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별이와의 만남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알겠어요. 오늘 밤에 떠나는 걸로 하죠.”온지유는 가져갈 물건이 별로 없었고 별이의 옷 두 벌을 챙기면 작은 가방 하나로 충분했다. 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신무열한테 말했다.“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Y 국에 오래 머무르진 못할 거예요. 제일 길어서 3일 있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거든요.”3일은 가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무열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온지유가 신무열과 함께 Y 국으로 가겠다고 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신무열은 온지유한테 찰싹 붙어서 조용히 앉아 있는 별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별이의 옆모습이 온지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야. 지유와 여이현의 아이가 죽은 지 5년이나 지났어. 살아있다고 해도 지유가 종군 기자를 5년 동안 하면서 몰랐을 리 없을 거고 옆모습이 비슷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펑!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습격을 받았어요!”그러자 신무열이 차분하게 지시했다.“각자 제자리로 가라고 전해.”온지유는 신무열 눈빛에 살기가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신무열은 총을 들고 차에서 내렸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사격했다. 온지유와 별이는 차에 남아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온지유는 별이가 두려워할까 봐 품에 꼭 끌어안았다.예상과 달리 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오늘 이 자리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신무열을 돕는 일이었다. 얼마 후, 주위가 잠잠해졌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신무열과 요한이 걱정된 온지유는 별이한테 말했다.“의자 아래에 숨어있어. 절대 차 밖으로 나오면 안 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잘 숨어 있어.”혹시 두 사람이 총에 맞았을까 봐 걱정된 온지유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비록 법로를 싫어했지만 신무열은 늘 온지유에게 잘해주었고 5년 동안 지원해 주었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차에 올랐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인해 신무열과 요한은 여전히 주위를 경계했다. 온지유도 별이를 안고 창밖을 유심히 내다보았지만 조용히 차량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온지유가 Y 국에 도착할 때까지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법로는 온지유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가장 크고 예쁜 집을 마련해 주었다. 온지유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과한 장식이 눈에 거슬려서 다시 나왔다.“다른 집으로 안내해 주세요.”온지유는 법로와 마주치지 않았지만 법로가 준비한 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법로가 어떻게든 온지유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 했지만, 이런 의미 없는 선심은 오히려 온지유의 반감을 샀다. 온지유가 Y 국에서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한 기억이 계속 떠올랐고 인체 실험의 강렬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온지유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Y 국 사람들은 아주 잔인했고 중독 때문에 목숨을 잃은 여이현을 생각하면 절대 법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친아빠인 법로와 여이현은 늘 대립 면에 서서 싸웠다. 그래서 온지유는 5년 동안 여이현의 죽음이 법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사했다.“그럼 저쪽 집에서 지내.”온지유가 고집을 피우자 신무열도 어쩔 수 없었다. 온지유는 다른 집 안으로 들어갔고 신무열은 업무를 보러 자리를 비웠다. 요한이 생활용품을 온지유에게 전해준 뒤,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고 집에는 온지유와 별이만 남아있었다.환경이 바뀌어서 무서울 법도 한데 별이는 그저 조용하게 온지유 곁에 앉아 있었다. 별이는 낯선 곳에 와서도 잘 적응했다.“당장 꺼져!”온지유가 별이와 얘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한눈에 보아도 Y 국 사람이었고 20살 정도 되어 보였다. 온지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온지유는 싸우기 싫었지만 그 여자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온지유
그 여자는 온지유가 제법 강한 여자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하지만 온지유를 내쫓기 위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서 그래? 도련님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Y 국의 통치권을 일부 얻어서 사모님이 될 것 같아? 이곳에 네가 원하는 건 없어. Y 국의 통치권은 법로님과 도련님이 율 아가씨에게 드리기로 했으니까 꿈 깨! 넌 네 사생아를 데리고 당장 여기서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사생아를 데리고 온 거야!”그 여자의 이름은 김혜연이었다. 김혜연은 온지유를 노려보면서 소리를 질렀고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하면서 온지유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온지유는 5년 전처럼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온지유는 가볍게 김혜연을 제압했고 온지유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요한이 신무열이 부탁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다.“아가씨, 도련님께서 부탁한 옷을 드리려고 왔어요.”김혜연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다, 당신이 율 아가씨라고?”김혜연은 온지유가 신무열을 유혹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나쁜 여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사생아를 신무열의 아이라고 속이고 데려온 줄 알았는데 온지유는 사실 율이었다.‘하지만 율 아가씨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큰 아이가 있다고?’“아가씨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당장 꺼지지 못해?”