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함께? 혹시 어장관리 같은 걸 하는 건가? 오늘같이 있었던 그 사람이랑은 무슨 사이일까?생각하다 보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뭐라고 그가 누구랑 뭘 했는지 간섭하는 건지... “왜 웃어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물었다.“배 실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실장님이랑 함께 술을 마시겠어요? 그럴 담까진 없어요!”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나는 확실히 배현우와 술을 마시면 안 됐다. 내가 뭐라고. 방금 이혼하고 남한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나와 배현우 씨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니 정말 아늑했다. 내가 너무 가슴 아플 정도로 하찮았다.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오늘도 그렇고...‘나 감정 기복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이제 감정 정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누굴 좋아하는 거야? 하...’“왜 갑자기 말이 없죠?” 내가 조용해지자 배현우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현우 씨 생각엔 지금 어떤 말을 하면 좋을 거 같나요?” 나는 그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물어볼 거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물어봐요!”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어볼 거 없어요.”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맞다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으니까.“쳇. 왜 안 물어봐요? 아까 그놈, 제 사촌 동생이에요!” 그는 내 이미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말해요. 저 안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누가 현우 씨랑 같이 있든 그건 현우 씨 자유지, 제가 간섭할 자격은 없죠!” 나는 일부러 센 척 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안심되고 후련해졌다. 문득 아까 그 여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왜 그런 눈빛으로 봤을까? 우리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몇 년 못 본 사람을 봤다거나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봤을 때 나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어떻게 해야 지아 씨가 자격이 생기죠?” 그는
사촌 동생이랑은 이제 나랑 상관이 없고 다신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그녀와 또 마주치게 되었다...월요일, 장영식은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고 그는 우리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나와 일을 나눠 가짐으로써 내 어깨 우의 부담도 절반 줄어든거 같았다.절대 사람을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장영식에게 신흥건재의 모든 발전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위기까지 모두 상세히 알려주었다. 장영식은 신흥을 아예 다시 하나 만드는 게 빠를 거 같다며 나를 비꼬았다.화요일에는 천우 그룹에 가서 회의를 진행했다. 거기서 배현우는 보지 못했지만 배현우의 사촌 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깔끔하고 정교한 정장을 입고 우아한 아우라를 뿜기며 회의에 참여했다.나는 회의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쭉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회의를 끝마치고 나는 이해월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가려 했고 이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한 대표님!”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배현우 사촌 동생이 웃으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한 대표님 맞으시죠?”“네! 한지아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여긴 천우 그룹 안이고 기본적인 예절은 꼭 지켜야 했으니까.“이세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계속 놓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그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손을 꼭 잡으면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고 물었다. “제가 한 대표란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저를 아세요?”“... 아뇨. 그냥 제 촉이 그쪽이 한 대표님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한 대표님 정말 이쁘세요!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고요!” 왠지 무언가를 감추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솔직히 생각 못 했어요. 천우그룹의 이렇게 큰 프로젝트 합작 파트너가 여자일 줄은. 그만큼 한 대표님이 우수하다는 거겠죠! 저도 대표님을 따라 배우고 싶어요!”그녀는 아부하는 거 같았고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죠!” “그 연락처를
계획을 꾸리던 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지 말자... 지금은 비록 남이지만 그래도 전엔 부부 생활을 함께하던 사람이었는데... 모든건 언젠가 자기의 위치를 찾아서 제대로 돌아갈 테니 굳이 이렇게까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서기엔 좀 서두르는 감이 있었다.그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마음을 정리했다. 특히 지금은 장영식이 내 부담을 확 줄여 주어 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그래서인지 전에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마음도 많이 사그라져 신호연에게 감성팔이를 할 바엔 차라리 내 사업이나 더 발전시키자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신호연은 우리 콩이의 아빠니까. 개가 나를 문다고 해서 나도 개를 물면 안 된다고 나도 그냥 신호연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신호연이 우리 쪽에서 딱히 이득을 본 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넓게 보는 게 맞는거라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했다.