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력서에서 본 그는 바로 대학 선배이자 고향 친구인 장영식이었다.전에 해외로 떠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으므로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나는 재빨리 이해월 실장에게 면접을 통지하라 일렀다.이해월은 신흥에 오래 몸 담근 직원이다. 높지 않은 학력에 비해 갖춘 상당한 업무 실력과 영리한 판단력, 그리고 특히 탁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인재였다. 내가 그녀를 나의 비서로 일하도록 한데는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신연아와 모순이 있었기에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장영식을 면접 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는 꽤 진중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회사의 사장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오래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를 만난 나는 신이 나서 바로 물었다. “나 누군지 알아?”그가 입꼬리를 올리고 살짝 웃었다. “당연히 알지!”“그런데 내 회사는 아직 그릇이 작아서 너의 학력에 수준이 못 미칠 수 있어.” 나는 직설적으로 회사의 상황에 대해 간결하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아마 월급도 네 능력에 비해 적게 가질 수 있어.”장영식이 더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잘됐네. 나랑 주식을 나눠 가지면 둘 다 손해 보지 않는 남는 장사일 것 같은데.”“걱정하지 마! 열심히 할 자신 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그 높은 학력과 능력치를 가지고 설마 아무것도 재지 않고 바로 내 회사로 달려온 건가?내가 돌에 맞은 듯 멍하니 앉아 있자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왜? 나 못 믿어?”“당연히 믿지. 그래도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보고서를 내줘. 친구라 해도 아무런 근거 없이 믿고 맡기기는 어려우니까.”나는 종래로 공짜로 주는 떡은 사양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노력 없이 성과를 채가는 사람은 사절이야. 잊지 마. 난 지금도 도둑질한 쥐를 내쫓고 오는 길이야.”나의 말에 그가 통쾌하게 웃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할게. 나도 네가
울산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간만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배현우가 생각났다. 이혼 축하 연락을 끝으로 오랫동안 배현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배현우도 나에게 주동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늪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왜인지 모르게 자꾸 생기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절대 겉으로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자제하고 또 자제했다.그러나 나는 착륙 후 부재중전화 목록을 보고 또 눈치 없이 쿵쿵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의 이름 세 글자가 제일 위에 떠 있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딥니까?”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물었다.“방금 울산에 도착했어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혼자예요?”“네!”“그래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그의 말투는 소원했으며 조금의 미련도 없이 금방 전화를 끊어버렸다.오히려 서운하고 답답한 것은 내 쪽이었다. 기껏 전화했다는 것이 두 마디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나?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요즘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백 개도 넘었는데!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진사원은 내가 서울에 온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 나를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본 진사원의 모습은 표정이 한결 밝아진 상태였다.나는 공항에서 사원으로 간 후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그리고 곧바로 프로젝트 도킹 회의를 열어 착공을 앞둔 천우 그룹의 프로젝트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고 계획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도면에 근거하여 전반적인 설계와 시공 방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업무 효율은 정말 높았고, 그들이 제시한 협조방안은 나의 사업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어 나로 하여금 갑자기 앞날에 대한 신심이 차오르게 했다.회의는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회의실에서 저녁 식사를 배달 음식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회의 후 진사원이 직접 나를 호텔로 데려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환청 같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다시 누우려고 할 때 다시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가로 살금살금 다가가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밖이 고요했으므로, 나는 긴장한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세요?”밖에서 벅찬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나는 귀를 의심했다. 졸음이 순간 싹 가셨다.내가 벙찐 채로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저예요, 지아 씨. 문 열어요!”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이 목소리 왠지...’나는 맨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려 비틀거리며 달려갔다.문가로 가서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문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빠르게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한껏 지쳐 보이는 배현우가 내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꿈일까 봐 조금 두려워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사실 어떻게 왔는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그립던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감성보다 이성이 앞섰기에 나는 할 수 없었다.그가 나를 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지아 씨가 있는 곳엔 제가 당연히 있어야죠. 왜요. 싫어요?”그는 내 당혹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크게 벌려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빨리 들어가요.”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가 들어갈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밖의 찬 공기가 그와 함께 따라 들어왔다. 그가 맨 발인 나를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땅이 이렇게 찬데 슬리퍼라도 신어요, 어서.”부드러운 눈빛에 내가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피곤함이 섞인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또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나는 얼른 슬리퍼를 찾아 신었지만 당황하여 로봇처럼 삐걱삐걱하였다.그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자 나는 얼른