요한이 소리를 지르자 온지유는 김혜연을 놓아주었고 김혜연은 온지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한은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얼른 아가씨한테 사죄해.”“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아가씨인 줄 모르고 무례하게 굴었어요. 분이 풀리시지 않으면 저를 때려도 좋아요. 정말 죄송해요!”김혜연은 사과하면서 연속 고개를 조아렸다. 온지유는 용서를 비는 김혜연을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진심이 아닌 것 같은데?”“그럼 어떻게 해야 아가씨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김혜연은 온지유 앞에 바짝 엎드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신무열이었다. 신무열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성큼성큼 들어왔다. 신무열이 눈짓하자 요한이 재빨리 김혜연을 끌어당겼다. 김혜연은 신무열이 화났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요한한테 끌려서 밖으로 나갔다. 온지유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김혜연을 쳐다보았는데 고귀한 백조처럼 그 자리에 도도하게 서 있었다. 신무열이 다가오더니 온지유한테 사과했다.“다 내 잘못이야. 지유야, 정말 미안해.”온지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말했다.“무열 씨 탓이 아니에요. 이곳으로 오겠다고 약속한 건 노석명 때문이잖아요. 그 계획을 언제부터 진행할 건지 알려줘요.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거든요.”온지유는 이곳의 분위기에 휩쓸리기 싫었다. 그러자 신무열이 입을 열었다.“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밖으로 나가자.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노석명은 참지 못하고 조용히 따라오다가 습격하려고 할 거야.”뱀을 유인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했다.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래요. 급한 일이 아니면 우리 집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아까 그 여자 말로는 Y 국 통치권을 나에게 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온지유는 신무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신무열은 온지유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온지유한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법로와 확실히 통치권을 온지유에게 넘기겠다는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온지유와 상의하기 위해 물자를 지원하면서 호감을 샀지만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부하 때문에 들통날 줄 몰랐다.신무열은 화가 났지만 씁쓸한 마음이 더 컸다. 온지유가 그동안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고 어떻게 해도 그 상처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지유야,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해.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로 너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까? 아버지랑 나는 네가 율인지 모르고 있었어. 이제야 알게 되어서 아버지는 너에게
신무열은 법로가 실험에만 집중하면서 모든 권력을 노석명에게 넘겼다고 했다. 법로가 머리를 다쳐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강요당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법로는 암묵적으로 노석명에게 권한을 주었고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법로가 지금 자리를 넘겨주려는 것은 신무열이 Y 국을 바꾸기를 바랐기 때문이다.“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쉬어.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말해둘게.”신무열은 심호흡한 뒤, 온지유를 뒤로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신무열이 간 후에 잘 차려진 밥상을 누군가가 가져왔는데 온지유는 한입도 먹지 않았다.온지유는 별이에게 수저를 쥐여주면서 말했다.“배고플 텐데 얼른 먹어. 많이 먹어야 아픈 것도 빨리 나을 거야.”온지유는 별이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처음 보았을 테니 별이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별이는 한 입도 먹지 않았고 젓가락을 온지유에게 건네주면서 밤하늘처럼 빛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온지유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그래. 같이 먹자. 너도 얼른 먹어.”다음 날 아침.온지유는 별이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요한을 불러왔다.“그 미친 여자처럼 누군가 또 집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서 이 아이를 보살펴줘요.”“아가씨, 맡겨만 주세요.”요한은 온지유를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별이한테 신신당부했다.“이곳은 S 국이랑 달라. 집 밖을 나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줌마가 돌아올 때까지 잘 있어야 해. 해야 할 일이 끝나면 널 데리고 갈 거야.”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온지유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온지유는 신무열과 함께 Y 국의 거리에서 걸어 다녔다. 이곳은 5년 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Y 국은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고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거리에서 지나가던 시민이 신무열을 알아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안녕하세요. 옆에 계신 분은 약혼녀인가요?”“아니요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온지유가 그의 가면을 힘껏 벗기려던 찰나, 남자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사람 잘못 보신 겁니다. 전...”“제가 잘못 알아본 거라면 당신이 저를 구한 이유는 뭐죠?”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는 그의 말을 끊었다.온지유의 검은 눈동자는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은색 가면을 쓴 남자는 얇은 입술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한 쌍의 검은 눈이 가면 사이로 엿보였다.