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와 여이현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앉았다. 한참 지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방금처럼 커다란 독사를 보면 저도 모르게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다. 여이현은 몸을 돌려 온지유를 꼭 끌어안은 뒤 이마에 뽀뽀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다시 동굴 안을 살펴볼 거야. 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이현 씨 탓 아니야. 누구라도 동굴에 독사가 있을 줄은 몰랐을 거라고.”온지유는 여이현을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습한 곳이니 분명 뱀이 살 것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뱀굴일 수도 있었다.다만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동굴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은 뱀을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결국 그들이 제멋대로 쳐들어와 집주인을 죽인 셈이다.여이현은 다시 모닥불을 피웠다. 동굴 안을 샅샅이 둘러본 뒤 커다란 돌로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런 뒤 그는 뱀을 굽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몰랐지만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Y 국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보고하러 들어왔던 사람은 다리를 절뚝이며 돌아왔다.“얼른, 얼른 사람을 불러와. 대장님, 대장님께서 다치셨다.”공간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바로 사람들이 몰려왔다.김헤원이 물었다.“어디에 있는데요. 많이 다쳤어요?”그녀의 목소리에선 떨림이 느껴졌고 불안에 잔뜩 휩싸인 모습이었다.“산등성이에...”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김혜연은 얼른 그의 무기를 들고 명령을 내렸다.“너희들은 얼른 이 사람을 법로 님께 데리고 가. 남은 사람들은 나와 함께 대장님을 찾으러 가는 거야.”산등성이는 그들의 군영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고작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적이 쳐들어오면서 분명 신무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적에게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신무열이 끌려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Y 국인들 또한 혼란스러워할 것이다.다행히 신은 Y 국을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굴에서 멀어졌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절벽을 보았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여이현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왜? 저기서 하룻밤 더 보내고 싶어? 그러다 어제 죽인 암컷 뱀의 남편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습하고 독사가 사는 곳이었잖아. 저 안에 칠엽초가 있는 건 아닐까?”온지유는 사실 추측한 것이었다. 여하간에 동굴엔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고 책에서 본 칠엽초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습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했으니까.칠엽초는 음습한 곳을 좋아했기에 햇볕을 피해야 했다.꼭 사람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모순이 많은 개체다.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말했다.“그럼 여기서 기다려. 내가 얼른 가서 확인하고 올게.”“아니야. 같이 가. 만약 어제 죽인 독사의 남편이라도 돌아오면 혼자서는 무리잖아.”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농담은 오로지 두 사람만 알아듣는 농담이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정말 칠엽초네.”동굴을 한 바퀴 빙 둘러보니 깊숙한 곳에서 칠엽초를 발견했다.하늘이 두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것인지 동굴 입구에서 또 하나를 발견했다. 햇볕이 들어오는 곳 바로 옆에 자라나 있었다. 빛깔도 좋아 이미 딴 칠엽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마치 칠엽초의 공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잡초는 평민 같았다.여이현은 흥분한 얼굴로 따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그를 잡아당겼다.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손으로 따면 안 돼.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떡해. 우린 반드시 완전한 모습 그대로 가져가야 해. 안 그러면 칠엽초는 우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말라 죽어 버릴 거야.”온지유는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며 말하곤 이내 여이현을 보면서
여이현은 얼른 온지유를 꽉 끌어안았다.온지유는 힘차게 쿵쿵 뛰는 여이현의 심장 소리를 듣게 되었다.지금까지 여이현은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사실 칠엽초라는 글을 보자마자 그녀는 혼자 올 생각을 했다.왜냐하면 그녀는 별이를 위해 뭔가를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하지만 여이현이 따라왔다.자욱한 안개는 어느새 걷히고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Y 국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고 법로와 다른 사람들도 온지유와 여이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제일 크게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온지유였다. 그들은 온지유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길 바랐다.“너도 참! 약초를 정리해 둔 건 약을 만들 때 찾기 쉬워서였어. 넌 이곳 지리를 잘 모르면서 그 산은 왜 올라간 거니?”법로가 약초를 정리해둔 건 별이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다만 온지유가 캐온 칠엽초를 보았을 때 법로는 놀라 말문이 막혀버렸다.그가 리스트에 정리해 둔 약초는 오로지 Y 국에서만 자라나는 약초들이었다. 그중 칠엽초는 구하기도 어려웠고 아주 비싼 약초였다.온지유와 여이현이 그런 약초를 캐왔다는 것은...“일단 별이부터 치료해주세요.”온지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약초를 캐러 간 과정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그래.”법로는 바로 대답했다. 온지유가 그에게 말을 건다는 것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너희들은 얼른 가서 푹 쉬어. 이따가 내가 부르면 별이 보러 와.”“네.”온지유가 대답했다. 여이현은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다만 온지유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신무열과 인명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그녀는 무심코 물었다.“무열 씨랑 명진 씨는요?”‘아니면 별이를 위해 다른 약초라도 구하러 간 것인가?'“인명진은 지금 무열이를 치료하고...”“네? 어디 다친 거예요?”법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는 다급하게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지금의 온지유는 불안하면서도 다
