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은 한참 달려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아린아, 너 어디 갔었어? 다들 찾았잖아.”“대장님 어디 있어요? 대장님을 만나야 해요!”아린은 빨개진 눈시울로 급하게 말했다.“아직 안 돌아왔어. 지유 씨는? 널 찾으러 간 사람 놔두고 왜 혼자 왔어?”“선생님이 잡혀갔어요. 빨리 대장님을 만나야 해요. 그래야 선생님이 살 수 있어요. 대장님은 어딜 간 거예요? 연락해서 알려야 해요.”“네가 실종한 걸 알자마자 지유 씨가 사람을 보냈어. 소식을 들었다면 금방 돌아올 거야.”아린은 급한 마음으로 기다렸다.잠시 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은 여이현이 돌아온 것을 직감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차에서 내린 여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걸어왔다.“선생님이 납치됐어요! 빨리 구해주세요, 대장님!”“누구한테?”“몰라요. 저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근데 선생님을 잡으러 온 건 분명해요. 선생님 지금 엄청 위험할 거예요. 빨리 찾지 않으면...”아린이 준 단서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여이현은 알 것만 같았다.그들은 Y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부터 알았던 사람일 것이다. 특히 노승아가 가장 큰 문제였다.여이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당장 출발해!”...같은 시각, 온지유는 아직도 유젠은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채찍의 끝자락을 들고 별로 힘도 쓰지 않은 채 유젠을 포박했다.유젠은 항상 이런 식으로 여자아이들을 괴롭혀왔다. 남자들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기선제압을 하더라도 가장 강한 사람에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온지유의 생각대로 유젠은 꼼짝 못 하며 말을 바꿨다.“저기... 이것부터 풀어줘. 말로 해결하자, 말로. 어차피 아가씨 여기서 도망 못 가. 괜한 데 힘쓰지 마. 안 그러면 맞는 것보다 더 한 일이 생길 거야.”“이걸 놓으면 바로 죽을 것 같은데요? 그쪽 여기 관리자죠? 내 손에 붙잡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것
유젠이 말했다.“아가씨 여기 사람 아니지? 우리 여긴 노예가 흔해 빠졌어. 앞으로 어떻게 살지나 걱정해.”온지유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그녀는 이 넓은 마당에서 모든 사람이 투명 인간이 되려는 것처럼 존재감을 낮추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맞을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애초에 도망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곳에서 해방을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됐다.“여기 혹시 법로의 관할 구역이에요?”이 말을 들은 유젠은 안색이 확 변했다.“이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 그분은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장 입 다물어!”법로는 그들도 두려워하는 존재인 모양이다.“법로랑 만난 적 있어요?”유젠은 창백한 안색으로 대답했다.“우리는 뵐 자격 없는 분이야. 그분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아니면 큰 화를 입을 거야.”그 말인즉슨 이곳은 법로의 구역이 맞았다. 다행히 그녀의 운이 따라줘서 맞게 찾아왔다.그래도 모험은 모험이었다. 자칫하면 그녀도 여기서 생을 다 할지도 몰랐다. 과연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지금은 유젠을 붙잡고 있지만,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여사님, 언니는 좋은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 벌해도 저를 벌하세요. 언니는 잘못한 거 없어요.”여자아이는 무릎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온지유가 도와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유젠이 온지유에게 험한 짓을 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유젠이 이런 말을 듣고 자신을 봐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온지유도 알았다.“나는 노예가 아니에요. 김명무라는 남자가 나를 데려왔어요. 율이 누군지는 알죠?”“율?”유젠은 의심하는 말투로 이어서 물었다.“율이 아가씨는 또 어떻게 알아?”“글쎄요. 그리고 나 여기서 나갈 생각 없어요. 그냥 좀 자유롭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율이가 데려온 사람을 그쪽들이 죽일 수는 없잖아요. 내 시체를 보게 된다면 율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벽에 박힌 총알과 끊어진 채찍을 바라보며 유젠의 안색은 빠르게 변했다.“빠, 빨리 경비를...!”생명의 위협을 느낀 유젠은 머리를 감싼 채 도망갔다. 온지유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하지만 별로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폭죽 소리도 총소리로 착각하는 법이니 말이다.총소리는 한 발만 들려왔다. 한참이나 잠잠하자 유젠은 머리를 빼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온지유는 유리를 통해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상대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문을 열었다.그 순간 방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유젠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요... 요한 님... 여, 여긴 어떻게...?”요한은 신무열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 직접 등장한 것이다. 요한쯤 되니까 총을 쏠 수도 있었다.온지유의 앞으로 가서 멈춰 선 요한은 차갑게 말했다.“이 사람, 건드리지 마.”유젠은 눈에 띄게 멈칫했다. 온지유가 한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던 것이다.유젠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요한은 예리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 말 못 들었어?”“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유젠은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눈길 하나로 모든 사람을 물러나게 했다.눈치 보던 온지유는 이때다 싶어서 다친 여자아이를 부축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유젠은 이미 요한을 뒤따라 떠나버렸다.어쩔 수 없이 온지유는 여자아이를 부축해서 원래 곳으로 돌아갔다.같은 시각, 요한은 유젠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잊지 마.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야. 만약 저 여자를 건드리면 조각 나서 개밥 그릇에 담길 줄 알아.”“네, 걱정하지 마세요! 직접 전하신 말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무조건 따를게요.”요한은 신무열 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요한의 사격 실력도 이미 잘 알려졌다. 그를 건드리는 건 죽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한참 침묵에 잠겨 있던 요한은 유젠을 향해 발길질했다.“아악!”돼지 멱 따는