다음날.정오가 되어서야 우리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진사원의 연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았다.나는 그에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고 저녁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그제야 그는 껴안았던 팔의 힘을 빼고 함께 일어났다.함께 점심을 먹자는 그의 말에 나는 또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와의 이런 관계가 도대체 어떤 관계이며,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관계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우리 사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망설임이 없지만, 그는 나에게 확실한 약속을 한 적도 사랑의 맹세를 한 적도 없었다. 정상적인 교제 관계로 정의 내리기는 더욱이 이상했다. 그럼 나는 도대체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물음이다.그러나 매번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치 N극과 S극의 자석이 자연스레 끌리게 되듯 나는 싫은 내색 한번 없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모두 받아주게 되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낀다.그는 나에게 원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본인의 마음 가는 대로.그래서 나는 감히 그에게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 말할 수도 없다.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까 봐.서울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는데 나는 피곤한 나머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속상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안타깝게 고개를 저으셨다. “지아야, 이렇게까지 희생하면서 일하는 이유가 무엇이니? 아니면 우리 가족 모두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인생도 짧은데 안일하고 즐겁게 보내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안일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행복한 삶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그러나 나는 서울에 너무 많은 아쉬움과 애정이 남아있다.이미 활이 시위에 당겨져 있는데 어찌 활을 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잃은 10년의 청춘은 나 스스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전체 프로젝트의 계
그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그 여자는 배현우와 대화를 하며 손을 뻗어 팔짱을 끼려 했다. 그녀는 오만한 시선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화려하게 이쁜 건 아니었지만 수수하면서도 뿜기는 기운이 남달랐다.배현우는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예민한 그 여자는 배현우의 눈길을 따라 내 쪽을 보았고 그녀는 마치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나는 잘못 본 게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녀의 표정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내가 어리벙벙해 있을 때 배현우는 덤덤하게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갈 때쯤 그 여자는 다시 한번 나를 째려보았다.이미연은 내가 배현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눈치챘는지 소리 높여 말했다. “가자! 내가 보니까 너 술 몇 잔 마셔야 할 거 같은데, 빨리 가자!”나는 곧바로 찬성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이라도 좀 마셔서 머리를 맑게 하고 싶었다.이미연은 차에 나를 태우고는 다크바로 갔다. 솔직히 말하면 좀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위스키 두 잔을 시켰고 위스키에 대해선 잘 몰랐던 나는 그녀가 주는 대로 받아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바텐더에게 한 잔을 더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야! 천천히 마셔! 취하고 싶은 거야?” 이미연은 소리치며 나를 말렸다. “천천히 음미해 봐. 취해가는 과정을 느껴야지. 지금 넌 빨라도 너무 빨라!”나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다. 과정? 나한테 지금 남은 건 과정밖에 없는데!“아 맞다, 장영식에 대해 알려준다는 걸 깜박했네!” 이미연은 반쯤 엎드린 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사해 보니까 이력서에 쓴 거랑 별 차이는 없었어. 이제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됐던데?”옆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소리가 아주 시끄러워 나는 문제 없다는 한마디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술 두 잔을 들이켜자 배가 뜨거워지면서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뒤끝이 이렇게 심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아직 정신이 남
