빛줄기가 홀 입구를 비췄다. 모든 사람이 떨리는 마음으로 입구 쪽을 향해 그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홀 전체에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울렸다...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비켜 무대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사람들 속에 끼인 나는 걸어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다만 수많은 별이 달을 받들고 한 사람을 따라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옆에 서 있던 신호연의 표정이 일순
오늘은 월요일.나는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고,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 귀찮았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매일 떠들썩하던 사무실에서 갑자기 너무 조용해서 내가 층을 잘못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유빈이 문을 두드리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다크서클이 깔린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한 대표님, 오늘 회의를 그대로 진행할까요?”“당연하죠! 왜 안 해요? 계획대로 해요!”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가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자 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네, 그럼 바로 확인하겠습니다.”10시에 대회의실에 도착했는데, 안이 소란스러웠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나를 몰아붙이려는지 떠들고 있었고, 반드시 오늘 결제해야 한다고 했다.나는 회의에 오기 전에 구 변호사를 불렀다. 신흥을 인수한 후, 그와 위탁 계약을 체결했으니 그는 제 개인 변호사일 뿐만 아니라, 신흥의 법무이기도 하다.유빈은 회의를 주재하며 여전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서둘러 그 사람에게 소개했다.아래 사람들을 힐끗 보니 한결같이 적개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앞장선 사람은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직접 물었다.“한 대표님, 오늘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여기 온 지도 며칠 됐으니 미루지 말아요. 먹고 마시는 것도 다 돈이에요!”“신호연이 오라고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당신들을 위해 결제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하는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는 즉시 펄쩍 뛰더니, 흉악하게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뭐라고? 당신들 이리저리 돌릴 거야? 두 사람 이혼한다면서? 우리가 우스워? 갖고 노니까 재미있어? 앞에서 그렇게 보여주고 뒤에서 뭔 짓 하는지 모를 줄 알아? 우리가 거지야? 지금은 당신이 인수하지 않았어? 그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결제해.”다른 사람들도 모두 맞장구 치며 마치 들보를 치는 광대들처럼 굴었다.
나는 그들의 포효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여러분, 당신들은 신호연과 협력하고 계약이 있어요. 어떻게 물건을 납품하고 결제하는지, 갑을 쌍방이 어떤 의무를 이행하는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정말 계약서가 휴지 한 장이라고 생각하나요? 매번의 계약이 완성되고, 대금이 결제되는데, 만약 연체된 것이 있다면 당신들은 신호연을 찾아서 결제받으면 되잖아요. 설마 신호연이 당신들에게 결제하지 않았단 말인가요?”“그럼 잔금도 많이 밀렸어요!”누군가 떠들어댔다.“잔금? 정말 뻔뻔하게도 그게 잔금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잔금을 나한테 달라고 하는 건, 당신들이 정말 거지라서야, 아니면 나 같은 여자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 같은 낯짝으로 감히 장사판을 기웃거려?”나는 강경한 어투로 말을 뱉고 이해월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료 뭉치를 건네주었다. 자료는 ‘턱!' 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 테이블에 떨어져 멀리 미끄러져 나갔다.“정말 당신들이 하는 짓이 빈틈없는 줄 알아? 당신들은 신호연과 계약 기간 조잡한 물건으로 공사품질을 속이고 있는데,내가 개발업자를 함께 찾아서 이야기할까, 아니면 관련 부서에 보고해서 조사를 시작할까? 그 업주들 안 와도 돼, 명단은 나한테 있어!”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란 사람에 대해 아마 들은 바가 있을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송이고, 게다가 백승불패의 철부리 변호사도 불렀어. 모두 함께 수법을 써봐, 내가 반드시 당신들에게 좋은 의견을 줄 거야. 만약 당신들이 이런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다면, 당장 당신들에게 결제해주고 한 푼도 빚지지 않을 거야.”회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나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이의 없는 사람은 내 회사를 떠나세요. 구 변호사님, 오늘 온 사람들의 모든 협력 계약을 해지해 주세요. 그들은 저 한지아와 협력할 자격이 없습니다.”“잠깐만요, 한 대표님! 오늘 회의라는 것이...”유빈은 나를 쳐다보더니 표정이 복잡해진 채 달갑지 않은 것
