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별이를 꼭 끌어안으며 곁에 있어 주었다.그러던 그녀는 우연히 법로가 정리해 둔 치료 목록을 발견했다.그중 하나의 약초 이름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칠엽초.이 약초는 그늘을 좋아해 깊은 산 속에서만 자라며 독특한 약효 덕에 주변에 독사가 자주 어슬렁댄다.그러니까 칠엽초는 전문 약초꾼이 아니라면 일반인은 캐기 어려웠다.법로는 칠엽초라고 써놓고 옆에 점을 잔뜩 찍어두었다. 아마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골치 아파했던 것 같았다. 온지유는 입술을 짓이겼다. 약초를 캐러 갈 사람이 없다면 그녀가 직접 갈 생각이다.별이만 살릴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라도 그녀는 전부 할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바로 출발하려 했다.그러자 여이현은 산 쪽으로 가는 그녀를 보며 바로 따라 나왔다.“어디 가려고?”“칠엽초 따러 갈 거야.”온지유는 직설적으로 말하며 한마디 더 보탰다.“나 혼자 가면 되니까 이현 씨는 별이 곁에 있어 줘.”“아니, 안 돼. 나랑 같이 가.”여이현의 태도는 아주 확고했다. 한시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동행했다.칠엽초가 자라나는 곳은 아주 음습한 곳이었다.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볼까 말까 할 수 있는 약초였던지라 산을 오르면서 온지유는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산속 깊은 곳이었으니까.얼마나 걸었을까. 주위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며 음습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로 추웠다.여이현은 얼른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입혀주며 걱정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넌 이만 돌아가. 내가 어떻게든 꼭 칠엽초 따서 돌아갈 테니까.”“아니야.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이번엔 온지유의 태도가 확고했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도 없었다. 설령 그 사람이 남편이어도 말이다.더구나 앞에서 어떤 위험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여이현 혼자 남겨두고 가는 일은 그녀는 할 수
등 뒤로 호랑이와 맹수가 끈질기게 두 사람을 쫓아왔다.온지유는 이렇게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산속에 완전한 밤이 찾아오면 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나무를 지나칠 때 온지유는 발을 들어 올려 있는 힘껏 나뭇가지를 꺾어 몸을 돌린 후 휙 던졌다. 그녀가 던진 나뭇가지는 마침 독사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독사는 더는 움직일 수 없었고 호랑이는 포효했다. 마치 동료가 죽은 것에 화난 듯했다.“산 절벽 타고 올라가.”여이현이 그녀에게 말하면서 횃불을 호랑이를 향해 던졌다.호랑이는 피하지 않았다. 횃불은 호랑이의 머리를 맞추며 땅에 떨어졌다. 호랑이 머리털 위로 불씨가 생겨나자 호랑이는 당황한 듯 가만히 있었다.온지유는 얼른 다가가 횃불을 주운 뒤 호랑이가 불씨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있는 힘껏 호랑이의 몸에 찔러 넣었다.한 방에 깔끔하게 호랑이를 죽였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5년 동안 온지유는 이렇게나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횃불은 이제 없어. 우린 얼른 적당한 곳을 찾아 모닥불을 피워야 해.”온지유는 산속에 절벽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을 했다.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사람의 형태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Y 국에선 여전히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한 Y 국인이 허둥지둥 군영으로 달려들어 오며 보고를 올렸다.“적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쳐들어온 것 같습니다. 저희 쪽 사람, 저희 쪽 사람들은 곧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가서 내 화살 가져와.”신무열은 잔뜩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바로 화살을 그에게 건넸다.“사람 몇은 실험실 앞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전부 나 따라온다.”신무열은 화살을 들고 출발했다. 사실 그와 함께 전장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다섯 명이었다.몇 번의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도 이 사실을 알고 습격한 것이다.그
온지유와 여이현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앉았다. 한참 지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방금처럼 커다란 독사를 보면 저도 모르게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다. 여이현은 몸을 돌려 온지유를 꼭 끌어안은 뒤 이마에 뽀뽀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다시 동굴 안을 살펴볼 거야. 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이현 씨 탓 아니야. 누구라도 동굴에 독사가 있을 줄은 몰랐을 거라고.”온지유는 여이현을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습한 곳이니 분명 뱀이 살 것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뱀굴일 수도 있었다.다만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동굴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은 뱀을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결국 그들이 제멋대로 쳐들어와 집주인을 죽인 셈이다.여이현은 다시 모닥불을 피웠다. 동굴 안을 샅샅이 둘러본 뒤 커다란 돌로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런 뒤 그는 뱀을 굽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몰랐지만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Y 국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보고하러 들어왔던 사람은 다리를 절뚝이며 돌아왔다.