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울 속의 신연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짜증을 냈다. “참, 귀신처럼 떡 서서 뭐 하는 건데?”“하! 야, 한지아, 너 진짜 뻔뻔하다! 저 사람 옆에 붙어서 또 뭘 하려고? 네 꼬락서니나 좀 보고 행동해! 이혼녀 주제, 자격 있다고 생각해?”“자격 있는지 마는지는 네가 말해서 소용없어! 너는 입만 열면 욕이지. 좀 말이라도 이쁘게 하면 안 되니?” 나는 말을 마치고는 손을 닦고 뒤 돌아 나갔다. 신연아는 내가 그녀의 마음대로 기죽지 않자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나쁜년. 언제까지 발버둥 칠 수 있나 보자! 언젠간 너도 울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불행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신연아의 말이 끝나자 이세림이 마침 화장실로 들어왔고 나와 신연아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끼고는 바로 내 옆에 서면서 내 팔을 잡고 말했다. “한 대표님, 왜 그러세요?”이세림의 눈길은 악독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신연아를 향했다.신연아는 이세림을 한번 훑고는 앙큼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조심해요. 당신 옆에 있는 사람 이래 봬도 꽃뱀이라 언제 그쪽 남자를 뺏을지 몰라요!”신연아의 말은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신연아, 너 말조심해! 너무한 거 아니야?”“너무한 건 너겠지!” 갑자기 어디선가 말이 들려왔다. “한지아, 너 꼭 이렇게까지 연아를 괴롭혀야 하는 거야?”신호연은 낮게 말하며 신연아 옆에 섰다. 그러고는 자기의 품 안에 끌어안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나오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어! 잊지 마, 신흥의 그 공급상들 내 말만 들으니까!”“하! 너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거야 뭐야? 야, 네가 남자라면 네가 직접 찾아오던가. 맨날 뒤에서 남이나 이리저리 조종하면서. 찌질하다! 참! 뭐? 네 말만 듣는다고? 네 말만 듣는 공급상들, 나도 필요 없어!”“한지아, 너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하지 마. 신흥을 살리고 싶으면 일단 허심함이나 배우고 와! 아니면 너랑 계약을 체결해도 그저 돈낭비...”신호연의 말이 채 떨어지기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소파에 푹 기대여 천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쑤시고 힘들었다. 신호연과 이혼만 하면 모든 게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단 하루조차 제대로 된 휴식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는 듯싶으면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거 같았다.그리고 신호연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무언가도 함께 나의 길을 가로막는 거 같았다. 전에 했었던 결정들이 진짜 맞긴 한 걸까...회사가 계약을 체결한 건 좋은 일이지만 하나의 족쇄가 되어서 내 목을 졸라왔고 그 족쇄는 나를 꽉 묶어둔 채 그저 수동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했다. 그게 불바다든 어디든 돌아갈 수도 없게 말이다.어머니는 내가 온단 연락을 받았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슬그머니 내려와 보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음 아파했다.나는 얼른 내 몸을 일으켜 세웠고 어머니는 내 옆에 와서 살포시 앉았다. “지아야, 많이 힘들지?”“...”“어머니! 우리는 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따뜻하고도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세게 강박할 필요 없어. 끈도 세게 잡으면 끊어지는 거처럼 우리도 너무 강박하면 사람이 미치게 된단다.”“신흥은 제 피땀으로 세운 거예요. 제 모든 걸 바쳐서... 하지만 계속 누군가 그걸 이용해서 저를 압박하고 무너뜨리고 싶어 하고! 저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더더욱 제가 세운 신흥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고요! 남들이 저를 그냥 내버려 두면 저도 가만히 있는데 쟤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쟤들이 먼저 건드린 거예요!”어머니는 손을 떨면서 말했다. “설마 그 짐승 같은 놈 말이니?”그 말에 나는 ‘아차’ 싶으면서 정신이 확 들면서 벌떡 일어나 안심시켰다. “어머니,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회사는 나름 잘 굴러가고 있어
배현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배현우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아 씨는 한참 전부터 저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왜요?”나는 놀라서 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아... 현... 현우 씨 저는...”“지아 씨,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 인생 책임져요!” 그는 살짝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이 진짜... 지금이 어느 땐데 이렇게 장난을!’ “아니... 현우 씨... 진짜. 저는 사업에 대해 말하잖아요. 저와의 계약이 혹시 현우 씨의 앞길에 영향 준 거 아니냐고요. 그... 그런거면 우리 계약 해지해요!”“늦었어요!”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니까 지아 씨는 오직 한 갈래 길밖에 없어요.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거요!”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마른침만 삼켰다.그리고는 그는 작게 속삭였다. “잤어요? 저 보고 싶지 않아요?”나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고 속으로는 너무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충동을 겨우 참아가며 말했다. “현우 씨 내일 출장 간다면서요. 지금 너무 늦었어요...”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은 나사라도 빠진 듯 미친 듯이 뛰었고 숨쉬기가 어려워지며 손에서 땀이 났다. 나는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그럼 얼른 쉬어요!”