나는 이 기세를 몰아 회사 전체 직원들을 불러 회의까지 소집했다. 이로써 이번 이슈는 일단락되었다. 신호연은 지금쯤 형원그룹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혜선에게 연락해 형원 그룹 내부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가끔 어떤 일들은 사전에 예상하여 후폭풍을 미리 준비하고 조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위기의식을 항상 갖고 있어야 어떤 일이든 나중에 잘 방어할 수 있다. 도혜선은 정말 훌륭한 스파이 자질이 있었다. 도혜선이 나를 위하는 마음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최선이 도혜선에게 하는 이런 내 부탁들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내키지 않은 그 무언가가 계속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고 어제저녁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해월은 종일 싱글벙글해 있었지만 나는 같이 즐길 수 없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이미연에게 전화해 언제 퇴근하는지 물었다. 이미연은 나의 조급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만날 시간을 바로 정했다. 약속 장소를 따로 정하지는 않았고 내가 술과 안주를 사서 강변 옆 잔디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변에 도착한 이미연은 강과 잔디밭의 어우러진 공기에 한껏 들떠있었다. “지아야, 여기 너무 좋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이미연은 좀 더 편하게 즐기기 위해 차에 있는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다시 자리에 왔다. 우리는 잔디밭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서로 마주 보며 맥주캔을 부딪쳤다. 이미연은 그 누구보다도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친구다. 이미연은 맥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배현우에 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 하자 이미연은 본인 생각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네가 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한 명은 닿을 수 없는 저 하늘 끝에 있는 별 같고, 한 명은 수심도 안 보이는 바다 밑에 있는 것 같아. 물론 네가 엄청나게 노력은 하겠지. 근데 분명히 힘들 거야. 네가 배현우를 따라갈 수 있을까?”사실 나도 늘 생각해 왔던 문
장영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요일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해외 나간 지가 벌써 20일이 넘었는데 그동안 온 연락은 두세 통의 전화가 전부다. 전화에서 장영식은 이번 출장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그 말에 내 맘속의 큰 짐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왜냐하면 배현우가 나에게 준 시간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대를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배현우가 홍콩으로 간 이후부터 지난번 발표회 날까지 그날 저녁 먼 곳에서 한 번 본 이후로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배현우는 귀국 후 전화 한 통 없었고 나도 먼저 전화해야 할 특별한 용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고객사와 미팅을 마치고 회사에 도착하니 점심이 다 돼 갔다. 진후빌딩 앞에 도착하니 이세림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본 이세림은 활짝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한 대표님. 오셨어요? 우리는 정말 인연인가 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세림이 나를 만나러 왔음을 알았다. 너무 의외였다. “혹시... 날 보러 온 거예요?”“아니에요. E 파크몰에 갔다가 시간이 비어서 지아 씨와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 온 거예요. 서프라이즈 주려고 연락 안 하고 온 건 데 없어서 서운할 뻔했어요.” 김빠진 얼굴을 했던 그녀는 방긋 웃었다.“안 그래도 정말 괜찮은 맛집이 있어서 지난번부터 같이 가보고 싶었거든요. 지난번에 못 봐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세림에게 얘기하면서 나는 조수석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이세림과 같이 할머니 집밥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난번 도혜선이 날 데리고 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유빈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스릴이 넘쳐나긴 했었다. 이세림도 역시 할머니 집밥 음식이 입에 너무 잘 맞는다고 했다. 이런 맛을 쉽게 찾을 수 없어 더 맛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호주에 살면서 집에 한식 셰프가 있었지만, 한식을 먹는 일은 거의 드물다고 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금수저임
나는 깜짝 놀라 이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서히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세림은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손을 닦으면서 나를 보고 웃었다. 이세림의 하얀 얼굴에 띈 웃음은 정말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오빠는 늘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사촌 동생이라고 소개하죠.”“아니에요?” 나는 이세림의 말이 끝나자마자 되물었다. 그동안 배현우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내색은 못 했지만 아주 불쾌했다.“맞긴 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양녀예요.” 이세림은 대수롭지 않은 듯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심장이 예고도 없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혈연관계가 없는 동생이라... 나에게는 왜 항상 이런 일들만 생기는 걸까?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계속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후회되는 게 있다. 이세림과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배현우와 나의 관계가 사촌 동생 얘기까지 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무심결에 보여준 것이다.“우리 엄마가 현우 오빠 고모예요. 정말 강하고 훌륭한 분이에요. 천우 그룹 전임 집행관이셨죠.” 