남자의 몸짓에 익숙함을 느낀 온지유는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이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여이현이라는것을.“나한테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뻔히 살아 있으면서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흘려보내고, 5년간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그 아이에 대해서도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체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는 거야?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온지유는 마음속에서 울렁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이현을 향해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딱딱하게 한마디 내뱉을 뿐이었다.“아가씨, 저는 정말 그 사람이 아닙니다. 임무가 있어서 Y국에 왔을 뿐이에요.”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온지유를 밀어내고 거리를 뒀다.떨어진 거리는 멀지 않았으나 온지유는 남자와 영원히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190이 되는 키.그리고 익숙한 체형.그가 여이현이 아니라는 것을 온지유는 믿기 어려웠다.무슨 임무가 있었기에 하필이면 Y국에 왔고, 하필이면 온지유를 구해줬을까.온지유는 몸에 항상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이 총은 S국에 갔을 때 인명진이 손수 만들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늘 보호받아 왔던 온지유는 이 5년간 권총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온지유는 권총을 꺼내 들고 남자의 발가에 한 발 쐈다.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온지유의 권총은 이미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섬찟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당신이 정말 여이현이 아니라면 난 여기서
여이현은 이런 온지유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5년간 온지유는 전쟁터에서 힘겹게 살아 남아왔다. 깨어나고 온지유의 위치를 확인 한 뒤 여이현은 바로 온지유의 곁으로 향했다.만나러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오지 못했던 것이다. 감히.온지유는 더 이상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맞아. 내가 협박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아직 그 가면을 쓰고 우스운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겠지.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여이현은 분명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모든 재산을 넘겨주고, 모든 길을 터 주 고, 준비를 해두었다.하지만 지금은...여이현은 그녀를 몇 년이고 내버려두고 사라졌다. 소식을 들려주기만 했어도 온지유가 이렇게 마음을 썩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무너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여이현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목에 뭐라도 걸린 듯 먹먹했다. 여이현은 숨이 막혔다.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대로 온지유를 확 안아 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온지유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은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이현 씨, 대답하라고! 아무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온지유는 악을 쓰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온지유는 눈을 붉히며 여이현을 바라봤다. 눈물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주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숨을 내리쉬었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여이현은 급히 다시 가면을 썼다. 그는 온지유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지유야, 널 안 찾아온게 아니라 여러 사정 때문에 못 찾아온 거였어. 여기서 잘 지내야 해.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으니까 다 끝내면 꼭 다시 돌아올게.”말을 마치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이현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온지유는 숨을 멈췄다. 단숨에 주위의 모든 공기가 사라진 기분이었다.온지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땅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율아!”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노석명은 실험실로 버려졌다.실험실에 있던 독약들은 모두 노석명의 입안으로 들어갔다.노석명은 창백한 얼굴로 고통에 몸부림치며 거품을 토해냈다.하지만 그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법로는 특히 더 했다.노석명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틈을 타 법로는 칼로 그의 살을 하나하나 도려냈다.“너만 아니었으면 율이가 우리와 갈라질 일도 없었고 나를 원망하지도 않았어! 게다가 마지막에는 가짜를 데려와서는 나를 놀려 먹었지. 무열이가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내 율이는 이미 죽었다고!”법로는 끝까지 율이가 가장 걱정이었다. 노석명이 법로의 지위를 찬탈하려던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딸과 그렇게도 오랜 시간 떨어져 있으며 매일 밤 매일 낮 걱정에 시달렸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곳곳을 찾아다니며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드디어 딸을 찾아내고 그간 부족했던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딸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지어는!노석명은 그런 율이를 실험실에 가두고 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그러니 노석명에게는 죽는 게 차라리 낫다 생각할 정도로 고통을 주리라.노석명을 고문한 뒤 법로는 그의 손발을 잘라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그가 혀를 깨물어 자살할까 봐 혀도 뽑아버렸다.마지막 성과물에 법로는 충분히 만족했다.그는 신무열에게 전했다.“율이를 괴롭힌 놈은 이미 응당한 벌을 받았다. 가서 율에게 전해주거라. 이 모습을 보고 분이라도 풀리게.”“예.”신무열은 짤막히 대답하고 온지유를 찾으러 갔다.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법로가 다시 불렀다.“그래, 율이에게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도 좀 전해줘.”“알겠어요.신무열은 실험실을 떠났다.”...온지유 측.여이현을 만난 뒤로 온지유의 마음은 늘 허공에 떠 있었다.왜 여이현은 죽지 않았으면서 5년간 온지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감추고 있는 고민이 있나 봐?”낮은 목소리가 주위에서 울렸다.온지유는 시선을 올려 바라보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