“얼른, 얼른 사람을 불러와. 대장님, 대장님께서 다치셨다.”공간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바로 사람들이 몰려왔다.김헤원이 물었다.“어디에 있는데요. 많이 다쳤어요?”그녀의 목소리에선 떨림이 느껴졌고 불안에 잔뜩 휩싸인 모습이었다.“산등성이에...”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김혜연은 얼른 그의 무기를 들고 명령을 내렸다.“너희들은 얼른 이 사람을 법로 님께 데리고 가. 남은 사람들은 나와 함께 대장님을 찾으러 가는 거야.”산등성이는 그들의 군영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고작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적이 쳐들어오면서 분명 신무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적에게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신무열이 끌려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Y 국인들 또한 혼란스러워할 것이다.다행히 신은 Y 국을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굴에서 멀어졌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절벽을 보았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여이현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왜? 저기서 하룻밤 더 보내고 싶어? 그러다 어제 죽인 암컷 뱀의 남편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습하고 독사가 사는 곳이었잖아. 저 안에 칠엽초가 있는 건 아닐까?”온지유는 사실 추측한 것이었다. 여하간에 동굴엔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고 책에서 본 칠엽초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습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했으니까.칠엽초는 음습한 곳을 좋아했기에 햇볕을 피해야 했다.꼭 사람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모순이 많은 개체다.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말했다.“그럼 여기서 기다려. 내가 얼른 가서 확인하고 올게.”“아니야. 같이 가. 만약 어제 죽인 독사의 남편이라도 돌아오면 혼자서는 무리잖아.”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농담은 오로지 두 사람만 알아듣는 농담이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정말 칠엽초네.”동굴을 한 바퀴 빙 둘러보니 깊숙한 곳에서 칠엽초를 발견했다.하늘이 두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것인지 동굴 입구에서 또 하나를 발견했다. 햇볕이 들어오는 곳 바로 옆에 자라나 있었다. 빛깔도 좋아 이미 딴 칠엽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마치 칠엽초의 공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잡초는 평민 같았다.여이현은 흥분한 얼굴로 따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그를 잡아당겼다.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손으로 따면 안 돼.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떡해. 우린 반드시 완전한 모습 그대로 가져가야 해. 안 그러면 칠엽초는 우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말라 죽어 버릴 거야.”온지유는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며 말하곤 이내 여이현을 보면서
여이현은 얼른 온지유를 꽉 끌어안았다.온지유는 힘차게 쿵쿵 뛰는 여이현의 심장 소리를 듣게 되었다.지금까지 여이현은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사실 칠엽초라는 글을 보자마자 그녀는 혼자 올 생각을 했다.왜냐하면 그녀는 별이를 위해 뭔가를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하지만 여이현이 따라왔다.자욱한 안개는 어느새 걷히고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Y 국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고 법로와 다른 사람들도 온지유와 여이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제일 크게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온지유였다. 그들은 온지유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길 바랐다.“너도 참! 약초를 정리해 둔 건 약을 만들 때 찾기 쉬워서였어. 넌 이곳 지리를 잘 모르면서 그 산은 왜 올라간 거니?”법로가 약초를 정리해둔 건 별이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다만 온지유가 캐온 칠엽초를 보았을 때 법로는 놀라 말문이 막혀버렸다.그가 리스트에 정리해 둔 약초는 오로지 Y 국에서만 자라나는 약초들이었다. 그중 칠엽초는 구하기도 어려웠고 아주 비싼 약초였다.온지유와 여이현이 그런 약초를 캐왔다는 것은...“일단 별이부터 치료해주세요.”온지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약초를 캐러 간 과정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그래.”법로는 바로 대답했다. 온지유가 그에게 말을 건다는 것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너희들은 얼른 가서 푹 쉬어. 이따가 내가 부르면 별이 보러 와.”“네.”온지유가 대답했다. 여이현은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다만 온지유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신무열과 인명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그녀는 무심코 물었다.“무열 씨랑 명진 씨는요?”‘아니면 별이를 위해 다른 약초라도 구하러 간 것인가?'“인명진은 지금 무열이를 치료하고...”“네? 어디 다친 거예요?”법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는 다급하게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지금의 온지유는 불안하면서도 다