내가 이렇게 그냥 자기 위안을 하고 있을 때 신호연은 나를 궁지에 몰고 있을 줄 생각도 못 했다.그 후 연이어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고 우리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공급상이 없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었다. 그 후 장영식이 신흥 쪽에서 또 큰 공급상들과 계약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고 오면서 이런 국면을 바로 잡는 게 더욱 힘들다는 게 느껴졌다.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직접 공급상들을 찾아다니면서 상담을 했고 회사는 장영식에게 맡겨두고 필사적으로 공급상을 구하러 다녔다. 장영식은 알아서 우리 회사를 잘 책임져 주었기에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다.배현우 그쪽도 마찬가지로 바쁜 거 같았다. 우리는 각자 바쁘게 지내면서 연락도 거의 안 했다. 그저 이세림과 두 번 정도 안부를 나눴고 회의할 때 가끔 마주쳤다.그녀는 지금 천우 그룹의 견습 주임이었고 말로는 본부에서 파견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본부와 관계가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나는 출장 갔다가 금방 일산에서 돌아와 KTX에서 내리자마자 이세림이 나보고 어디냐고 연락
뭐라고? 배현우도 온다고?“근데 오빠는 아마 조금 늦게 올 거예요. 오빠가 평택에 갔다가 지금 돌아오는 길이어서요. 그렇다고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먼저 먹으면 돼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바로 전에 현우 오빠가 갑자기 전화 와서 뭘 먹을지 묻길래 그냥 지아 씨랑 먹는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겠다길래 그러라고 했어요.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요! 괜찮죠!”‘정말 괜찮나?’ 사실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이 순수하고 무해한 이 사람을 상대로 불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다행이네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메뉴판을 나에게 건넸다. “제 것은 이미 다 골랐어요. 같이 밥을 먹는 게 처음이니까 지아 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여기 보면서 골라봐요!”그녀는 정말 열정적이고 솔직하고 숨김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그 오만하고 차가웠던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난 그때 그녀가 일어서서 주변을 훑어볼 때의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나는 먹고 싶은 요리들을 고른 후 웨이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세림에게 말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 못 했네요. 죄송해요.”“에이, 무슨! 미안할 필요 하나도 없어요. 바쁜 거 다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다. “저는 지아 씨가 너무 존경스러워요! 자기 회사를 다 차리고 너무 대단한 거 같아요!”나는 그저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휘청거리며 거의 무너져 가는 회사가 누군가의 존경 대상이 된 게 웃기고 놀리는 거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죄가 없었다. 우리가 주문한 요리들이 나왔고 나는 이세림을 보며 물었다. “정말 배 실장님 안 기다릴 거예요?”“실... 실장님?” 이세림의 눈은 휘둥그레졌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를 하고는 말했다. “아... 기다릴 필요 없어요!”나는 뭔가 잘못 말한 거 같았다. “저... 혹시 뭘 잘못 말한 건가요?”“아... 아뇨! 기다릴 필요 없어요.
나는 거울 속의 신연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짜증을 냈다. “참, 귀신처럼 떡 서서 뭐 하는 건데?”“하! 야, 한지아, 너 진짜 뻔뻔하다! 저 사람 옆에 붙어서 또 뭘 하려고? 네 꼬락서니나 좀 보고 행동해! 이혼녀 주제, 자격 있다고 생각해?”“자격 있는지 마는지는 네가 말해서 소용없어! 너는 입만 열면 욕이지. 좀 말이라도 이쁘게 하면 안 되니?” 나는 말을 마치고는 손을 닦고 뒤 돌아 나갔다. 신연아는 내가 그녀의 마음대로 기죽지 않자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나쁜년. 언제까지 발버둥 칠 수 있나 보자! 언젠간 너도 울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불행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신연아의 말이 끝나자 이세림이 마침 화장실로 들어왔고 나와 신연아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끼고는 바로 내 옆에 서면서 내 팔을 잡고 말했다. “한 대표님, 왜 그러세요?”이세림의 눈길은 악독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신연아를 향했다.신연아는 이세림을 한번 훑고는 앙큼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조심해요. 당신 옆에 있는 사람 이래 봬도 꽃뱀이라 언제 그쪽 남자를 뺏을지 몰라요!”신연아의 말은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신연아, 너 말조심해! 너무한 거 아니야?”“너무한 건 너겠지!” 갑자기 어디선가 말이 들려왔다. “한지아, 너 꼭 이렇게까지 연아를 괴롭혀야 하는 거야?”신호연은 낮게 말하며 신연아 옆에 섰다. 그러고는 자기의 품 안에 끌어안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나오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어! 잊지 마, 신흥의 그 공급상들 내 말만 들으니까!”“하! 너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거야 뭐야? 야, 네가 남자라면 네가 직접 찾아오던가. 맨날 뒤에서 남이나 이리저리 조종하면서. 찌질하다! 참! 뭐? 네 말만 듣는다고? 네 말만 듣는 공급상들, 나도 필요 없어!”“한지아, 너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하지 마. 신흥을 살리고 싶으면 일단 허심함이나 배우고 와! 아니면 너랑 계약을 체결해도 그저 돈낭비...”신호연의 말이 채 떨어지기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소파에 푹 기대여 천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쑤시고 힘들었다. 신호연과 이혼만 하면 모든 게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단 하루조차 제대로 된 휴식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는 듯싶으면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거 같았다.