가녀린 팔다리를 지녀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은서우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인명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인명진도 수술이 늦게 끝나 자정을 넘길 때가 많았는데 병원을 나설 때 늘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바로 은서우였다.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남아 의료 관련 논문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그렇기에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회를 주고 싶었다.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는 은서우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소씨 가문이 끝없이 돈을 요구할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고 소태훈이 협박할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자신을 도와줬던 인명진 앞에서는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했다.“제가 원장님을 실망하게 한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바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사직서 낼게요. 직접 신고하지 않으셔도 자수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인명진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누가 나가라고 했나요?”그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은서우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해졌고 인명진 역시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그녀는 공범이 아니라 단순히 속아 넘어간 어찌 보면 불쌍한 희생양이었다.인명진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문 지식 배경이 탄탄하다는 건 알겠어요. 지금 저한테는 조수가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은 선생님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은서우는 눈을 깜빡였다.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떡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었고 인명진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더 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은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그 인턴을 찾는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당겨져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머리를 부딪친 것 외에도 팔꿈치와 무릎에 멍이 들었다.내상은 심하지
그때 은서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말할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손가락을 꼬아 쥔 채 눈을 자주 깜빡였다. 모든 몸짓과 표정이 지금 극도로 망설이고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자신이 몰래 사진 촬영을 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여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았다.모든 걸 말하고 나니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반면 인명진은 그녀가 말하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의 반응을 알아차린 은서우는 너무 일찍 안도한 자신을 한탄했다.“죄송합니다. 고소하고 싶으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은 건 자신의 앞날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이상 인명진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녀의 운명은 인명진의 손에 달려 있다.인명진은 처음엔 정말 화가 났다.누구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사진을 찍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평범한 용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하지만 죄책감에 가득 찬 은서우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결국 수없이 맴돌던 말들은 삼켜지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그 인턴은 어디 있죠?”“네?”은서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인명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물었다.“은 선생님한테 명령한 그 인턴 누구냐고요. 은 선생님이 주범이 아니라면 주범을 찾아서 직접 물어봐야겠죠.”그냥 묻힐 문제가 아니었다.어떤 의도로 몰래 촬영된 건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서우가 카카오톡을 추가한 인턴이 당사자임을 설명했다.“민지아라는 인턴이었어요. 얼마 전에 온 인턴인데 원장님은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어요.”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명진은