인명진은 온지유 몸에 가득한 먼지와 흙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녀의 눈가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온지유는 별이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원래 온지유를 따라가려 했지만 여이현이 먼저 따라붙었다.그는 하는 수 없이 남아 법로와 함께 별이를 치료해야 했지만 습격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 법로는 쉴 새도 없이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지금 법로는 실험실에 있었고 그는 신무열의 곁에 있었다.인명진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무열이 무사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김혜연이 눈에 들어왔다.김혜연은 지난번에 그녀를 적으로 취급하긴 했어도 지금은 신무열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정말로 신무열을 사랑하는 듯했다. 그러니 굳이 이곳에 남아 두 사람 사이의 방해물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고 인명진도 이곳에만 있을 수 없어 김혜연에게 당부한 뒤 나왔다.“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절 부르세요. 바로 옆 방에 있을 거니까요.”“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인명진은 천막에서 나갔다.그녀는 침대에 누운 신무열을 보았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고 얼른 신무열이 깨어나기만을 바랐다.인명진은 천막 밖에 서 있었다. 짜증이 치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그는 담배를 꺼내 태웠다.온지유의 곁엔 여이현이 있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요한은 바로 도우미에게 갈아입을 새 옷과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했다.그녀는 욕실로 들어갔고 여이현은 그녀가 들어간 욕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이때 요한이 여이현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대장님, 굳이 이렇게 서서 아가씨를 지킬 필요 없습니다. Y 국의 내부는 안전 하거든요. 그리고 저희도 아가씨가 절대 다치지 않게 지킬 겁니다.”Y 국에서 온지유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이곳에 있었기에 온지유가 필요한 순간 바로바로 나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인명진은 현실을 받아들였다.그는 여이현이 될 수 없었다. 설령 온지유가 사랑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곁에 머물고 있어도 그저 친구이자 친한 오빠밖에 될 수 없었다.그는 이번 생은 그녀를 위해 살 생각이다....약을 받은 여이현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온지유는 이미 샤워를 마쳤다.머리칼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은은한 장미 향이 났다.여이현은 얼른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옷을 아래로 좀 내려봐. 약 발라줄게.”“알았어.”온지유는 그가 요구한 대로 옷을 살짝 벗어 내렸다. 여이현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을 발라주었다.심지어 세심하게 입으로 후후 불면서 말이다.그는 행여나 약이 상처에 닿으면 아플까 봐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 통증은 온지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종군 기자로 일하게 되었을 때 혼란스러운 전쟁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했다.어느 한번은 폐허를 걷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철근을 밟아 철근이 발을 통과한 적도 있었다. 원래는 반년 동안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야 했지만 3개월 만에 그녀는 다시 전장으로 나왔다.그 뒤로 그녀는 이런 작은 통증에 무감각해지게 되었다.전장에 나왔으면 이런 사소한 일로 훌쩍이면서 유난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유야, 미안해. 그동안 네가 혼자...”여이현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행여나 눈물이 그녀의 상처에 떨어질까 봐 말이다.눈물은 쓰면서도 짠 것이었다.온지유도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이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통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처럼 그녀의 앞에 나타나 절대 그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이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현 씨,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니까 지난 일에 대해서는 그만 말해줘. 우리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별이야. 별이가 어떻게 되든...”온지유는 원래 여이현과 결심을 내리려고 했지만 최악의 상
아주 분명한 현실이었다. 아무리 온지유가 현실을 부정해도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법로가 그녀의 친부라는 것을.법로는 지금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이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이것 또한 그녀가 그의 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면 그의 눈앞에서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일단 나가서 기다려볼까?”여이현은 그녀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행여나 이곳에 계속 머물고 서 있다간 견디지 못하고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말이다.하지만 온지유는 확고하게 남겠다고 말했다.“중독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여기 남아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난 별이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 거야. 