배현우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내뱉기 그렇게 힘들었는데 배현우는 이성적으로 딱 잘라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나는 순간 실망감이 확 들었다. 정말 너무너무 배현우가 보고 싶었고 이 갈망은 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려요.”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전화를 끊은 다음 나는 공허함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고는 왜 아까 거절한 건지, 왜 그렇게 억제하면서 진중한 척을 한 건지 나를 탓했다. 생각할수록 더 보고 싶어졌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정도로.하지만 나는 그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신흥의 원 멤버들을 한번 쭉 돌이켜 보았다. 우리 직원의 경우 나는 한 번도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특별한 사람이었고 나와 굉장히 친하고 신뢰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스파이라... 도대체 누구일까?사무실로 돌아온 후 나는 우선 배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강훈이 알려준 정보가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비행기에 탔는지 전화기가 꺼져있었다.그 후 서강훈이 나를 타일러 주며 말해 준 거와 같이 그 몇 개 공급상들은 연이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나와 장영식은 몰래 계획을 살짝 변경했다. 내가 신흥을 돌보고 장영식이 공급상들과 만나 담판을 하기로 했다. 신호연은 나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을 테니 장영식 쪽은 아마 조금은 무방비 상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영식은 내게 받은 자료를 들고 회사를 나섰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오직 나만 알고 있었다. 우린 이해월조차 모르게 행동했다.내가 신흥을 인수했을 때 신호연이 옮겨간 프로젝트 외에도 마무리가 흐지부지한 채로 있는 프로젝트가 몇개 있었는데 공급상들은 이걸 빌미로 삼아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그들이 소란을 피우든 말든 나와 이해월은 조용히 쉬지 않고 대형 공급상들의 스캔들만 열심히 수집했다.이미연은 또 한 번 우리를 도와주며 그녀의 조력자들까지 불러다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이 몇 년간 신호연이 협력할 때 했던 은밀한 거래의 흔적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겉으로 보기의 우리 신흥은 엉망진창이었다. 소문에는 우리 신흥이 파산 직전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사무실은 아주 지저분했고 새로 온 대표는 어디 갔는지 모르며 나조차 회사에 코빼기도 안 삐쳤으니까.나는 회사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 회사의 가장 오래된 직원인 건이에게 모든 사무를 쥐여주었다.본명은 채형건이고 나는 그를 건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이 굉장히 허심하고 야무져 몇 년간 항상 그에게 창고 관리를 부탁했었다.
“알았어. 오면 다시 얘기해.” 대충 얘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갑자기 나한테 묻는다. “한 대표, 혹시 천우 그룹 주인이 바뀐다는 소문 들었어?”“뭐라고...?” 흠칫 놀랐다. 심장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릴 만큼 쿵쾅쿵쾅 뛰었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주인이 바뀌어?”이세림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니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빨리 갈게. 끊어.”말이 끝나는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얘기지? 주인이 바뀌어? 이렇게 큰 그룹이 말 한마디에 주인을 바꾼다고?내가 그동안 천우 그룹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그래서 배현우가 그때 급히 가면서도 나에게 본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이였다. 이세림은 내가 정보 좀 알아내려고 전화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물어본 거였다. 미연이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휴대전화 화면에 도혜선이라는 이름이 떴다. 그동안 나는 도혜선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잠금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 혜선 씨.”“지금 시간 되세요? 잠깐 봐요. 할 얘기가 있어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말투에 잠깐 멈칫했지만 바로 답했다. “좋아! 어디서 볼까?”“때마침 점심이니까 같이 점심 먹어요.”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진흥동 쪽에 맛있는 할머니 집밥이 있어요. 이쪽으로 와요. 기다릴게요.”전화를 끊고 바로 진흥동 쪽으로 갔다. 음식점 이름으로 봐서는 일반 작은 가게인 것 같다. 도착해 보니 역시 규모가 작았고 주차장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맞은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길을 건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가 크지 않았지만, 내부는 아주 깨끗했다. 도혜선이 보이지 않아 전화하려는 순간 입구 왼쪽 비좁은 계단 위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아 언니!”살짝 고개를 돌려 위쪽을 보았다. 도혜선은 세 계단 내려와서 나를 행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에는 룸이 여러 개 있