인명진은 온지유 몸에 가득한 먼지와 흙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녀의 눈가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온지유는 별이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원래 온지유를 따라가려 했지만 여이현이 먼저 따라붙었다.그는 하는 수 없이 남아 법로와 함께 별이를 치료해야 했지만 습격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 법로는 쉴 새도 없이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지금 법로는 실험실에 있었고 그는 신무열의 곁에 있었다.인명진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무열이 무사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김혜연이 눈에 들어왔다.김혜연은 지난번에 그녀를 적으로 취급하긴 했어도 지금은 신무열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정말로 신무열을 사랑하는 듯했다. 그러니 굳이 이곳에 남아 두 사람 사이의 방해물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고 인명진도 이곳에만 있을 수 없어 김혜연에게 당부한 뒤 나왔다.“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절 부르세요. 바로 옆 방에 있을 거니까요.”“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인명진은 천막에서 나갔다.그녀는 침대에 누운 신무열을 보았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고 얼른 신무열이 깨어나기만을 바랐다.인명진은 천막 밖에 서 있었다. 짜증이 치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그는 담배를 꺼내 태웠다.온지유의 곁엔 여이현이 있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요한은 바로 도우미에게 갈아입을 새 옷과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했다.그녀는 욕실로 들어갔고 여이현은 그녀가 들어간 욕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이때 요한이 여이현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대장님, 굳이 이렇게 서서 아가씨를 지킬 필요 없습니다. Y 국의 내부는 안전 하거든요. 그리고 저희도 아가씨가 절대 다치지 않게 지킬 겁니다.”Y 국에서 온지유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이곳에 있었기에 온지유가 필요한 순간 바로바로 나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인명진은 현실을 받아들였다.그는 여이현이 될 수 없었다. 설령 온지유가 사랑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곁에 머물고 있어도 그저 친구이자 친한 오빠밖에 될 수 없었다.그는 이번 생은 그녀를 위해 살 생각이다....약을 받은 여이현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온지유는 이미 샤워를 마쳤다.머리칼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은은한 장미 향이 났다.여이현은 얼른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옷을 아래로 좀 내려봐. 약 발라줄게.”“알았어.”온지유는 그가 요구한 대로 옷을 살짝 벗어 내렸다. 여이현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을 발라주었다.심지어 세심하게 입으로 후후 불면서 말이다.그는 행여나 약이 상처에 닿으면 아플까 봐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 통증은 온지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종군 기자로 일하게 되었을 때 혼란스러운 전쟁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했다.어느 한번은 폐허를 걷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철근을 밟아 철근이 발을 통과한 적도 있었다. 원래는 반년 동안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야 했지만 3개월 만에 그녀는 다시 전장으로 나왔다.그 뒤로 그녀는 이런 작은 통증에 무감각해지게 되었다.전장에 나왔으면 이런 사소한 일로 훌쩍이면서 유난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유야, 미안해. 그동안 네가 혼자...”여이현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행여나 눈물이 그녀의 상처에 떨어질까 봐 말이다.눈물은 쓰면서도 짠 것이었다.온지유도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이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통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처럼 그녀의 앞에 나타나 절대 그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이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현 씨,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니까 지난 일에 대해서는 그만 말해줘. 우리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별이야. 별이가 어떻게 되든...”온지유는 원래 여이현과 결심을 내리려고 했지만 최악의 상