여기 있을 거야.”확고한 그녀의 태도에 누구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그녀가 남겠다고 하니 여이현도 당연히 남아 그녀의 곁에 있을 생각이다.그러나 법로는 그에게 눈빛을 보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난 잠깐 나갔다 올게.”“응.”빠르게 여이현은 법로와 함께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법로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지유한테는 네가 내 좋은 말만 해주길 바란다. 비록 우리가 전에는 적이었지만 네가 누구인지 나도 알고 있단다. 그래도 난 지유를 위해 언제든 너한테 고개를 숙일 준비가 돼 있어. 나에겐 딸이라곤 지유 하나뿐인데 너만 신경 쓰고 네 말이라면 다 듣거든.”법로는 여이현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말했다. 지금의 그는 Y 국을 이끄는 수장이 아니었고 전처럼 거만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그는 그저 온지유의 아버지일 뿐이다.“설득되는 정도에서 설득할 겁니다. 하지만 지유는 하나의 독립체고 여느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죠. 제가 어떤 말을 하든 전부 듣는 건 아닙니다.”여이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법로가 너무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법로는 여이현의 뜻을 알아챘지만 기회만 있다면 그게 어떤 기회든 그는 전부 시도해 볼 생각이다.마음이 급해진 법로는 목소리를
온지유는 소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랐다. 그랬기에 종류별로 접시에 담아주었다.“먹어 봐, 입에 맞는 거 있으면 더 가지러 오면 되니까. 하지만 낭비하면 안 돼. 먹을 만큼 가져가야 해. 알았지?”“아주머니가 골라준 거라면 소미는 전부 좋아요.”소미는 정말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담아준 음식은 전부 먹어치웠고 수프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셨다.배를 채운 후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소미는 처음에 어색해하면서 편히 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타고 난 뒤 신나게 놀았다.“오빠, 난 회전목마가 좋아. 우리 한 번 더 타면 안 돼?”“아까 내가 큰 말에 탔으니까 이번엔 네가 큰 말에 타. 내가 작은 말에 탈게.”별이는 소미의 손을 잡았다.두 아이는 아직 어렸기에 위험한 놀이기구는 탈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타도 위험하지 않은 놀이기구를 전부 타본 뒤 마지막엔 온지유와 여이현과 함께 관람차를 탔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소미는 두 손을 꼭 모아 말았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들었어요. 전 오빠랑 오빠 가족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그럴 거야.”온지유는 아이를 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족 구성원이 넷이면 아주 좋았다. 다섯이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놀이공원에서 나온 뒤 여이현은 호텔로 운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지나서 온하윤을 태우려고 했다.온하윤은 이틀 동안 아빠와 엄마, 오빠를 보지 못해 반가웠는지 작은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소미야, 봐봐. 하윤이는 내 여동생이야. 귀엽지?”별이는 소미를 데리고 온지유 옆에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온지유가 안고 있는 온하윤을 보았다.소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온하윤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온하윤은 먹을 것인 줄 알고 혀를 내밀며 소미의 손을 깨물려고 했다.여이현은 얼른 소미를 안아 올렸다.“안 돼. 하윤이한테 손가락 물리면 안
“그래, 별이한테도 친구가 생겼으니 우리도 둘만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여이현은 손가락으로 온지유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듯하면서도 간지러웠다.온지유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그러지 마. 아이들이 밖에 있다고. 만약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안 좋아.”별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만약 별이가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온지유는 정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민망했다.“이 호텔은 방음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더구나 꼬맹이들은 지금 티브이에 정신이 팔렸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티브이 음량을 더 높이면 되지.”온지유가 반박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이현은 이미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고 오더니 음량을 두 개 정도 높였다.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키스했다.그의 리드에 온지유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지게 되었다. 온지유는 티브이를 끈 뒤 녹초처럼 침대에 흐느적 누웠다.땀에 몸은 끈적거렸기에 너무도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움직이는 것이 귀찮았다.여이현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듯한 물 받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와 온지유를 안은 후 천천히 그 욕조 안으로 내려놓았다.온지유는 몸을 감싸는 따듯한 온기에 온몸이 나른해졌다.“지유야.”여이현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온지유는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다행히도 정신이 번쩍 들어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안 돼. 꿈도 꾸지 마. 내일 아이들이랑 놀이공원도 가기로 했단 말이야.”이미 조금 전의 일로 힘이 전부 빠진 그녀였다. 