이곳에서는 폭력이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약물 실험과 각종 인체 실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말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잔인한 일들이었다.이야기를 듣고 난 온지유는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아이는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여기서는 시체도 다 쓸모가 있어요.”여자아이는 시체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또 설명해 줬다. 온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곳은 노예 수용소도 아닌 그냥 지옥이었다....한편, 같은 공간의 다른 방에는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진 고급스러운 방이 있었다. 율은 이 방 안에 있었다.그녀의 테이블에는 값비싼 보석들과 정교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여유 적적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갑자기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율은 그들의 착장만 보고 누구인지 알아챘다. 곧이어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린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물론 눈조차 보이지 않았다.율은 즉시 일어나서 공손히 남자에게 다가갔다.“아버지.”남자는 율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목이 망가진 사람과 같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율아, 너 요즘은 뭘 하고 있니?”율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찾아온 게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가 이곳에 온 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딱히 한 건 없어요...”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 게 없다고? 난 네가 누군가 데려왔다고 들었는데?”남자는 율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율은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그 사람이 먼저 저를 괴롭혔어요. 저 거의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복수하고 싶었는데, 하 장로님이 막더라고요.”율은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는데도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기분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덧붙였다.“아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걔는 그냥 평범한 여자인데 왜 장로님의 보호는 받는 거죠? 혹시 장로님을 믿고 저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요
율의 눈에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그래도 이미 온지유를 이곳으로 데려왔으니 절대 살아서 나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남자가 떠난 지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들어와요.”율의 대답을 듣고, 한 남자가 몸보신을 위한 인삼탕을 들고 들어왔다. 남자는 그녀 앞에서 공손하게 말했다.“아가씨, 법로 님께서 건강을 챙기라고 하시며 이 인삼탕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여기 둬요. 옷 갈아입고 먹을게요.”율은 인삼탕을 힐끗 본 후 등을 돌렸다. 인삼탕은 이곳에 와서 꽤 자주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인삼탕에 질려 있었다.남자는 그녀의 말대로 인삼탕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법로 님께서 반드시 다 드시는 걸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율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서 테이블 앞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닭고기 냄새와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참고 억지로 탕부터 마셨다.“좀 유연하게 대처할 순 없나요? 꼭 내가 다 먹는 걸 지켜봐야겠어요? 내가 그렇게 약골은 아니잖아요.”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율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저 손을 흔들며 그를 내보냈다.“알겠어요. 나가요.”지난날의 모든 고통을 견뎌온 그녀가 인삼탕 따위에 굴할 리가 없었다.“네.”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율도 머리를 질끈 묶고 베일을 쓴 후 방을 나섰다.그녀는 온지유를 보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남자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법로 님께서 당분간 아가씨가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마세요.”이 말을 듣자 율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돌아다니지 말라니, 이건 그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마음속에 화가 났지만, 그녀는 표현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으로 돌아선 그녀는 김명무에게 몰래 문자를 보냈다.[온지유의 상태를 확인하고 영상 찍어줘요.]그녀가 발이 묶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에