아주 분명한 현실이었다. 아무리 온지유가 현실을 부정해도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법로가 그녀의 친부라는 것을.법로는 지금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이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이것 또한 그녀가 그의 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면 그의 눈앞에서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일단 나가서 기다려볼까?”여이현은 그녀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행여나 이곳에 계속 머물고 서 있다간 견디지 못하고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말이다.하지만 온지유는 확고하게 남겠다고 말했다.“중독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여기 남아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난 별이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 거야. 여기 있을 거야.”확고한 그녀의 태도에 누구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그녀가 남겠다고 하니 여이현도 당연히 남아 그녀의 곁에 있을 생각이다.그러나 법로는 그에게 눈빛을 보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난 잠깐 나갔다 올게.”“응.”빠르게 여이현은 법로와 함께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법로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지유한테는 네가 내 좋은 말만 해주길 바란다. 비록 우리가 전에는 적이었지만 네가 누구인지 나도 알고 있단다. 그래도 난 지유를 위해 언제든 너한테 고개를 숙일 준비가 돼 있어. 나에겐 딸이라곤 지유 하나뿐인데 너만 신경 쓰고 네 말이라면 다 듣거든.”법로는 여이현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말했다. 지금의 그는 Y 국을 이끄는 수장이 아니었고 전처럼 거만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그는 그저 온지유의 아버지일 뿐이다.“설득되는 정도에서 설득할 겁니다. 하지만 지유는 하나의 독립체고 여느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죠. 제가 어떤 말을 하든 전부 듣는 건 아닙니다.”여이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법로가 너무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법로는 여이현의 뜻을 알아챘지만 기회만 있다면 그게 어떤 기회든 그는 전부 시도해 볼 생각이다.마음이 급해진 법로는 목소리를
별이는 고개를 저었다.다만 아이는 별이의 손을 꽉 잡았다.심지어 천천히 손을 들기도 했다.여이현은 바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 지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별아, 엄마는 별이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줄 거야. 우리 별이가 튼튼해지면 아빠랑 함께 엄마랑 아빠가 자랐던 곳으로 갈 거야. 엄마는 매일 우리 별이를 학교에 데려다줄 거고 학교 끝나면 데리러도 갈 거야. 그리고 별이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도 뵈러 갈 거야. 그곳은 별이가 살았던 곳과 달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거든. 별이는 매일 즐겁게 놀 수 있고 매일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어.”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말했다.“네.”그 말을 법로도 들었다.온지유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온지유를 탓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어릴 때부터 Y 국에서 자라지 않아 받은 교육도 달랐다.“엄마가 가서 맛있는 거 만들어 올게.”그녀는 아이의 손을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여이현은 침묵했다. 다소 슬퍼진 법로의 눈빛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법로에게 얼른 온지유를 따라가라는 눈빛을 보냈다.별이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아이였지만 법로를 본 순간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실험실에 누워있는 동안 법로는 매일 아이를 위해 바삐 움직였다.주사를 맞을 때면 법로는 아이의 눈을 가려주기도 했다.그리고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무섭지 않게 달래주었다.아이는 눈앞에 있는 법로가 아주 다정하고 좋은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법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랑 엄마는 별이를 위해 맛있는 거 만들어 주러 갔어. 별이는 착한 아이니까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별아, 최근에는 어때? 전보다 몸이 덜 아픈 것 같아?”별이에게 칠엽초를 먹인 후 혈색이 아주 좋아졌다. 게다가 실험실로 들어온 뒤로 천식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골수는 아직도 찾는 중이었다. 아이와 맞는 골수를 찾으면 바로 골수 이식할 생각이다.아이는 앞으로 건
“이미 전부 지나간 일이야. 그러니까 자꾸 떠올리려고 하지 마.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한곳에 있잖아. 별이도 치료를 받고 있으니 튼튼해질 거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로 자랄 거야.”여이현은 울적해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채고 위로했다.별이의 건강을 언급하니 온지유는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그래, 고통은 전부 지나간 일이잖아. 우린 이제부터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돼.'어느새 돼지고기 죽은 완성되었다. 딴생각하고 있던 온지유는 뜨거운 냄비에 그대로 손을 가져다 댔다.“아!”뜨거운 것이 손에 닿자 온지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곤 귓불을 만지며 식혔다.“괜찮아?”여이현은 다급하게 온지유의 손을 보았다.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온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입술은 부드럽고 따듯했다.여이현은 그 순간 가슴이 간질거렸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 당장 멈췄을 테지만 온지유의 손가락이 더 걱정되었다.“괜찮아. 그냥 조금 부은 것 같아.”온지유는 손을 내밀며 보여주었다. 손가락이 전부 빨갛게 되었고 손끝에는 물집도 생겨났다.여이현은 얼른 그녀의 손을 싱크대로 가져다 대며 물을 틀었다.“일단 물로 식혀. 남은 건 내가 할게.”그는 몸을 돌려 가스를 꺼버린 후 냄비를 들었다. 냄비 뚜껑을 연 순간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죽을 냄비에서 퍼낸 후 그릇에 담아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온지유도 수도꼭지를 닫은 후 따라갔다.별이에게로 가는 길에서 여이현은 먼저 법로에 대해 입을 열었다.“네가 아직 법로 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도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법로 님은 별이의 외할아버지잖아. 이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이야. 별이도 알 권리가 있고...”온지유는 침묵했다.만약 법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그녀는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친부는 하필이면 법로였고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손에 피를 묻혔다.그녀는 법로를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