만약 또 반복하게 된다면 내일은 아마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여이현은 점점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얼른 씻어. 밖에서 기다릴게.”그도 온지유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온지유는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소미는 줄곧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별이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온지유가 그녀를 보육원에 맡기려 했으나 소미는 온지유의 팔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이모, 지금 바로 이모네 집에 가면 안 돼요?”“이젠 우리 집이야.”옆에 있던 별이가 말했다.“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어. 우리 아빠, 엄마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고 여동생도 아주 귀여워.”어떤 아이들은 낯을 가리지만, 온하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보아도 웃으며 울거나 떼쓰지 않는 아이였다.“응, 응.”소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한 손으로 별이의 손을 잡았다.“다 같이 있으니 정말 좋아.”원래 여이현과 온지유는 이 도시에 사흘쯤 머무르며 놀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소미가 있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떠나기 전, 그들은 아이들에게 물었다.“별아, 소미야,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어?” “가고 싶어요!”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놀이공원에 가본 적은 있지만 늘 혼자서만 놀았다. 이번엔 엄마 아빠도 곁에 있고 방금 사귄 새 친구 소미도 있다. 그와 달리 소미는 좀 더 주저하는 듯했다.“그... 그런데 놀이공원이 뭐예요?” “엄청 재밌는 곳이야. 거기엔 놀이기구가 잔뜩 있고, 큰 목마를 탈 수도 있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수도 있어. 사람보다 더 큰 인형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도 많아.”별이가 간단히 설명했다. 소미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세상에 그런 곳도 있구나!” “당연하지, 혹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가봤어?”이번엔 별이가 놀랐다. 해외에도 놀이공원은 있을 것이니 말이다.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아빠는 나를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어. 갈 때마다 동생들만 데리고 갔거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뒤, 별이가 먼저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는 생각할수록 자신이 너무
권다솔은 고개를 숙여 문손잡이를 보고는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마침 석규리가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배진호에게 달려들던 순간이었다.배진호는 잠시 방심한 채 도와주려고 했던 상대가 되레 등 뒤에서 들이받을 줄 몰라 예기치 않게 큰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석규리는 손을 더듬어 그의 입술로 키스하려고 했다.배진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며 고개를 젖혀 피했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턱 끝에 스칠 뿐이었다.그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피한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깜짝 놀라 문가를 바라봤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다솔 씨, 잠깐만. 오해했어요!”항상 침착하고 무너지지 않던 그의 태도에 균열이 가고 허둥대며 일어서려 했다.하지만 권다솔은 그의 움직임에 겁이라도 난 듯 더 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으며 몸을 돌려 곧장 밖으로 나갔다.배진호는 뒤쫓으려 했으나, 석규리가 그를 끌어안으며 막았다.그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얼마나 익숙한 장면인가.지난번 권다솔이 떠났을 때, 그는 하루 밤낮을 그녀를 찾아다니고 또 이삼일을 애타게 기다려서야 겨우 그녀를 곁에 둘 수 있었다.이번에는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이번에도 돌아와 주기는 할까?...권다솔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마침 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도우미가 그녀를 보고 감추지 못할 놀라움을 드러냈다.“웬일이세요? 아직 병원에 계실 때 아닌가요?” 권다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구와도 대화할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자기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뒤, 배진호의 흔적으로 가득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칫솔은 그의 것이고, 컵도 그렇고, 수건마저 그에게 속한 것이며, 침대 위 이불조차도 반은 그의 몫이었다.그는 언젠가 말했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진호는 냉담하게 그녀를 밀어냈고, 석규리는 침대에 쓰러지며 답답한 신음을 토해냈다.그가 약간 힘을 뺀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었을 터이다.“이미 말했잖아요.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고요.”배진호는 차가운 어조로 마지막 말을 던졌다.그는 곧장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바깥에서 문을 잠근 것 같았다.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얇게 다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하는 게 어때요?”석규리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옷이 없어요.” 