’쌔앵’ 소리가 내 뒤통수 뒤로 들려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과는 다르게 그저 ‘쨍그랑’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술이 반쯤 깬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남자는 책상 위에 습격당한 사람처럼 드러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사나운 표정을 한 배현우가 서 있었다.그 남자는 화를 내며 다시 일어나 배현우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러자 배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 남자는 아파하면서 소리를 질렀다.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몰렸다. 배현우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이미연도 허겁지겁 우리의 가방을 챙기고는 뒤따라 나왔다.“한지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곳에 다 오고. 심지어 술까지 마셔요?” 그는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금 일 때문에 놀라서 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그의 사나운 표정을 보니 진정이 됐다. ‘하! 아까 식당에서는 방긋방긋 잘도 웃더니 여기 나한테 오니까 얼굴색이 싹 변하네.’“지아야, 너 괜찮아?” 이미연은 한바탕 내 몸을 훑어보고는 배현우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여기에 오자고 했어요.”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다 마신 마당에 누가 제안했는지 알 게 뭐야.’ 나는 이미연을 보면서 명령하는 식으로 말했다. “괜찮아, 우리 집에나 가자!”이미연은 살짝 민망한지 나와 사나운 표정을 한 배현우를 이리저리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현우 씨가 지아 좀 데려다줄래요? 우리가 다 술 마시는 바람에 차를 몰수가 없어요.” 배현우는 차갑게 그저 “네.” 한마디만 뱉을 뿐이었다.이미연은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나는 이미연을 향해 크게 욕을 했다. “...야! 이미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밖에 안됐냐? 저기...”나는 이미연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배현우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워져 비틀거리다 배현우의 가슴팍에 부딪혔다.나는
나랑 함께? 혹시 어장관리 같은 걸 하는 건가? 오늘같이 있었던 그 사람이랑은 무슨 사이일까?생각하다 보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뭐라고 그가 누구랑 뭘 했는지 간섭하는 건지... “왜 웃어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물었다.“배 실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실장님이랑 함께 술을 마시겠어요? 그럴 담까진 없어요!”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나는 확실히 배현우와 술을 마시면 안 됐다. 내가 뭐라고. 방금 이혼하고 남한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나와 배현우 씨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니 정말 아늑했다. 내가 너무 가슴 아플 정도로 하찮았다.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오늘도 그렇고...‘나 감정 기복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이제 감정 정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누굴 좋아하는 거야? 하...’“왜 갑자기 말이 없죠?” 내가 조용해지자 배현우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현우 씨 생각엔 지금 어떤 말을 하면 좋을 거 같나요?” 나는 그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물어볼 거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물어봐요!”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어볼 거 없어요.”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맞다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으니까.“쳇. 왜 안 물어봐요? 아까 그놈, 제 사촌 동생이에요!” 그는 내 이미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말해요. 저 안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누가 현우 씨랑 같이 있든 그건 현우 씨 자유지, 제가 간섭할 자격은 없죠!” 나는 일부러 센 척 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안심되고 후련해졌다. 문득 아까 그 여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왜 그런 눈빛으로 봤을까? 우리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몇 년 못 본 사람을 봤다거나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봤을 때 나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어떻게 해야 지아 씨가 자격이 생기죠?” 그는
사촌 동생이랑은 이제 나랑 상관이 없고 다신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그녀와 또 마주치게 되었다...월요일, 장영식은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고 그는 우리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나와 일을 나눠 가짐으로써 내 어깨 우의 부담도 절반 줄어든거 같았다.절대 사람을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장영식에게 신흥건재의 모든 발전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위기까지 모두 상세히 알려주었다. 장영식은 신흥을 아예 다시 하나 만드는 게 빠를 거 같다며 나를 비꼬았다.화요일에는 천우 그룹에 가서 회의를 진행했다. 거기서 배현우는 보지 못했지만 배현우의 사촌 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깔끔하고 정교한 정장을 입고 우아한 아우라를 뿜기며 회의에 참여했다.나는 회의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쭉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회의를 끝마치고 나는 이해월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가려 했고 이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한 대표님!”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배현우 사촌 동생이 웃으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한 대표님 맞으시죠?”“네! 한지아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여긴 천우 그룹 안이고 기본적인 예절은 꼭 지켜야 했으니까.“이세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계속 놓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그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손을 꼭 잡으면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고 물었다. “제가 한 대표란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저를 아세요?”“... 아뇨. 그냥 제 촉이 그쪽이 한 대표님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한 대표님 정말 이쁘세요!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고요!” 왠지 무언가를 감추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솔직히 생각 못 했어요. 천우그룹의 이렇게 큰 프로젝트 합작 파트너가 여자일 줄은. 그만큼 한 대표님이 우수하다는 거겠죠! 저도 대표님을 따라 배우고 싶어요!”그녀는 아부하는 거 같았고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죠!” “그 연락처를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