이세림은 물티슈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닦으며 말했다. 이세림은 정말 정갈하고 깔끔한 사람이다. 네일케어도 빠짐없이 손톱 하나하나 다 받았고 큐빅으로 장식해 놓아 흠집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전임 집행관이요?” 나는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네. 맞아요. 기존에 있던 천우 그룹 재단은 전부 저희 엄마가 관리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겨우 현우 오빠에게 돌려준 거예요.”내 머릿속은 이들의 가족관계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인을 바꾸기 위해 오랫동안 불안정했다고 했는데 현우 씨와 고모 사이의 관계가 불안정한 거였을까?그러면 왜 이번에는 전부 현우 씨에게 넘길 수 있었을까? 이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무슨 이유로 전임 집행관이 아예 손을 뗀 걸까? “돌려줬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이세림에게 물
갑자기 온 전화에 너무 당황스러웠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거절 버튼을 누르려고 했으나 손이 미끄러져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수화기 너머 배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통화 첫마디가 불평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나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늦다고? 안 받으려고 했거든!내가 대답이 없자 배현우는 계속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무... 무슨일?”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자신 없는 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배현우는 예민한 말투로 계속 묻고 있었다.“그러면 기분이 좋아야 할까요?” 인제야 연락해 놓고 내가 연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드리길 바라냐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었다.“왜 여태껏 전화 한 통이 없어요. 내가 귀국한 걸 알고 있었잖아요!” 배현우는 오히려 당연한 듯 나에게 불평을 토로했다. 배현우의 뻔뻔한 태도에 기분이 좀 상했다. “귀국하신 분이 휴대전화에 뜬 부재중 전화는 못 보셨나 보네요. 항상 본인만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드릴까요? 이혼녀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지만, 본인 주제는 잘 알고 있더든요.”말을 내뱉는 순간 내 표현이 너무 과했다는 걸 느꼈다. 무의식 속에 혀를 깨물었고 진한 피비린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다시 얘기하려는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 선 채로 휴대전화만 뚫어지게 바라봤다.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흐렸다! 개였다! 날씨도 이것보다는 덜하겠네! 전화는 항상 먼저 끊고 말이야!손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대체 뭐냐고? 항상 사람 마음을 헤집어 놓고 본인만 끊으면 다냐고!이틀 뒤, 장영식은 터벅터벅 걸으며 회사로 들어왔다. 내 눈앞의 사람이 장영식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수염도 며칠 깎지 않았는지 지저분했고 얼굴도 햇볕에 꺼멓게 타 있었다.“영식
오늘 저녁 우리 집은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였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다. 저녁 내내 우리 모두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아빠는 맥주 한 캔까지 원샸했다. 혹시나 많이 취하셨을까 봐 걱정됐지만 아빠는 전혀 문제없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거실로 자리를 옮겨 과일까지 함께 즐기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눴다. 시간이 늦어지자, 장영식은 집으로 가려고 준비했고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자청했다. 장영식의 집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집을 나와 같이 걷고 있는데 장영식이 먼저 말을 건넸다. “배가 너무 부른데 좀 걷지 않을래? 유빈이 얘기 좀 해봐.”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골드 빌리지 대문을 나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유빈이의 일에 대해 전부 얘기했다. 장영식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파트너로서 회사 일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다. 한참 얘기하며 걷고 있는데 외투 주머니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나보다 먼저 벨 소리를 들은 장영식이 나에게 알려줘서야 내 벨 소리임을 알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배현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벨 소리를 끊어 버리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회사 일에 대해 우리는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얘기가 항상 길어진다.이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고 장영식은 나를 보며 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아?”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배현우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왜 또 안 받아요? 나와 연락 안 할 거예요?”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딘데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오더니 배현우가 성난 목소리로 나를 행해 외쳤다. “타요!”갑자기 나타난 배현우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차 옆으로 두 발짝 걸어갔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