환자의 가족이 갑자기 달려들어 은서우를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지며 이마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부딪혔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졌다.인명진은 은서우를 부축하고 이마에 남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보고 가족들을 노려보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가족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 하는 거냐고? 너 같은 엉터리 의사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 딸은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내 딸이 죽은 건 다 네 탓이야!”인명진도 놀랐지만 품에 안긴 은서우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은서우를 들어 올렸다.간호사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가족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지나갔다.“시위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싸늘한 인명진의 시선에 그들은 움찔하며 결국 길을 열어주었다.인명진은 빠르게 은서우를 진료실로 옮겼다.그때 은서우가 깨어나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고 가냘팠다.“원장님, 정말 아니에요. 저 믿어 주세요.”그녀의 창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자 인명진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요?”“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린 인명진은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처음에는 은서우가 강인한 사람이라 좋은 후배로 키울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녀가 자신에게 약을 탄 걸 알고 실망했다. 그 후 한동안 그녀를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실망도 사라지고 그저 착잡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특히 은서우가 아까 자신을 지키려 앞서갔을 때 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분노가 가득한 가족들을 마주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건가?’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안명진은 찡그린 얼굴을 풀고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인명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서우를 안아 들어 방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침대에 눕혔다.그는 빠르게 수건을 찾아 차가운 물에 적셔 은서우의 이마에 살며시 얹으며 그녀의 체온을 내리려 했다.아픈 은서우의 모습에 인명진의 마음은 복잡하게 얽혔다.침대 옆에 앉아 은서우를 지켜보는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평소 은서우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 신비로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환자에게 보이는 그 집중력과 책임감은 가짜일 리 없었다.그는 또 두 사람이 함께 수술실에서 협력했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때 은서우는 침착하고 전문적이었는데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은서우가 정말 나쁜 사람일지 아니면 숨겨진 사정이 있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은서우는 고열에 혼미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원장님, 죄송해요. 저도... 저도 원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히 물었다.“그럼 왜 그런 거죠?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하지만 은서우는 반쯤 잠든 상태로 계속 사과하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시간이 흐르고 인명진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은서우의 체온도 조금 내려갔다.좁혀졌던 미간이 펴지고 호흡도 고르게 되자 인명진은 조바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은서우의 상태가 점차 안정되는 걸 보며 결국 몸과 마음의 피로에 못 이겨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쳐 들어왔다.자연스럽게 깨어난 인명진은 먼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이 아직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어젯밤처럼 아프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그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혼자 교류회에 참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 은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던 탓에 그녀
인명진은 손을 들어 은서우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은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은 선생님, 오늘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낮고 부드러운 인명진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주문처럼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은서우는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다.“저... 원장님,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인명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은서우는 가늘게 비명을 질렀다.“이제야 당신이 품고 있는 속셈을 알겠네요. 제 물컵에 약 탄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은서우는 그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원장님, 아니에요. 저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은서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지만 인명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사정?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약까지 타려고 했죠? 은서우 씨, 제가 당신을 잘못 봤나 보네요.”“원장님,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온 인명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약인으로서 각종 약에 대한 감지 능력과 면역력이 뛰어났다.처음 물이 입술에 닿았을 때 그는 바로 이질감을 느꼈다.눈치채지 못한 척 조용히 뱉어냈지만 그는 은서우의 행동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제가 그렇게 믿었는데 저한테 약을 탔네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요?”인명진은 은서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은서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인명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원장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 그대로 은서우를 방에서 쫓아냈다.그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뒤로한 채 단호하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