그리고 신호연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무언가도 함께 나의 길을 가로막는 거 같았다. 전에 했었던 결정들이 진짜 맞긴 한 걸까...회사가 계약을 체결한 건 좋은 일이지만 하나의 족쇄가 되어서 내 목을 졸라왔고 그 족쇄는 나를 꽉 묶어둔 채 그저 수동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했다. 그게 불바다든 어디든 돌아갈 수도 없게 말이다.어머니는 내가 온단 연락을 받았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슬그머니 내려와 보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음 아파했다.나는 얼른 내 몸을 일으켜 세웠고 어머니는 내 옆에 와서 살포시 앉았다. “지아야, 많이 힘들지?”“...”“어머니! 우리는 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따뜻하고도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세게 강박할 필요 없어. 끈도 세게 잡으면 끊어지는 거처럼 우리도 너무 강박하면 사람이 미치게 된단다.”“신흥은 제 피땀으로 세운 거예요. 제 모든 걸 바쳐서... 하지만 계속 누군가 그걸 이용해서 저를 압박하고 무너뜨리고 싶어 하고! 저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더더욱 제가 세운 신흥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고요! 남들이 저를 그냥 내버려 두면 저도 가만히 있는데 쟤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쟤들이 먼저 건드린 거예요!”어머니는 손을 떨면서 말했다. “설마 그 짐승 같은 놈 말이니?”그 말에 나는 ‘아차’ 싶으면서 정신이 확 들면서 벌떡 일어나 안심시켰다. “어머니,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회사는 나름 잘 굴러가고 있어
배현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배현우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아 씨는 한참 전부터 저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왜요?”나는 놀라서 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아... 현... 현우 씨 저는...”“지아 씨,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 인생 책임져요!” 그는 살짝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이 진짜... 지금이 어느 땐데 이렇게 장난을!’ “아니... 현우 씨... 진짜. 저는 사업에 대해 말하잖아요. 저와의 계약이 혹시 현우 씨의 앞길에 영향 준 거 아니냐고요. 그... 그런거면 우리 계약 해지해요!”“늦었어요!”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니까 지아 씨는 오직 한 갈래 길밖에 없어요.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거요!”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마른침만 삼켰다.그리고는 그는 작게 속삭였다. “잤어요? 저 보고 싶지 않아요?”나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고 속으로는 너무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충동을 겨우 참아가며 말했다. “현우 씨 내일 출장 간다면서요. 지금 너무 늦었어요...”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은 나사라도 빠진 듯 미친 듯이 뛰었고 숨쉬기가 어려워지며 손에서 땀이 났다. 나는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그럼 얼른 쉬어요!”배현우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내뱉기 그렇게 힘들었는데 배현우는 이성적으로 딱 잘라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나는 순간 실망감이 확 들었다. 정말 너무너무 배현우가 보고 싶었고 이 갈망은 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려요.”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전화를 끊은 다음 나는 공허함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고는 왜 아까 거절한 건지, 왜 그렇게 억제하면서 진중한 척을 한 건지 나를 탓했다. 생각할수록 더 보고 싶어졌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정도로.하지만 나는 그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신흥의 원 멤버들을 한번 쭉 돌이켜 보았다. 우리 직원의 경우 나는 한 번도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특별한 사람이었고 나와 굉장히 친하고 신뢰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스파이라... 도대체 누구일까?사무실로 돌아온 후 나는 우선 배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강훈이 알려준 정보가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비행기에 탔는지 전화기가 꺼져있었다.그 후 서강훈이 나를 타일러 주며 말해 준 거와 같이 그 몇 개 공급상들은 연이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나와 장영식은 몰래 계획을 살짝 변경했다. 내가 신흥을 돌보고 장영식이 공급상들과 만나 담판을 하기로 했다. 신호연은 나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을 테니 장영식 쪽은 아마 조금은 무방비 상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영식은 내게 받은 자료를 들고 회사를 나섰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오직 나만 알고 있었다. 우린 이해월조차 모르게 행동했다.내가 신흥을 인수했을 때 신호연이 옮겨간 프로젝트 외에도 마무리가 흐지부지한 채로 있는 프로젝트가 몇개 있었는데 공급상들은 이걸 빌미로 삼아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그들이 소란을 피우든 말든 나와 이해월은 조용히 쉬지 않고 대형 공급상들의 스캔들만 열심히 수집했다.이미연은 또 한 번 우리를 도와주며 그녀의 조력자들까지 불러다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이 몇 년간 신호연이 협력할 때 했던 은밀한 거래의 흔적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겉으로 보기의 우리 신흥은 엉망진창이었다. 소문에는 우리 신흥이 파산 직전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사무실은 아주 지저분했고 새로 온 대표는 어디 갔는지 모르며 나조차 회사에 코빼기도 안 삐쳤으니까.나는 회사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 회사의 가장 오래된 직원인 건이에게 모든 사무를 쥐여주었다.본명은 채형건이고 나는 그를 건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이 굉장히 허심하고 야무져 몇 년간 항상 그에게 창고 관리를 부탁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