배진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그럼 관두죠.”그에게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은 전혀 없었다. 자기 옷을 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한편, 권다솔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마침내 배진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정미진이 문을 열었다.결국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문을 열고 말했다.“다솔 씨, 잘 왔어요. 들어와요.”권다솔은 정미진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들여보내기 싫어하던 정미진이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혹시 동네 어르신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안에 배진호가 다른 여자와 있는 게 맞는 걸까?문턱을 넘어서면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거나 애정에 빠져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예리하게 찔렸다.권다솔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남은 미련이 있으니 직접 확인해야 했다.하지만 문턱을 넘어섰을 때, 그녀가 기대했던 충격적인 장면은 전혀 없었다. 배진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거실에는 배상준만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내가 착각했나?’권다솔은 문득 스스로를 의심했다. 어쩌면 배진호는 정
배진호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는 물건만 챙겨 가고 싶었지만, 정미진의 말투에는 미묘한 강압과 간청이 뒤섞여 있어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그 물건들을 권다솔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아이를 잃은 경위를 그녀가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의 어머니였다. 20여 년을 길러준 어머니 아니던가.배진호는 목울대를 조금 움직이며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 한 잔으로 인연을 칼로 베듯 끊어버리려는 듯이 말이다.다 마신 뒤, 그는 홍경천 통을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진호 씨, 왜 가는 거예요?”석규리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몸이 격하게 흔들렸고 양 뺨은 유달리 붉게 달아올랐다.이미 현관까지 다다른 배진호는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비틀거리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 다리가 탁자에 걸려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아랫배 깊은 곳에서 불덩이 같은 열기가 타오르는 듯 격렬했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젖이 오르내리며 형언하기 어려운 갈망이 몸속 어딘가에서 피어났다.곁에 있는 석규리는 훨씬 더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도 배진호는 자제력이 좋아 약간의 의식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더위를 참지 못해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배진호는 그쪽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최대한 떨어져 앉았다. 이 상황에서 그는 단번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어머니, 그 물에 약을 탄 거예요?”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정미진을 바라봤다. 설마 친모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지금 정미진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배진호의 상태를 보고 약이 듣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방 안에 숨은 배상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집의 방음이 꽤 좋은 탓에 배상준은 한참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얼른 진호랑 규리 씨를 2층 침실로 옮겨.”정미진이 지시했다.2층에는 빈 침실이 세 개 있었고, 그중 두 개는 복도의 맨 왼쪽 끝과 맨 오른쪽 끝에 있어 거리가 멀었다
권다솔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주변에서 밀려오는 말들은 차디차고 날 선 바람결 같았다. 손가락은 경직되고, 팔다리는 감각을 잃은 듯했다. 이곳에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육신밖에 없었다.‘진호 씨가 나한테 숨겼던 일이 이거였어?’한참이 지나서야 권다솔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위로 향하는 동안, 배진호는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 단지 그의 얼굴빛은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싸늘했고,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얼음꽃이 맺힌 듯 미세한 온기조차 엿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석규리는 억울함이 거의 실체를 띨 듯했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아주머니...” 석규리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조건은 분명히 뛰어난데 배진호가 왜 이러는 걸까. 게다가 그녀는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상황이었다. 조연숙은 배진호가 결혼한 적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를 원치 않았지만, 석규리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 배진호를 만났던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연숙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슬쩍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어째서 배진호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걸까? 