도혜선의 생각을 듣고 싶어 직접 얼굴을 보며 물었다. 소문이 아닌 확실한 정보였다. “내 말은 형원 그룹은 못 건드려요. 하지만 신호연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도혜선은 음험한 웃음을 보였다. “이번에 지아 씨와의 이혼소송 때문에 불만이 엄청 많이 쌓였을 텐데 지아 씨가 화려한 복귀를 할 수 있게 보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이 자식 일단 힘만 좀 생기면 첫 번째로 지아 씨 망하게 할 준비를 할 거예요!”“그건 맞아요. 안 그래도 지금 여러 공급업체와 계속 뒤에서 수작 부려서 요즘 편한 날이 없어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도혜선이 그때 그 일 때문에 신호연에 대한 화가 많이 나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인간들이 한 짓이니 욕먹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면 앉아서 한 대 맞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묻잖아요. 신흥에서는 무슨 방법이 없어요?” 도혜선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아 씨. 날 친구로 생각하든 안 하든 상관없지만 신호연과 관련된 일은 무조건 도울 거예요.”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는 도혜선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고마워요.”그러나 신흥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속사정을 도혜선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있는 동안은 신흥건재가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천우 그룹은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힘들어진 거예요?” 나는 도혜선을 보며 물었다. 도혜선이 비지니스를 안 한다고 쉽게 보면 안 된다. 그 어떤 사업가보다 더 프로패셔널하다. 강 건너 불구경까지도 사건의 경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룹재단이 해외에 있다 보니 구체적인 내막은 아무도 몰라요. 근데 주인이 바뀌는 건 확실해요. 얘기가 나온 지 좀 됐어요. 근데 회사기밀을 철저히 숨기고 있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도혜선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면 우리가
내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유빈을 향해 물었다. “요 며칠 별일 없었어?”“하... 말도 마세요. 이 새끼들 정말 장난 아니에요. 한 푼이라도 더 받겠다고 정말... 이 새끼들이랑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입이 아파요. 신호연에게 가서 받으라고 백 번을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본인들은 누가 누군지 모른다면서요.”“수고했어. 유빈 씨.”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계속 얘기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에게 상황 설명을 정확하게 해 줄 수 있을까?”“한 대표님. 신호연은 진짜 남자도 아니에요. 법원에서 이미 판결이 났는데 인정을 안 하잖아요. 우리는 그냥 공급업체들과 빨리 얘기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해요. 대책 좀 내주세요.”“글쎄... 아니면 지금 손에 있는 프로젝트들 전부 다 다른 곳으로 돌릴까? 그렇게 하면 남는 건 없지만 프로젝트 진행 보장도 있고 우리가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답답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계속 얘기했다. “아는 사람 좀 있어?”유빈은 아쉬운 척 연기했다. “ 정말 그렇게 결정하실 거예요?”“아니면 어떡해? 계속 난리칠 텐데. 신호연에게까지 그럴 수 있으면 더 좋고. 해 보라고 해. 정면으로 승부를 겨뤄보자고!”유빈은 피식 웃었다. “정의는 승리한다고 했어요! 제가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도 신호연은 잘 알아요!”잠깐 머뭇거리더니 유빈은 계속해서 물었다. “저희 다음 스텝은 어떻게...?”“가는 대로 가보지 뭐.” 말은 대충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세상의 모든 욕을 다 퍼붓고 있었다. 너에게 다음 계획을 알려줄 만큼 내가 멍청하지 않아!“요 며칠 장 부장님도 안 보이시던데 혹시 어디 출장 가셨나요?” 이건 신연아가 궁금해했던 내용을 유빈에게 물으라고 시킨 것이다. “본가에 내려간다고 며칠 휴가 냈어. 지금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이러네.” 나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유빈 씨. 지금 재촉하는 금액 리스트 만들어서 나에게 보내줘. 하나도 빠짐없이 다!”유빈
전화한 사람은 콩이 선생님이었다. 콩이 아빠가 애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너무 불안했다. 신호연이 평소에도 절대 안 하던 콩이 하원 픽업을 갑자기? 바로 신호연에게 전화했다. 너무 익숙했던 번호가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긴 통화연결음 끝에 신호연은 애정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순간 너무 화가 났다. “신호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누구 맘대로 애 데리러 가?”“여보, 화내지 마.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 보러 간거야. 콩이를 만난 게 얼마 만인지 몰라. 너무 보고 싶었어!”입바른 말만 하는 신호연이라는 인간에 너무 소름 끼쳤다. 콩이가 보고 싶다고? “여보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진짜 너무 싫어! 지금 어디야?”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습관이 돼서 그렇잖아. 내 평생 여보는 당신 하나뿐이야.” 신호연은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나를 약 올리기 위함이 틀림없다. “우리 지금 겨울왕국에 있어.”신호연이 더 말하기 전에 빨리 전화를 끊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콩이 하원 픽업 간다고 했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나보다 더 화낼 게 분명했다. 최대 시속으로 겨울왕국을 향했다. 겨울왕국은 대형 어린이 공원이다. 여러 가지 아이스크림과 각 연령대에 맞는 놀이 기구가 있다. 콩이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신호연에게 아빠라고 부르긴 하지만 아빠 자격은 오래전부터 없었다.조급한 마음으로 겨울왕국 안으로 뛰어갔다. 저 멀리 신호연이 의자에 앉아서 콩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날 감동하게 하기도 했었다. 콩이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의자에서 뛰어내려 나에게 달려오려고 하자 신호연은 바로 콩이를 안고 일어섰다. 신호연 팔에 안겨 발버둥 치는 콩이도 내키지 않아 하는 게 보였다. “엄마!”바로 콩이 앞으로 달려가 신호연에게서 콩이를 뺏었다. 콩이를 꼭 껴안았더니 콩이도 내 목을 끌어안았다.신호연은 살짝 웃음을 띠며 말했다. “뭐가 이렇게 급해? 콩이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