온지유는 이곳에 와서 남자를 본 적 없다.여자아이가 대답하려고 한 순간 문이 열리고 유젠이 들어왔다. 그녀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나와.”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지유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여자아이도 미간을 찌푸렸다.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찰나 유젠이 데리러 왔으니 말이다.‘이제 결국 벌하려는 건가?’여자아이의 얼굴은 차분했다. 시선도 차갑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죽더라도 유젠은 꼭 데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안 그러면 그녀가 지금껏 한 고생이 헛될 것 같았다.같은 시각,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유젠을 뒤따랐다. 유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걷다가 한 남자 앞에 가서 멈춰 섰다.남자는 온지유도 아는 사람이다. 바로 얼마 전 그녀를 구해준 적 있는 요한이라는 사람이었다.“요한 님, 말씀대로 데려왔으니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유젠은 빨리 나가고 싶은 듯 빠르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요한의 발에 차였던 곳이 아직도 아팠다. 뼈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은 정도였다.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유젠이 떠나고, 이 공간에는 그녀와 요한만 남게 되었다. 요한은 검은색 카드를 건넸다. 위에는 검은색 밧줄이 감겨 있었다.“이걸 가지고 있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이곳을 떠나지 않는 전제하에 어디든 갈 수 있어요.”온지유는 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열 씨의 뜻인가요?”신무열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위험에 처한 줄 알고 요한도 보낸 것 같다.근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카드를 주면서 왜 나가지는 못하게 하는 걸까? 온지유는 알 수 없었다.요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요한은 한 번도 온지유 앞에서 정체를 밝힌 적 없다. 심지어 별다른 말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신무열의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도련님이 알려줬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도련님은 함부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꼼작하지 않았다.“끌고 가서 개한테 먹여!”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 온지유는 죽을지언정 살고 싶지 않아 했던 여자아이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만.”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남자가 시선을 보냈다.요한을 발견한 순간 그들은 안색이 확 변하며 고개를 숙였다.“요한 님!”요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남자를 힐끗 바라보며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아직 살아 있어. 죽었다고 해도 개 먹이로 버리는 건 아니지. 요즘 노예 찾기도 어려워. 법로 님의 실험이 성공하기 전에는 인원을 아껴야지.”“네, 요한 님.”남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조금 전의 기세를 잃은 채 한없이 공손하기만 했다.온지유는 이제야 노예 수용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갈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젠이 여자 노예의 관리인이라면, 요한은 남자 노예의 관리인인 모양이다.요한은 신무열을 도련님이라고 부른다. 법로도 아는 것을 봐서 신무열과 율은 법로의 자식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는 법로일 것이다.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벌써 특권과 같은 것을 얻었으니 법로와 만나는 것도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복잡한 생각을 멈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 무열 씨랑 만날 수 있을까요?”“도련님께서 그런 지시는 없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돌아다니는 건 문제 없어요. 생각 없으면 이만 돌아가서 쉬고, 괜찮으면 제가 길을 안내할게요.”거절당했다.온지유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안내해 주세요.”“네.”그렇게 온지유는 요한을 뒤따랐다.이곳은 그녀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마당의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도 있었다. 나무의 가지는 바깥세상까지 뻗어 있었다.요한을 따라 구경하다 보니 성벽과 같은 거대한 벽 바깥에도 경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요한과 미리 돌아봐서 다행이지, 나무를 타서 도망가려고 했다가 다시 잡혀 오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아니, 죽는 게 사치
독기 서린 검은색 눈동자는 온지유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율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고생 좀 하라고 데려온 온지유가 요한을 따라다닐 줄은 말이다.요한은 신무열의 사람이다. 더군다나 남자 노예의 관리인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온지유를 데리고 산책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여기가 휴양지인 줄 알아?’율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은 손바닥에 박히게 되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김명무의 문자였다.[온지유 씨가 도련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도련님께서 블랙카드까지 줬습니다.]모든 글씨가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눈이 아픈 건 물론 심장은 뒤틀려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노와 질투가 마음속에서 빠르게 자라났다.그녀는 김명무에게 전화를 걸어 단호하게 말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자를 괴롭혀요. 절대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안 돼요. 죽고 싶게 만들어 달라고요!”“...어렵지만 최선을 다 해볼게요. 그런데 도련님 말고도 하 장로님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김명무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던 율은 김명무의 답을 듣고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나도 알아요! 그래서 지금 내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거예요?”율의 입장에서는 말 안 듣는 수하를 버리고 다른 수하를 들이면 되는 일이었다.“아닙니다.”김명무가 대답하기 바쁘게 율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핸드폰을 꽉 붙들었다. 온지유를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말이다....한편, 온지유는 재채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요한의 안내 덕분에 수용소에 부쩍 익숙해졌다.이때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왔다.“요한 님, 큰 일 났습니다.”요한의 안색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것만으로도 기세가 훨씬 강해졌다.하지만 온지유를 바라볼 때는 훨씬 가다듬어진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구경하고 싶으면 계속 구경하다가 지내던 곳으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