전 아내와 비교해 그녀가 어떤 점에서 모자란다는 건가?“진호야, 규리가 틈내서 이렇게 어렵게 온 건데 얼굴 좀 피워봐.”정미진이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배진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맞선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미진이 주겠다고 한 물건을 받기 위해 방문했을 뿐인데 도리어 속은 셈이다. 그런데 어찌 좋은 표정이 나올 리 있겠는가?그는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한겨울 칼바람 같은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물건을 줄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가 괜히 헛걸음친 거네요.” 그는 정말 이대로 나가버릴 기세였다. 정미진은 가까스로 그를 속여 불러놓고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문 앞으로 달려가 가로막았고, 석규리 또한 긴장한 얼굴로 일어났다. “알았어, 알
하지만 지금 권다솔이 과연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배진호의 눈동자에 흐릿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는 문득 자신이 고집해 온 길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아마 회사를 차리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권다솔의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런 사태까진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배진호는 한 템포 쉬고 나서 등 뒤의 정미진에게 차분히 말했다.“남은 장홍화는 저한테 주세요.”그 말을 남긴 뒤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이번에도 정미진과 배진호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남았다.그 후로 배진호는 쭉 권다솔 곁에 머물며 회사 일조차 손을 놓고 남에게 맡겼다. 여이현이 선뜻 도와줘서 참 다행인 부분이었다.밤낮으로 곁을 지킨 덕분에, 권다솔의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드물게 어린아이 용품이나 작은 장난감을 멍하니 응시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회복세를 보였다.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자, 늘 긴장하던 배진호도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잠잠하던 정미진이 마침내 전화를 걸어서 장홍화를 넘기겠다고 했다. 배진호는 바로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 의도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물건을 가져가려면 네가 직접 와.”배진호는 잠시 생각한 뒤, 권다솔에게 한마디 알리고 집으로 향했다.그는 짐작도 못 했다. 자신이 막 출발한 직후, 권다솔이 병원에서 빠져나와 뒤를 밟을 줄은 말이다.“기사님, 앞에 가는 저 차 따라가 주세요.”권다솔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는 자신과 두 대 앞서 달리는 검은색 차를 힐끗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대낮에 이런 건 좀 그렇지 않나요.”그러고는 무언가 충고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요. 증거 잡으러 가는 길입니다.” 권다솔의 짧은 한마디에 기사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목이 막힌 듯
조연숙이 말을 꺼내자 순간 방 안은 조용해졌다.정미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조연숙 모녀의 달라진 기색을 인지하곤 허둥지둥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배진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석규리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연숙은 분노에 들끓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네 아들이 결혼했다는 걸 왜 이제 와서 말해?”“아니, 그게 아니고, 얘가 헛소리를...” 정미진은 황급히 배진호를 노려보곤 변명에 나섰다. “우리 집안에 얽혔던 여자가 있었던 건 맞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어.”하지만 조연숙은 냉소를 지었다. 이런 변명 따윈 세상 물정 다 겪은 사람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허점 덩어리에 불과했다. 설령 정미진의 말대로라고 해도, 결국 배진호는 한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라는 이야기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무엇하랴? 잘 키운 딸을 돌싱에게 시집보낼 순 없었다.조연숙은 바로 석규리의 손을 잡아채며 노려봤다. “우리 딸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갈 수 없어. 나가자.” 석규리는 아직 멍한 상태였으나 조연숙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미련 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상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정미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답답한 듯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배진호에게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규리가 널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몰라? 네가 입 다물고만 있었으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텐데!”“어머니, 저는 오늘 물을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배진호는 느닷없이 정미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한기 서린 빛을 품고 있었고, 그런 기세에 정미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뭔데?”“다솔 씨 일 어머니한테 책임이 있죠?”배진호는 또박또박 말했다. 기세도 점점 살벌해졌다.자신이 뒷걸음질 친 사실을 깨달은 뒤, 정미진은 고개를 떨구며 고약한 얼굴빛을 띠었다. “내가 네 엄마인 거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